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너나 나나 영원히 쳇바퀴를 돌뿐이다

by writernoh

2020. 8. 26. 수.

오만과 편견

다아시란 부자 청년은 낯선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았다는 교만 때문에 욕을 들어 먹었다.

당시 사교는 의무처럼 신분에 걸맞은 인사와 무도회의 춤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공식적이면서도 귀찮은 절차가 통과의례였다.

춤추며 상대를 꿰뚫어 보는 놀이가
시답지 않은 귀족 다이시는 그것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눈에는 재수 없는 오만한 자로 비쳤다.

그런데 자기들의 무리에 어울려 춤을 추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는
습관은 200년 전의 일만은 아니다.

서로 다른 소통방식의 차이를 끼어 맞추다가 힘들면 허허 웃고 말면 그뿐인데
어찌 그 지점에서
불쾌와 오만을 느껴야 하는가.

변함없는 인간의 속성을
되짚어주는 이 지점!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 교차하는 곳이다.

나의 예의를 모르는 상대가 오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본인의
편견일 뿐,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은 다소 진솔한 대화와 즐거운 공유시간 한 때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까나.
가족, 친구, 연인 등등의 관계는 그 선을 너무 복잡하게 그어 버린다.

줏대 없이 착한 부자인 빙리 청년은 여동생들의 신분상승 열망과 질시로 자기 사랑을 놓칠 뻔했고, 나름 줏대 있는 친구 다아시가 너무 신중하여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조언하는 통에
백마 탄 왕자를 만나 자신과 가족을 얹어 기생하려는 이들의 숲 속에 유독 고고했던 제인을 놓칠 뻔했다.
이것이 주인공 다아시와 엘리자벳(리지)의 갈등의 원인이 된다.


결혼이라는 족쇄를 의무로 생각하는 시대에
여성들은 그저 자신을 상품화하며
어떤 가치를 선택하든,
타인의 눈에 비쳤을 때
1,2,3,4.. 속된 조건이라도 충족되면 성공했다고
심지어 도매급으로 자기 인생을 넘기는 풍속이 결혼이었던 것이다.
낯선 남성에게 팩트체크도 없이 후한 점수를 주어
사랑에 빠졌다가 신세 망쳤다는 신파가 여성의 영원한 주홍글씨라고 여기고 싶지 않는다면,
이러한 습관은 적어도 2020년에는 버려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제까지 자신을 규정하는 신분과 외적 껍데기에 의존하여 타인보다 비교우위에 있고 싶어 하는 습성을 보편적 기준이라
인정하고 집단지성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불편한 진실을 따지자면
지금 품 넓은 드레스와 모자, 그리고 마차 타는 수고만 다르지
결코 진보된 삶으로 느껴지지 않은 21세기의 인간으로서 처절한 여성들의 모습에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우리 모두 인정하고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연애의 본능처럼 넘치는 욕망의 리디아와 키티. 15세야 지금은 다 컸어도 아기이지만
당시에는 과년한 처녀의 대열로 보일 것라 생각한다.
동시대 조선에서는 이미 출가하여 아이도 기르지 않던가.
그 또래 리디아가 어떻게든 부대 근처에서 훤칠한 남성미 뿜 뿜 발산하는 동물적 외모의 청년 장교들과 헌팅을 해보려는 심리는 각자의 교양의 견지에서 다각도로 여겨질 부분이다.
하나 섣불리 외모로만 접근하여 열정을 불태우려는 것은 아주 조금만 고전적 팬덤으로 봐줄 수는 있을 뿐 합리화하기에는 너무 자신을 값없는 사람으로 전락시킨다.
존재감 없는 여인들이란 뜻이다.

아마도 나 역시 심한 편견으로 그런 현상을 자연스럽게 보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리 쉽게 자신을 베팅할 정도로 그 남정네들이 신뢰로워 보이는가. 고전판 클럽의 근원이었으나
리디아와 키티가 성숙한 자유연애의 카리스마로 덤벼들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그들의 연봉과 겉모습에 짧은 쾌락을 우월시 하다가 가족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미성숙한 존재일 뿐이다.

엘리자벳에겐 이 모든 만남의 허위와 경박함이 열정이 아닌 잘못된 만남일 뿐이었다.
이 생각에 본인도 한몫을 더하며, 제인과 리지가 자기를 지키는 주체적 매력을 지닌 것에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끌리게 된다.

