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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Jan 28. 2023

이혼, 그리고 절교

20230128


이제라도 나는 아부지와의 이혼, 그리고 엄마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이게 또 뭔 개소리인가 싶지? 더는 말하기도 입 아프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자라오면서는 별생각을 다 했었지만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안 좋았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보다 더 박복한 사람도 많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고, 이전보다는 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쓰는 나도, 읽는 자네들도 애지간히 피로감을 느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써야만 한다. 글로라도 써서 이 속에 있는 걸 다 털어내야만 흐렸던 시야가 맑아져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의 방해물 없이 이제는 앞만 보고 나아가고 싶다.




딱 2000년 봄, 중학교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엄마가 짐을 싸서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됐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칼을 갈며 이 집구석 뜰 날만 기다렸었다는걸. 가엾은 맹히.

엄마가 떠나고 나니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 되었다. 아부지와 오빠가 뒤집어 벗어놓은 양말을 다시 뒤집어 빨았고, 아부지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했다. 오빠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느라 밥 먹으러 나오라고 불러도 징하게 안 나왔다. 겨우 식탁 앞에 앉아서도 서툰 내가 한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는지 편식을 했다. 그 즈음의 남학생은 고기라면 환장을 하니까, 밥을 먹이기 위해 고기반찬을 적어도 하나씩은 상에 올렸다. 동네에 값싼 치킨집이 개업하고부터는 가끔 치킨을 사와 저녁 반찬으로 먹기도 했다. 고기반찬을 따로 할 필요가 없어 편했지만 아부지는 밥을 먹을 때 국이나 찌개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라 국물 요리 한 가지씩은 꼭 있어야 했다. 치킨을 한 마리 사 오면 다리가 두 개였고, 우리는 세 사람이 나는 날개를 집었다. (지금은 웬만한 치킨집 메뉴에서 오직 닭 다리로만 구성된 세트를 볼 수 있는데, 나는 이제 혼자 먹을 때 무조건 그걸로 시킨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은 학원에 가거나 끼리끼리 누구 집에 놀러 가거나 했다. 나도 그런 걸 아주 못한 건 아니었지만, 집에는 일찍 들어와야 했다. 장을 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차려야 했으니까. 그나마 빨래라도 세탁기가 해 줘서 아주 고오맙더라. 아부지는 장남, 오빠는 장손이었고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살았다. 나조차도 집에 엄마가 없으니 내가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게 가스라이팅인 줄도 모르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고부터는 집안일을 병행하기가 버거워졌다. 7시까지 등교, 10시에 하교. 도와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빨래라도 빨래통에 제대로 넣던가, 설거지라도 싱크대 물에 잘 좀 담궈 두던가 했으면 하는 사소한 바램 정도. 나는 여느 집 엄마들처럼 잔소리가 늘었고, 우리 집 남자들은 나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했다. 오빠새끼는 내가 지 빤쓰까지 빨아줘 가며 뒤치다꺼리한 걸 어쩌다 생색이라도 내면, “누가 너한테 해 달라고 했어?”라며 큰소리를 치고는 방 문을 쾅 닫았다. 사춘기 아들, 쉽지 않다.

한 번은 너무 화가 나서 파업을 한 적도 있었다. 청소는 내방만 했고, 옷도 내 옷만 골라 빨고, 알아서 처먹든지 말든지 밥도 안 했다. 그러면 나한테 조금이라도 고마운 줄은 알까 해서. 개뿔. 며칠이 지나도록 둘은 늘 그랬듯 아무것도 안 했고, 결국엔 냄새를 참지 못한 내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나는 그래서 남자에 대한 환상이 없다.


고3 때도, 고3인 동시에 가정주부였다. 그나마 그땐 오빠 하나라도 군대에 보내놔서 훨씬 수월했다. 오빠가 장가를 갈 때도, 아들 하나 해치운 기분이었다.




아부지는 나에게 이런 식의 의무감을 주면서도 거기에 대한 죄책감이 없었다. 나는 딸이면서도 와이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집을 나간 엄마마저 나에게 그런 역할을 물려주듯이 했고, 당신들의 기대에 순응하길 강요했다. 나는 고작 14살이었는데. 오빠만 사춘기였던 게 아닌데. 나는 때를 놓쳐 제 시기에 겪지 못한 사춘기를 늦게서야 씨게 때려 맞으며, 그래서 마음이 더 힘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어쩌면 차라리 고아였다면 편하기라도 했겠다 싶은 생각을 감히 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가정 구조도, 내 이런 생각들도, 이거 다 정상 아니잖아.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이 요상한 역할극이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아부지는 사고를 쳤고, 수습은 내가 했다. 내 명의로 대출을 요구했고, 나는 내 나이에 비해 은행에 꽤 큰 액수의 빚을 갖게 됐다. 도대체 어느 집 아부지가 자기 살자고 딸을 빚쟁이로 만들 수가 있는지. 만기가 도래한 그날이 온다면, 아부지는 나에게로 부터 독립할 수 있을까.




