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셔야겠습니다.

익숙한 것에 사망신고와 에피소드

by writernoh

이 계절은 정말, 참 많은 상념을 준다.

마음 협소한 이에게는 화들짝 놀라 더 소심히 지내게 하는 용한 재주를 지녔다.




수요일 오늘 드디어 AS기사가 방문했다. 지난주부터 예약하고 취소하고 다시 예약을 위해 서비스센터 전화에 매달렸다가 다시 회생한 세탁기 생명력에 또 운을 믿으며 버텨왔다. 하지만 마냥 기다린 다는 게 말도 안 되어 드디어 기사를 불렀다.


시작은 지난주 어느 날 갑자기 세탁기가 멈추어 버렸을 때부터이다. 저녁에 남편이 들어와 버튼을 누르니 다시 작동이 되었다. 내가 더 많이 쓰면 썼지 어쩜, 내 손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참...

세탁기가 멈춘 건 날씨가 추워져서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다시 전원이 들어오지 않자 서비스센터 전화했더니 자체 점검 방법을 알려준다. 두꺼비집이 내려간 것도 아니고 콘센트에 다른 가전 기기들은 작동이 된다. 이때 아파트 방송에서는 최근 강추위로 배관이 막히니 세탁기 사용을 자제해달라는 소리가 여러 번 나온다. 날씨 탓이야, 세탁기가 얼어버린 것이야 하고 하루를 더 기다렸지만 끝내 얘는 정신을 못 차린다. 고민 끝에 서비스 센터에 다시 전화를 해 AS 신청을 했다. 그런데 서비스를 신청하고 반나절이 지났는데 다시 전원이 작동됐다. 날씨 탓이구나! 그래서 서비스를 취소했다.

하지만 세탁기는 다시 멈췄고 거듭 예민해진 나는 토요일 내내 서비스 센터 전화를 했으나 불통이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세탁기를 사기로 했다. 남편은 집에 치수를 재어 다시 오자고 했으나 나는 막무가내로 내 몸이 기억한다며,

"내 팔을 벌려 뚜껑을 열고 팔을 벌려 세탁물을 건졌거든, 그러니 이쯤이면 맞아. 분명해."

이러면서 카드를 긁었다. 세탁기는 월요일 아침에 배송되기로 했다.



이래저래 빨래는 쌓여 갔고 일요일 아침 혹시나 남편이 버튼을 눌렀을 때 다시 가동이 되었다. 귀신의 조화였다.


"안 돼! 날 춥다고 돌리지 말랬어."


라고는 했으나 멈추면, 정신이 들었다 났다 하는 그 물건이 언제 또 정신줄을 놓을지 몰랐고 이미 물이 들어가 죽었다 살아난 듯 돌고 있는 그 기기를 난 모른 척 돌리고 말았다. '정오라 문제없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다시 스피커 방송이 나오고 세탁기 사용을 자제해달란다. 내가 사는 특정 동을 거론하면서!

상당히 놀랍기도 하고 설마 싶기도 했지만 시스템이 내 집을 감시하고 있지도 않을 텐데 관리사무소는 다 알고 있나 보다. 진정으로 놀라서 돌리던 세탁기를 멈추고 빨래를 그냥 널어 버렸다. 우와, 이렇게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하고는 못 사는가 보다 하며 그날 내내 심기 불편하게 지냈다. 거기다가 남편은

"다시 돌아가는데 꼭 세탁기를 사야겠어?"

그런다. 순간 멍해지는 나. 과거가 소환된다. 음음, 이건 마치 오래 전

"어제 고기 먹었는데 제왕절개를 해야겠어? 자연분만 하지!"

그때 오래전 첫아이 낳을 때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배가 아파 산부인과에 급히 도착해 조산이니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소리를 듣고, 의사 말이 40%의 위험성이 있습니다였는데, 남편은 나더러 자연분만을 하랬다. 무서워진 난, 진중하게 남편을 설득해서 수술을 하기로 했다.

"고기 먹은 거 힘다빠졌어. 그리고 나 별로 많이 안 먹었어..."

이러면서..




다시 세탁기건으로!

