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휴가수당이 없다고요?

미사용 연차휴가와 휴가사용촉진조항

by 김영호 노무사

“연차휴가를 못 썼는데, 수당을 안 준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팀장님.”

“아, 글쎄. 인사팀에서 그렇게 연락이 왔어. 나도 올해 연차휴가수당 못 받았어. 민재씨만 그런 거, 아니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날아온 월급명세서를 보고, 직원들이 술렁였다.

문기의 회사에서 13월의 월급이란, 연말정산만을 일컫는 용어가 아니었다. 연말에 지급되는 연차휴가수당도 그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근속기간에 따라 15일 치부터 25일 치의 연차휴가수당이 지급되었다. 근속기간이 긴 노동자들은 거의 한 달치 월급을 받는 셈이었다. 쉼을 포기하고 일을 택한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의 성격이 강했다.


근로기준법 제60조(연차 유급휴가)
① 사용자는 1년간 80퍼센트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15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
④ 사용자는 3년 이상 계속하여 근로한 근로자에게는 제1항에 따른 휴가에 최초 1년을 초과하는 계속 근로 연수 매 2년에 대하여 1일을 가산한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 이 경우 가산휴가를 포함한 총 휴가 일수는 25일을 한도로 한다.



민재는 근속기간 3년 차 직원이어서, 올해 15일의 연차휴가가 부여됐다. 내년에는 가산휴가 1일이 더해져서 16일이 부여된다.

연차휴가를 다 사용하는 직원들은 많지 않았다. 연차휴가를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직원도 있었고, 연차휴가수당을 더 받기 위해 연차휴가를 쓰지 않는 직원도 있었다. 팀장이 눈치를 줘서 사용하지 못하는 직원도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연차휴가를 다 사용하는 직원들은 거의 없었다.

민재도 마찬가지였다. 연차휴가를 다 쓰지 못했다. 여름휴가철이 가장 바쁜 시기라서 조금은 여유가 있는 가을에 5일의 연차휴가를 사용했다.


그마저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 얻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연차휴가수당이라는 13월의 보너스로 보상이 된다는 생각에 쉼을 확보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런데, 12월의 월급명세서에는 연차휴가수당 항목에 어떠한 숫자도 찍혀 있지 않았다. 창 밖으로는 월급명세서의 깨끗한 여백처럼, 새하얀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첫눈은 깨고 싶지 않은 낭만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독한 현실일 뿐이다. 12월의 크리스마스에는 쉼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발단은 7월 1일에 날아온 문서 한 장이었다. 전 직원에게 발송된 문서였다. 민재의 책상 위에도 똑같은 양식의 문서가 하나 놓여 있었다.


“연차휴가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서 근로기준법 제61조에 따라, 연차휴가 사용계획서를 송부해 드립니다. 사용하지 아니한 휴가일수를 첨부해 드리오니, 아직 연차휴가를 다 사용하지 못한 직원들은 휴가 사용계획서에 휴가 사용 시기를 적어서 통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사용일수 전부에 대한 사용 시기를 다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민재는 그 문서 한 장이 어떤 의미인 줄 몰랐다. 그냥 연차휴가를 가급적이면 다 사용하라는 설득 내지는 권면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급한 대로 팀장과 상의를 한 다음에, 연차휴가 사용 시기를 적어서 인사팀으로 발송했다. 자신의 손으로 적은 그 시기에 연차휴가를 다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남아 있는 한 방울의 기억조차 증발할 정도로 무더운 여름이었다. 7월의 문서 한 장은 그렇게 민재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민재씨, 내일 연차휴가 쓰겠다고 한 날, 아냐? 쓸 수 있겠어?”


‘아, 내일이 연차휴가 쓰겠다고 적어낸 날이었구나...’


팀장이 부하직원들의 연차휴가를 반겼다면 의문문을 사용하진 않았을 게다.


민재는 가볍게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고, 팀장님. 지금 우리 팀 사정에 그게 가능하겠어요? 전, 그냥 연말에 돈으로 받을랍니다.”

“회사일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일 연차휴가 갔다 와. 괜찮으니까.”


팀장이 평서문을 쓰는 순간,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가정을 돌봐야 했던 민재도 쉼보다 돈을 원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결합되어 있었다.




“아니, 위원장님.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연차휴가를 보상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요? 지금까지 휴가 쓸 사람은 휴가 쓰고, 안 쓰는 사람은 보상을 해 왔잖습니까? 하루아침에 이게 뭔 일이랍니까?”


마치 문기에게 얘기하면, 무슨 해결책이라도 생길 것처럼 민재가 말했다.


“연차휴가사용촉진조항을 활용한 거야. 그거.”

“네? 연차휴가사용촉진조항이요? 그게 뭐래요?”

“좋게 얘기하면, 가급적 휴가를 쓰라는 조항. 안 좋게 얘기하면 돈 안 주겠다는 조항이야.”


관행과 다른 무언가가 주위에서 발생했다면, 독수리의 눈동자같이 매섭게 그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은밀하게 진행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다.

