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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Dec 31. 2023

미국에 온 이후로 내가 성탄절을 싫어하게 된 이유

나는 이 세상에 성탄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날을 좋아했다. 반짝이는 트리에 하루 종일 눈을 떼지 못했고,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놓일 산타의 선물이 기대되어 24일 밤부터 두근거리고는 했다. 겨울이 되면 집에 작은 플라스틱 트리를 장식해 두고, 친척들과 모여 빵집 케이크를 잘라먹으며 산타에 대해 새벽까지 떠들었다. 산타를 더 이상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을 때도, 어쨌든 쉬는 날이었기에 가족들과 목욕탕에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 휴일을 즐겼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지인들과 올 한 해도 수고했다며 술 한 잔 기울이는 날이 성탄절이었다. 

  

미국을 난생처음 방문했을 때도 성탄절 시즌이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성탄절을 맞아 가족들을 방문할 때 함께 따라갔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별의별 성탄절 장식을 해 놓고, 가족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걸 보고 나서, 영화에서 표현된 미국인들의 성탄절이 과장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미국 영화 속에 들어갔다 나온 체험을 한 것 같아 매우 즐겁고 재미있었지만, 미국 거주인이 된 현재는 안타깝게도 더 이상 성탄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탄절 때문에 12월이 되면 스트레스가 찾아온다.

 

내가 미국에 온 이후로 성탄절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바로, 성탄절은 미국에서 ‘명절’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내게 성탄절은 그저 ‘공휴일’이었다. 나를 비롯해 우리 가족은 모두 종교가 없기에, 어릴 때는 그저 트리 꾸미고 선물 받는 날, 커서는 쉬면서 술 먹는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다르다. 특히 우리 시어머니에게 성탄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다.

 

날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시어머니에게, 성탄절은 무조건 온 가족이 모두 만나야 하는 종교적이고 가족적인 날이다. 그러면 나는 집에서 6시간 떨어진, 왕복 12시간 거리의 시가를 운전해서 가야 한다. 다른 대중교통이 없으니 운전으로만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가기 전부터 이미 지쳐 있다. 사실 시가 식구들을 만나는 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리 즐거운 것도 아니며, 우리 동네보다 더 시골인 촌동네에 있기 때문에, 가서도 집에 있는 거 외에는 할 게 없어, 그 동네에 있는 것만으로 약간의 우울감과 심심함을 느낀다. 


그리고 명절이니 당연히 명절 요리가 필요하다. 성탄절 음식이라는 게 사실 대단한 요리가 있는 건 아니다. 지역마다 가정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 우리 시가에서 먹는 음식들은 커다란 햄 구이와 파이, 스튜, 감자나 고구마 요리, 콩요리, 옥수수 빵 같은 것들이다. 시가에서 성탄절을 보내는 경우 내가 요리를 많이 할 필요는 없지만, 설사 음식을 내가 해야 한다 하더라도, 이미 도로 위에서 체력을 바닥낸 상태로 가기 때문에 뭘 하기도 힘들 것이다. 문제는 한국인인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은 없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기름지고 짭조름한 고기 요리와 설탕과 버터가 잔뜩 들어간 빵만 연이어 먹다 보면, 쌀밥과 매콤한 찌개를 갈구하게 된다. 명절이라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겠다 하는 기대감이 제로다. 


여기에 더해, 어릴 때는 받기만 하면 되었던 성탄절 선물을, 이제는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여기에서 오는 고민이 또 만만치가 않다. 시부모님께 뭐가 필요하냐 여쭤보면, 절대 대답을 해 주지 않으신다. 필요한 거 없다, 아무것도 사 올 것 없다는 말만 하신다.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빈 손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시가 식구들이 가까운 곳에 살지 않다 보니 뭐가 필요한 지 파악하기 쉽지 않은데, 그런 상태에서 머리를 쥐어 짜내 어떻게든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준비해 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선물을 고를 때까지 계속 압박감을 느낀다. 반대로 내가 선물을 받을 때도 압박감은 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선물을 받더라도 열심히 리액션을 해줘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이번 성탄절에는 퍼즐 선물을 받았다. 나는 손으로 만드는 그 어떤 것도 잘하지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집에 퍼즐이 존재한 적도, 내 손으로 퍼즐을 산 적도 없지만 나는 그 선물을 받고 매우 흥미롭고 관심 있다는 리액션을 보여야 했다. 물론 그게 선물을 준비해 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어느새 낡은 체력에 시니컬하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이제 이런 의무적인 선물 주고받기가 버겁다. 웃긴 건, 이 문화권에서 자란 남편조차 성탄절 선물 받기 리액션에 똑같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냥 깔끔하게 아무것도 안 주고 안 받고 싶은 것이 이 낭만 없는 부부의 속마음이다.

 

이제는 캐럴조차도 안 듣는데, 미국에서는 정확히 1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든 가게와 식당, 라디오에서 전부 캐럴만 틀어댄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한 달 내내 같은 음악만 들으면, 나중엔 그 음악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서 막상 성탄절 당일에 캐럴을 들으면 행복한 기분이 아니라, ‘이제 그만….’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딱히 종교적이지도 가족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않은 내게, 미국의 성탄절은 너무 가족적이며 감성을 요구하는 느낌이라 거기에 맞추다 보면 가끔은 에너지가 탈탈 털리는 기분이다. 친구들은 내가 외국인과 결혼해 외국에서 살다 보니, 유부녀들이 겪는 명절 스트레스는 없을 거라 부러워했지만, 그 형태만 좀 다를 뿐 어디나 명절 스트레스는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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