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의 인생 이야기이다. 어부가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늙고 초라한 어부를 사람들은 ‘살라오’라고 놀리며 운이 다했다 한다. 하지만 노인은 밤마다 해변의 사자 꿈을 꾸며 자신의 신기루를 찾아 새벽에 눈을 떠 바다에 배를 띄운다. 세상 외롭고 초라한 노인의 한낱 오기는 아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남아있지 않은 노인에게 날마다 커피를 가져다주며 허상 같은 노인의 대화를 들어주는 소년 마놀린이 없다면 산티아고 노인은 한낱 미련에 사로잡혀 있는 주름진 늙은이로 굳어져 잊혀졌을 것이다.
소년은 5살 때부터 노인과 고깃배를 탔고 이제 노인과 40일 동안 배에 탔으나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때문에 소년은 아버지에 의해 다른 고깃배를 타야 했지만 혼자 남은 노인을 안타까워하며 부지런히 그의 끼니를 챙기고 있었다. 소년의 마음속에는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 가는 노인이 그저 애처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기잡이 사수를 존중하며 그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며 그의 기술과 배포가 아직 살아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듯 그의 운이 다 한 것이라 여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노인의 돛은 여기저기 밀가루 부대 조각으로 기워져 있었다. 돛대를 높이 펼쳐 올리면 마치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보였다. 돛의 비천한 모습은 노인의 지금 모습처럼 초라하나 이 같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쇠락을 두고 한 생의 찬란했던 영광마저 물거품처럼 잊어버린다면 모든 인간은 산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또한 젊음만이 최선이라 여겨 나이 듦을 거부했을 것이다. 불로초를 찾았던 이들처럼. 그러나 인생은 반드시 젊기에 화려한 것은 아니며 불꽃같은 시절은 한때라도 그로 인해 남은 자취가 아름다워야 완성되는 것이다.
노인은 세월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나이 들었고 이미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냈으며 인간의 애착마저 서서히 털어내고 있었다. 노인의 손에 남은 거친 상처는 평생을 고기 밧줄을 다루다가 생겼다지만 사막의 침식지 만큼이나 오랜 세월 인간의 계곡을 넘나든 흔적이었다. 누군가는 가슴속에 깊이 저장해 놓았을 상처를 그는 고스란히 손에 남겨두고 있다. 이 손을 바라보는 누군가는 노인을 위해 울고 노인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전수할 것이다. 삶의 지혜를 유전하며 마지막 손을 털 때 죽어도 죽지 않는 만물 유전을 이행하는 관계로 이어질 것이다. 아직은 노인의 두 눈이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고 지치지 않았으므로,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기에 그의 기회를 기다려 주는 것이 존재에 대한 예의이다. 소년은 가장 적절한 자리에서 그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소년은 노인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고 헛소리일망정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맞장구쳐주었다. 노인의 포부를 꺾지 않는 소년은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노인의 고기잡이 기술을 존중하는 누군가의 기대가 노인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는 것을 아는 아이였다니 놀라운 지혜였다.
“고맙구나, 넌 나를 기쁘게 해 주는구나. 너무 큰 고기가 결려서 우리 생각이 틀리다는 게 입증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노인은 자신을 최고의 어부라 말하는 소년에게 사실은 힘이 빠지고 쇠약하다는 것을 감추고 싶은 자존심이었을까. 다들 무시하는 자신의 배짱과 요령을 존중해주는 이가 있으니 모든 것을 잃었어도 중요한 것 하나는 얻은 노인의 인생은 흡족하지 않을까.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르는 노인의 처지. 이제 그의 뇌리마저 생의 애착은 사라지고 희미한 기억의 재현으로 신나게 해변을 뒹구는 사자만이 지구와의 멀어짐을 고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남은 육체와 위신은 아직 노인에게 힘을 부여하며, 기를 쓰고 바다에 나갈 수 있게 한다. 이게 모든 지구 인간의 궁극의 삶이 아닌가.
다음 날 새벽 노인은 소년이 가져다준 정어리와 신문지에 싼 미끼 두 뭉치를 가지고 바다로 나간다. 굵은 낚싯줄을 바다에 부리며 노인은 생각한다. 새들은 우리 인간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사는구나. 바다가 이렇게 잔혹할 수도 있는데 왜 제비갈매기처럼 연약하고 가냘픈 새를 만들어 냈을까? 곧 독수리 떼의 습격이 올지라도 무한한 바다를 날고 날아 먹이를 찾는 고단한 날개를 접고, 잠시 노인의 조각배에 쉬어가는 작은 새를 보며 노인은 자기의 모습을 투영한다. 지상의 모든 피조물의 소멸과 나약함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노인은 아구아말라, 즉 해파리의 무지갯빛 거품을 보며 아름답다고 여겼지만 이미 그 거품이 바다에서 가장 허황되기 짝이 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독기로 고통을 주는 삶을 겪은 노인은 무지갯빛 아름다움에 속지 않겠지만 해파리가 남기는 고통을 맛보지 못한 이들은 허세의 바다에 뛰어들 것이다. 오래 산다는 바다거북은 이 해파리를 먹어치우며 얼마나 덤덤하게 바다를 얕보는가. 하지만 인간들이 난도질하는 장수거북의 심장이 몇 시간이나 살아 고동칠 때의 비극을 거북은 몰랐을 것이다. 노인은 젊은 시절 거북 낚시로 바라보았던 먹잇감의 최후를 어쩌면 지금에야 자신의 심장이 뛰는 모습도 그와 같을 것이라 깨닫지 않았을까. 그때는 그들의 싱싱함을 몰랐고 나이 들며 혼자 조각배에 남겨진 지금 그들에게 취했던 에너지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아가며 미안함과 살아야 했던 이유를 받아들이는 중이다. 이 망망대해에 낚싯줄을 드리운 어부 노인이 기력을 돋우기 위해 평소 바다거북의 흰 알을 먹어 치웠고 상어의 간유도 마셨으나 점점 노쇠해지고 힘이 빠지는 것은 고동치는 바다거북의 심장이 소멸해가며 남기는 메시지임을 이제는 보이는가.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날들을 퍼덕거리며 사는 것이 이미 소멸해가는 불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살아가는 중이라는 신호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노인은 그 길에 서서 생의 미련을 하나씩 내려놓고 삶이 다하는 시간까지 자신의 못다 이룬 배포와 기술을 어떻게든 부려 그 정체성을 영원히 향유하려는 이승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언젠가 지구 인간이라면 거쳐 갈 모습을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어 엄숙하기도 하다. 이를 부정하고 망각과 쇠락을 넘어설 자 있을까.