하지만, 현재의 노조에게 그런 감시자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노조인지, 동호회인지 알 수 없는 단체였다. 예스만을 외치는 예스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단체협약으로 연차휴가촉진조항을 활용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노조가 앞장섰다.


“이제, 우리도 삶의 질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쉼의 가치를 고민해야 할 시기입니다.”


노조 위원장이 소리를 높여 외친 것이 기억났다. 쉼의 가치는 중요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본급이 낮은 우리나라의 급여체계에서 연장근로수당이나 연차휴가수당 같은 부가적 수당들이 사실상 임금을 보전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쉼을 버려야 했고, 쉼을 취하긴 위해선 돈을 포기해야 했다. 휴식과 보상이 동지가 아니라, 적이 되어 있는 문화였다. 쉽게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연차휴가촉진조항이 만들어진지 꽤 시간이 흘렀다. 법에서 정한 절차대로 휴가 사용을 독려하게 되면, 사용하지 않은 연차휴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보상해줄 의무가 없었다. 돈을 버리고 쉼을 취하겠다는 철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현실은 간교한 여우와도 같았다.


쉼도 버려지고, 돈도 증발해 버린 사업장이 적지 않았다.


7월 1일에 연차휴가 사용계획서가 날아온 것은 휴가촉진 절차의 첫 단계였기 때문이다.

연말까지 연차휴가를 사용해야 하는 사업장에서 연차휴가사용촉진조항을 통해 미사용 휴가에 대한 보상의무를 면제받기 위해서는 7월 1일부터 7월 10일 사이에 근로자에게 남아 있는 연차휴가를 언제 사용할지 통보해 줄 것을 서면으로 촉구해야 한다.


“그런데, 민재 네가 연차휴가를 언제 쓸지 통보해준 거잖아. 그러면, 그때 연차휴가를 써야 해. 안 쓰더라도 회사가 금전으로 보상할 의무는 없다는 거지.”

“네? 그래요? 그러면 제가 언제 연차휴가를 쓸지 통보를 안 해 주면 되겠네요?”

“법을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어 놓았겠니? 만약에 근로자가 10일 이내에 휴가사용시기를 통보 안 해 주면 사용자가 사용시기를 통보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어. 10월 말까지.”


근로기준법 제61조(연차 유급휴가의 사용촉진) 사용자가 제60조제1항 및 제4항에 따른 유급휴가의 사용을 촉진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조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로자가 휴가를 사용하지 아니하여 제60조제7항 본문에 따라 소멸된 경우에는 사용자는 그 사용하지 아니한 휴가에 대하여 보상할 의무가 없고, 제60조제7항 단서에 따른 사용자의 귀책사유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본다.

1. 제60조제7항 본문에 따른 기간이 끝나기 6개월 전을 기준으로 10일 이내에 사용자가 근로자별로 사용하지 아니한 휴가 일수를 알려주고, 근로자가 그 사용 시기를 정하여 사용자에게 통보하도록 서면으로 촉구할 것

2. 제1호에 따른 촉구에도 불구하고 근로자가 촉구를 받은 때부터 10일 이내에 사용하지 아니한 휴가의 전부 또는 일부의 사용 시기를 정하여 사용자에게 통보하지 아니하면 제60조제7항 본문에 따른 기간이 끝나기 2개월 전까지 사용자가 사용하지 아니한 휴가의 사용 시기를 정하여 근로자에게 서면으로 통보할 것


법으로 정한 절차에 따라 연차휴가를 촉구했다면, 남아 있는 연차휴가일수에 대해서 보상할 필요가 없었다.

돈 대신 쉼이 주어졌다면, 그나마 법의 생각대로 현실이 움직이는 거였다. 하지만, 쉼도 앗아가고, 돈도 주지 않는 형태로 법이 악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문기와 민재의 사업장도 그랬다.


“아니, 사용 시기를 정했더라도 바빠 죽겠는데, 어떻게 휴가를 씁니까? 상사들도 은근슬쩍 눈치를 주고요. 그러면 적어도 돈은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게. 노동조합이 조금 협상을 해서, 어느 정도는 보상을 하도록 단체협약을 체결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노조야 뭐... 민재 너도 알잖아... 어용인 거... 저번에 창립기념일도 노조위원장이 합의해서 연차휴가로 사용한 거, 기억 안 나?”


근로자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하면 특정일을 연차휴가로 갈음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근로기준법 제62조(유급휴가의 대체)
사용자는 근로자대표와의 서면 합의에 따라 제60조에 따른 연차 유급휴가일을 갈음하여 특정한 근로일에 근로자를 휴무시킬 수 있다.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으면, 그 노동조합이 근로자대표가 됐다.

모든 법은 선용되기도 하고, 악용되기도 한다. 많은 기업에서 이 조항을 악용해서 쉬기 싫은 노동자들을 억지로 쉬게 하기도 했다. 법정공휴일을 연차휴가로 갈음하는 사업장도 많았다.

임금의 양극화만큼 쉼의 양극화도 심화되어 갔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블랙홀에 빠진 듯, 그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퇴근길에도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 민재의 머리 위에 쌓였다. 무거웠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가 땅을 향했다.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목적지도 없는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갔다.

대설경보가 발령되었다.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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