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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May 03. 2023

Before Sunset

20230503


관 앞에 서 있을 자신이 없어 나는 뒤에서 참관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그렇지만 가족들이 서럽게 우는 걸 보니 그건 또 그거대로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엄마가 우는 건 어려서부터 많이 봤어도 이모나 삼촌들이 저렇게 우는 건 태어나 처음 봤다. 순간의 감정에 솔직한 이들이 가엾고도 한편으론 반가웠다.

입관식이 끝난 후 장의사가 큰 아드님이 누구시냐고 묻더니 관에 이름을 써달라 부탁했다. 하루에도 여럿의 장례가 치러지는 병원 장례식장의 특성상 관을 덮고 나서부터는 고인의 신분을 구별하기가 어려우니 이름표를 붙여 두는 거라고 설명했다. 아직 눈이 꽤 충혈되어있는 큰외삼촌이 훌쩍거리시며 이름을 쓰셨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신이 없으셨는지, 이름표의 앞에 ‘故’라고 쓰여 있는데도 할머니 이름이 아닌 삼촌 본인의 이름을 적는 실수를 했다. 장의사가 지적하자 적은 이름에 대충 빗금을 치고서 그 옆에 다시 할머니의 존함을 적었다. 나는 그게 웃겼다. 이름표가 저 지경인 집은 아마 우리 집 밖에 없을 거다.


엄마는 내가 새벽부터 일하고 퇴근하고서 바로 오느라 아무것도 못 먹고 왔을 거라며 식사 먼저 하라고 했다. 새벽에 대충 뭘 먹긴 했지만 벌써 오후 시간이라 배가 고프긴 했다. 평소 같았으면 할머니께 먼저 인사부터 드리는 게 순서 아니냐고 따졌겠지만, 그날은 그냥 고분고분히 시키는 대로 했다. 나에겐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지만 엄마에겐 엄마가 돌아가신 거니까 당분간은 내가 봐준다. 맘 바뀌기 전에 맹히씨 하고 싶은 대로 해.

따로 일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두 분이나 계신 데도 엄마는 굳이 자기가 주걱을 들고 내 밥을 퍼 왔다. 밥을 담을 때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어머, 무슨 밥을 그렇게 많이 퍼요?” 하길래 “우리 애가 밥을 많이 먹어요.”라고 대답했단다. 시발.

엄마도 아점 먹고서 그 시간까지 아직 굶었다고 자기 밥도 떠서 내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같이 앉아 밥을 먹으니 예전 버릇이 또 나온다.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 장례식장 밥인 것 치고는 여기가 맛이 괜찮다며 자꾸 이것저것 맛있다고 너도 먹어 보라 했다. 가끔 외식할 때 말곤 평소에도 끼니를 대충 때우는 나는 다른 반찬 없이 육개장에 밥만 먹어도 괜찮아서, 고생한 엄마나 많이 잡수시라 했다. 하도 울어서 배가 고프긴 했었는지 어제부터 먹은 같은 메뉴일 텐데도 맛있다고 잘 먹었다. 그러다 현타가 와서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지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밥은 또 잘 들어가네...”


라며 한숨을 푹 쉬는 맹히씨.


“할머니가 지금 옆에 계셨으면 엄마가 방금 나한테 한 거랑 똑같이, 엄마한테 하셨을걸. 장례식은 장례식이고 얼른 이것 좀 더 먹어 보라고.”


“...... 너도 나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밥 먹다가 이런 생각 하겠지? 그럼 그땐 이 기분 알 거야.”


“그러겠지, 뭐. 엄마도 내가 밥도 안 먹고 구석에서 질질 짜고만 있으면 꼴 보기 싫을 거 아냐. 나도 이다음에 한 톨도 안 남기고 야무지게 싹 긁어 먹을게. 그러고선 같은 생각 할게. 그러니까 마저 다 드셔.”


