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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Apr 25. 2023

봄 나들이

20230424


교대하고 은행에 가는 중, 맹히씨로부터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올해로 아흔 살이 되셨지만, 지난달에 엄마가 할머니 댁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연세에 비해 아주 괜찮으시다고 했었기 때문에 정말 백 살까지 사실 줄 알았다. 돌아가시기 전날 드신 게 소화가 잘 안되어 속이 계속 불편하시다고 하셨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화장실을 다녀오시다 갑자기 쓰러져 큰외삼촌이 바로 구급차를 불렀고, 응급처치 중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사람이 나이를 그만큼 많이 먹으면 평소에 건강하더라도 음식 한 번 잘못 먹은 걸로 이렇게도 되는가 보다. 꼭 남 얘기하듯 이런 생각을 했을 만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바쁜 일을 핑계로 할머니 뵈러 간다는 걸 미뤄왔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늘 그 자리에 계실 거라고,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그땐 언제라도 볼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아직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었을 그날 새벽에도 했었다, 바보같이.


매일 먹여야 하는 약이 떨어져 엄지(고양이, 갑상선 기능 저하증. 지금은 간에 악성 종양까지 생겨 호스피스 중.)를 데리고 병원엘 꼭 가야 하는 날이라 다음 날 퇴근하고 올라가기로 했다. 새벽에 출근하자마자 근무자와 입씨름을 한 탓에 생각도 정리할 겸 마침 미루던 일들도 한꺼번에 다 해 이미 어지간히 피곤한 날인데, 일이 끝날 때쯤엔 믿었던 사람에게 협박을 듣고 개싸움이 나더니 그 와중에 나에게 두 번째로 큰 사랑을 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나는 아픈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고 밤에 또다시 출근하려면 서둘러 집안일을 끝내고 자야 한다. 나에겐 늘 뭐가 이렇게 참 지나치게도 많다. 평소 같지 않은 이런 이벤트들은 제발 하루에 한 건씩만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루에 많은 일들이 있을 줄 알았다면 새벽에 가게 기물 옮기기 정도는 안 하고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껴뒀겠지. 도무지 울 시간도 없어 울지를 못해 울고 싶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는 버거운 하루가 지난 다음 날,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이따가 수원에 가려면 오늘도 피곤한 하루일 테니 손님이 없는 시간에 미리 잠도 조금 잤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늘 하던 루틴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잘하고 있는 건지 잘못하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11시에 출근하시는 이모님과 교대 후 일찍 집에 들러서 서둘러 갈 채비를 했지만 막상 갈 시간이 되니 왠지 가기가 싫었다. 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은 게 되는 것도 아닌데도, 거길 가면 정말 할머니의 빈자리를 인정해야만 할 테고 그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내일 또 출근하려면 저녁에는 돌아와야 하니까, 그러려면 얼른 출발해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장례식장에 머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너무 가기 싫어서 줄담배만 피워대며 괜히 시간을 끌다가 억지로 겨우 출발했다.


지하철을 타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한 장소에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본 것도. 늘 두세 블록 남짓 되는 한정적 영역 안에서만 지내던 우물 안 개구리는 할머니 덕분에 이렇게 바깥세상 구경도 한다. 참으로 날씨가 좋은 날에 돌아가셨다. 열차의 큰 창문을 통해 보이는 봄의 초록색들과 햇볕의 따스함이 새삼스러우면서도 향수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눈으로 계절을 확인한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기분이 조금은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쓰는 게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섭섭해하실 분은 아닐 거다. 우리 할머니는 손녀가 삼십 대 중후반의 노처녀가 됐는데도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며 꼭 쪽 소리가 나도록 전화기에 대고 찐하게 뽀뽀해주셨었다.

엄마에게 나는 친구였고 아부지에겐 내가 와이프였지만 할머니에게는 손녀였다. 엄마가 있지만서도 없던 내게 할머니는 친정엄마 같은 존재였다. 중학교 때부터 떠맡아져 해왔던 생존형 살림 스킬의 대부분은 할머니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내가 결혼해 본 적은 없지만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웠던 할머니와 떨어져 타지로 내려와 살게 됐을 때, 시집가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싶었었다.

가게를 시작하고부턴 일에 지쳐 할머니를 뵈러 갈 여력이 없어져 그 미안한 마음에 명절 같은 때엔 선물이라도 꼭 보냈었다. 그러면 우리 손녀가 보내줬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으셔서 경로당에 가져가 여기저기 다 나눠주느라고 정작 할머니 입으로 들어가는 건 별로 없었다. 할머니 드시라고 보내드린 게 누군지도 모르는 남의 입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지만 그런 우리 할머니가 귀여웠다. 그래서 나중엔 나눠드릴 양까지 감안하고 넉넉히 보냈다. 멜론을 보내드렸을 때 가장 좋아하셨어서, 올해도 보내드릴 생각에 멜론이 나올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달리는 열차의 창으로 들어오는 봄 햇살에 눈이 감겼고 지금 이 순간 할머니와 함께 눈부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질없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타고서 역에 도착했다. 이렇게나 쉽게 올 수 있었던 건데, 겨우 이 거리를 그동안 왜 그렇게 무엇 때문에 한 번을 뵈러 오지 못했던 걸까. 나는 지금의 이 후회를 아마 남은 평생토록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싸다.

택시로 갈아타고 장례식장에 거의 다 와 갔을 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지금 입관식 하러 가느라고 자리에 아무도 없을 테니 도착하면 일단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조금만 더 빨리 가면 나도 입관식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입관 후에는 내가 살아있는 한 정말로 할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이게 우리 작별의 마지막 기회였다. 빠른 길로 잘만 가고 있는데도 괜시리 운전 기사님이 원망스러웠다. 기사님을 탓할 게 아니라 아까 나년이 출발 전에 그렇게 늦장만 안 부렸어도. 모자란 년.


내리자마자 뛰어 들어가 직원에게 입관식을 하는 위치부터 물어봤다. 헐떡이며 찾아 들어간 곳에 엄마와 외가 쪽 가족들이 모두 있었다. 이미 입관식이 진행 중이라 늦은 내가 방해가 된 건데도 다들 어서 오라며 반겨 주었다. 할머니는 이미 수의에 감싸져 계셔서 기대했던 것처럼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드디어 내 앞에 계셨다. 생전에(이런 단어를 쓰기도 아직 익숙치가 않다) 우리 할머니는 체격이 좋은 편이셨는데, 삼베에 싸여진 할머니는 내 기억보다 너무나 작았다. 이제야 나는 울어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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