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공진단 드셨어요?

11월 가족소설-무

by writernoh

1.

흐린 가운데 푸른 하늘을 보았다.

한 달 만에 병원을 찾았을 때 다시 당화혈색소가 높아져있었다. 의사는 다시 초록색 반쪽 짜리 알약을 추가 처방했고 더 이상 보험 수가를 넘기지 말자고 했다.


집에 오자마자 새 약을 먹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있는 한 착실한 환자였기에 다시 깜빡하기 전에 약을 먹어야 했다.


저녁이 되자 몸이 무거웠다. 붕뜨고 어질어질한 것이 약기운에 밀리는 모양새이다. 퇴근한 남편에게 무채를 썰어달라 부탁했다. 저녁 메뉴는 야채김밥을 만들 것인데, 시골서 가져온 무를 나물 무쳐 하얀 숙채로 얹어 먹게 할 생각이었다. 작고 귀여운 무들이 제법 달고 맛났다.


이럴 때 바로 전화를 해서

"무가 너무 예뻐요!"

하고 말할 수 있는 사이면 좋으련만, 이미 나의 고부관계는 끝이 난 것 같다.

무거운 마음만큼 하늘빛도 내내 흐리다. 온종일 재택으로 일을 해야 하는 나는 운동부족일 수밖에 없다. 가족이 돌아오기 전 내 일은 접어 놓아야 하기에 생각이 풀리지 않는 날이면 저녁 준비를 놓친다. 그나마 오늘은 식구들 귀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를 마감할 수 있어 돌아온 남편과 함께 저녁 준비할 수 있다. 남편이 얼른 손 씻고 도와준단다. 게다가 신선한 무도 잔뜩 있으니! 장 보지 않아도 된다. 있는 재료 레시피로 준비하면 된다.


어제 오이 사 온 것도 아사삭 맛이 좋았다. 요정도야 하며 하나를 채 썰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오이값마저 비싸서 주저주저했던 것이 날이 추워지는데 오히려 값이 내려가 1,900원에 다섯 개라니! 집에 무가 잔뜩 있어도 오이를 집었다.

냉동실에 잡채용 등심 사놓은 것을 아까 꺼내놓았는데 이제 다 녹아간다. 붉은 물이 생긴다. 그걸 녹여 후추를 뿌리며 볶을 생각에 어서 무가 준비되기를 바랐다. 무는 내 손의 악력이 감당할 것이 못된다. 무즙이 조금 남아 있는 채로 돼지고기를 볶으면 기름을 넣지 않아도 타지 않을 거고 무향으로 잡내도 없앨 생각이었다. 그래서 얼른 채 썬 무가 필요했는데, 식탁에 밀다만 채칼만 놓인 채 남편이 없다. 거실에 가 있다.


"거기서 뭐해? 손 다쳤어?"

남편은 약상자에 가서 밴드를 찾고 있었다.

모처럼 시켰더니 자기 손부터...

"칼날에 손톱이 들렸어."

나는 이제부터는 좀 부드러워지기로 했기에,

"그래 괜찮아?"

하면서 직접 채칼로 무채를 내기 시작했다. 손목이 으스러진다. 엄지손가락은 물론 손마디 마디마다 욱신거린다. 이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난 1년간의 문제이다. 이전부터도 뼈가 아파 왜 이러나 싶었으나 작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통증이 진화해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정형외과의도 처음 본다는 MRI속 손목의 물혹들, 너덜거렸던 흔적이 있는 인대. 대학병원까지 갔으나 의사는 약 먹으며 두고 보자만 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이 내 오른팔을 밟고 지나간 듯, 손목의 통증은 내 삶에 착달라붙어 기생하고 있었다. 하여 간신히 최소한의 일처리만 하며 눈치 보며 다스리고 있던 것이다.


남편이 제일 먼저 도착해야 하는 무채를 멈추자, 급한 마음에 왼손으로 무를 잡고 미는데, 무 조각들이 많이 튀었다. 가슴에 파편처럼 식탁 주변에 허옇게 거친 눈이 내렸다. 채칼 날이 이다지도 무딘가. 연속적인 채칼 위에 무덩어리를 고집스럽게 붙들다가 고갱이 속박지만 남기고 얼른 프라이팬으로! 괜히 도와달랬어.


큰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야채들과 특별히 거기 무나물을 놓고 종지에 간장과 겨자를 풀었다.

진짜로 지난번 밖에서 먹은 충무김밥 보다 맛이 좋았다. 믿거나말거나 이걸 무 김밥이라 해야 할까!

삶은 무는 절대로 먹지 않겠다던 아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저녁을 마치고 설거지는 남편이 했다. 당연한 상황이었으나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묵묵히 고무장갑을 끼어주니 사랑스럽다.


그러면서 내 손목은 후끈후끈 조용히 통증을 견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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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공진단 드셨어요?"

문자를 보냈으나 답이 없다.

지난주 김장에 가지 않은 게 화근이다. 늘 화를 달고 사시는 분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전화 통화를 하다가도 끊어 버리셨다. 허탈함과 함께 상처가 남았다.


"여보, 어머니는 나 그날 일하는 거 모르셔? 게다 손목 아픈 거 몰라?"


남편은 말을 하지도 않았단다. 내 상황을 말하면 나쁘게만 생각하셔서 아예 토요일에 일을 하는 것조차 말하지 않았단다. 심지어 손목을 못쓰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으면서 내게 화를 내고 계신 것이었다. 남편 말이 어머니 마음이 굳었단다. 아! 이제는 내쪽에서도 마음 정리를 하고 싶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내 입장은 배려하지 않으셨어. 우리 신혼여행 다녀온 날부터."


