내가 고등학생 때였던 7차 교육과정에는 '특별활동'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격주 토요일마다 학교 수업과는 별개로 교양/취미같은 카테고리의 수업을 선택할 수 있었고, 첫 학년 1학기는 당연히 퀼트반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도 손으로 꼼지락 꼼지락 만드는 거에는 도가 텄었기 때문에 나샛기는 퀼트반의 넘사벽 에이스였다. 겨우 몇 달 정도의 과정이었지만 이 때의 배움은 후에 살면서 큰 영향을 끼칠 나비효과가 된다. 나중에 또 언급하기로 하고, 아무튼 천과 바느질에 대해서는 완전 마스터했다고 생각했기에 2학기 때는 미지의 분야인 기타반에 들어가게 된다. 기타반 수업은 기타가 제공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타를 소지한 학생만 들을 수 있었다. 기타반에 들어는 왔는데 기타가 없던 녀석들에겐 감상문이나 쓰라며 영화를 틀어줬다. 기타반 지도 선생이 문학쌤이었거든. 다행히 단짝이었던 친구와 나는 기타가 있었다. 원래 치던 건 아니고, 막내 삼촌이 소싯적에 겉멋들어서 사놓기만 하고 안 치던 걸 냉큼 가져왔었지. 조건이 됐던 사람은 대여섯명 정도의 소수 인원이었기 때문에 거의 1:1 강습처럼 들을 수 있었다. 문학쌤인데 어떻게 기타를 가르치느냐. 쌤 대학 시절 동아리가 기타 동아리였다고 했다. 첫 수업에서 기타치며 노래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양희은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불러줬고, 그 때 감명을 받은 나는 아직도 가끔 그 노래를 듣는다.
기타쌤(문학쌤)은 좀 도라이였다.
피부가 유난히 까맣고 별로 크지도 않은 키에 약간은 껄렁껄렁 혹은 능글능글한 말투를 가진 20대 후반 남성. 나름 멋부린 듯 갑자기 파마를 하고 온 적이 있었는데, 그게 교감 눈에 거슬렸는지 단정치못하다고 한 소리 들었단다. 당시에는 요란하지만 않다면 복장은 자유였지만, 여학생들은 귀 밑 3센치, 남학생들은 까까머리를 강요당하던 시절이었기에, 선생들에게도 암묵적으로는 넘지 말아야 할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일단 파마머리한 것 부터 맘에 안드니 입고 있던 청바지까지 괜시리 싸잡아 지적당한 모양. 다음 날, 기타쌤은 머리를 삭발하고 양복을 입고 출근했다. 킬포는 신발이었다. 남자 선생님들이 신는 그 가죽같은 재질의 아저씨 슬리퍼 알지? 그걸 양말없이 맨 발에 신고 보란 듯이 출근. 머머리에 수트에 쓰레빠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내가 한글날 백일장에 냈던 그 글의 시각화가 딱 그런 느낌이겠다. 위에서 시키는대로는 해주되, 멕이기는 해야겠는.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
한 번은, 지정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수행평가가 있었는데(안타깝게도 나는 이과반이라 이 선생님의 문학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기타 수업 외엔), 독후감 쓰는 날 아예 컴퓨터실로 학생들을 불렀단다. 어차피 인터넷 검색해서 다 똑같이 베껴 써 올테니까 그럴 바에 그냥 다같이 지금 찾아서 베껴 쓰라고. 학생들은 벙쪄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고. 이건 사실 그렇게 한 학생들에 대한 화가 아니었다. 알맹이 없는 대한민국 교육 체제와 인문계 고등학교의 평가 방침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니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검색해서 써도 점수 줄 테니까 어서 써서 내라고 했다고. 소문이 퍼진 교무실에서 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본인의 일상적인(?) 수업에서는 칠판에 돈을 붙여 놓고선, 선생님의 질문에 손 들고 대답해 맞춘 학생에게 상금으로 사비를 줬다고. 자본주의 학습법. 이 때 실제로 칠판에 돈을 붙여 놓은 사진을 친구가 몰래 찍어 싸이월드에도 올렸었다.
스펙은 공주사대 출신, 전교조 소속. 평범한 수도권지역 일반고등학교의 입장에서는 받아주기 난감하고 부담스러운 사고뭉치였겠지. 후에 2년을 못채우고 결국 지방의 다른 사립고로 전근 보내지기에 이르는데..
나는 그런 그 사람이 조금 멋졌다. 교무실에서는 뭐 거의 왕따였고 학생들은 그저 웃기는 또라이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반항심과 똥고집이 나에겐 투쟁과 소신으로 보였다. 서술한 사건 외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꽤 있었고, 그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 편이었다. 그래, 지금 하는 이야기는, 남선생님을 좋아한 여제자의 뻔-한 스토리. 물론 비주얼적으로는 클리셰와도 같은 교회오빠st의 선생님이 전혀 아니었지만, 짝사랑했고, 아마도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인 바램이 있던 건 아니었다. 선생님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냥 막연히 마음으로만 몰래 좋아했다. 팬심 같았으려나. 특별활동 날만 그렇게 기다렸다. 학기가 끝나 기타반 수업이 종료되고 나서는, 쉬는 시간 복도나 점심시간에 급식소에서 마주치는 것 외엔 선생님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쌤의 수업을 듣는 문과반 친구(기타반 동기)에게 소식을 캐며 어지간히 귀찮게 했다.
