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기간제 노동자의 계약기간 만료 시 연차휴가
"뭐라고? 주은씨? 연차휴가수당을 달라고? 줬잖아. 연차휴가수당! 다른 팀에서 근무한 기간까지 합해서, 우리 회사에서 딱 1년을 근무했지? 그래서 연차휴가수당 15일분 챙겨줬잖아? 퇴직금도 지급했고. 깔끔하게 정리한 거, 아니었나?"
정대리의 목소리가 커지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자신이 있거나, 자기보다 약하거나.
다른 팀원들이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전화기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주은씨에게 정대리는 알량한 자기의 권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딱 1년 근무하고 나간, 기간제 노동자, 주은. 정대리보다 약한 존재였다.
자신이 지나치면, 교만이 되고
교만이 지나치면, 무지가 된다.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으려면, 겨자씨 같은 사소한 질문 앞에서도 겸손해야 한다.
하지만, 정대리는 자신의 무지를 동네방네 떠들고 있었다. 한 기간제 근로자의 정중한 질문 앞에 정대리는 겸손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은씨를 윽박질렀다. 네 까짓 게 뭐길래 대기업의 정규직 대리를 귀찮게 하냐는 말투였다.
'실력도 쥐뿔 없으면서, 자기 부모 백으로 들어온 주제에. 참 가지가지한다.'
민주는 생각했다.
"정대리, 무슨 일이야? 주은씨가 뭐라 그래?"
통화를 끝내고, 자기 분을 못 이겨 씩씩, 거리고 있는 정대리에게 팀장이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 회사가 연차휴가수당, 덜 지급했대요. 11일분, 더 줘야 한다고..."
"응?"
"지급 안 하면, 노동부에 찾아갈 거라고..."
"그거, 정대리가 깔끔하게 정리한 거, 아니었어? 주은씨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뭐, 자기도 법이 바뀐 걸 몰랐는데 누가 주은씨한테 연차휴가수당, 더 받을 수 있다고 얘기했나 봐요."
정주은.
2017.6.1부터 2018.5.31까지 일한 기간제 노동자.
교육팀에서 3개월간 근무를 했고, 바로 이어서 인사팀에서 민주가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비운 자리를 대신했다.
맡겨진 일은 무난하게 처리하는 정도,라고 했다. 1년간만 계약한 기간제 노동자에게 더 이상의 충성심을 바라는 것은 탐욕이겠지... 민주는 생각했다.
교육팀과 인사팀은 다른 팀이었지만, 같은 회사에서 1년을 이어서 근무했다.
"아, 그래서 우리 회사가 퇴직금, 지급했잖습니까? 팀장님. 그 친구 보기보다 욕심이 많네요. 연차휴가수당도 한 번 찔러봤을 겁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팀장님은 아무 염려하지 마세요."
'기간제 근로자가 어떠한 확신도 없이 거대한 대기업을 상대로 찔러봤다?'
팀장은 뭔가 찜찜했다.
정대리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팀장은 조용히 민주를 호출했다.
민주도 이런 식으로 정대리와 자꾸만 엮이는 게 싫었지만, 사회생활이란 게, 다 그런 거라며,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거미가 풀어놓은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모든 관계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빠져나오려고 허우적대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내려놓게 된다. 때론 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론 적이 되기도 했다.
한 번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기 쉽지 않았다. 정대리와는 그저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었다. 어떠한 인간적인 호감도 느낄 수가 없는 사이였다.
"연차휴가, 정대리 말 믿어도 되는 거야?"
"..."
"정대리가 또 실수한 거지? 그렇지? 안 그래도 다른 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 자잘한 실무는 정대리한테 맡겨 둔 건데... 휴. 내가 죄인이다, 죄인이야..."
정대리의 실력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실무 이슈 중 하나였다.
2018. 5. 29. 자로 연차휴가에 대한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된 건, 정대리도 알고 있었다. 다만, 디테일한 실무지식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런데 실력은, 그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에서 결정된다.
주은은 민주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회사를 소개해 준 것도 민주였다. 단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출산휴가를 신청할 때 굳이 사람, 새로 뽑을 필요 없이, 옆 팀에 있는 주은씨를 우리 팀에서 이어서 계약하면 되지 않냐고, 은근슬쩍 조언을 해 준 것도 민주였다.
"언니, 그런데 정대리는 어떻게 회사에 들어왔대요?"
"왜? 관심 있어?"
"예? 그 진상을요? 언니는 잘 모르죠? 회사에 있는 비정규직들에게는 아주 유명해요. 쓰레기라고..."
주은이 회사를 나가고 난 후, 며칠 후에 만난 식사자리에서, 주은은 정대리를 술자리의 안주처럼 질겅질겅 씹어댔다. 주은의 입을 통해 등장한 정대리는 앞과 뒤가 달랐고, 낮과 밤이 달랐다. 팀장 앞에서의 모습과 비정규 노동자들 앞에서의 모습이 달랐다. 대기업의 정규직 인사팀 대리라는 신분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파견업체 콜센터 직원들과 관리자들에게도 그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진실은 은폐되었다. 언젠가 승진하면, 자신들의 생사여부를 결정할 수도 있는, 미래가 촉망되는 대기업의 인사팀 직원이었다. 정대리는 그 신분제도의 약점을 야비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동료들은 몰랐다.
"연차휴가수당, 더 달라고 해. 주은이, 네가 전화해서. 너, 연차휴가수당 더 받을 수 있어. 앞으로 우리 회사 입사할 거, 아니면..."
