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 때였던 거 같다. 한밤중에 갑자기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야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안 하면 좋은 것 중 하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잘 참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긴 세월 동안 내 인생에는 수많은 야식이 있어왔다. 그럼에도 유독 그날 밤의 식사는 두고두고 잘 잊히지 않는다. 밖은 이미 깜깜했으니 적어도 밤 10시는 넘었을 거다. 누군가는 잠들 시간, 냄비에 수돗물을 콸콸 받아서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가스 불을 띠리릭 켜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가 달걀 6알 정도를 냄비에 퐁당 넣었다. 덜 자극적인 메뉴를 고심하다가 달걀을 삶기로 한 것이다. 요리라고 지칭하기도 민망한 행위였지만 엄연히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낸 수고로운 일이었다.
10분 정도 삶아진 달걀 6알을 식히려고 냄비를 통째로 들고 싱크대에 옮겼다. 찬물을 쏴아 부어주면서 열기가 가시자 예쁜 접시에 옮겨 담았다. 한 알을 집어 톡톡 가장자리에 상처를 내고 껍질을 깠다. 소금에 살짝 찍어 한 입을 베어 물었을 때, 나는 감격하고 말았다. 그 맛은 말로 다 설명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최선을 다해 묘사해 보자면 기분이 째질만큼 풍요롭고 자유로운 맛이었다. 삶은 달걀에서 어떻게 풍요롭고 자유로운 맛이 나냐고 따져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누가 음식을 맛으로만 먹나요? 눈으로도 먹고 분위기로도 먹는 게 바로 음식 아니든가요.
그 밤, 나는 드디어 내 처지를 절실하게 알아차린 거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부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말이다. 밤 10시가 뭐야, 여차하면 새벽 3시에도 가스 불을 켤 수 있는 형편이 됐다. 오랜 기숙사 생활을 청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처럼 찾아든 자유였다. 두 살 터울 동생이 상경하면서 함께 자취 생활을 시작한 덕분이었다. 비록 동생이 함께였음에도 나 혼자 사는 것만큼 자유로웠던 이유는 과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환경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거처는 줄곧 비슷했었다. 한 방에 타인 여러 명과 함께 부대끼면서 살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단체생활의 연속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타인을 만나 통성명을 시작으로 최소 6개월, 길면 1년 동안 함께 살아야 했다. 가족과도 한방을 쓰면 부딪힐 일이 많은데, 생판 남과 한 공간에서 부대끼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생활 습관을 지적받기도 하고 조심해달라는 부탁을 들으며 행동을 조심하게 됐다. 배려는 습관이 됐고 자연스레 눈치 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 방은 결코 내 방이 아니었다. 듣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틀어놓을 수도 없었고 친구에게 오는 전화도 마음껏 받을 수가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도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어야 했고, 뒤척이다 방문을 조용히 열고 나가 봐도 내가 거닐 수 있는 곳은 고작 기숙사 복도가 전부였다. 잠깐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도 대문의 쇠창살을 뚫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생활에 서서히 젖어 들다 보니 자유가 억압된 생활에 어느덧 익숙해진 것이다.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처럼, 잃었던 걸 되찾아보니 알 수 있었다. 원하는 걸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를 말이다. 다만,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되면 당연해지고 무뎌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달걀을 삶는 일 따위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언제든지 해낼 수 있지만, 슬프게도 풍요롭고 자유로운 맛은 더 이상 나지 않기 때문이다.스물세 살에 달걀을 끓이던 집보다 더 넓고 깨끗한 곳에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따금 가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내가 하찮게 느껴지는 시기를 겪는다. 그럴 때면 더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나를 다독여줄 필요가 있다. 그 무엇을 새롭게 가지더라도 그건 잠시뿐이란 걸 알잖아, 결국 또 비슷하게 흐려질 뿐이야.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달걀을 삶을 수 있고, 잠이 안 오면 TV를 켜놓고 깔깔거릴 수 있는 현실에 눈을 돌려본다. 4인 1실을 쓰면서 억압받는 생활로 다시 돌아간다고 상상하다 보면 뺏겼던 자유를 되찾은 것처럼 안도하게 된다. 일종의 정신 승리 치료법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금세 나를 평온하게 해주는 것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