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에어컨 기본값을 반대하며
휴대폰 세상
문 열린 집 안에서 벌거벗고 있는 아이에게 얼른 옷을 입으라고 한다. 아이는 괜찮다며, 어차피 사람들은 휴대폰만 보면서 다니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만 보면서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잠시라도 휴대폰이 없으면 불안하다. 나도 휴대폰 중독 같다. 그래도 적어도 집과 학교의 아이들 앞에서 휴대폰 사용하는 모습을 최소로 보여주고 싶다. 아이가 어릴 적 남편과 약속을 했다. 아이 앞에서는 휴대폰을 하지 않기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만 바라봐도 우린 적어도 아이에게 집중해 주는 그런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도 나도 일을 처리한다는 핑계로 아이가 조금 크고 나서는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보게 된다.
얼마 전 길을 가다 한 초등학생을 보았다.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휴대폰으로는 영상인지 게임인지에서 쉴 새 없이 음악과 영상이 나왔다. 아마 게임 속 화면이었던 것 같다. 아이는 나와 만나는 길을 걷고 있었지만 마치 게임 속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오랜 기간의 초등교사 가락으로 볼 때 스마트폰 중독인 게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그 아이를 탓할 수 있을까. 그 아이의 가정을 탓할 수 있을까. 문제는 세상이다. 육아 휴직을 쓸 수 없는 시스템,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내 집 마련을 할 수 없는 양극화된 사회, 양가 부모가 아니면 공공 돌봄을 받기 어려운 것 등의 이유로 아이들은 방치된다. 어른들의 바쁨을 핑계로, 육아휴직 시스템을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핑계로, 양극화를 줄이기 어렵다는 핑계로 아이들은 매일 작은 화면 속 세상에서 홀린 듯이 살아간다.
내가 바라는 세상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모두 휴대폰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휴대폰을 '잘' 사용하면 좋을 텐데 '못' 사용해서 더 문제다.
아이들은 15초도 안 되는 영상들을 못 참고 3초 만에 넘긴다. 아이들은 힘든 일을 겪어본 적이 없다. 여름은 더운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밖에서 노는 것을 덥기 때문에 포기한다. 친구와 나가서 놀라고 말해도 더운 게 더 싫다고 안에서 놀겠다고 말한다. 죄책감 없이 틀어대는 에어컨 탓에 에어컨이 없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로 안다. (산 옆의 우리 집은 올여름 에어컨을 손님 왔을 때 한 번만 틀었다.) 안에서 놀 수 있는 것들은 한정적이다. 땀을 흘릴 일도, 숨바꼭질을 하면서 조절능력을 기를 일도 없다. 친구들과 같이 있어도 다시 휴대폰을 보는 것으로 놀이는 금세 귀결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힘든 것을 참을 줄 아는 세상이다. 올해 반 아이들에게 내가 힘들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문제는 그거였다. 작은 힘듦들을 겪어보지 못했던 것. 눈앞의 쇼츠를 한 손가락으로 빨리 넘겨 버리듯이 모든 일은 평탄하고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해도 된다. 조금이라도 덥거나 습하면 에어컨을 틀면 되고 내가 더럽힌 책상 주변은 다른 사람들이 청소를 해준다. 하지만 그런 환상 같은 편안함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나의 힘듦을 해결해 주는 사람은 부모도, 교사도 아닌 오롯한 아이의 몫이다. 아이가 사회에 나갔을 때 갑자기 닥쳐올 온갖 힘듦들을 미리 내공을 쌓아야 한다. 세대 전체의 아이들이 그래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묻지 마 범죄가 줄어들 것 같다. 힘든 것을 참아보고 견뎌보면서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는 세상,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 그것이 내가 바라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