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남자친구와의 장거리 연애 시절, 그런 적이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몇 주나 몇 달에 한 번씩 겨우 보고 전화 정도나 가끔 하니까 주변에서 정말 남자친구가 있는 게 맞냐며, 없는데 있는 척하는 거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생각해 보니 그럴만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날에도 하루나 이틀 정도만 보니까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기도 아까워서 누구에게 인사를 시켜주거나 소개할 자리를 만든 적도 없다시피 했고, 둘 다 사진 찍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같이 찍은 사진도 연애 초기에 찍었던 겨우 몇 장이 전부다. 또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서로 바빠서 늘 손이 일을 하고 있으니 나도 남친도 폰을 들고 있어야 하는 영상통화보다는 블루투스로 하는 음성통화를 더 선호했다. 여러모로 증거불충분. 그런 면에서 지인된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해 볼 만했을 거다. 실물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그런 유니콘 같은 존재에 대해 들려주는 썰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있을 리가.
그 말을 한 언니야 물론 농담으로 그런 거였지만, 조용한 시간에 나는 혼자 또 요상한 상상을 한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야. 내가 진짜로 있지도 않은 사람을 진짜라고 착각하고 계속 꾸며내고 있는 거라면? 애초에 남자친구는 없었고, 나와 5년간 만났다고 믿고 있던 그 사람이 사실은 나의 외로움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인물이라면? 내가 그저 스토리텔링에 능한 정신병 환자라면? 스스로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과학에서는 어떤 것도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 공동의 약속과도 같다. 거의 100%의 확률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도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라고 표현하는 동시에 그렇지 않을 일말의 가능성에도 여지를 남겨 둔다. 이런 이과적 관점에서는 내가 심각한 정신병자일 확률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거다. 이런 생각 자체로도 뭐 이미 미친 거 아니냐고? 글쎄. 님은 사실 ‘통속의 뇌’일 뿐이고, 님이 읽고 계신 이 글이, 정확히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보이도록(‘본다’고 믿도록) 프로그래밍 된 시뮬레이션인 걸지도 모르잖아. 당신이 사랑하던 당신의 삶이 실은 죄다 구라를 쳐바른 [트루먼 쇼]였다고, 당신은 알고 보니 [사토라레(サトラレ)]였다고 한다면, 에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무슨 근거로? 증명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계속 파고들면 그 길이 바로 미친년이 되는 지름길이겠다. 그럼에도 머릿속 한 켠에 있는 작은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연애 초기 때부터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본 ㅊㄴ나, 실제로 남친과 인사까지 했었던 맹히씨마저도 날 위한 마음에 나의 모든 거짓말에 맞장구를 쳐가며 완벽한 허구를 완성 시켜준 걸지도 모르지. 그는 있으면서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굳이 열어보며 가슴을 쓸어내리기 위해,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카톡을 차단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말 나온 김에 방금 프로필 사진을 확인해 보니 내가 그렇게 반대했던 바이크를 기어코 산 모양이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수상한 전여친으로 보일 걸 알지만, 마음이 남아서가 아니다.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 되긴커녕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오히려 안심되는 걸 보니 그렇다.
나와 나의 사람들이 실존할 가능성이 크다는 근거를 찾는 방법으로는 공통된 추억을 함께 회상하는 것이 있다. 나는 이걸 어제 ㅇㅎ와 대화에서 명확히 느꼈다.
고등학교 친구인 ㅇㅎ와는 2학년 때 딱 한 번 같은 반이었다. 각자의 베프도 따로 있고 서로 어울리는 무리도 달랐다. 그런 것 치고 우리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친밀함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끈이, 느슨하지만 그렇다고 끊어지진 않을 것 같이 연결돼있달까. 하여간 큰 접점이 없이도 묘하게 편하고 죽이 잘 맞았다. 학창 시절 진득하니 붙어 다녔던 친구도 아니었고, 졸업 후에도 동네에서 마주치는 것 말고는 따로 약속을 잡고 만난 적도 별로 없던 것 같은데. 그렇다 보니 둘 사이에 버라이어티한 추억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한 가지 기억 나는 건 둘이서만 갔던 KFC다. 한 달에 딱 한 번 토요일인가,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이 없어 학교가 일찍 끝났던 유일한 날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둘이 KFC에 런치 세트를 먹으러 갔었다. 그 당시 3,900원에 징거 버거와 치킨 한 조각, 음료 하나까지 먹을 수 있었으니까 학생 신분으로는 최고의 식사였다. 조금 아쉽다 싶으면 주머니의 잔돈을 털어 비스킷 하나를 추가하고. 신나게 먹고 수다 떨고 했던 게 너무 재밌어서 우리는 그다음 달의 토요일에도 같은 코스를 함께했고, 또 그다음도 그랬던 게 결국엔 둘 사이의 전통이 됐다.
몇 개의 글에서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를 쓰며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3년의 시간을 통틀어 정말 즐거웠던 기억이라고는 그 기억 하나 남더라고. 그 하나만으로도 고등학생 때의 기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지더라. 고3이 되면서는 그 토요일에도 학교에 남아야 했었으니까 우리가 거길 함께 갔던 게 기껏 해봐야 몇 번 안 될 테지만, 아직도 나에게 KFC는 ㅇㅎ라는 친구 그 자체로 남았고, 아마 ㅇㅎ에게도 똑같이 내가 그랬었나 보다.
오랜 사진 한 장을 계기로 아주 오랜만에 연락해 오래전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나는 또다시 공상에 빠진다.
[쇼생크의 탈출]에서 출소한 레드가 브룩스가 머물던 방을 쓰게 되고, 레드는 멕시코로 떠나기 전 브룩스가 천장 대들보에 새긴 유언을 발견한다.
BROOKS WAS HERE
레드는 브룩스의 글자 옆에 자신의 글자도 남긴다.
SO WAS RED
우리가 늘 앉던 KFC의 테이블에 우린 ‘여기 우리가 있었다’는 보이지 않는 글자들을 새겼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낙서를 발견한 거다. 우리는 우리가 다시 만날 아직 날짜도 없는 그날의 약속에, 장소는 무조건 KFC로 정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우리도 여기 있었다’고 다시 옆에 남기겠지.
ㅇㅎ는, 우리 이제 돈 버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시키자고 했다. 용돈을 아껴가며 그날만 기다렸다가 코 묻은 돈을 탕진했던 우리는 이제 KFC에서 치킨을 버켓으로 시킬 수 있는 존나 멋진 으른이 되었다. 그때처럼 우린 또 그날을 기다린다.
한 달 사이에 고양이 둘과 물고기 하나, 그리고 나의 할머니를 잃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그와 나 단둘만이 기억하는 추억들을 이제는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기억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나를 슬프게 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나 자신 말고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기억을 가진 우리들은 어쩌면 다 미쳤는지도 모르지. 증언을 해 줄 증인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통속의 뇌라면, 임의로 저장된 거짓 데이터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있었다는 것을 내가 기억하기에 그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와 나 사이의 새로운 기억은 안타깝게도 더 이상 생기지 않겠지만 누적된 기억만으로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살아있는 한은 그들은 확실히 있었다. 당신들이 나와의 일들을 기억하는 한 나도 존재 한다. 나는 존재한다.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