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부끄러운 나의 편견
마스크를 올리고 검은 옷을 입은 배달노동자를 하루에도 몇 번씩 본다. 예전엔 그들을 보면 고백하건대 부끄럽지만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전혀 상관없다는 것은 만나서 대화를 하고 교감을 나눌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는 뜻이다. 친해질 필요도 말을 건넬 필요도 없다. 그저 물건만 잘 주고받으면 된다.
나이를 좀 더 먹고 난 뒤에 보니 그들은 내가 가르쳤고 졸업을 시킨 옛 제자들 같았다. 그다음엔 알바 노동을 하는 지금의 제자들 같았다. 그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매일 똑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달린다. 그들이 하는 일은 똑같은데 그들을 보면서 내 생각만 바뀐 것이다.
제 주변에 다들 배달 노동을 하고 있어요.
AI에게 이렇게 빨리 지배당할 줄 몰랐어요.
최근에 들은 한 인디 밴드의 보컬의 말에 의하면 요즘 음악인들이 배달 노동을 많이들 한다고 한다. 그의 밴드는 국내 유명한 락 페스테벌의 무대에 당당히 올라가는 정도다. 그렇지만 음악 수익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아닌 상위 1퍼센트 음악인들이 다 가져간단다.(음원 사이트의 수익 구조가 그러하단다.) 그나마 용돈 벌이를 하던 단편 영화나 광고 음악 제작 일거리들이 있었는데 AI가 등장해서 그마저도 다 뺏겼단다. (요즘은 AI가 작곡을 5분 만에 해낸다.)
그래서 대부분의 음악인들은 생계를 위해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알바를 해야 한다고 한다. 쿠팡 물류창고로 가거나 배달 노동을 하거나 등등. 악기 연주 연습을 할 시간은 하루 중 얼마 없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 이제는 배달 노동자를 보면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무대에 당당히 올라가는 인디 밴드의 멤버로 보인다.
가슴이 떨리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혁오의 반가운 신보가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혁오 및 선셋 롤러코스터란다. 역시나 음악은 훌륭하고 감사하다. 한동안 신나게 들어야지. 그들의 콘서트가 있나 오랜만에 찾아봤다. 소싯적 내 취미는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콘서트 도장 깨기였다. 검색하다 보니 아니 이럴 수가! 당장 이번주에 콘서트가 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티켓값이 무지 비싸다. 비싼 자리가 십오만 원에 육박한다. 내 형편에 이런 지출은 못한다. 콘서트를 포기한다.
라이브는 뺏기지 않을 거예요.
음악을 들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음악인들이 인공지능에게 점령당하지 않을 영역은 오로지 연주, 공연이랬다. 얼굴을 마주한 라이브 공연을 통한 교감. 그것만은 AI에게 뺏기지 않을 수 있다. 로봇이 연주하는 라이브 음악은 상상만 해도 매력이 없다. 혁오를 마주하고 멀리서 라도 그들의 라이브를 듣는다면 그들의 연주에 실수가 있더라도 이 얼마나 짜릿할 것인가.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는 것이 인공지능으로부터 음악씬을 보호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달 노동을 하며 진짜 음악을 준비하는 음악인들. 내가 되고 싶었던 음악가의 꿈을 힘겹게 이루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마음속의 격한 응원과 미래의 비싼 티켓값을 지불할 능력을 키워봐야겠다. 그리고 음원 시장에도 양극화가 좀 아물기를. 악기만 연주하던 그들의 손에 쥐어진 배달 노동이 좀 더 따뜻하기를. 그들이 만나는 고객님들이 좀 더 인간답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이 AI에게 일자리를 뺏긴 상실감에 멈추지 않고 쭉 이어지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배달 노동자들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닌, 내가 좋아하고 나와 관계가 있을 수 있는 사람들임을 자각하려고 애써야겠다. 언제든 관계가 생길 수 있는 사람 대 사람인 것이다. 나의 노동이 나의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듯, 그들의 배달 노동이 그들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 속에는 다채로움을 가진 사람이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말을 걸어보자. "혹시 음악 하세요?" 아니다, 이건 오버다. "배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정도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