엄마는 집을 떠났으면 보란 듯이 행복할 것이지, 지독하게도 외로워했다. 그때마다 나를 찾았고 나는 그런 엄마를 토닥였다, 내 주제에. 나는 의도치 않게 철이 일찍 들었고, 철없는 엄마는 철들어버린 딸을 의지했다. 우리 집은 수원이었고, 엄마의 친정(나의 외갓집)은 의왕이었는데, 1년에 한두 번 엄마가 왔다 갈 때마다 친정과 나로부터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갔었다. 엄마는 신이 나서 “나는 친정이 꼭 둘인 것 같네~”라는 철없는 소릴 했다. 어느 날은 또 통화를 하다가 내 말에 “야, 꼭 니가 엄마고 내가 딸인 것 같다!” 하기도.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속 터지게 하는 데에 굉장한 소질 있음.


상황적으로 엄마의 바톤 터치를 받게 된 내가 이 집에서 엄마 노릇을 하고 있어서였는지, 우리의 대화는 꼭 같은 남편과 아들을 공유하는 두 엄마 같았다. 상대적으로 무뚝뚝한 아들보다는 딸인 내가 더 편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나에게 굳이 한 다리 건너 오빠의 안부를 묻거나 아부지 욕을 하곤 했다. 일종의 동료 의식 같은 느낌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게 엄마는 나를 친구처럼 대했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기보다 ‘맹히씨’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건지도. 가정사가 어찌 됐든 간에 ‘친구 같은 엄마’인 우리 엄마를 두고 내 친구들은 재밌어하기도, 부러워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엄마는 나의 모든 걸 알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라 보아도 무방했고, 나도 그게 문제라고 인지하지는 않았었다.


몇 달 전 유튜브에서 모녀 관계에 대한 강연을 보기 전까지는.


[모녀의 세계]를 쓴 가정 심리 상담 전문인 김지윤 소장은, 이런 ‘친구 같은 모녀 사이’에 대해 강경하게 비판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언제나 부모로서 존재하여야 하고, 자식을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해야 하며, 이러한 균형이 어긋날 경우 자식에게 그릇된 애착을 갖게 되고 심하면 집착까지 하게 되는데, 가장 흔한 예가 ‘친구 같은 모녀’라고 했다. 엄마의 부재시 엄마의 대리 남편 역할까지 자연스레 강요한다는 그 내용까지, 모두 다 나와 나의 엄마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엄마가 ‘엄마’로써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엄마가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불안한 존재였지, 든든하다거나 존경할만한 대상이었던 적이 없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엄마다운 엄마가 아니더라도 없는 것 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내 엄마는 실체만 있을 뿐 사실상 없는 사람이었다. 정작 내게 엄마가 필요했던 시기에 엄마는 한 번도 그 자리에 있던 적 없었으니까.


오히려 엄마의 필요에 의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은 나였다. 엄마는 그때까지도 나와 하루에도 여러 번씩 통화를 해야만 성에 차는 사람이었다. (나는 연애를 할 때도 이렇게까지는 안 한다.) 나는 이런 애착을 그동안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엄마의 시계는 나를 두고 떠났던 그 시점에 여전히 갇혀 있고, 엄마에게 나는 아직도 14살 중학생 같았을 거라고. 그래서 나의 일상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어 하고, 아침, 점심, 저녁에 뭘 먹었는지까지 궁금해한 걸 거라고.


나를 향한 집착은 아마 ‘자식 걱정’이라는 그럴 듯 해 보이는 프레임 안에서, 나에게 본인의 역할을 맡기고 떠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합리화였을 거다. 거기에 플러스, 아부지와 오빠에 관한 것들도 항상 나와의 통화로 전해 들었고, 그 덕에 나는 엄마와 오빠 사이의 서먹함에 끈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도 되어 주었으니까.

이 집구석의 정신적 ‘가장’은 결국 나였다. 나는 이 콩가루 집안의 제일 어린 막내였을 뿐인데도 얼떨결에 모두가 떠맡긴 짐을 지고 있던 거다.




시간이 필요했다. 심리적인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내 입장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엄마는 “친구 같은 엄마가 뭐 어때서, 이런 엄마도 있고 저런 엄마도 있는 거지!”라며 또 나를 그저 예민하게 구는 애로 취급했다. 이런 엄마도 있고 저런 엄마도 있다면, 쿨내나는 딸도 있고 예민한 딸도 있는 법이다. 내가 아무리 온갖 예민을 떨어대도 엄마의 자식이니, 당신이 정말 나의 ‘엄마’이고 싶다면, 엄마로서 자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길 원했다. 그리고 그놈의 ‘친구 같은 딸’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협의할 게 아닌 일방적 통보였다. 도대체 누가 ‘절교’를 쌍방 합의한단 말인가.



나는 다시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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