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브라더가 보고 있다 너

1984 같은 2020

by writernoh

1984를 읽다 말고.

노트북도 해를 넘기면 수명이 다하는 것인지 기대치 않은 오류가 생기곤 한다. 방금 전에는 한글 입력이 안 되어 뭘까 싶었는데 알 수 없는 또 다른 창이 열려 어디에 배분을 시킬지 저 스스로 혼란을 겪은 모양이다. 기존대로라면 마지막 열린 창에 1984라고 담으면 될 텐데 이 노트북 엘군은 그걸 못한다. 아래 메뉴창에 머뭇거리다가 붉게 반전만 시키고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다. 미련한 것인지 똑똑한 것인지 상황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

일일이 창을 제거하고 오로지 하나 남겨 키를 눌러 주어야 정신을 차리는 이 까다로움은 어쩌면 자신을 보호하느라 그렇게 쭈삣댄 것인지 모른다. 일종의 혼란의 방어체계인 셈이다.

종종 언제고 맛이 갈까 봐 불안과 노심초사에 시달려 얼른 백업을 시켜야겠다는 마음이 드는데, 현실의 나는 또 그걸 늦춘다. 뭐하느라고? 진짜 할 새가 없이 잊고 만다. 켜놓고 외출 다녀와서 왜 외부 메모리가 이곳에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인가를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 두뇌의 손상을 재차 확인하는 상실에 젖어든다. 아! 하고 한 박자 뒤 떠오르는 절차의 과정을 뭐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이다. 이렇게 마모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일 뿐이니까.






그러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조작해 놓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유를 누릴 수 없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세대가 아닌 거라면 인간에게는 자기의 고유 존엄이 존재하고 그것을 제 의지대로 실행하고자 하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것을 해내는 과정에서 삶의 재미도 느끼고 새로운 발견에 즐거워 노력이라 불리는 인풋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가치의 대가는 볼 수 있는 자만의 몫이고.

그러나 나의 모든 인풋이 누군가의 아웃풋을 위한 헛도는 삶이라면 그 삶 속에 녹아들 수 있을까? 싫다. 강렬하게.


아마 윈스턴도 그러했을 것이다. 과거를 기억할 수도 어린 시절에 대해 분간할 수도 없는 조정된 두뇌 속에 남아 있는 정경만을 단서로 자기를 찾아가야 하는 인생길이 투병이라도 하듯 몸무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오세아니아라는 가상의 나라 속에 하나의 세포인 진리부 직원으로 존재하는

그는 감시와 통제 아래 움직여야 하는 존재이다. 생명성은 아직 그 온기 있는 정체성을 지니려 하는 이들에게 투쟁해서 얻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투쟁가를 응원하고 성공하길 바라는 게 그러한 이상을 가진 자들의 묵묵한 지향점이다.




그러나 조지 오웰은 그것을 완전히 뭉게 버렸다.

극도의 통제 사회에 살아가는 감시 세계의 한 부분에서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키고자 투쟁하려한 윈스턴을 그 이름처럼 차갑게 냉각시키고 부서 버리고 만다. 그는 끝내 연인 줄리아를 자기가 가장 공포스러워하는 쥐앞에 자기대신 고통받게 하라는 말을 내뱉고 만다. 최악의 상황에 이를 때까지 한 인간의 자존을 발가벗기는 고통에서 존엄을 지키지 못한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게 밀어붙이는 고문과 폭력은 폭압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인간의 굴복 방식이다.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뭔가를 꼭 붙들고 지켜내고 있는가. 최근의 삶이 나를 가장자리까지 내몰지는 않았던가.

끝내 의기를 저버리는 윈스턴의 모습에서 삭막한 겨울 들녘의 허탈한 바람을 마주하게 되는 우리는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세상은 왜 그러한 감시와 통제 방식에 굴복하게 되었을까.

이미 당신도 알고 있듯이 자본의 분배 문제가 공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때부터 이 일은 시작되어 왔다. 소규모 수공업자들의 몰락과 브랜드와 겉치장의 화려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기호를 인지한 마케터들의 사냥의 먹잇감이 된 현대 사회에서 뭘 더 지킬 것이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기업은 자신이 자본의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앞뒤 분간 없이 모든 현상을 물질로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으니 우리는 그에 따른 종속을 경제생활이라 인정하고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금융의 지배도 스스로 베팅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며 재테크를 합리화시키고, 심지어 가상화폐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상품화하는 기술은 엄청난 진화이다.


그런 행위를 잘하는 자들은 이미 충분한 금전적 가치를 보상받는 곳이 자본주의 사회이고 먼저 뛰어든 자들 이후 더 이상 노다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진실을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윈스턴이 되어 기록되어지고 자유의지 보다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돈으로 살아가는 사회 아니던가.

마이클 샌댈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서 제시한 가치들이 진정성 있게 논의되기라도 할라치면 생산성이며 관심도의 불충족으로 상품성에서 제외되는 이 사회는 빅 브라더스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자기 우물 안의 것을 먹고사는 게 현실에 만족하는 거야 하고 때때로 불어오는 미풍 같은 생각에 위로받으며 벽을 뛰어넘지 못하는 대다수의 대중은 왜 우물 밖으로 보이는 하늘의 푸름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설혹 우물을 뛰어넘었다 하더라도 자기만의 블루를 지키지 못하고 똑같은 쪽빛이 되어가는 지금이 우울하지 않은가?


글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흥미와 시의성에 집착하여 대중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를 보면 다시 그 책을 보고 싶지 않게 된다. 창작의 세계에서 어디서 본 듯한 것 말고 자기 관점으로 제대로 뜻을 펼치는 자가 작가이지 않을까.




언제던가 스노든의 폭로 이후 지구 상의 모든 사찰은 피할 수 없다는 공식을 설계받은 현대인이 너무도 쉽게 업그레이드되는 기기의 최신성도 그러한 굴종의 방식이지 않을까?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의 사이버 세상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신나게 댓글을 올리고 떠들어 대지만 나의 문자는 이미 소모되기 위한 추임새였음을 주장한다면 나는 극단 의심 마니아로 평가될 수 있겠으나 나는 의심한다.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하고, 대답해야 할 것을 대답하지 않는 세상에서 글쎄, 무엇이 진실이고 맥락 있는 팩트로서의 의미를 교환하는 것인지 그저 맨땅에 헤딩하는 용기 있는 자만이 혀를 놀릴 수 있을 것이다. 감시당한다고 생각하여 익명을 거부하지 않는 것처럼 멍청한 일도 없으나 그렇게 쫄아있는 자들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눈으로만 스캐너의 기능을 갖춘 침묵자들의 혀를 조심성 있다기보다 비겁하다고 말하고 싶은 쪽에 더 가까운 나이기에!

2020이나 1984나 다르지 않은 프레임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황망하게 되내어 본다.

거부할 수 없는 부정의의 사회에서 빅브라더는 그런 침묵하는 자들의 무책임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견지에서 사회의 모순을 고민해 본다.


그보다 먼저 오늘 내게 남은 시간 노트북 에이에스를 받아야 하나 백업을 해야 하나 이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