이런 시각을 가진 엘리자벳에게
특히 절친했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결혼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대놓고 속물임을 드러내는 젊은 목사이자 사촌인 콜린스와 샬롯의 사랑없는 결혼 선택은 믿을 수 없는 속물근성이자 혐오에 가까운 충격이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꾸며 놓고 그것에 길들여지며 조건을 충족시키는 삶이
내 기준과 다르다 하여
거짓된 삶이라고 치부하기엔
이 세상의 많은 존재가치가 다 그렇게 영롱하고 오묘하지만은 않다는 진실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아무리 자존감 높은 리지도 친구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또한 그녀의 삶임을 존중하는 게 관계이므로.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것을 친구라 해서 감, 배 타령을 하기엔 이미 샬롯은 철저히 자신의 계산된 운명의 배에 몸을 실었다.

어찌 구차함에 고개 돌려 고고한 인생만을 꿈꿀 수 있겠는가.
그 조건과 인간의 자존이 절충을 하며 성숙된 판단을 내리는 게 나이 드는 것.
그 고고함의 정수를 오래 누릴
수 있는 자의 안정된 삶의 조건에 부러움을 사거나, 속됨을 무시하고
수도자처럼 거룩한 영혼으로 사는 이들의 선택을 마음으로 존중하는 게 인간에 대한 예의로 위로할 뿐이다!!!


자세히 보면 자아가 강하고 열정적인 여성 엘리자벳. 그녀조차도 아무리 진솔한 사랑을 찾는 꼿꼿함을 가졌어도 심한 편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에 굴복해야 했다는 게 진실이다.
한 사람의 진심을 알려하기보다 자신의 눈에 보인 것만 믿어 착각했던 덫은 진정 찐 실패를 맛보아야 하는 아이러니를 탄생시켰으니, 조금 앞설지라도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의 삶의 반경 안에 같은 시야에
머물던 까닭이었다.
고뇌하는 시간이 다가오니
그녀도 오만의 가면을 벗고 나서야 자기 앞에 놓인 운명, 다아시란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파해야 한 것이다.

그나마 가장 근대적인 사고를 가지며 시대의 편협함에서 벗어나 자존심을 지키려 한 점에서
시행착오 많은 인간의 프레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 제인 오스틴이 책에 빠져 사는 셋째 메리에 대해 마치 정상이 아닌 듯 민폐녀로 보여주는 것은 작가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였다고 본다.
외모가 뛰어나지 않아 책에 매달리는 여성 콘셉트. 뭔가 자기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끈기 있는 노력. 그것이 왜 문제가 되어야 할까. 그건 그 시대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니 작품의 시대를 이해할 따름.
원서의 내용이 어떠했을지는 모르는 입장에서 결코 그 모습이 가족의 수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끊임없이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베넷 부인이나 인격적 결함을 고치지 못하는 위컴을 남편으로 삼은 막내나 충실한 기생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현대의 속된 모습이 들어맞는다는 게 사실인 것이다.

어떻게든 귀족에게 시집보내 사위 뜯어먹고 살려는 베넷 부인을 보며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여전히 주위를 돌아보면 베넷 부인 2,3 인물이 보이고야 만다. 당시 한정상속제의 억울함이 여성을 종속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본다면 베넷부인조차 삶에 충실한 인물이었으며 쟁취의 결과였으니! 시대여! 남성중심사회의 폐혜라~

자기반성이란 1도 없이 알고 보니 부자라는 이유로 다아시에 대한 태도가 확 바뀌는 모습에, 그 변화도 거친
생활력이라 말하기엔 얄밉지만 운이 좋은 사람 정도로 치부한다. 자칫 딸 인생 망치는 엄마의 표본으로 시사할 점은 있겠다.

엘리자벳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오로지 무도회에서 본 남자에게 일평생을 거는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아직도 부모나 남편의 어깨에 몸을 싣고 독립적이고 싶지 않은 여성들에 대해 이 책의
프레임을 맞춰보며 그런 현실이 아직도 강요되고 지배적인 이 시대에 내 딸의 인생은 주체적이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또 타인과 관계에서 자주 속단하는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한 걸음 뒤에 생각은....
역시 혼자서 속으로만 속단하지 말고 진실을 위해
구차한 변명 같아도
약간은 부대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오만과 편견의 시행착오 삶 속에 죽는 날까지 쳇바퀴를 돌려댈 것이다.


이상 오만과 편견을 읽고 토론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