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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Apr 13. 2023

멍청이 월드컵

20230410


낯이 익은 남자가 들어왔다. 밖에 시동을 끄지 않은 차를 세워둔 걸 보면 출근 중이겠지. 두리번거리며 뭘 찾는 것 같길래 찾으시는 게 있느냐고 물었고, 택배를 보내려 하는데 박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직 폐지 아저씨가 들르지 않은 시간이라 버릴 박스 모아둔 곳을 가르키며 저쪽에 있으니 필요한 걸로 골라가시라 했다. 그제서 다시 그를 보니 겉에 비닐팩이 붙어있는 작은 박스가 손에 들려 있었다. 납작하고 길다란 모양(크기도 그렇고 키보드인 줄 알았다)으로 봐서는 마땅한 박스가 없지 싶었다. 그 물건을 담을 만큼의 큰 박스야 있지만 너무 커서 빈 공간이 생겨 덜그럭거릴 텐데.

남자는 부시럭대며 박스를 고르더니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들고 나갔다. 밖의 차가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차 안에서 포장이라도 하는가 보다. 여기서 부칠 생각인가. 라면 박스로 골라 갔으니 그 크기로어차피 편의점에서 접수가 불가한데. (편의점 택배는 소형 물류만 취급하므로 상자 세 변의 합이 80cm를 넘어서는 안 된다. 무단 접수시 배송 기사님으로부터 수거 거부 될 수 있다.)


맨손으로 다시 들어온 그는 혹시 테이프와 가위를 빌릴 수 있느냐고 했다. 빌려는 드리되, 밖에 가지고 나가서 쓰지 마시고 본인 물건을 가지고 들어와서 이 안에서 작업하시라고 했다. 가게의 펜이든 테이프든 칼이든 시발 지들꺼 맡겨라도 둔 듯 잠깐만 빌리자고 가져가서는 돌려주지 않은 인간들이 태반이다. 상식없는 동네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야금야금 삥뜯긴 게 한두 번이어야지. 되돌려달라 했다가 되려 손님을 잃은 적도 있었다. 몇 년 전 어떤 사람은 여기서 와인을 사고 오프너가 없어서 못 먹고 있다며 다시 왔길래, 우선 이걸로 사용하시고 다음에 오실 때 돌려만 달라면서 보유하던 오프너를 친절히도 빌려주었었는데 역시나 가져오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후에 가게 밖 쓰레기를 줍고 있는데 마침 그 사람이 지나가고 있어서 저번에 빌려가신 오프너 가져다 달라고 얘길 했더니, 잊고 있었다며 지금 집에서 바로 들고 나오겠다고 하고서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그 인간을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겠지. 그깟 오프너 하나 꿀꺽하겠다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과 편의점 주변의 동선마저 포기하다니. 그토록 열정적인 도둑놈 심보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남자는 테이프와 가위를 받으며, 그럼 혹시 뽁뽁이도 좀 줄 수 있느냐고 했다. 이 새끼 선 넘네. 왜 멍청한 것들은 꼭 하나같이 바라는 것도 시발 존나게 많을까.



“편의점 택배는 배송 대행을 해 주는 곳이지, 배송 업체가 아니에요. 저희는 말 그대로 접수만 받는 거고, 접수 이전의 모든 준비는 본인이 직접 해 오셔야 돼요. 여기서 접수하시려면 택배를 보내실 모든 준비가 이미 되어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그 박스로 보내실 거면 저희 쪽에서는 접수가 안 되고요. 여기 적혀있는 기준 사이즈를 넘어가는 박스 크기라서요. 보내시려면 저기 길 건너 우체국 가셔서 하셔야지 될 것 같고요, 거기엔 그런 완충제도 종류별로 있고 그 물건 담으실만한 더 적당한 박스도 다양한 규격으로 보유하고 있을 거예요. 근데 어차피 물건 자체가 이미 작은 박스에 담겨 있는데 그걸 다시 박스에 담아 보내실 필요가 있나요? 그냥 그거 채로 보내시면 그 정도는 접수 가능한데. 내용물이 뭐죠?”


“아 그런가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럼 그렇게 해야겠다. 내용물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같은 거예요.”


“그러면 파손위험 때문에 완충 포장해서 접수하시는 게 맞겠네요. 접수 과정에 본인이 파손면책에 동의하셔야지만 송장이 나오는 거라, 이대로 보냈다가 배송 중에 혹시라도 파손되면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박스 겉에 붙은 비닐팩(드라이버와 헤라 등의 공구가 들어있었다)도 어차피 그 상태로는 접수가 안 되죠. 안에 같이 넣으시면 모를까, 걔네는 파손은 둘째치고 분실될 텐데.”


“아, 그럼 뽁뽁이로 둘둘 감싸서 그 상태로 보내는 건요?”


하 씨 진짜 병신인가.


“님 뽁뽁이 없으시다면서요. 저희도 없다니까요. 그리고 겉 포장이 택배용 포장 비닐이나 종이 박스가 아니면 그것도 기준에서 벗어난 거라 어차피 접수 안 되시고. 우체국 가시라고요.”


“에고, 그래야겠다. 여기 우체국 몇 시에 열어요?”


“그런 건 직접 검색해 보시죠?”


“네ㅠ 그럼 라면 박스는 다시 놓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예, 안녕히 가세요(제발 빨리 얼른 신속히 꺼져).”


그렇게 상황이 종료됐다. 남자가 가고 나서 왜 낯이 익었는지 생각이 났다. 가끔 음식물 종량제 봉투를 묶음으로 사러 왔었는데, 가장 작은 크기인 1리터를 묶음으로 그것도 남자가 사러 오는 경우는 이 동네에선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무식하면서도 악의라곤 없는(하지만 해로운), 얄미울 정도로 해맑은 저 말투.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 MZ세대 특유의 말투에, 그럼에도 의외로 종량제를 사용하는 개념 정도는 박혀있고, (1리터를 묶음으로 사다 쓰는 점과 여기서 즉석식품을 한 번도 사간 적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자취하면서도 집밥을 해 먹는 부지런함과 건전함. 이런 단서들의 합이 굉장히 부조화스런 사람이라 어쩌다 한 번씩만 오는데도 잊을 수가 없었다. 눈치는 좆도 없지만 그래도 애는 착해 보이는 그런 캐릭터.


한 번씩 이렇게 기 빨리는 손님이 왔다가 가면 쉬는 시간과 카페인, 그리고 무엇보다 니코틴이 필요해 담배를 태우고 온다. 다녀와서 손을 씻고 핸드크림을 바르며 무심코 거울을 봤는데, 급히 출근하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왕 눈곱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같이 움직이며 속눈썹에 달려있었다. 이런 눈을 하고서는 저 사람보다 뭐가 낫다고 빈 틈이라곤 없는 양 잘난 척하며 무시한 꼴이라니. 자, 이제 누가 더 멍청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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