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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Feb 08. 2023

나비 효과

20230208


요즘은 안 가봐서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 어릴 때만 해도 엄마 따라 여탕에 들어온 남자아이는 흔했다. 어느 집이든 아빠는 돈 버느라 바빠서 육아의 주체인 엄마가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온 걸 테니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문제가 된다면 꽤 큰 남아가 여탕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는 것 정도. 시대가 지나면서 이 문제를 두고 논란이 있긴 했었나 보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때와는 다르게 현재는 공중위생관리법 시행규칙에 목욕업소의 출입 제한 연령이 법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여탕에 출입이 가능한 남아의 나이는 5세(만 4세) 미만이라고 한다. 그 시절과 비교해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로의 제한이 상당히 의외이긴 하지만, 실제 나이보다 어리다고 속이고 출입시키려는 엄마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겠지 뭐. 편의점에 담배 사러 오는 미성년자한테처럼 느그 애새끼 민증 까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여간 재미있는 법이네.


서두가 길었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다. 아빠가 남탕에 딸을 데리고 가는 것에 대한 님들의 생각은? 이것도 찾아보니 말이 많더라고. 잠재적 아동성범죄자들의 타겟이 될 가능성에 관한 우려의 언급은 물론이고, 남탕의 다른 남성들이 위화감을 느껴 불편할 수 있다는 신박한(?) 의견도 있었다. 근데 이런 부분은 순 어른 입장에서의 발상일 뿐이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탕에 등 떠밀려 들어간 여아의 입장도 들어봐야지 않겠느냐, 이 말이야.

에이, 애가 뭘 알겠냐고?


애도 알 건 안다. 나는 다 기억나거든. 내가 어릴 때 남탕에 갔던 기억이, 그때의 느낌이.

남탕 가 본 썰 푼다. 단 한 번의 방문으로도 30년 동안이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을 보면 어린이에게도 굉장한 충격이었던 듯하다. 남탕은 정말 분위기부터 달랐다. 도대체 그날 나의 부모에게 무슨 빌어먹을 사정이 있었길래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목욕을 안 시키면 안 시켰지 기어코 어린 딸을 남탕에 보내야만 했을 그 대단한 사정이 당최 무엇이었을. 생각난 김에 따져 묻고 싶긴 하다만 내가 지금 아부지와는 이혼 중이고 엄마와는 절교 중이라서 말야. 하여튼 텍스트 그대로의 ‘남탕’은 정말이지 수컷들만 가득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엄마 따라서 여탕에 간 모양인지 여탕에 비해서도 남아의 인구는 현저히 적었다는 것. 한국이란 나라는 목욕문화마저 이렇게 가부장적이다.

미취학아동이었기에 성적수치심을 느낄만한 나이는 확실히 아니었고, 단지 너무나 낯선 환경에 덩그러니 놓여지다 보니 꽤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어딜 쳐다보든지 간에 나의 시야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덜렁덜렁한 것들이 수십 개씩 덜렁거리고 있었고, 이 ‘덜렁이’들의 위치는 하필이면 어렸던 나의 눈높이와 수직높이가 비슷해서, 가까운 옆으로 누가 지나가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평생 볼까 말까 한 진귀한 풍경이 아닐 수가 없다. 거기다 여기저기에 시커먼 털북숭이들이 보였다. 야생의 털 짐승들이 유유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젖은 사파리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랄까. 우리 집 남자들은 털이 별로 없는 편이라, 태어나서 한 장소에서 그렇게나 많은 양의 사람 털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물론 마지막이기도 하겠지). 극도로 이질적인 시청각 자극의 폭풍 속에서 신경이 민감하게 곤두서 있었기에 무슨 정신으로 씻고 오빠와 물놀이했는지, 과연 제대로 놀기는 했는지 거기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 하나 더 기억나는 건 드라이기의 생각지도 못했던 용도.


다행히 그날 이후 그곳에 다시 갈 일은 없었다. 내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의 기억이 저러하니,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그날의 나를 보았다면 그는 때아닌 고추밭의 풍년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뚫어져라 살피고 있는 이상한 꼬맹이로 날 기억하겠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부지는 나를 다시 남탕에 데려가지는 않았다.



그 후엔 엄마가 나를 여탕으로 데리고 갔지만, 내 의지로 가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부터는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만 엄마와 살았으니까, 중학교 이후로는 자연스레 집에 있는 욕조에서 혼자 목욕했고, 지금까지도 나는 대중목욕탕을 이용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찜질방에 놀러 간 적도 몇 번 있었는데(그땐 그게 유행이었다), 찜질만 하고 씻는 건 집에 와서 씻었다. 그런 나를 유난하게 보는 친구들 때문에 나중엔 그마저도 가지 않았다. 칸막이가 없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도 너무 싫었다. 내 몸을 보여주기 싫었고, 다른 사람의 맨몸도 보고 싶지 않았다.

