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봇 Jan 03. 2024

함께 살며 알게 된 친구의 성인 자폐증

얼마 전 일본에서 친구가 방문했다. 계속해서 급등하는 항공료와 높은 달러 환율로, 미국 구석에 박혀 있는 우리 집까지 먼 길을 와 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국도 아닌 일본에 사는 친구가 대뜸 우리 집에 오겠다고 선언했다. 외모는 초등학생처럼 어려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의 언니로, 내가 베트남에 살 때 만난 사람이다. 무료 요가 수업에서 친해졌는데, 당시 그녀는 베트남에서 계약직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으로, 그녀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두세 번 따로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고, 어쩌다 보니 내 결혼식까지 오게 되었다. 그 후로 멀리 떨어져 지내며 자주 보지는 못 했지만, 종종 안부 인사를 묻고, 가끔 내가 일본에 갈 일이 있을 때 한 번씩 보고는 했다. 미국에서 심심하게 지내면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여기 놀러 오라고 했는데, 대뜸 그녀가 진짜 놀러 오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지인인 내가 살고 있으니 지금이 방문하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 역시 멀리서 친구가 여기까지 온다는 사실에, 며칠 동안 어디를 데려가면 좋을까, 뭘 먹으면 좋을까 즐겁게 고민하며 친구가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내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사실 즐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들었다. 친구가 놀러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는데, 왜 막상 이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이 이리 즐겁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문제는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는 데 있었다. 


일단, 식성이 너무도 독특했다. 먹는 음식이 빵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친구를 제일 처음 데려간 외식 장소는 멕시칸 식당이었다. 미국에서 제일 흔한 외식 장소고, 맛도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 가볍게 배를 채우는 데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식당에서 메뉴를 보던 중 그녀는 대뜸 당황스러운 말을 했다. 


“나 고기를 안 먹어.”  

“그래? 채식주의자야? 전혀 몰랐네.”

“채식주의자는 아닌데, 고기를 싫어해.” 


그래서 고기 대신 두부와 채소들만 들어간 한 그릇 음식을 시켰는데, 또 먹지 않았다. 올리브도, 아보카도도, 토마토도 싫어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두부는 맵다고 먹지 않았다. 두부가 맵다고? 

그녀가 매운 음식을 못 먹는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맵기의 기준이 다 다르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두부가 맵다는 건 도대체 맵기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매우 혼란스러운 발언이었다. 그때부터 끼니때마다 무슨 식당을 데려가야 하는지가 내 최대 고민이 되었다. 친구가 안 먹는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쌀, 술, 특정 야채 등 매 끼니마다 새롭게 먹지 않는 식재료들이 등장했다. 평생을 아시아에서 산 사람이 쌀을 안 먹는다는 것도 매우 신기했다. 미국에 살며 웬만한 편식쟁이들을 다 만나봤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편식을 자랑하는 이가 바로 이 친구였다. 결국 그녀가 먹는 것은 빵 밖에 없었다. 빵과 초콜릿처럼 설탕 가득 들어간 단 음식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난 거 같이 먹는 게 인생의 낙인 나에게,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현저하게 적은 친구와 계속 밥을 먹는 건 생각보다 매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단 거 싫어하고 쌀 안 먹으면 수전증이 오는 정반대의 식단을 갖고 있어, 밖을 돌아다니다 밥때만 되면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식사 외에도 함께 하는 나머지 즐겁지 않았던 이유는 대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과 알고 있는 것들이 매우 한정적이었다. 바닷가 마을이라 바다에 데려갔더니 바다를 별로 안 좋아한다길래, 그럼 산에 가자니 산도 싫다, 도시는 사람 많아 싫다는 답변이 돌아와, 나보고 어딜 데려가라는 건지 난감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콘셉트로 꾸며진 술집에 데리고 가도 헤밍웨이를 몰라 좋아하지 않았고, 쿠바 샌드위치 가게에 가도 쿠바가 뭐냐고 물어봤다. 바이든 대통령 사진을 들고 피켓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며 저 사진 속 사람은 누구냐고 했고, 영국 여행기를 얘기하니 영국에서는 영어를 쓰냐는 질문을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공유하는 상식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질문하는 친구를 보며 약간 말문이 막힐 때도 있었다. 뭔가 지능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본인이 관심 있어하는 것 외에는 아예 흥미가 없어 알고 있는 범위도 매우 좁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인형과 디즈니 프린세스 영화였다. 


실제로 친구는 경유까지 합쳐 열 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기를 타며, 한 손으로 다 안기 힘든 크기의 봉제 인형을 갖고 왔을 정도로 인형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좋아하는 영화 등에 대해 물어도 주로 라푼젤 같은 영화를 얘기했다. 물론 나이에 따라 취향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주변 30대 중에 그렇게 프린세스 영화와 인형에 몰두하는 사람이 없어, 그녀의 취향은 신선함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몇 년간 친구 사이로 지냈을까 되돌아보니, 알고 지낸 시간만 길었지 실제로 함께 밥 먹은 일이 많지 않아 식성을 몰랐고, 전화 통화를 해도 하고 있는 일 얘기나 연애사 위주로 떠들었었기 때문에, 그 외의 주제에 대해 많이 얘기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니 여기 와서 새로운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할 때 말이 끊기는 일이 잦아 조용히 다닐 때가 많았다. 


때마침 교사를 하고 있는 지인의 전화가 왔다. 놀러 온 친구가 이러이러해서 잘 안 맞는다고 말하니, 지인은 의외의 의견을 내놓았다. 친구의 자폐 스펙트럼이 의심된다는 것이다. 심각한 편식도 그렇고 굉장히 좁은 관심도를 보이는 것, 다른 30~40대에 비해 성숙도가 낮은 취향과 대화 방식이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증상이라는 것이다. 지인은 교사 일을 하면서 자폐 증상을 보이는 학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있는데, 스펙트럼이라는 게 워낙 넓어 친구가 어느 정도 레벨의 증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녀가 보이는 많은 행동이 지인이 알고 있는 증상과 일치했다. 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니 그제야 우리 집에 와 있는 친구가 조금 이해가 되었다. 성인 자폐증에 무지했던 나는, 의사소통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는 친구가 설마 그런 문제를 겪고 있을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둔감한 내가 그것 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인의 말을 듣고 남들과 좀 다른 친구의 행동이 이해는 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확연히 다른 식성과 취향이 맞추어 질리는 없었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드디어 이것저것 원하는 대로 밥을 먹어도 되고, 집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나름 친구가 이곳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노력은 했어도, 너무 다른 사람과 한 집에서 계속 함께 하는 게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실 즐길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친구 본인이 더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이렇게 멀리 까지 날아온 친구의 용기에 감탄한다. 이제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 특징들을 보다 잘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 만날 때는 한층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때는 친구가 좋아하는 빵집이나 검색해 놔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에 온 이후로 내가 성탄절을 싫어하게 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