나는 엄마가 고봉으로 퍼다 준 밥을 국에 말아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고, 엄마는 후식으로 테이블에 있던 떡과 과일까지 다 먹었다.


식사 끝내고선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향을 피워 두어 내가 좋아하는 절 냄새가 났다. 영정 사진을 보니 할머니 표정이 심술궂었다. 우리 할머니는 전혀 그런 분이 아닌데. 저 사진은 언제 찍으셨었냐고 물어봤다. 몇 년 전에, 경로당에서 동네 노인들을 대상으로 날을 잡아 한꺼번에 찍어줬었다고 옆에 있던 사촌 동생 ㅅㅎ이가 대답했다. 아마 그날 뭐가 맘에 안 드셨던 모양이다. 엄마에게 할머니한테 저런 색 한복도 다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건 포토샵이라고 했다. ㅅㅎ이와 나는 웃었다. 요즘엔 장례식장에서 서비스로 저렇게 다 수정해서 새로 보기 좋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그냥 액자를 걸어둔 게 아니라 사진을 화면에 띄워 둔 모니터였고, 할머니 실루엣을 등진 뒷배경은 심지어 동영상처럼 은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참 재미난 시대에 돌아가셨다.


이른 오후 시간대라 외부 손님은 아직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과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선 서로의 나이 든 얼굴을 보며 앉아있으니 소속감이 들었다. 외가 쪽의 가족들은 눈동자가 아주 밝은 갈색이다. 할머니도 그랬고, 삼촌들과 이모, 우리 엄마도 밝은 색의 눈동자를 가졌다. 지금 보니 사촌 언니와 오빠도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나의 눈은 엄마가 아니라 아부지를 닮았나 보다. ㅅㅎ이도 나와 비슷했다. 그래도 얼굴 생김과 성격은 영락없는 이 집 식구였다. 나는 친가보다는 외가 쪽과 늘 성향이 잘 맞았고, 나와 이들 사이의 비슷한 점들을 좋아했다. 이곳에 와 있으니 편안하고 좋았다.


한쪽에서 엄마와 이모는 걱정이었다. 니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두 분이 매일 같이 싸우셨었다며, 멀찌감치 떨어뜨려 묻어 드려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에이, 저승에 가셔서까지 싸우실까. 그러다 두 분이 싸웠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듣고 있던 우리는 또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가 난다던데.


바빠질 시간이 되기 전 초저녁에 첫 제사가 진행됐다. 할머니는 매년, 1년에도 몇 번씩 제사 음식을 준비하시느라고 고생하셨었는데 이제는 편안히 제사상을 받게 되셨다. 다 같이 모여 절을 하는 그 방 안의 공기에서 각자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사람을 향한 진심만으로 가득 찬 이곳.

장례사가 술잔은 세 명이 올리는 거라고 해서 장남인 큰외삼촌과, 수술로 다리가 불편한 이모 대신 작은 딸인 우리 엄마, 장손인 사촌 오빠가 차례로 술을 따라 드리고 큰절했다. 절차가 끝나고 난 뒤 맨 뒤쪽에 있던 ㅅㅎ이는, 우리 할머니 생전 술이라곤 한 방울도 안 드셨었는데 오늘 어쩌다 세잔이나 받으셔가지고 지금쯤 아마 알딸딸 하실 거라 했다. 실은 나도 정확히 똑같은 생각 중이었다.


아쉽지만 혼자 다시 천안으로 내려왔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더라니 마음이 허전했다. 내려오는 길의 지하철 안은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올라갈 때보다 사람이 더욱 많았고, 나라는 존재와는 철저히 분리된 시뮬레이션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실과 피로 내일에 대한 책임을 등에 겨우 이고 지고서 두정역에 도착해 집으로 가는 방향을 향해 걸으니, 하늘엔 어느덧 노을이 형광빛 주황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지금 눈앞의 이 노을이, 나에게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노을이란 걸 한눈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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