근속기간이 1년 미만인 노동자에게는 매월 개근할 때마다 1일의 연차휴가를 부여해. 그리고 근속기간이 1년이 되고 1년간 출근율이 80% 이상이면, 15일의 연차휴가를 부여해야 하고...
민주는 주은에게 차근차근 연차휴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언니. 그래서 회사에서 저한테 15일 치 연차휴가수당, 지급했어요. 1년 근무했다고... 그러면, 되는 것 아니에요?"
"응. 더 받을 수 있어. 법이 바뀌었거든."
"네?"
"2017년 5월 30일 이후에 입사한 사람들은... 법이 바뀌었어. 정대리가 그걸 정확하게 알 리가 없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언니."
"응응. 별로 어렵지도 않아. 예전에는 근속기간 1년이 될 때 발생한 15일의 연차휴가 속에 근속기간이 1년이 안될 때 발생한 11일의 연차휴가가 포함 됐거든. 1년 되기 전에 연차휴가를 쓰면 15일에서 쓴 휴가일수만큼 공제를 했어. 쉽게 얘기하면 2년 동안 연차휴가를 15일 쓸 수 있는 셈이었지. 그런데, 이제 근속기간이 1년 되기 전에 발생한 11일의 연차휴가를 따로 줘. 1년 되기 전에 11개. 1년 될 때 15개를 따로 주는 거지. 즉 2년 동안 연차휴가를 최대 26일 쓸 수 있는 걸로 바뀐 거지"
주은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민주는 레스토랑의 비어있는 부분에 종이를 놓고 그림을 그려주었다. 때로는 말보다 그림 한 장이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림 그려주니까, 좀 이해가 되지?'
"아, 그러면 1년 되기 전에 발생한 연차휴가 11일을 별도로 쓸 수 있는 거니까, 2년간 연차휴가를 26일을 쓸 수 있는 거네요? 그런데... 전 딱, 1년간 근무하고 나왔는데도 그게 적용되는 건가요? 5월 31일 날 그만뒀잖아요? 딱 1년 될 때.."
아마도 정대리는 퇴직일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연차휴가수당을 왜 주는지에 대한 판례법리도. 실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다. 낙하산들의 특징, 같았다. 여기서 무너져도 다시 자신들의 부모가 책임져 줄 거라는 미성숙한 아이 같은 믿음, 같은 거랄까...
"주은아, 연차휴가수당이잖아. 돈. 그지? 왜 그 돈을 주는 건지 생각해 봤어?"
"열심히 근무했다고 보상해 주는 거, 아닐까요?"
"사실 휴식을 근무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네 말대로 보고 있어. 열심히 근무했으니까, 유급으로 쉬게 해 주는 거라고 말이야. 그러면 15일을 유급으로 보상해 주는 건 뭐 때문인 걸까? 그다음 해에 일을 해야 하니까 주는 걸까? 아니면, 1년 동안 수고했으니까, 주는 걸까?"
"아, 언니. 알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1년만 근무하고 나가더라도 1년 동안 근무한 거니까, 그 대가로 15일을 주는 거군요? 11일은 이미 발생한 거고요..."
"빙고!"
주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언니 저는 5월 31일까지만 근무했잖아요. 그러면 6월 1일이 되기 전에 그만둔 거니까, 15일은 발생하지 않는 것 아닌가요?"
"그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내용이야. 5월 31일은 마지막 근로일이야. 네 퇴직일은 마지막 근로일의 다음날, 즉 6월 1 일인 거지. 넌 근속기간 1년을 채운 거고... 마지막 근로일과 퇴직일 개념은 엄청 중요한 건데, 보통 인사팀 직원들도 모를 때가 많아."
근로를 제공한 날은 고용종속관계가 유지되는 기간으로 보아야 하므로 별도의 특약이 없는 한 그 다음날을 퇴직일로 간주함. (2006.9.26, 임금근로시간정책팀-2862)
법 개정에 따라 1개월 개근시 1일씩 발생하는 유급휴가도 별도로 인정되는 만큼, 개정법 시행 이후 1년 기간제노동자의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경우 최대 26일분의 미사용수당을 지급하여야 함.(고용노동부, "개정근로기준법 설명자료", 2018. 5.
주은이 노동부의 설명자료를 들고 나타났다.
"대리님, 제 퇴직일은 2018년 6월 1일입니다. 그리고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1년 미만일 때 발생한 연차휴가 11일, 1년 근무 후 발생한 연차휴가 15일이 별개로 발생되고요. 이거, 제가 억지 쓰는 거, 아닙니다. 노동부 자료라고요. 법원 판례에 따른 해석이기도 하고요..."
노동부의 조사 때문에, 이전에 인사팀장이 경질된 마당에 다시 노동부의 조사를 받으러 갈 수는 없었다. 정대리의 기안으로 다시 연차휴가수당을 지급했다. 팀장은 인사담당 이사 앞에서 온갖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이사실에서 나온 박팀장은 누가 들으라는 건지 알 수 없어도,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앞으로 기간제 전부 다 11개월로 체결해! 알겠지?"
권리가 회복된 줄 알았는데, 다시 아래로 고통이 전가되었다. 위로 향해야 할 요구들이 쓰나미처럼 아래로 흘러갔다.
인간이 사라진 법(法)은, 잔인하고 냉정했다.
물이 아니라, 칼 같았다.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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