드디어 노인의 미끼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청새치가 걸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행운이란 게 청새치와의 신경전을 펴는 노인의 기술이고 먼바다로 나가 때를 기다리는 것이 노인의 배포라면 이제 자신이 설계한 인생의 마지막 장을 한껏 펼칠 때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삶이 알려준 것처럼 운이 왔다고 쉽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보란 듯이 청새치와 치열한 싸움을 하며 빠르게 빼 달아 나가는 거센 낚싯줄에 손이 파이고 쥐가 나고 다리가 저리며.. 발을 동동 구르며 아찔한 정신을 가다듬는 시간 동안 기력이 약한 노인은 철저히 혼자였다. 자신이 설계한 인생을 거머쥘 만큼 여력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잠시 소년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나 현실은 이런 기막힌 시간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흠, 죽어도 너를 놓지 않으리라.’는 집념, 평생을 몸이 굵어온 바다, 여기에서 내가 흔들리랴! 아, 처절하다. 그 순간이 올까 봐 두렵다. 그런데 나이 듦이란 이런 무게가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니 때가 되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아닐까.
바다라는 지구의 광활한 공간에 인간이라는 도전자의 낚싯대는 거센 입질에 쉽게 부러지고 바다로 끌려들어 간다. 때로는 스스로를 버려야 사는 수도 있다. 커다란 행운 하나를 위해 다른 낚싯줄은 끊어진다. 3일간을 거대 청새치와 싸우며 가진 힘은 작은 조각배와 피 흘리는 손바닥뿐인 노인은 앞이 보이지도 않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날 생선을 베어 먹으며 자꾸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젊음의 한 때를 회상하는 것은 그때의 힘이라도 소환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으리라. 인생의 선물인 청새치와의 싸움에서 드디어 적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경지에 오르지만 그 친구에게 작살을 꽂아야 하는 순간 약육강식의 승기는 노인에게 온 듯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를 위한 작살 꽂기로 흘린 피 냄새 때문에 몰려드는 상어 떼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은 배에 매달린 청새치를 거침없이 물어뜯는다. 인생 최대의 수확 앞에 그 행운을 잃을 수 없는 노인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상어 떼를 물리치지만 청새치의 몸뚱이는 살쩜이 다 날아갔다. 거듭 되는 상어 떼의 습격에 행운을 지키지 못해 결국은 울며 좌절하는 노인에게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본다. 허무하다 못해 무기력에 빠져든다. 그러나 노인은 죽지 않았다.
하바나 항의 불빛만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염원으로 육지에 도착한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만선의 물고기를 들쳐 매는 게 아니라 조각배의 돛을 떼어 다시 어깨에 걸친다. 빈 생선가시를 매달고 온 영웅은 누구의 우상이 될 수 있을까. 그나마 청새치의 흔적만이라도 가늠할 수 있는 거대 생선가시의 존재를 바라보는 항구의 사람들은 그의 운이 다한 건 아니었다는 말로 노인을 위로할 수 있을까. 지쳐 쓰러져 잠든 노인의 머리 위로 쳐든 두 손바닥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야 하는 것은 소년만이 아니어야 한다.
무언가를 기를 쓰고 열심히 해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노인의 깊이 파인 손바닥의 핏길 계곡과 그 각인된 상처의 의미를 아는 눈을 지녀야 한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의 이야기에서 벙어리 누이는 멀끔한 신사로 찾아온 악마의 희고 깨끗한 손바닥을 보며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노인의 손에서 찾는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생겨난 시대이다. 청춘이던 때 좌절 없이 기성세대가 된 이가 있다면 그는 지금의 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을까. 좌절 없이 노인이 된 사람은 그저 어린 사람들이 안타까워 희망고문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 생애가 아프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 아프지 않은 때가 없다. 산티아고 노인이 다시 바다에 나간다고 소년과 배를 타고 나간 들 그것이 다시 거대 물고기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살아있기에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가시만 남은 청새치를 끌고 와서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는가? 자신을 들여다보자. 고기를 잡아봤어야 허무가 무엇인지도 알 것이다. 과연 얼마나 많이 바다에 나갔고 청새치를 만나 사투를 벌여봤던가. 상어 떼처럼 물어뜯다가 지친 걸 노력했다고 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