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너를 만나러 갈게...

손 끝으로 여는 작은 세상

by 임그린


지금은 초등학교가 되어 버린 국민학교 시절, 일기는 매일 검사받아야 하는 숙제였다. 다 읽고 나서 보라색으로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 주시는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 가끔은 꾸며내기도 했다. 했지만 별 거 아닌 일을 과장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하면 좋았을 일 따위를 마치 내가 한 일인 양 적어 내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참 잘했어요, 도장 아래로 빨간펜의 선생님 칭찬이 가득했다. 그저 도장만 쾅 찍힌 친구들의 일기장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렇게 바보 같은 일이 또 있을까. 헌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칭찬 한가득 받을, 하지도 않은 일을 적어두고 나면 그걸 보상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 움직이게 했던 것 같다. 일기장에 써 둔 대로, 혹은 그와 비슷하게 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좀 더 착하게 굴고 좀 더 괜찮은 모습이 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한다. 마치 결심 후에 실행하는 것처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일기장에 그려둔 모습이 진정 '나'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루고 나면 빨간펜의 칭찬 앞에 떳떳했다.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더는 받지 않아도 되고, 내 발자취를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지만. 일기를 쓰는 건 습관이 됐다. 지금은 거짓으로 하지 않은 일을 꾸며대지 않는다.

하지만... 했지만 부끄러운 일이라든가, 해 놓고 가슴 아픈 기억이라도 생기게 되면 당장 적어낼 수가 없다.


매년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면 맘에 드는 1년 간의 친구를 찾기 위해 공을 들인다. 그리곤 약속 하나를 한다, '매일 너를 만나러 올게'.

잘 지켜지지 않지만. 당장 적어낼 수 없는 일들이 쌓이면, 약속을 지키기란 더 어려워진다. 사실, 일기란 사사로운 글이기에 누가 보게 될까,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게 맞는데 그런 일들은 당장 쓰기 껄끄럽다고 해야 하나... '진정한' 나 자신 말고, 날 '보아주는' 내게도 거리낌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글을 쓸 수가 있다. 그러려면 며칠 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픈 기억은 어느 정도 치유가 되어야 펜을 잡을 수가 있고, 부끄러운 기억은 시간이 흘러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시간들을 내게 주고 나서 기억을 끄집어 내고 적어 버리면 그제야 후련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일기'라는 친구가 내겐 참 좋은 양심의 나침반이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그 친구와 '보아주는' 나에게 당당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후회 게이지가 높아지면 그만큼 좌절의 깊이도 깊어지지만, 뜻밖의 뿌듯함이 쌓이면 용서가 가능해지기도 하니까 그렇게 균형을 잡으면서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 내가 몇십 년 동안 일기라는 친구와 함께하게 될지 모르지만, 얻어서 행복하고 고마운, 정말 좋은 친구라는 건 변치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난, '당장' 그 친구와 만나기 위해 내 앞에 놓인 인생이라는 길을 조심히 걸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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