기숙사에 살 때, 룸메이트와 함께 자취할 때, 운동을 다닐 때,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 모두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여자들이 옷을 훌렁훌렁 벗을 땐 마치 내가 남자인 것처럼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내가 누군가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땐 겉옷 속에서 어기적대며 갈아입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탈의했다. 그럴 수도 없는 경우에는 나를 보지 말아달란 부탁을 굳이 하고서 최대한 빨리 갈아입었다. 그런 나에 대해 다들 ‘왜 저래’하는 반응이었다.


내가 왜 저러는 건지는 나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유독 부끄러움이 많은 내성적인 아이였던 걸까. 내 몸을 보이기 싫은 거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는 꾸준히 있었으니까. 그건 지금처럼 살이 찌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입장에서는, 누구나 신체적 콤플렉스를 갖고 있음에도 동성 앞에서는 수치심이 전혀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신기했고 일관성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내 몸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은 것과, 내가 남의 몸을 보기 싫은 것은 어쩌면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이중적이라는 거겠지.


나는 살색이 갑자기 지나치게 많이 보이면 비정상적으로 불안했다. 언젠가 ‘환 공포증’이 느껴지는 무언갈 보고 나서 갑자기 환 공포증의 반응 원리가 궁금해 급 검색을 해 보다가 나의 살색에 대한 과장된 두려움도 이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속적인 수많은 구멍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순간적인 혐오감. 이건 확실히 공포증에 가까웠다. 해서 좀 더 파고드니 이 세상엔 생각보다 아주 다양한 공포증들이 존재했고, 다행히도 내가 가진 이 공포심은 나체공포증(nudophobia) 또는 체육관 공포증(gymnophobia)이라는 심리학적 명칭마저 갖고 있었다. 다른 공포증만큼 다양한 사례와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좆같은 게 나한테만 있는 증상은 결코 아니라는 것에 일단 큰 위안을 받고.


받고 하나 더. 나체공포증의 특성은 타인의 노출을 보기 두려워하는 동시에, 자신의 노출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도 두려운 것이 보편적이라는 것. 별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두 용어가 혼용된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나체’ 공포증은 내가 나체를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직관적으로 표현, ‘체육관’ 공포증은 체육관과 같은 특정 장소에서 탈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적으로 표현) 두 특성이 짝꿍처럼 존재한다니 다행(?)이지 뭐람. 합리적인 합리화. 정신 승리의 승리.


공포증이 발현될 만한 상황을 회피하는 식으로 증상의 빈도수를 줄일 수는 있지만, 일상적 생활에 방해가 되는 부분은 경험상 은근히 많다. 모두가 벗고 있는 목욕탕, 탈의실뿐 아니라 섹스마저 당연히 꺼리게 되고(‘꺼리다’라는 것은 나름의 쿠션 화법이고 솔직히는 고역이다), 건강검진을 받는 것도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특히 산부인과 진료는 상상만 해도 힘들다. 미루고 미뤘지만, 낼모레가 마흔인데 이젠 더 이상 안 받을 수도 없고. 나에게는 건강을 위한 주기적인 의무 정도가 아니라, 어렵지만 해내야만 하는 커다란 임무와도 같다. 그러니 요 앞 왁싱 언니는 나에게 제발 왁싱 하러 오란 말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왁싱 불구자로 판정받은 수준 아니냐.



글의 시작을 남탕 입갤썰로 열었으나 사실, 원인을 한 가지로만 특정 짓기엔 무리가 있고 아마 꽤 복합적인 문제일 거란 생각을 해 본다. 다른 어린이였다면 단순한 에피소드로만 기억될 일을 나의 예민한 성향이 사건을 확대시켜 받아들인 탓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 문제에 남탕 사건의 지분이 다른 어떤 트라우마보다도 클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고, 분명한 방아쇠였다.


글을 쓰면서, 내 글을 읽었으면 하는 특정 독자층을 어느 정도 정해 두고 그들을 겨냥해 글의 방향을 고민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도저히 감도 안 잡히다가 최근에야 독자층을 정했다. 나는 나의 글을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데에 있어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무언지, 놓쳤을 때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려주고 싶다. 부모의 어떤 실수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실수라 해도 아이의 내면에서는 눈덩이처럼 커져 버려 아이가 자란 후에는 회복하기 어려운 문제를 낳기도 한다는 걸 어른들이 꼭 알았으면 한다. 나의 부모는 놓친 것이 너무도 많았다. 놓쳤다기 보다는 놓은 거겠지. 물론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었고, 뭐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예민한 아이였다. 하필 또 공교롭게도 나의 부모는 다른 부모들보다 둔감한 부모였다. 서로에게 이 부분이 불운으로 작용했다. 하여간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지려고 하면, 온갖 악조건들의 아다리가 완벽하게 맞물려 제대로 된 나쁜 일이 벌어진다. 이렇게 극단적인 케이스의 이상적인 본보기가 또 있을까. '애 키울 때, 이렇게만 안 하면 됩니다.'의 사례를 몸소 보여준 내 부모의 육아 방식을 피해 가는 것만으로도 자네들에게는 치트키가 되길.



올해는 꼭 건강검진 받도록 노력해야지. 물은 셀프, 극복도 셀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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