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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May 22. 2023

본 게시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30522


책을 잔뜩 사 놓은 거에 비해 읽는 속도가 느려서 읽지 못한 책이 줄을 섰다. 그래도 느린 속도로라도 꾸준히 읽던 적이 있었는데, 한두 달 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은 거의 읽지도 않으면서 내가 쓴 글은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게, 꼭 남의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내 얘기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꼴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책 하나를 꺼내서 읽고 있었는데, 겨우 몇 페이지 보다가 덮고 방금 다시 노트북을 열었으니 나는 또 남의 말을 끊고 내 말을 시작한 꼴이다. 그래도 보던 책이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라는 제목을 단 ‘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도록’ 격려하는 내용의 책이었고, 재미있게도 책의 고작 첫 챕터 만에 정지우 작가의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방금까지 보던, 내가 빈 문서를 열게 만든 내용은 이렇다.


『 글쓰기는 글쓴이의 시선의 힘을 드러내는 일이다. 같은 대상을 응시하더라도 오직 글쓴이만이 지닐 수 있는 시선으로 그 대상을 보듬고, 살려내고, 규정하는 것이 곧 글쓰기다. (중략) 결국 글쓰기는 우리의 고유한 시선을 찾아 나가며, 그 시선 안에 머무르는 일이다. 우리는 시선의 존재가 되기 위해 글을 쓴다.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응시하고, 그 응시의 기록을 남기고자 글을 쓴다. 관념으로 도피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상 곁에 살아있기 위하여 글을 쓴다. 글쓰기는 관념의 유희, 당위의 강요, 기준의 폭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 하는 것이다. 매일 매 순간 살아있다는 것은 나의 시선이 나만의 것으로 생생하게 유지된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은 곧 가장 생생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


가장 최근에 쓴 존재와 기억에 관한 그 글과 닿아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근자에 내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님으로부터 ‘바빠도 글을 자주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듣고서 그러겠노라고 대답한 터라 이렇게 실행에 옮겼다. 나만이 가진 시선의 힘으로 생생하게 ‘존재’하기 위해서.


글쓰기를 독려하는 저런 내용의 책을 몇 권 가지고 있다. 글을 쓰고는 싶은데 방법을 몰라 좀처럼 써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같은 책들이다. 사실 내가 ‘글을 쓰고는 싶은데 방법을 몰라 좀처럼 써지지 않아서’ 저런 책들을 샀던 건 아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을 때, 방법은 뭐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건 됐고 그냥 써지는 대로 갈겼다. 다행히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다지 없는 성향이고, 그래서 보통 가장 어려워하는 ‘첫 문장 쓰기’를 별 고민 없이 일단 아무렇게나 냅다 적고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생각이 말하는 대로 받아적기만 했고, 다시 읽었을 때 어색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당연히 어색하고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에 고쳤다. 그렇게 몇 달간 해 온 게 현재는 80개가 넘는 파일이 쌓였고, 어쨌든 꾸준히 하다 보니 처음보다는 읽을 만해졌다. 단순 무식함의 승리. 겁 없는 행동력에 더해 반복적인 시간 소요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면 딱히 필요로 하는 것도 없고 봐야 할 목적도 없는 저런 책들은 왜 샀을까. 아마 읽은 것도 극히 적고 쓰는 걸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니, 뭣도 모르고 야매로 시작한 내 이런 방식이 맞기는 한 방법인지, 아니 혹시 틀리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러워 검토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 지금처럼 스스로가 쓴 글에서 점점 클리셰가 보인다거나, 후진 어휘력 탓에 유독 자주 사용하는 특정 단어와 한정된 표현의 반복으로 새로 쓴 따끈한 글도 이미 읽어본 글처럼 진부하게 느껴질 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비루한 밑천이 드러났을 때.


그나마 소재가 떨어지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운이 좋게 하루에도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풍부히 생긴다. 이건 오히려 나의 쓰는 속도가 글감의 개수를 차마 못 따라갈 정도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나 많이도 쓰고 싶을 만큼 얼마나 세상은 요지경인가. 메모장에 적어둔 나의 ‘시선의 대상’만 한가득이다.


