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

손 끝으로 여는 작은 세상

by 임그린


극장엘 갔다. 두 팔 가득 팝콘과 콜라를 들고 상영관을 찾는데, 발이 데려다 놓은 곳은 화장실 앞. 순간 훅 올라오는 뜨거운 부끄러움. 아무렇지 않은 척.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그곳이었다, 거짓 표정을 짓는다. 속에선 당혹감과 창피함이 만나 파티가 열린다, 화려하게.


즐겁게 영화를 보고 터지는 감정을 살짝만 내보인 후 발길을 돌린다. 무리 속에 섞여 나갔어야 하는데, 눈물을 찍어내느라 그러지 못했다. 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이곳은 어디인가, 다시 보이는 좌석들. 고개가 갸우뚱. 4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서 3관으로 들어가 버린 발, 하아. 극장무한지옥. 빠져나갈 수 없는 건가.


툭하면 길을 잃는다. 복잡한 건물들 사이에서 꼬불거리는 길을 헤쳐 나가야 했던 거냐고? 아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카페 안에서 출입문을 찾지 못해 헤매기도 하고, 어느 백화점 주차장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이만하면 답답해질 만도 하다. 이건 내 이야기이다.

이렇게나 부족한 내 능력(?)에 지인들은 답답한 눈길을 보내기도,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한다. 정작 나는, 사실 아무렇지 않다. 길을 잃고 이곳저것 기웃거리는 시간이, 그때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 으레 그러려니 해서 나는 약속시간 보다 항상 조금 빨리 나간다. 헤매기는 해도 그로인해 늦지는 않는다.


내 발과 내 눈이 만나는 세상은, 같은 장소 다른 느낌-항상, 아니면 거의 매번 새롭다. 그렇게 부족한 내 능력이 좋다. 같은 곳을 보아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로인해 내 감정은 더욱 풍부해지니까. 물론 집중하지 못해서라는 걸 안다. 핀잔을 얻어맞고 얼얼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거다, 내가 보고픈 것만 보는 세상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삶을 살아내기 위해선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내게 가끔 그런 내 맘대로의 세상을 선물한다. 아무도 주지 않고, 멋대로 줄 수도 없고, 줘도 받지 못하며, 받아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이 천지인데. 나는 그 새로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길치, 운치가 있는 단어이다. 길을 찾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새롭게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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