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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May 05. 2023

비하인드 씬

20230505


#1.


오빠가 아부지한테 할머니 돌아가신 얘길 해서 아부지가 장례식장에 올 뻔했다. 한때는 장모님이었으니 뭐 그 정도야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문제는 엄마가 질색했다. 엄마는 오빠한테 ‘니가 입방정 떨어서 이렇게 된 거니까 니가 직접 니 아빠 못 오게 수습하라’고 했고, 오빠 새끼는 늘 그랬듯 책임을 회피했다. 속은 시커먼 놈이 겉으로는 또 싫은 소리를 못 한다. 이 얘기를 들은 나는 아부지 잠깐 왔다 가는 게 뭐 어떠냐고, 생각해서 온다는데 굳이 못 오게 할 건 또 뭐냐고, 오면 부조나 받으라고 했지만 엄마는 아저씨(엄마의 룸메이트)가 올 거라서 셋이 마주치기 싫다고 했다. 음. 것도 그럴 수 있겠네. 결국 엄마가 아부지에게 직접 마음은 고마운데 오면 불편하니 오지 말아 달라는 내용인 장문의 문자를 보냈고, 아부지는 오지 않았다.

팝콘각이었는데.


아저씨는 경북 경산에서 경기 의왕까지 먼 길을 달려오셨고, 아저씨 인맥이 좋으신 모양인지 경산에서 온 화환만 열댓 개나 돼서 엄마가 체면이 섰다고 했다. 내가 힘들 때 곁에 있는 사람의 행동에서 그 사람의 진가가 보이는 법이다. 나는 그 아저씨 첫인상이 영 별로였었는데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나 보다.



#2.


내가 장례식장을 다녀간 후에 저녁 시간부터 수많은 조문객이 왔다 갔다고 했다. 안 그래도 하루 전날 어쩌다 보니 병원 사정으로 객실을 더 큰 곳으로 바꾸게 됐다고 했었는데, 그런데도 테이블이 꽉 찰 정도였다고 했다. 자리를 지키던 가족들과 사촌들이 정신없이 바빴었다고. 가게 때문에 먼저 내려온 게 더 미안해졌다.

어쨌든 그 덕분에 꽤 많은 조의금이 모아졌고, 상조 보험이 없어 부담이 컸던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일해 주신 아주머니들의 일당을 포함 모든 장례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그러고도 여윳돈이 남아 지병이 있던 둘째 삼촌의 수술비로 쓰게 됐다고 했다. 수술비가 없어 수술을 미루고 있던 차에 선물 같은 소식이었다. 삼촌은 한 달에 약값으로만 몇십씩 들어가는데, 일을 못 하게 되신 후로는 사촌 동생인 ㅅㅎ이 혼자 많지도 않은 자기 월급에서 충당하고 있던 모양이다. 이후로는 나머지 삼촌들과 이모, 맹히씨가 매달 돈을 모아 약값을 댔지만 삼촌은 짐이 되기 싫다며 약을 끊다고 하셨었다. (약을 끊으면 살 수가 없다.)


둘째 삼촌은 꼭 외국인처럼 항상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던 게 트레이드 마크라 내가 어릴 때부터 ‘털보 삼촌’이라고 불렀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분장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산타 그 잡채였다. 낚시를 좋아해 수십 년 동안 전국 구석구석 여행 다니던 짬바가 있어 자칭 인간 네비게이션이다. 또 굉장한 미식가라 털보 삼촌이 데려간 맛집은 맛없던 곳이 없다. 어린 나에게 멕시코 뮤지션인 [카를로스 산타나]를 알려주었던 그 멋쟁이 삼촌이다. 독학으로 깨우친 신디사이저 실력이 수준급이다. 아픈 뒤로는 집에만 계셔서 덕력이 더 늘었을 것 같은데.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까지도 이렇게 아들을 살리신 거다.



#3.


흙수저인 우리 집안에 이렇게나 많은 조문객이 와 주신 것만도, 이게 다 할머니가 살아 생전 쌓으신 덕이고 죽어서도 받으신 인복이다. 장의사가 염을 하고서 엄마에게, 고인이 생전에 복이 많으신 분이라 했다고 했다. 수많은 고인을 모시는 직업이라 시신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연세에 비해 신체가 아주 깨끗하셨다고.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나 멍과 같은 외상이나(나이를 먹을수록 작은 상처도 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병이 있었다면 그런 부위에 남는 특정한 흔적 같은 것들을 의미했을 거라 추측해 본다. 사망 당시에도 평소와 같다가 갑자기 쓰러지신 거였으니 고통없이 가셨을 거라고. 이런 점들이 그쪽의 관점에서는 다 큰 복이라고 했다. 장의사의 이런 언급은 우리에게 뜻밖에 아주 따듯한 위안이 되었다.



#4.


할머니의 장례식에 쌩뚱맞게 도움이 됐던 인물은 새언니였다. 장례 첫날, 남편인 성순이와 ‘내 조카’라는 그 아이와 함께 왔었다고 했다. (나와는 방문 시간이 달라 마주치진 못했고, 친가에서 우리는 종갓집이며, 그렇기에 이름에 돌림자를 쓰는데 하필 ‘순’ 자 돌림이라 장남인 오빠는 성순이가 본명이고 족보상으로는 내 이름도 ‘김지순’으로 올라가 있다. 이름에 관한 썰은 다음에 한 번 풀어 보기로.)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귀했던 회사에서 운 좋게 다른 회사로 더 좋은 조건에 이직했는데, 복지 혜택 중 하나가 장례 물품 지원이었다. 보통은 직계가족의 경우에만 해당되지만 지금의 회사는 상관없이 지원한다고 했다. 해서 장례식장에서 쓰는 여러 가지 일회용품이나 자잘한 물품들을 꽤 많이 보내왔다고. 그것도 당일 특급 배송으로다가. 총 장례 비용에 비하면 물품비가 그렇게 큰 비중이 있지는 않겠지만 무시할 수준은 아닐 거다. 많은 사람이 방문했는데도 종이컵 같은 것들이 남아 맹히씨가 챙겨왔다고 하니 어지간히 많이도 보내온 모양이더라고. 고호맙다 아니, 고맙다.



#5.


겨우 일주일 후, 나는 또 한 번의 장례를 치르게 된다. ‘상황이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좋지 않은 상황의 연속을 겪으며 지쳐있을 때, 빌어먹을 이놈의 인생은 ‘ㅇㅇ 쌉가능’이라고 성의없이 대답한다. 시발꺼 아주 쿨내가 진동을 하네. 그래서 요즘의 테마곡은 비비의 [인생은 나쁜 X]이다. 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다. Jump scare 따위엔 안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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