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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Apr 05. 2023

증오는 나의 힘

20230405


긴 한 주를 보냈다. 스트레스로 빈틈없이 가득 찬 시간들. 내 마음처럼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힘든 순간에도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쉼 없이 움직이는데도 계속 또 새로운 일이 터진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몇 번 못 챙겨 먹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킹받는 부분은, 이런데도 불구하고 살은 고작 1키로 밖에 안 빠졌다는 거다. 살이라도 쪽쪽 빠지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분하고 억울해서 아무것도 쓰기도 읽기도 싫었다. 내가 뭔가 하지 않더라도 내 상황들은 나에게 이미 충분히 과하다. 과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항상 뭐가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된다. 고양이도 너무 많아. 살림도 너무 많아. 할 일도 너무 많고 챙겨야 할 사람도 너무 많아. 나한테 없는 건 돈밖에 없어. 시발.


딴생각이라도 좀 해야겠어서 넷플릭스를 켜고 미뤄오던 [나는 신이다]를 봤다. 보기를 미룬 이유는 또 과몰입 할까봐서. 공감 능력치가 상당한 ENFP이면서 동시에 초민감자(Empath)고 사주팔자마저 모든 걸 흡수한다는 흙의 기운이 다분한 닝겐이다보니 뭐만 봤다하면 쉽게 과몰입된다. 물론 이런 성향을 나눠놓고 설명한 성격검사 MBTI나 명리학 그 자체도 과몰입해서 파고들었다. 이런 건 재미라도 있지. 하지만 [나는 신이다]는 사이비 종교에 관한 다큐멘터리라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쪽에 과몰입이 되면 분명히 또 심리적인 타격이 클 것이 뻔했다. 그래서 타격감을 줄이기 위해 컨디션이 최상일 때 보려고 궁금해도 참았던 건데, 다른 집중할 수단이 지독하게도 필요해서 결국엔 이렇게 엉뚱한 시기에 과몰입해 버린다. 안 그래도 빡치는데 너무 빡쳐서 빡이 치니깐 다른 빡칠 걸 찾는 지경이라니. 뭘 또 굳이 일부러 사서 분노를 하겠다고.


이런 걸 보면 나는 나도 모르게 은근히 정신적인 학대를 즐기는 일종의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에 너무 취약하다 보니 매사가 스트레스라 이젠 아주 스트레스에 잡아 먹혀서 거기에 중독이라도 돼 버린 것 같은. 스트레스와 분노가 마치 나의 원동력이라도 되는 것 마냥. 지금의 분노는 더 큰 분노로 비로소 덮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약 중독자가 점점 더 센 자극을 찾듯이. 남들이 뭐 재미있는 일 좀 없나 할 때 나는 뭐 더 화날만한 일 또 없나 하면서. 이 정도면 이거 변태 맞네.


여기까지 쓰는 데 벌써 (공백을 포함해) 천자를 넘어섰다. 이딴 개소리로만 천자를 채울 수 있다니, 참 정성스런 개소리가 아닐 수 없다. 이딴 걸 에세이라고 쓰고 있는 나도 우습고 여기서 뭘 얻어가겠다고 누군가는 읽고 있을 걸 생각하면 또 우습다.

하긴 에세이도 에세이 나름이다. 최근에 본 두 권의 에세이책은 둘 다 음악을 하는 가수가 쓴 책이었는데 그중 고학력자인 작가가 쓴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캐주얼 할 정도로 특출난 구석이 없었고, 나머지 하나는 정말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을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과 사차원적인 발상으로 가득했다. 와. 겨우 이런 글로도 책을 내다니. 다른 면으로 대단했다. 이 정도면 그들의 팬을 위한 굿즈같은 개념으로 밖엔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나는 팬도 아닌데 이걸 왜 산 거지. 글이 본업이 아닌 사람의 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뭐, 목표는 달성 했네. 그래도 책을 냈으니 책을 낼 수준은 될 줄 알았는데. “제가 가진 직업적 영향력만으로 이렇게 책을 펴냈다는 것이 글이 본업이신 다른 작가분들에게 혹시 모를 불쾌감을 주거나 피해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며 “세상의 모든 작가들에게 존경심을 보낸다”고 진심 어린 말머리를 써 두었던 다른 어느 연예인의 책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내 글은 내가 봐도 쓰레기가 맞지만 나는 이걸로 소득을 보는 게 아니니, 출판사를 통해 정식으로 출판된 책을 내고 인세를 벌어가는 그들의 글은 적어도 내 글보다는 나았어야 했다. 내 개소리 보다는 그 개소리가 더 그럴 듯 했어야 한다고. 개나 소나 책을 쓰니까 꼭 사촌이 땅을 산 것처럼 배가 아프다. 내 사촌들은 다들 어려워서 다행히 당장은 땅을 살 일이 없겠지만.



