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alia Branch & Exeter branch Library
7월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회사가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게 되면서 매일 짐을 싸고 옮기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흘러갔다. 뜨겁게 내리쬐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어김없이 우리의 피부를 검게 그리고 벌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끝이 안 보이는 제품 박스들을 하루에도 몇십 개씩 옮기며 일하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저러다 정말 쓰러지는 건 아닐까 싶어 나는 내내 노심초사했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엘리에게 여행을 가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어느새 여름방학도 끝자락이 보이는데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하루라도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개학까지 딱 일주일을 남긴 시점에서, 우리는 마침내 이사를 마무리하고 드디어 2박 3일간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더 멀리, 더 오래 떠나고 싶었지만 회사 일, 그리고 교회 반주 사역 때문에 금, 토, 일에는 휴가를 쓸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딱 2박 3일이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첫 장거리 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여행 목적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들이 있다는 *세쿼이아 국립공원(Sequoia National Park)* 이었다. 4시간 정도 거리이기에 2박 3일 일정으로 충분히 다녀올 수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라는 타이틀을 가진 곳이라 남편은 이곳을 꼭 가보고 싶어 했다.
드디어 여행 첫날이 되었다. 엘리는 처음 떠나는 장거리 여행에 여행 가방을 싸는 것부터 설렘이 가득했다. 큰 건물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LA 다운타운을 지나 한참을 더 달리니, 끝이 보이지 않는 과수원길이 펼쳐졌다. 그 길을 따라 또 한참을 달리자 어느새 Visalia라는 도시가 나왔다. 첫날의 여정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긴 드라이브로 밀려온 피로와 멀미를 해소해야 했다. 잠시 쉬었다가 Visalia 에서 방문하려고 구글맵에 저장해둔 도서관 주소를 다시 살펴봤다. 자동차로 10분 거리, 꽤 가까운 곳이었다. 혹시나 해서 사진과 리뷰를 확인해보니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이 도서관은 꽤 흥미로운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1904년,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1만 불을 기부해 설립한 유서 깊은 장소로, 오랜 세월 지역 주민들의 지식과 문화를 지켜온 보물 같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리뷰에는 최근 급격하게 늘어난 홈리스들이 이 공간을 쉼터 삼으면서 일반 이용객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있다는 불만이 많았다.
LA도 아닌데 설마 홈리스가 그렇게 많을까 의아했지만, 그래도 정한 곳이니 우리는 그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렌지 카운티에서 느끼던 한산함보다 더 조용한 분위기의 도시였다. 길거리에는 사람도 차도 거의 없고, 오래된 건물들만 보여 도시 전체가 썰렁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도심 안으로 들어섰고,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공공도서관답게 제법 큰 건물이었고, 현재의 건물은 1936년 공공사업으로 확장되었으며 2008년에는 아동 열람실을 포함한 리모델링도 완료되었다고 한다.
도서관 앞에 주차하고 내려서니 작은 공원 벤치와 잔디밭, 문 앞까지도 홈리스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산했던 도시와는 달리 도서관 앞은 북적이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문 앞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불쾌한 찌린내가 진동을 했다. “아… 리뷰가 안 좋았던 이유가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단번에 들었다.
도서관 안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장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는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아동 열람실로 들어섰다. 꽤 넓은 공간이었지만, 역시 오래된 책과 카펫 냄새, 그리고 먼지가 날리는 곳이었다.
그래도 엘리는 신나게 그 공간 안으로 뛰어들었다. 한쪽에는 할머니와 손자가 책을 읽고 있었고, 한 명의 사서가 그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엘리는 사서에게 다가가 색칠 도구를 받아와 테이블에 앉아 색칠을 시작했다.
나는 요즘 엘리가 책을 좀 더 재밌게, 특별하게 고를 수 있도록 상상 속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다. 도서관 책들이 엘리가 오면 “얘들아, 엘리가 왔대! 엘리가 나를 골라주면 좋겠다~ 제발~” 하고 속삭이고, 그날 밤 도서관 문이 닫히면 책들이 깨어나 서로 “엘리가 오늘 나 골라줬어!” 하고 자랑하며 부러워한다는 이야기. 엘리는 이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언젠가는 자기도 꼭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참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엘리는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순간을 더 즐기게 되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집어 든 책이 행복의 소리를 지른다고 상상하며 책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참 색칠 놀이를 마친 뒤, 우리는 책을 골라 읽었다. 그날 엘리가 고른 책은 Yuki Ainoya 작가의 그림책이었다. 토끼 탈을 쓴 남자아이가 등장하는 수채화 느낌 가득한 사랑스러운 책이었다. 우리는 그 책에 빠져들어 즐겁게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서관 전체에 사이렌이 울렸다.
"긴급 상황입니다. 모두 즉시 밖으로 대피해 주세요!"
이런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놀란 엘리는 눈이 동그래져 내 손을 꽉 잡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에는 우리처럼 당황한 얼굴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서 있었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우리는 이곳에 더 머무르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근처에 또 다른 도서관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 역시 앤드류 카네기의 기금으로 세워진 도서관이었다. 실제로 이 근방에는 카네기가 설립한 목재 도서관들이 몇 곳 더 있었지만, 한 곳은 임시 휴업, 다른 한 곳은 휴무였다. 그런데 이렇게 또 하나의 카네기 도서관을 찾게 된 것이다.
예상치 못한 긴급 대피 상황 덕분에 오히려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다.
우리는 다시 10분을 더 달려 Exeter라는 도시로 향했다. 스퀘이아 국립공원이 보이는 방향이었다. 과수원 길을 따라 달리던 중 ‘1911년 도시 설립’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우리가 가는 도서관은 1916년, Exeter Public Library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현재는 Tulare County Library의 지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당시 카네기가 기금 5,000불을 후원한 도서관이었다.
현재는 새로 지은 건물이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고, 본래의 카네기 도서관 건물은 커뮤니티 센터로 쓰이고 있었다. 작고 아담했지만 직원들은 반갑게 인사해 주었고, 동네 할머니들이 북클럽을 하고 있었다. 비록 크진 않지만,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이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랜 시간 사랑받아 왔는지 느껴졌다.
책이란 게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 세대를 잇는 징검다리라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나는 도서관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걸 참 좋아한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 사서들의 아이디어와 손때가 묻은 코너들을 둘러보는 건 늘 새로운 즐거움이다. 우리는 작은 도서관을 꼼꼼히 둘러보며 잠시나마 참 좋은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밖으로 나가 예전 카네기 도서관 건물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 건물 앞에 홀로 서 있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 이 도서관을 드나들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 함께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까진 몰랐다.
고작 2박 3일의 짧은 여행 동안, 우리가 무려 7곳의 특별한 도서관을 원정하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