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집단 무의식의 근원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온다.
한 마리 새처럼.
싱클레어의 거짓말은 선에서 악으로의 일탈의 시작이었다. 어둠의 속성을 가장 쉽게 깨닫는 아이는 다시 밝음의 세상으로 가기 위해 크로머를 벗어나려 하지만 밝음을 위해 거짓을 들키고 싶지 않은 불안한 모순에 껍질을 깨지 못한다. 허물지 못하는 ‘명예’라는 껍질 때문에 크로머의 유혹에 예속되어 어린 싱클레어는 원죄를 지우고 살아가게 된다.
고전 '데미안'은 소년이 인간 속성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어두웠던 기억의 전말을 깨닫는 과정에서 만난 멘토들의 영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신분석과 종교적 심미주의에 푹 빠져있기에 특정 종교성이 나타나는 것 같지만 결국 인류의 역사에서 배태된 영적 흐름의 하나로서 생성하는 정체성 문제를 다룬 것이다.
참된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를 도덕이나 신앙을 뛰어넘어 형용할 수 없는 인간의 욕구, 전쟁을 통한 엄청난 살인을, 카인과 아벨의 극단적 패륜의 도달거리를 왜 그래야 했는지 각성하게 하는 자기로부터의 인식을 기본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다수가 치부한 악의 상징으로서 이방인이 된 특정 인물이 어쩌면 맥락을 뒤엎고 다시 모래시계를 돌려 선악의 이분법을 벗어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손바닥 뒤의 모습인 것을 짚어주고 있다.
오로지 하나의 진리, 이성, 우물 안에 하늘만 바라본 자들에게는 정신이 아뜩할 정도로 충격적인 다원성의 발화였다. 그러기에 종교를 폐쇄적인 울타리에 가두려고 한 조상 학자의 신념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이단의 저서로 자리매김하는 게 당연할 수 있다. 단지 헤르만 헤세가 노벨상을 받고 시대를 대변한 좀 유명한 작가라는 이유로 자기 신념을 뒤엎고 시장의 우상으로 그런가 보다라고 수용하려는 신도들에게는 이제 좀 벗어나야 할 뭔가가 있음을, 당신은 그저 사과 자루를 훔친 소년에 불과하다는 경종을 울리고픈 메시지가 담겨있다.
데미안은 언젠가 우리 곁을 스쳐간 그 사람, 줄탁동시로 나를 튕겨 주었던 그의 역할에 대한 그림자이다. 데미안은 ‘신’이란 인간이 정해놓은 절대적 표상이라고 전해준다. 그것을 각성하며 운명을 이해하는 과정이 성장이고 누구나 이 단계에 도달하면 미지에 대한 동경으로 아프락사스를 갈구하게 되며 성인으로 되어버린다는 걸 짚어준다.
데미안은 처음부터 싱클레어를 알아본다. 그가 협박자 크로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자기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 싱클레어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며 이마에 카인의 표적을 확인시켜준다. 견진성사는 영원한 신의 자녀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칠대 성사중 하나이다. 하느님의 자녀 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 인증의 표로 주교는 견진자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어준다. 물로써 이마를 흘러가게 하며 세례를 받아 서구적인 이름을 하나씩 갖는 세례성사 보다 더 성숙한 표징이 된다.
이 기독교 문화의 관문, 절대 신앙적 시기에 두 소년은 신부에게 교리를 받으며 하느님 말씀의 전달을 흥미롭게 받아들인다. 물론 카인의 후예 관점으로 눈빛을 초롱초롱 빛낸다. 카인이라 하면 진절머리를 치는 보수적인 중산층 가정 출신 싱클레어는 사과 도둑이 될 뻔한 자기를 구원해준 데미안이 인생 구원자이고 카인의 의미를 비틀어 보게 한 시각을 준 그가 세상의 인도자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더욱 그의 프레임으로 보니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절대로 신을 거역하지 말고, 모든 위반되는 죄악은 사탄의 짓이라 여기는 기독교에서 바운더리 밖 데미안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 이단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정의롭다. 기독교의 프레임만 벗어나면 그가 가는 길이 세상을 꿋꿋이 살아갈 인간이 최선의 길이지 않은가. 종교라는 인간이 만든 껍질도 벗어던져 보자.