또또 감정 쓰나미가 밀려온다. 그리고 당신도 서운하다. 처음부터 며느리는 발언권도 없었으나 아직도 사오정처럼 귀를 닫는 어머니. 내가 온종일 일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합리적인 대화보다는 무조건 몸으로 때우고 언제나 난 제외되고 그걸 제삼자인 듯 모른 척하는 남편. 이젠 불편한 감정을 잊으려 했으나 변하지 않는 관계로 내 하늘은 우울했고, 이제 나도 지쳤다고 선언하고 마음을 굳히고 싶었다.



그래서 더 희뿌연 잿빛 하늘이었는데, 문뜩 오늘 아침 수도국산 숲 속에 오니 하늘이 푸르다. 다행이다. 아직 숨을 쉬겠다.


언제고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아직 언제일지 모르나 지금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이정순 여사의 무 이야기를 쓰는 것 같다.



이정순 여사가 아직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1960년 대 말 20대에 그녀는 인천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큰딸이라는 이유이기도 했으나 생활력 강한 집안 내력으로 당장 손에 쥘 현금이 필요했기에 인천에 있는 양말공장에 취직해 여공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월 월급의 대부분은 강화에 있는 친정어머니에게로 보내졌고 어머니 박옥분 여사는 꼬박꼬박 큰딸이 애처롭고 미안하면서도 그 돈으로 살림에 보태고, 돈을 묶어 집 앞에 땅을 조금씩 늘려갔다.

박옥분 여사가 처음 이 집에 시집왔을 때가 17세. 그때 방칸은 두 개이나 숟가락이며 밥그릇도 식구 수 대로 없는 집이었다.

해서 옥분 여사는 밭일을 하러 다니며 틈틈이 앞집 땅을 마음에 두었고, 어느 날 집에 방을 내자는 시아버지 말씀에 용기를 내었다.

"아버님, 그러지 말고 앞집을 사시지요. 제가 돈을 융통하겠시다.""

가만 생각하니 터도 좁은 집이라 시어른은

"네 말이 옳다."

허락을 했고 며느리 옥분 여사는 친정 언니며 아는 대로 돈을 융통해 내놓은 앞집을 샀다. 그렇게 땅을 넓히니 옥분 여사는 그 재미로 밭일을 할 때마다 돈을 따로 만들어 놓아 아들이 태어났을 때 또 땅 한 마지기를 샀다. 그렇게 4남 2녀가 태어날 때마다 일단 밭부터 늘려가니 땅값으로 얻은 빚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식들이 자라자 그 땅에서 소출을 내고 위로 아들 둘은 농사꾼이 되었다. 큰 딸 정순 씨에게는 국민학교만 다니게 하고 더 공부를 시킬 수 없었다. 땅값을 갚아야 했으니!

정순 씨도 그런 사정대로 농사일을 하며 집안일을 보다가 인천에 공장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너 시집갈 밑천이나 해라.!"

해도 그 딸은 엄마를 닮았는지

"어머니, 보태서 땅을 더 사시지요!"

하고 친정집에 돈을 보탠 것이다.

어느 날 정순 씨가 집에 내려왔는데 떡허니

선을 보라 하셨다.

"난 돈을 더 벌 것인데, 싫수다."

해도 나이 스물이 넘은 지 벌써 몇 해나 지났다는 이유로 덜컥 선을 보게 되었다.

그래 선 자리에서 만난 이가 국민학교 동창 이강전 씨였다.


조산의 아들 많은 집 맏아들에게 시집을 오고 나니 주렁주렁 딸린 동생이 다섯 이고 게다가 집안 장손이라고, 사촌 동생까지 더부살이를 한다.

그 많은 식솔을 데리고 지금 인천 수도국산에 신접살림을 내고 동생들 도시락 싸서 학교 보내가며 자신도 아들 둘을 낳았다.

살다 보니 친정집에 나이 어린 여동생이 자꾸 눈에 밟힌다. 시동생들은 못해도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보냈는데 친정동생은 여전히 자신처럼 공부를 시키려들지 않는 아버지이다. 해서 정순 씨는 동생 정옥 씨에게 학비를 대기 시작한다. 지금도 여동생을 고등학교까지 보낸 게 삶의 보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며느리도 보기 싫은 지경에 동생과 조카딸이 삶의 위안이다. 그러니 정순 여사는 며느리 앞에서도 그저 조카딸 조카딸 하며

내가 딸이 없어서, 조카딸이 딸이다 한다.


이렇게 맏이 노릇하며 자신의 장남을 장가 들이는 일이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며느리는 자신처럼 집안을 일으키고 대소사를 거뜬히 치러낼 일꾼 또는 종이어야 했다.

처음 인사하러 온 날 건장한 체격에 어디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아 단숨에 맏며느리감으로 허락을 한 이후, 정순 씨는 예비 며느리가 집에 오면 콩을 갈게 했다. 저녁 먹으라 해서 놀러 갔다가 늦은 밤까지 콩을 갈던 나는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마다하지 않고 콩을 갈았으나 손목이 아팠다. 몹시 졸리고 피곤해서 잠시 앉아 있다가 그만 남자 친구 집에서 새벽에 깨어난 것이다. 아뿔싸. 그 남자 친구, 지금의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같이 졸았단다.

새벽에 화장실 가러 나온 정순 여사는 당황해하는 예비 며느리에게

"우린 다 괜찮다."

하시며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들이 방밖으로 나왔다.

"엄마, 이 무반찬 그럭저럭 먹을 만 해요!"

한다.



손가락을 좀 쉬고 그 다음이야기 이어갈까 고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