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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Apr 19. 2023

Titanium

20230419


가게 입구 쪽 어닝이 또 부서졌다. 이번이 세 번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고는 네 번째고, 부서진 게 세 번째. 맨 처음 사고에서는 살짝 기스만 나고 부딪힌 트럭의 천막만 찢어진 거라 별다른 수리 없이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동네 꽃집 사장님 배달 트럭이기도 했고.

한 자리에서 올해로 8년째 운영 중인데, 공교롭게도 파손이 될 정도로 사고가 났던 세 사건은 모두 근 1년 안에 있었던 일들이다. 작년 여름에 새로 바뀐 물류 기사님이 가게 외부 구조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탑차로 들이받았고, 작년 겨울에는 웬 길 잃은 관광버스가 좁은 골목길로 들어오고는 빠져나가지 못하자 차를 돌리려고 코너를 돌다 버스 창문에 우리 가게 모서리를 박아서 서로 개박살이 났다. 앞 사건의 물류 기사님이야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비켜주려다 실수한 거였지만, 관광버스 사고가 있던 날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화가 많이 났었다. 버스 운전기사라는 놈이 요즘 세상에 네비도 없이 다니고 또 직업이 운전인 사람이 길을 잃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며, 버스 중에서도 덩치가 꽤 큰 대형 버스를 차선도 없는 이런 골목길에 끌고 들어온 것도 그렇고, 사고 처리까지도 지겹도록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해당 버스는 통근버스인 모양인데(다행히 운전자 외에 아무도 타지 않은 상태라 인명 피해는 없었다), 회사 소유의 차이기 때문에 버스 수리비와 우리 가게 수리비까지 사고를 낸 기사가 이중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인인지 조선족인지 모를 어눌한 말투를 쓰며 보험도 없다면서 불쌍한 척 사정했다. 보험이 안 된다니 안타깝긴 하다만 댁만 사정이 있는 게 아니잖나. 어쨌든 사고를 낸 건 그쪽이고 우리가 피해를 봤으니 책임은 지셔야지. 우리 쪽 본사 측의 시설 관련 협력업체에서 내준 견적은 믿을 수 없다며 다른 사설업체를 쓰겠다고 하길래 알았다고 하고선 기다렸는데도 열흘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고,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걸었을 때 본인은 일하느라 바빠서 못 알아봤으니까 내가 대신 업체 좀 알아보라며 명령질을 했다.


“......? 지금 일하시는 중이라고요? 운전 중이면 이렇게 전화 받으시면 안 될 텐데요?”


“아니, 오늘은 쉬는 날인데 자다가 깨 가지고.”


저 개떡 같은 한마디에 그만 봉인이 풀려버렸다.


“그럼 지금 바로 알아보시면 되잖아요? 본인만 일하느라 바쁘십니까? 저는 뭐 놀아요? 그쪽은 그래도 쉬는 날은 있네요? 저는 좆빠지게 일하느라 쉬는 날도 없는데? 사고 쳐 놓고 잠은 오시나 봐요? 저희 쪽에서 먼저 업체 견적 받아 놨더니 아저씨가 비싸다고 싫으시다면서요. 그래서 시간 드린 건데 당사자는 자느라 바빠서 알아볼 생각도 없고, 이제와서 저한테 알아보라고요? 제정신이세요? 그쪽 때문에 가게 입구 부서진 채로 영업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경우죠? 자꾸 사정 좀 봐달라고 하시는데, 저희가 피해자예요. 뻔뻔한 것도 시발 정도껏 하셔야지. 내가 당신보다 어리고 여자니까 아주 우습죠? 차 넘버랑 당신 회사 번호 다 찍어놨으니까, 이런 식으로 자꾸 시간 질질 끄실 거면 그냥 바로 경찰서 가서 뺑소니로 신고하겠습니다.”


자기가 불리할 때마다 잘 못 알아듣는 척을 하던 그 사람은 경찰서 얘기를 꺼내니 갑자기 한국말이 능숙해졌다. 결국 며칠 후에 수리할 사람이 오긴 왔는데 엄밀히 말해 전문 업체는 아니었고, 예전에 수리일을 잠깐 해 봤다는 덤앤더머 둘(운전자의 지인이라고 했다)이 와서는 한참을 만져대더니 중간에 지들끼리 의견충돌로 싸웠다가 그 와중에 또 밥은 쳐먹고 왔다가 할 수 있는 지랄 염병은 다 떨어놓고서 대충 모양만 그럴싸하게 수리해 놓고 갔다. 저 인간들 못미더워서 모든 과정을 감시하며 잔소리하느라고 나까지 퇴근도 못 해 진이 빠졌고, 다시는 엮이고 싶지도 않아 그 정도에 타협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엊그제, 몇 년도 더 전에 처음 박았던 그 꽃집 배달 트럭이 또 어닝 모퉁이를 들이받은 거다. 이쯤 되면 저 구조물의 위치에 문제가 있는 건지 의심될 정돈데, 사실상 최근에 와서야 여러 번 사고가 있었을 뿐 6년 동안 수리할만한 사건이 한 번도 없던지라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다. 작년부터 이어진 세 사고와 더불어 파손되지 않았던 첫 접촉 사고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공교롭게도 모두 내가 근무하는 시간에 벌어진 일들이었고, 팩트가 이러하니 나의 어떤 기운에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혹시 이게 무언가로부터의 어떠한 메시지인 걸까 하는 미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누구 말대로 정말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하다못해 또 막걸리로 결계를 쳐야 하는 걸까. 에세이 폴더를 뒤져보니 나쁜 꿈을 꾸고서 막걸리를 뿌렸던 게 9월인데, 그 사이 효력이 떨어진 걸 수도. 참나, 미신도 유통기한이 있겠냐고. 그럼 뭐, 주기적으로 뿌려야 하는 거임? 아니, 애초에 효력이라는 게 있기는 했던 걸까.