김나지움 시절 방황하는 싱클레어는 아직 알을 깨지 못하는 청소년이었고, 오히려 데미안이 두렵기까지 느껴지며 차츰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홀로서기의 방황은 그를 주류의 흐름에 따르기보다는 뭔가 내면의 소리가 향하게 하는 일탈을 구별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빠져들게 한다. 진실로 그는 카인의 표시를 이마에 숨기고 있던 것일까.
그러나 너무도 간단히 성적 흥분의 도덕적 죄의식과 아직 벗어나지 못한 타인 중심의 사고로 타락처럼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 다시 구원의 빛은 비친다. 시각적 최강의 정결자 소녀 베아트리체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조로아스터가 그려 놓은 천사의 모습일까. 지상에 그렇게 고귀한 존재가 있음 자체가 그를 다시 도덕심의 중앙에 데려다 놓고 오로지 마음으로만 흠모해 자기 이성을 끌어다 놓게 된다.
하나의 빛처럼 이름도 몰라 단테의 그녀 베아트리체를 따서 정해놓은 소녀의 존재는 하나의 방향성이 되어 다시 주류의 선이라는 궤도에서 자기 길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자기가 만든 형상일 뿐 데미안처럼 멘토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 불투명한 존재이다. 사춘기 소년 싱클레어에게는 좀 더 구체적인 이정표가 필요했다.
내면이 밝고 어두운 이유는 자기가 가진 막, ‘껍질’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뒤통수를 한 대 맞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으나 베아트리체는 그저 흠모의 머나먼 대상일 뿐이다. 싱클레어의 존재 원형의 바탕에는 그러한 징검다리를 기점으로 한 곳으로 흐르게 하는 이끌림이 있고, ‘꿈’을 통해 그것의 정체를 울리게 한다. 꿈을 꾸고난 후 조용히 형상을 종이에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기의 내면의 메시지를 그림에서 형상화하여 어떠한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데 그중 하나가 베아트리체이고 새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어디선가 조우했던 잠재된 심상이었고 점점 그들은 데미안이라는 매개를 통해 에바 부인과 아프락사스의 문장으로 완성된다.
소년의 성적 성장은 그토록 포기할 수 없는 고뇌였으나 죄악이라기보다 조절과 인내의 기름이었고, 그 열정을 내면의 성찰로 이어가게 한 그는 정신적 통찰에 세계를 갈구하게 된다.
피스토리우스는 그에게 한 계단 한 계단 옮아갈 수 있는 도구의 스승 멘토였다. 그러나 스승 조차도 영원하지 않으며 어느 순간 스스로도 누군가의 멘토가 되고 있으며 그 본질은 유전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층 성장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도 모르게 변태 되어 있을 때 카인의 눈은 열려 있고 다시 데미안과 연결된다.
대학생이 된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의 집에 드나들며 그녀의 조심스러운 배려와 그곳에 조성된 지적 탐구의 그룹에서 다양한 세계를 바라보며 자기의 모습을 찾아간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인류 부조리를 겪어야 하는 시기 불안한 날개는 자기 앞에 놓인 십자가를 향해 공포를 딛고 일어서게 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 두 청년은 전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데미안의 마지막 멘토링을 듣고 이제 소년이 아닌 성인이 되어 자기의 세계를 탈피한 것이다.
전장에서 죽어가는 데미안은 말한다.
"프란츠 크로머 아직 기억해?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이제 너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눈을 감아 싱클레어, 에바 부인의 키스를 전해 줄게."
싱클레어가 독립하기 직전 마지막 껍질을 털어 내는 순간이다. 싱클레어 속에 당신이 보이는가? 청년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고정되지 않은 인간의 세계는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여 자기 모습을 스스로에게서 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알 속에 웅크리고 있는 하나의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데미안은 어쩌면 싱클레어의 삶의 실존이 아니라 그의 또 다른 그림자로서 안락과 평온의 꽃길 같은 삶은 없다는 것을 깨고 나와 자신의 정체성을 지닌 더 넓은 세계로 가기 위한 이상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독자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날개를 펼치기에 좋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