예를 들면, 젊고 허우대가 멀쩡한데도 나라에서 주는 무직자 생계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 어떠한 일도 절대로 하지 않는 동네의 오랜 백수부터, 장사가 안된 것이 아니라 너무 잘 돼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던 어떤 가게, 식물은 사랑하나 동물은 싫어해서 마당의 가드닝을 망치는 옆집 개를 처단하겠다고 쥐약을 놓는다는 사람, 자기 남편도 서비스직이면서 본인이 연봉 빵빵한 대기업 직원이라는 이유로 그 콧대 높으신 자존심에 어느 상점엘 가도 직원을 무시하는 여자, 우리에겐 그저 똑같은 손님일 뿐인데 혼자 친하다고 착각하고서 우리 가게의 모든 직원에게 한 장 한 장 청첩장을 돌리던 단골 언니, 지나친 오지랖으로 손님과 또 다른 손님의 맞선을 중개해 결국 양쪽 손님 모두를 잃은 어느 밥집, 남의 집 딸내미 연애사에 주제넘은 코치를 해준답시고 그렇게도 참견하더니 정작 본인 딸은 술김에 어린 남자와 사고 쳐서 만삭인 채로 드레스 입혀 급히 시집보냈던 아줌마,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웃고 뒤돌면 그 사람 욕을 하는 어느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과 그 부부 앞에서는 웃고 퇴근하면 부부를 욕하던 그 식당의 직원, 로또 1등에 당첨된 어느 배달 집의 배달부가 오래 일해오던 그곳을 그만두며 사장 가족에게 그동안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만 원씩 선물했다는 훈훈한 썰,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자신의 가게에서 스스로 목메고 자살한 가엾은 남자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 자리에 야심 차게 세 들어 왔다가 결국엔 망해서 접은 억울한 여자, 어지간히도 꼬인 성격 때문에 온 동네 사람마다 시비를 걸고 다니는 인간 시한폭탄이 의외로 독서가 취미에다 하필이면 인문학을 가장 좋아한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 온갖 자잘한 불법적인 행위도 티 나지 않게 몰래 저지르고 다니는 인간이 알고 보니 대학 시절 법학을 전공했다는 웃기지도 않는 썰, 폐지를 줍다가 우연히 발견한 300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의 주인을 끝내 찾아 주고서 고귀한 양심을 지켰던 리어카 아저씨, 과거엔 유명했던 원숙한 어느 여배우가 산책하다 잃어버렸던 개를 어쩌다 보니 우리가 찾아줬던 일, 딸을 성추행한 놈인 걸 알고도 딸의 처신을 탓하며 오히려 그놈과는 형님 동생 하면서 밥 먹는 사이로 지낸 형편없는 아버지,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1년에 꼬박 천만 원씩 모은 알뜰한 알바생 등, 당장 생각나는 것만 적어도 여기까지.


이토록 흥미진진한 실화들을 자연스레 풀어나갈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내가 흘러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기억하고 있고, 그것들을 써서 기록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양한 일들을 겪고 재미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가지만, 그 모든 사람이 다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까.


『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시간, 자극을 통해 사라지거나, 단순하게 처리되며 정의되는 대상, 쉽게 규정하고 재생산되는 언어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 모든 것을 멈춘 채 바라보며 대상 이면, 인간 이면의 풍요로움을 발견해 가는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 이롭다. 그는 더 큰 인간을, 더 큰 세상을 탄생시킨다. (중략) 그가 발굴해 낼 것 중에서는, 그가 아니었으면 결코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 그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다. 』


해서 이 부분을 읽으며 조금은 용기를 갖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정말 내가 쓰지 않았다면 아무도 들을 수 없던 이야기들을 써내려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의 역할에 꼴값잖은 사명감과 동시에 좆만한 자부심을 갖고서, 나도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 이로운’ 사람 중 한 명이고 싶어졌다.


장사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뜻밖에도 글을 쓰는 데에 많은 영감을 얻은 건 사실이지만 이러한 인풋은 내가 만들어 가기 나름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새로이 쓰고픈 대상이 끊이지 않는 이런 직업을 가졌다 해서 꼭 유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향신료를 넣어 자극적인 맛의 음식을 뚝딱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흔하고 단출한 구성의 재료만으로 담백하고도 깊은 맛을 내는 요리사가 있는 것처럼. 작고 사소한 것도 확장하여 느끼고, 지나칠 만한 것도 멈춰서 살펴보며,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담백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숙성시켜 식탁 위에 보기 좋게 내는 것이 숙제다. (솔직히 즉석식품 대충 돌려서 님들 이것 좀 드셔보라고 한 적도 꽤 많았던 듯.)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다시 어떤 걸로 내 보일. 매사에 대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렇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고, 나도 그런 사람이란 걸 알았다. 글을 더 자주 썼으면 좋겠다는 그 작가님의 말씀이 어떤 뜻이었는지 알 것 같다. 써야만 하는 나를 받아들이고, 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견디면 된다.

쓰다가 막힌 글 하나를 한참 동안 붙들고 있다가 내려놓고서 다른 거라도 먼저 쓰기 시작했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되었다. 그렇게라도 꾸준히 쓰련다. 사는 것도 그렇게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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