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하기의 하수, 중수, 고수
GTD에서는 물과 같은 마음을 강조합니다.
A.P.R.O란? 에도 이야기했지만, 물과 같은 마음이란
행동을 할 때
1. 언제 뭘 해야 할지 이미 잘 알고 있고,
2. 그 상황에 필요한 것들이 잘 갖춰져 있어서
3. 어떤 상황에서든 당황하지 않고, 척척 해치울 수 있는 편안함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GTD의 정리하기는 이러한 상황에 준비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GTD를 하더라도, 이 '물과 같은 마음'을 이해하느냐, 아니면 이해 없이 그냥 따라 할 뿐이냐에 따라 생산성이 크게 달라집니다.
정리하기의 하수, 중수, 고수가 갈리게 되는 거죠.
하수: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고, 상황에 처해서야 허둥지둥하는 사람
중수: 뭘 할지 잘 알고 있지만, 상황이 되어서야 준비를 하는 사람
고수: 뭘 할지 잘 알고, 상황이 되면 0.4초 안에 물이 흐르듯 실행할 수 있는 사람
고수는 실행할 상황이 되면 0.4초 안에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왜 0.4초일까요? 생각이 끊기지 않는 최소한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0.4초 이상 대기 상황이 벌어지면,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이를 도허티 임계라고 합니다.
(도허티 임계는 yeon님의 브런치 글을 참고해 보세요. 좋은 글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겠어'라는 생각이 행동으로 물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0.4초 안에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정보와 재료가 모두 그 순간 모두 준비되어야겠죠?
이렇게 말하면 '0.4초 안에 어떻게 바로 준비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여기서 제가 설명해 주지 않을까 기대도 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불가능합니다.
당연합니다. 0.4초 안에 모든 준비를 하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상황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냥 말만 해선 이해하기 어려우니 예를 들어봅시다.
다음 날 회사에 가져갈 매우 중요한 서류가 있다고 합시다.
이걸 빼먹으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합니다.
하수라면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잊어버립니다. 출근길 회사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비로소 서류가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어쩔까 안절부절못하다가 내려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땀에 젖은 채로 지각합니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겪어보셨던 상황일 것입니다.
중수라면 출근 시간에 맞춰 알람을 맞춰 둘 것입니다. 알람이 울리면, 내용을 확인한 뒤, 서류를 서류함에서 꺼낸 다음 들고나갑니다. 나쁘지 않죠?
하지만 진정 고수라면 신발장 위에 서류를 올려둡니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으면서 자연스럽게 서류를 챙겨 들고나갑니다
멋지지 않나요? 굳이 알람을 맞추고, 일일이 신경 쓰고 할 필요 없이 그것이 필요한 상황(출근)에 자연스럽게 재료(서류)가 준비됩니다. 물과 같은 흐름이지요.
사실 이 '신발장 위 서류'는 GTD 창시자 데이비드 앨런의 '쏟아지는 일 완벽하게 해내는 법'에 나오는 사례이자, 물과 같은 마음으로 정리하기의 가장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이번에는 개인 경험입니다.
부모님이 반찬을 보내주셔서 잘 먹고 빈 통이 잔뜩 남았습니다.
부모님 댁에 갈 때 부모님께 다시 가져가야 합니다. 어떤 것이 고수의 정리일까요?
하수라면 통을 찬장에 차곡차곡 잘 챙겨 놓고 있다가 역시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부모님 댁에 도착해서야 기억이 납니다. 잔소리를 듣고, 잘 챙겨야지 다짐합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나 다음 부모님의 반찬이 집에 도착합니다. 집 안에 반찬통은 점점 늘어납니다.
중수라면 부모님 댁 가는 전날 캘린더에 반찬통 챙기기를 일정으로 넣습니다. 전날 다른 짐과 함께 반찬통을 가방에 차곡차곡 챙겨 넣습니다.
고수라면? 부모님 댁에 갈 때 쓰는 캐리어에 반찬통과 가방을 모두 넣어둡니다. 그리고 부모님 댁에 갈 때가 되면 캐리어를 꺼냅니다. 여니 반찬통이 보이고,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반찬통을 빼고, 짐을 넣습니다. 어디에도 적지 않았지만, 반찬통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앞서는 모두 실제 '장소'를 예시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장소가 없는 디지털 공간은 어떨까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chatGPT 베스트 프롬프트 10가지'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걸 고수처럼 정리하려면 어떻게 할까요? 자, 생각해 봅시다. 이 내용은 내가 실제 chatGPT에 입력할 때 비로소 유용한 내용일 것입니다. 그럼 chatGPT에서 0.4초 안에 쓸 수 있어야 고수겠죠?
하수라면 기사를 통째로 노션 등에 스크랩해서 태그를 단 뒤 보관합니다. 며칠 지나 실제 사용하려고 태그를 입력하니 이미 이전에 보관한 수십 개의 기사가 보입니다. 원하는 기사를 하나하나 찾아가다 포기합니다. 은근 한 번씩 있는 일이죠.
중수라면 기사를 본 뒤 10개의 프롬프트 리스트만 뽑아 메모로 정리해 둡니다. 전에 비슷한 내용을 정리해 둔 메모가 있다면 거기에 추가해서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합니다. chatGPT를 사용할 때가 되면 메모를 검색해서 찾은 다음, 복사해서 입력합니다. 디지털 자료를 잘 정리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보통 이 방법을 사용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수라면? 기사를 읽고 espanso 등의 텍스트 자동 입력 툴에 프롬프트 리스트를 바로 입력해 둡니다. 그리고 chatGPT 창에서 필요할 때, 프롬프트 창에서 단축 문구를 입력, 프롬프트 리스트를 띄우고 골라 엔터를 눌러 빠르게 입력합니다. 창전환도, 일일이 검색도, 복사하는 귀찮은 일 없이 원하는 프롬프트를 바로 사용할 수 있죠.
물과 같은 마음. 0.4초를 넘지 않는 전환은 생산성을 높일뿐더러, 마음도 편해서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준비할 것과 상황은 모두 다릅니다.
저에게 서류를 들고 출근할 일은 없으니, 첫 번째 예시는 큰 도움이 안 됩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각자 자신만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물과 같은 준비 방법을 스스로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글을 쓸 때 무한서랍에서 아이디어를 얻곤 합니다.
이번에도 이런저런 제텔이 사용되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본문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작은 재미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