이 일이 아니어도 스트레스는 많지만 그래도 요즘엔 잠은 그럭저럭 잤다. 단풍이(고양이, 오줌싸개)의 잦은 실수로 토퍼를 빨다 빨다 아예 갖다 버린 뒤로 그리 편히 자진 못했어도. 넷플릭스에서 [BEEF] 시리즈(한글 제목은 [성난 사람들])를 본 날을 제외하면 그래도 규칙적으로 여섯 시간씩은 잤고, 가게에서도 새벽에 손님 없는 시간에 쪽잠을 잤다. 보통은 일주일에 한두 번 그렇게라도 잠을 보충하는데 최근에는 거의 매일을 가게에서도 잤다. 손님을 감지하는 센서 벨이 울리면 자다가도 일어나 계산을 해야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는 게 오히려 집에서 잘 때보다도 편히 자는 것 같기도. 그래도 하루 종일 졸리다.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왜 자도 잔 것 같지도 않은 건지 모르겠다. 춘곤증인가. 아니면 몽유병 같은 거라도 있나. 집에 늘 켜두는 홈캠 녹화를 재생하기만 하면 확인은 가능하겠지만 정말로 몽유병일까 봐 차마 확인해 볼 자신이 없다. 에이, 설마.

몽유병이든 말든 뭐, 다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나는 예민한 탓에 어릴 적부터 아무 데서나 못 자고 잠귀도 밝고 한 번 깨면 다시 잠들지 못하는 그런 체질이었지만, 지금의 여유 없는 일상은 나에게 머리만 대면 어디서든 코까지 골고 잘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주었다. 웃프니까 그 자체로 블랙코미디다. 좋게 생각하련다.


이번 사고도 얼마든지 좋게 생각하려면 좋게 생각할 수 있다. 저번에 그 빡대가리 듀오가 고치고 갔을 때 아무래도 영 찜찜했었으니까 이번 기회(?)에 제대로 다시 손 보는 걸로 생각하기로. 사실 물류 기사님과 사고가 났을 때도, 개업 이후 드디어 처음으로 기사님 덕(?)에 낡은 어닝을 새것으로 교체한다고 생각하며 긍정했었다. 네 번의 사고를 겪으면서도 네 번 모두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잖아. 또 1년 사이에 같은 위치를 세 번이나 박았고 세 번 모두 그 자리에 내가 있었지만, 살다 보면 이런 우연이 우연히도 겹칠 수 있는 거겠지. 로또에 당첨될 확률보다 번개를 맞을 확률이 훨씬 더 크다는 데도 로또 당첨자는 매주 나오잖아. 무심결에, 연속된 사고의 원인이 왠지 ‘박복한 나’일 것만 같아서 꽃집 사장님이 번호를 주시며 투덜거릴 때 하마터면 죄송하다고 사과씩이나 할 뻔했지만, 따지고 보면 여기에 나의 잘못이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나의 무언가를 부술 때마다 내가 부서지는 것만 같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열어 David Guetta의 Titanium(feat. Sia)을 Extended 버전으로 듣는다.


I’m bulletproof, nothing to lose

Fire away, fire away

Ricochet, you take your aim

Fire away, fire away


You shoot me down, but I won’t fall

I am titanium

You shoot me down, but I won’t fall

I am titanium


어닝은 세 번이나 부쉈겠지만 나를 부술 순 없을 거다. 나는 뻐킹 티타늄이거든? 내가 티타늄이고 티타늄이 나다, 이 말이야. 인간 티타늄 그 잡채라고. 유남생?


운석 맞은 거 아님


아직은 수리 업체에 접수 처리만 된 상태라 견적은 나오지 않았고, 꽃집 사장님은 보험처리 하신다고 했다. 우리는 또다시 입구 지붕이 부서진 채로 장사를 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웃프니까 블랙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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