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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Jan 30. 2023

코고는 여자

20230130



나는 잘 때 코를 곤다. 내가 코를 골 때 나는 자고 있으니 정확히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동침한 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확실히 평균 이상이다. 내 코 고는 소리에 내가 깰 때도 자주 있다. 키우는 고양이들 때문에 몇 년 전부터는 집에 홈캠을 두고 실시간으로 녹화 중이라 내가 자고 있을 때의 모습을 충분히 확인해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나 자신이 코 골며 자는 모습을 굳이 일부러 꺼내 보고 싶을 만큼 궁금한 건 그다지 아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 같은 느낌이랄까.


지금은 살이 찌며 생긴 비염 핑계라도 댈 순 있지만, 사실 그래서 갑자기 생긴 증상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도 이미 완성형 코골이였다. 수학여행을 가면 친구들은 둘째 날부터는 나와 같은 방 쓰기를 기피 했다. 5학년 때 그 일을 겪고 나서, 6학년 수학여행은 내가 기피 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되는 것도 싫었고, 내 의지로 컨트롤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기가 싫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친구들이 놀리는 게 당연히 제일 싫었다. 다른 집 애들은 수학여행에 신이 나 있는 반면 오히려 가기 싫어하는 나를 두고, 엄마는 정말 심각하게 고민한 모양이었다. 우리 가족은 타노스급의 굉장한 코골이인 아부지를 겪으며 살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지 아빠를 닮은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었다.


검사를 받아 보자고 큰 병원에 데려갔다. 뭔가 해결 방법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서.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고 구강 구조를 살펴봤다. 나는 선천적으로 입천장이 낮은 편이라고 했다. 그래도 전문가의 소견으로 봤을 때 구조상으로는 그렇게 심하게 골 것 같지는 않다며 뭐 겨우 요정도 가지고 병원에 왔냐는 듯 상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엄마는,


“아니에요, 심하긴 심해요. 애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데, 나중에 커서 시집가도 소박 맞을까봐 엄마인 저도 걱정일 정도고요. 뭐 방법이 없을까요?”


라고 했고, 의사는 정 그러시면 수면 패턴 검사를 해 볼 순 있다고 했다. 병원에 하루 입원해서 자는 모습을 촬영해 습관까지도 분석하는 검사. 그렇게 해서 어떤 특정 원인이 나온다면 수술을 통해 낫게 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긴 하지만, 본인 판단에 나의 케이스는 심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에(명백한 오진이다) 치료의 목적이 아닌 일종의 ‘미용’의 성격이 짙은 수술이 될 거고, 그렇게 되면 보험 혜택은 전혀 적용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별 소득 없이 병원을 나왔다.

나는 결국 수학여행을 갔고, 잠을 참아가며 밤을 꼴딱 샜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장학금 받은 게 아까워서라도 1학년 동안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 때마다 그 며칠씩 정도는 안 자고 버텼다지만, 매일 그런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옆으로 누워 자면 훨씬 덜 곤다는 말에 한쪽에는 항상 커다란 인형을 두고 잤다. 기숙사는 4인이 1실이었고 우리 방은 나 빼고는 다 선배였는데, 언니들은 당연히 코 고는 나를 처음부터 싫어했다. 지내는 1년 내내 나와 말도 거의 안 섞을 정도라 방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눈치가 보였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내 침대로 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둔다거나, 코 고는 소리와 대화를 하는 장난을 치기도 하고, 코를 고는 나의 콧구멍에 이것저것 뭘 끼워두고는 몰래 찍으며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는 행동에 가끔 깬 적도 있었다. 내가 동아리 활동이나 과 회식으로 외박이라도 하고 들어오면 다음 날 대놓고 ‘푹 잘 잤다’며 얄밉게 꼭 티를 냈다. 그래도 수면에 지속적인 방해를 받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알기 때문에 날 미워해도 이해하려 했고, 고등학생 때 따돌림당했던 경험 덕(!)에 맷집은 또 쎄서 이 정도 괴롭힘 받는 것쯤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같은 방 언니들 중에는 남자랑 내선 전화로 밤새 통화하는 언니도 있었고, 남친과 연애하느라 거의 매일 새벽에 들어오는 언니도 있었어서, 나도 수면에 방해받긴 마찬가지라 퉁 치기로 했다. 해서 썅년들 다 좆까란 생각에 후반기엔 나도 죄책감 없이 그냥 편하게 실컷 코 골고 잤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자취방을 얻어 잠귀가 아~주 어두운 동기 하나와 함께 살았다.


같은 과 동기들과는 정말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서, 엠티에 가서까지 예전처럼 뜬 눈으로 버티거나 하진 않았다. 신나게 마시고 놀다가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일어나서 의외의 시청 소감(?)을 듣게 된다. 여자 동기 A와 B, 그리고 내가 셋이 나란히 잠들었는데, 알고 보니 A도 심각하게 코를 고는 편이라 가운데 있던 B는 양쪽에서 코 고는 소리를 돌비 5.1채널 서라운드 입체 음향으로 직관했다고. 그 말에 순간적으로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한 코 고는 나와 양대 산맥으로 견줄만 한 파워 력을 갖춘 코골이가 가까운 곳에 또 있었다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한 수 위일 텐데...? 콤플렉스가 자부심이 된 순간.


우리 집 고양이들은 청각이 예민한 ‘고양이’임에도 내가 코 고는 그 소리를 도대체 어떻게 견디고 사는지 아직도 미스테리다. 같은 소음을 늘 듣다 보니 이제는 그냥 ‘백색 소음’처럼 느껴지려나. 이런 동물적 감각을 가진 고양이도 나를 견디고 사는데, 겨우 코 고는 것 정도로 소박맞을 결혼이라면 그 결혼, 내가 극구 사양한다. 오늘도 맥시멈 볼륨으로 시원하게 코 골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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