아무튼 [나는 신이다]의 첫 화를 보고 또 개빡이 쳐서 자연스럽게 과몰입이 됐다. 관련 유튜브 영상을 줄줄이 보고 나무위키를 정독하고. 책장을 뒤져보니 공교롭게도 나중에 보려고 사두었던 책 중에서 [종교가 사악해질 때]와 [예언이 끝났을 때]라는 반종교적(사실 제목만큼 그렇게 극단적이진 않았다. 실은 저자도 종교인이다.) 성격의 책이 있어서 그것도 읽기 시작했다. 저 다큐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이런 책을 읽겠다고 사 둔 걸 보면 어떤 촉이 있던 건지, 아니면 이미 사이비에 대한 반감이 꽤 컸던 건지.

나는 종교를 믿진 않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믿었다. 그들의 믿음과 기도의 힘을 믿었다. 이것도 나름의 신념이라면 신념인 건데 종교 하나 없는 나의 이런 신념도 사이비의 만행에 깨져버린 거다. 잘못되어도 한참을 잘못되었다. 알아갈수록 상상을 초월했다. 안티 JMS 운동을 해 왔다는 ‘엑소더스’의 홈페이지를 둘러본 후 JMS의 홈페이지(주소부터 시발 정명석.com이다)를 봤는데 정명석의 이력이 쓰여진 글의 댓글엔 온통 광신도들의 뻘소리로 가득했다. 다큐가 나온 후 세상이 떠들썩한데 그런 것 치고 악플이라곤 전혀 없는 걸로 봐서는 철저하게 관리 중인 것 같았다. 과연 하늘의 빛과 같은 님에 대해 쌍욕을 쓰면 정말 빛의 속도로 삭제되는지 너무도 궁금해서 손이 근질근질했는데, 삭제와는 별개로 IP 추적을 통해 보복성 테러라도 당할까 싶어 꾹 참았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그래도 아직 써 보고 싶긴 함.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일상은 늘 힘이 들었고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언젠가 ㄴㅇ님이 어떤 대상을 미워하는 마음은 결국 스스로를 갉아먹고 나만 괴로운 일이라 했는데. 스트레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기분 전환 겸 셀프 염색도 했는데 그때뿐이고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머리 색깔이 형광 초록색이 됐는데도 머릿속이 어지러워 가게에서 파는 장난감 하나를 꺼냈다. 내가 팔지만 편의점은 정말 별놈의 걸 다 판다. ‘픽셀 블록’이라는 퍼즐 장난감인데 들어있는 도안에 맞춰 색깔별로 끼우면 그림이 완성되는 거였다. 게다가 헬로키티, 마이멜로디, 쿠로미 같은 산리오 캐릭터 그림이었다. 이거라도 해야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단순노동으로부터 생기는 명상의 순간은 늘 나에게 유효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바느질을 잘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집중해서 한 블록 한 블록 꽂았다.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하나가 완성됐다. 왠지 아쉬워 종류별로 하나씩 하려고 두 개를 더 꺼냈다. 장사하는 년이 팔 생각은 없고 이렇게 지가 야금야금 꺼내 쓴다. 개이득.


블록을 꽂아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가며 생각해 봤다. 분노와 증오라. 나만 이렇게 매사에 쓸데없이 과몰입해 화가 많은 건가. (물론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만) 인스타만 보더라도 다들 사는 게 재밌어 죽겠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늘 예쁜 것만 눈에 담고 좋은 것만 귀에 담으며 분노와 증오 없이 사는 사람들. 인정하기 싫겠지만 님들아,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현실을 부정하며 내 시각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히려 나만큼 낙천적인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화가 나는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고, 화를 내야만 하는 일들은 지천에 널려 있다. 분노하지 않으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광복절도 독립운동가들이 개빡쳤었으니까 이뤄낸 거라고, 이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선택권을 줘도 고민도 없이 호로록 파란약이나 줏어 먹을 인간들아. 니가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 해서 그게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라여. 예?


그런 의미에서 다시 염색 얘기. 염색약은 집에서 할 때 만이라도 ‘크루얼티프리’ 인증 제품을 쓴다. 미용실에서는 어쩔 수 없더라도 직접 선택할 수 있을 때엔 소신을 잃지 말자. 사용한 제품은 [manicpanic]. (갑분 보그병신체)

귀한 걸 먹은 사진, 멋진 곳에 간 자랑 사진이 피드에 뜨는 동안에도 내가 자꾸 동물 학대나 동물 복지의 현실에 대해 인스타 스토리를 공유할 때마다 그런 거 올리지 말라며, 어차피 볼 사람은 내가 그러지 않아도 찾아보게 되어 있고, 관심 없는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해도 끝까지 안 볼 테니 괜한 사명감 갖지 말라던 녀석에게 ‘안 보는 새끼들은 대가리 붙잡고 눈깔 벌려서 보게 만들 건데?’라고 답장한 적이 있었다. 왜냐면 나는 빨간약 빨고서 계속 게거품 물기로 했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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