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안고 펑펑 울었던 순간.
유시민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전 늘 '제 롤모델이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시민 선생님은 정치권에서도 강력한 파워를 가지고 계시고, 쓰는 글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대중 작가시기도 하시죠. 하지만, 제가 책을 잘 팔고 싶어서, 혹은 정치 성향이 맞아서 유시민쌤이 제 롤모델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그 나이에서 드문 모습.
'경청하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나'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어른, '꼰대'라고 이야기하면 상대방의 의견은 듣지 않는 사람이죠.
틀렸든 옳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합니다.
반대 증거를 들이밀어도, 다양한 변명으로 포장하고 '내가 맞아!'라고 우깁니다.
사실, 이건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이긴 해요.
나이라는 '권력처럼 느껴지는 비권력'을 쥐고 흔드는 게 나이 든 사람이라서 더 드러날 뿐.
하지만 유시민쌤은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다가도, 본인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생각을 바꾸고, 자신이 틀렸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처음 그런 모습을 본 건 알쓸신잡의 모습이었지만, 그 어떤 글이든 방송이든 늘 그러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스스로 반성하고, 아집이 아닌 진실을 통해 성장하고 싶기에' 그러한 유시민 쌤을 롤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최근 유시민 쌤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역시 제40대 롤 모델이시구나.
라고 깨달았습니다.
겸사겸사 예전의 롤모델은 누구였을까?라고 돌이켜보았습니다.
10~20대의 롤모델은 서태지 님이더라고요.
학력이 없어도, 빽이 없어도, 실력만 있으면 세상을 뒤엎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구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려면, 결국 실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꾸준히 공부를 놓지 않게 해 준 고마운 롤 모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30대의 롤 모델이 없었습니다.
어? 라는 생각과 함께 8년 전,
30대였던 제 인생이 한번 무너졌던 시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찬 물에 개구리를 넣고, 천천히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자신이 삶겨가는 걸 모른다고 합니다. 8년 전 제가 딱 그랬습니다.
8년 전 저는 꽤 큰 게임 회사의 그래픽 팀장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원래 작은 회사였던 곳은 큰 회사에 인수되어 재미가 아닌 돈만 좇는 곳이 되었고, 팀원들은 불만이 가득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팀장으로서 위아래를 모두 신경 써야 하는 중압감에 눌려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계속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전 팀장이었으니까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준비하던 차였습니다.
팀원 중 한 명이 이야기하더라고요.
'이렇게 열심히 해봤자 어차피 안될 텐데요.'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주변에 미래보단 과거에 머문 좀비가 가득한 세상.
그런데 내가 지키고, 내 등을 맡겨야 할 팀원이 사실은 이미 좀비로 변해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팀장의 소름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버텨야 했습니다. 팀장이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요즘 회사 재미있어?"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재미? 난 팀장인데? 그런 걸 신경 쓰곤 일을 못하는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있던 저에게 아내가 조곤 조곤 이야기했습니다.
요즘의 제가 예전의 저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재미있게 일을 하고, 성장하던 제가 달라졌다구요.
순간, 팀원이 던졌던 질문과 그때의 소름이 다시 떠오르며 깨달았습니다.
사실 제가 무서웠던 건 팀원이 좀비라서가 아니었어요.
'주변에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과연 아직까지 인간인가? 아니면 나 역시 인간인 척하는 좀비는 아닌가? 난 이미 삶긴 건가?'라는 질문을 무의식적으로 던지면서 생겼던 공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거울을 봤다면, 아마 반쯤 녹아내린 좀비를 마주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몰랐던 지점을 아내가 정확히 짚으면서 저는 우르르 무너졌습니다.
아내를 끌어안고 1시간가량 정신없이 펑펑 울었어요.
그런 저를 토닥거리며 아내는 말했습니다.
"회사 때려치고 쉬어. 내가 돈 벌어 올게"
너무 멋진 아내님.
아내 말대로, 정확히는 아내가 퇴사 처리까지 척척 준비해서 진행해 준 덕분에 저는 11년 다닌 회사를 때려치웠고, 6개월 팽팽 놀았습니다.
그 경험 덕분에 지금 행복하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도, 돈도 적당히 벌고, 특강도 짬짬이 하면서 살고 있는 제가 될 수 있었어요.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절 좀비에서 구해주신 아내에게 늘 감사하고, 늘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그저, 회사 윗사람이 나빠서, 내가 너무 바빠서 내 삶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30대 때에만 쏙 빠진 '롤 모델'의 부재도 한몫했던 것 같아요.
롤 모델을 만드는 것은 '나는 이렇게 살아갈 거야'라는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한 사람의 삶으로 압축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면서 '이 사람처럼 살면, 이 사람과 같은 모습을 가질 수 있어'에 대한 뚜렷한 근거가 됩니다.
GTD에서 프로젝트를 설정할 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결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향해서 가야만 자신이 원하는 걸 제대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눈에 보이는 결과에는 보통 참고할 수 있는 비슷한 결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보고서라면, 내가 따라 할 멋진 보고서 양식이, 그림이 목표라면 선배들의 멋진 그림이 내가 참고할 요소가 됩니다.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프로젝트입니다.
내가 죽을 때야 비로소 마무리되는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테피스트리죠.
삶이 프로젝트라면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결과'를 위해 내가 참고할 누군가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걸 참고하면서 전진할 수 있지요.
그런 목표한 삶이 없다면 그 삶은 그저 살아가기 위한 삶, 주변에 휘둘리며 고통받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을 살아가는데 참고할 다른 사람의 결과가 바로 '롤 모델'이구요.
8년 전 저는 제 삶의 목표가 아니라, 회사와 주변, 가족과 팀원을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뚜렷한 방향성이 없었기에, 저는 주변에서 저를 두들기는 것들을 피해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롤모델이 사라지자, 제 삶 역시 방향을 잃었습니다. 제가 잘 살고 있는지 비교할 대상이 사라졌으니까요.
아내가 옆에서 제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헤매고 다녔을 것 같아요.
롤 모델이란 말은 좀 고루한 느낌입니다.
'난 나 본연의 모습으로 살꺼야'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사실 롤 모델은 불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전 제 잘난 맛에 살고 내가 인생을 만들어갈꺼야!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롤모델은 유시민 쌤이에요'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롤 모델은 누군가를 생각 없이 좀비처럼 따라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내 삶의 방향을 정하고, 삶의 정확한 형태를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틀리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검증하는 작업입니다.
그림으로 치면 롤모델은 모작의 대상이 아니라, 내 그림을 위한 참고자료에 가까울 것입니다.
방향성 없이 시작한 그림이 결국 시간만 보내고 무의미한 그림이 되듯, 생각 없이 시작한 글이 명작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삶을 보내기 위해서 롤모델을 필요합니다.
당신의 삶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나요?
혹시 제자리 맴돌고 있진 않나요?
삶이 무너지기 직전으로 느껴지는 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을 한' 롤 모델을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