"음, 물론 내가 마침 어제 사업자금 필요하단 말을 한 건 맞아, 그리고 세탁기가 다시 돌아가는 것도 맞아. 그리고 내년 이사 갈 때 바꾸려 했지. 근데 난 생각이 좀 달라. 10년 넘게 썼고 먼지도 날리니 이 참에 바꿔도 될 것 같아. 전원이 자꾸 안 켜졌던 건 신의 계시야."

내심 고민은 하면서도 세탁기를 취소하지는 않았다. 가족 톡에 투표를 올려 의견을 말해보자 했더니 아무도 응하지 않아 내리고 스스로

"그럼 사야겠네."

로 무게가 실렸다. 톡에 세탁기배송이 시작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취소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월요일이 되었다. 21킬로그램 새 세탁기가 배달되었다. 정직한 기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이거 설치하고 뚜껑 열 때 좀 걸리겠어요."

이러신다. 지금 사는 이 집에 요즘 나온 세탁기가 안 맞나 보다.

"설치는 할 수 있죠, 그런데 사용하다 보면 움직이고 그러다 보면 파손될 수도."

아무리 작은 흠이라도 이 말을 듣고 어찌 설치할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어젯밤 남편은 퉁명스럽게 굴었는데! 그래서 나는 이제껏 조짐이 무척 걸려

"죄송하지만 설치 안 할게요. 추운데 죄송해서 어쩌지요."

이렇게 새 세탁기를 포기했다.




오늘 아침. 세탁기는 다시 잠정적 파업 중이었다. 물론 강추위 배관 문제 때문에 빨래를 자제 중이기도 했지만 얘는 그저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침묵 중이다. 요물! 빨래를 못하다 보니 베란다에 빨래는 산이 되어 거실까지 흘렀고 입던 점버들도 나오게 되니 뭐 이삿집이 다름없다. 요즘 빨래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말을 주워들으며 우리 동네는 그런 데도 없는데... 저걸 어찌하나 싶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급한 것부터 욕조에서 세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뜨거운 물에 세제를 풀어 바로 엄청 밟아대야지 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남편도 퇴근 후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남편이 다시 버튼을 눌러보았다. 짠! 남편의 '혹시나'가 다시 한번 신기를 발휘했다. 와우~ 세탁기가 움직였다. 내가 눌렀을 때는 꿈쩍도 안 하던 버튼이었다. 남편이 어렸을 땐 착하게 살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살짝 스치기도 했다. 이때다 싶어 얼른 세탁물을 넣고 작동을 했다. 잘 돌아갔다. 하지만 한 시간 후 아직 헹굼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멈추었다.

지난 토요일 걸려온 전화가 많아 이용이 불가하다는 서비스 센터에 다시 한번 전화를 하니 오늘은 평일이라 바로 연결이 되었다.




드디어 서비스센터 기사님이 다녀가셨다. 내 마음은 홀가분하다.

기사님이 나사를 풀러 계기판을 열었다. 그리고 전원을 눌렀는데 작동되었다. 아주 쉽게 해결되었나?

"이거 계기판이 고장입니다. 부품은 대략 15만 원 정도 드는데, 그마저도 부품 보관기간이 지나 없습니다. 아무래도 준비하셔야겠습니다."

이러시는데 그 멘트에 웃음이 나왔다.

"세탁기를 교체하라는 말씀이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듯이 들린 나는 운명한 세탁기가 발악하듯 살았다 말았다 한 것에 대해 무슨 조화일까 싶어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전원이 들어왔나요."

"분해했다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들어오긴 했는데 아마 이제 안 들어올 겁니다. 준비하시죠"

그 한 마디에 지난 며칠간 세탁기 전쟁은 종료된 것이라 점을 찍었다.


남편에게 경과보고를 했다. 부품값이며 그 부품이 없음을 말했다.

"오늘 별일 없지? 바로 들어올 거지?"

그때 그 마트에 다시 갈 것 같다.


지금 세탁기는 언제인지 모를 사망신고에도 불구 살아나 힘을 내고 있다. 기사님이 다녀가고 조심스럽게 조금씩만 넣고 돌리는데 자긴 별 문제없다는 듯이 세탁을 이어가고 있다. 노익장이다. 시한부 판정 세탁기는 마지막 여정을 준비하며 최선을 다한다. 오늘 날씨가 풀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