그렇게 2학년을 보내던 중 [한글날 빌런]의 이슈가 터졌고 갑자기 교무실에 나샛기가 유명해지면서, 내가 그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것도 소문이 나 버렸다. 선생님도 나도 그들에게는 그저 또라이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썩 씹을 만 한 가십거리 하나 던져 준 셈. 우리반에 수업 들어 온 선생들은 돌아가며 나를 놀렸고, 담임은 아예 반 친구들 앞에서 나에게 대놓고 모욕을 줬다. 너는 애가 어쩜 사람보는 눈도 그렇게 없냐며. 모두가 웃었지만 나는 그 말이 틀렸다는 걸 그 때도 알고 있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나는 고3을, 선생님은 전근을 코 앞에 두던 2월 14일. 집에서 밤 새 직접 만든 기타 모양의 상자에 여러가지 초코렛을 가득 담아(안에 편지를 썼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네) 점심시간이 끝나기 몇 분 전, 교무실 앞에 갔다. 모두의 눈총이 예상됨에도 용기를 냈던 건, 그나마 선생님 자리가 문 열면 바로 앞이었기 때문이다(아마 교감에게 밉보인 탓이겠지). 후딱 해 치우자. 지금 자리에 계시려나. 선생님이 계셔서 직접 드리는 게 좋을지, 아니면 차라리 안계셔서 그냥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나오는 게 그림이 더 나을지 잘 모르겠었다. 사실 드려도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더라. 결혼 상대도 있는데 미성년자인 내가 뭘 어쩌자고 주는 건 아니고, 단지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소문이 그렇게 났으니 내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안하면 굉장히 후회할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노크 후 문을 열었다.
드르륵-
수완 : ? (계심)
나 : ;;;;;;; (당황)
나 : 안녕하세요!!!!!!!!! (초코렛을 척 내민다)
수완 : .....???? (받는다)
나 : 안녕히계세요!!!!!!!!!! (도망)
드르륵- 탁.
한 3초 걸렸을까. 태어나 처음 해보는 '고백'이라는 것. 그리고 빤쓰런.
얼굴이 벌게져서 교실로 뛰어 왔는데 시간표를 보니 5교시는 한문수업이었고, 뻐킹한문쌤은 하필이면 기타쌤의 바로 옆자리고, 내가 방금 교무실에서 3초 간의 짧은 초코렛 전달식을 할 때 옆에서 관전하고 있었다. 시발. 그 생각을 못했네. 종이 울렸고, 한문쌤(여적여, 평소에도 싫어했던 타입)은 들어오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며 초코렛 잘 먹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죽이고 싶었다.
너, 내가, 기억한다.
그렇게 살인 충동을 이겨 내고 봄 방학 시작 전, 2학년의 마지막 날. 나에게 시달려 어쩔 수 없이 선생님 얘기를 해줬던, 그 쌤에게 문학을 배우는 문과반 그 친구녀석이 우리반에 나를 찾아왔다. '야, 수완쌤이 너 교무실로 오래.'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나를? 왜? 나 혼나나? '몰라, 빨리 가 봐.' 친구는 이젠 양쪽에서 심부름을 시키니 좀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교무실에 갔더니 참고서를 잔뜩 쌓아 두셨다. 타의적 전근 때문에 짐 정리를 하시는 듯 했다. 그 중 따로 빼 놓은 것 같은 한 뭉텅이를 주시며 고3꺼라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라고 하셨다. 감사하고, 뭉클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선생님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때 그 빨간머리 여친과 결혼 해 자식 낳고 어딘가에서 여전히 유쾌하게 사시겠지. 날 기억하실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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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교롭게도 공주대에 들어갔다. 입학하고는 선생님이 자주 얘기했던 그 기타 동아리가 늘 궁금하긴 했다. 그 동아리에 들어가면, 어쩌면 동아리 후배로써 선생님을 선배로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우리 캠퍼스(공주대는 캠퍼스가 4개임)가 아니라서 동아리 가입은 불가능했다. 아쉬운대로 이 쪽의 다른 음악 동아리에 가입했다.
2학년 때 였나, 교내 체육대회에서 소프트볼 선수로 출전했는데 캠퍼스 매치를 위해 사대 쪽 캠퍼스로 경기를 갈 기회가 생겨, 우연히 그 기타 동아리인 '칸타빌레'의 동아리방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때의 공기와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후 시간, 체육대회 때문에 아무도 없던 그 동아리방에 햇빛이 간접광으로 비추고 있었고,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의 움직임이 그 빛에 비춰져 눈에 보일 정도로 고요했다. 그 사람이 자주 머물던 공간이었다는 생각에 구석구석 눈으로 더듬으며 당시 들었던 이야기들을 상상하니 시간을 초월해 우리가 한 공간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때문에 공주대를 간 것도 결코 아니었고, 캠퍼스도 전공도 전혀 무관했으며 소프트볼 결승 역시 모든 게 우연의 일치였지만, 지금의 내가 과거에 그 사람이 있던 여기, 바로 이 곳에 와 있다는 것이 마치 그 모든 게 이 순간만을 위해 정해진 선택들의 연속이었던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십수년 전의 뻔한 스토리.
뻔하게도 나는 여전히 기타를 못치고, 기타치는 걸 여전히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