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곳은 바닷가 근처라 산이 없다. 트레일이라 부르는 등산로는 꽤 있지만 대부분 해안가를 중심으로 한 길이나 숲 트레일이기 때문에 ‘등산로’라고 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나는 사실 바다와 산 중 고르라면 무조건 바다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테네시라는 산 많은 지역에서 자란 남편은 젊어서부터 나 홀로 노지 캠핑을 즐길 정도로 산을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랜드 캐니언이나 요세미티 같은 국립공원 정복을 늘 꿈꾸고 있다.
지금은 더위가 살살 누그러드는 시기이기도 하고, 마침 내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있어 이를 핑계로 우리는 워싱턴 주 여행 계획을 짰다. 아무리 국내 여행이기는 하지만, 남쪽 끝에서 북서쪽 끝으로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비행기도 두 번 타야 하는 멀디 먼 거리다. 워싱턴 주를 여행지로 정한 이유는 바로 ‘레이니어 산(Mount Rainer)’에 가기 위해서다. 산을 잘 모르는 내게는 낯선 이름이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4,390m에 이르는 높고 넓은 산이다. 이곳에서 2박 3일 등산과 캠핑을 하고 시애틀로 넘어가 도시 구경을 할 생각이었다. 평소 짐을 간편하게 싸는 편이라 큰 가방은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텐트와 침낭부터 조리 도구까지 각종 캠핑 도구를 챙기니 이민 가방 하나 사이즈가 나와서 수화물로 보냈다.
늦은 시간 도착이라 첫 째 날은 공항 근처에서 자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산으로 향했다. 산이 넓어 어떤 등산로를 이용할까 하다 고른 곳이 ‘모위치’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는 곳이었다. 호수 근처에 캠핑장이 있어 텐트를 치기에도 좋았다. 그런데 캠핑장에 텐트를 치자마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미 정해 놓고 온 스케줄을 바꿀 여유가 없었기에 비가 온다고 이제 와서 돌아갈 수 없었다. 굵은 비가 아니니 이 정도면 맞으면서 등산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바로 예정된 등산로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산을 오르다 보니 부슬비가 점점 굵어져 장대비로 바뀌었다. 비가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워싱턴 주 날씨를 산에 오르자마자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등산로에는 흙탕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돌들이 워낙 미끄러운 탓에 넘어질까 평소보다 몇 배로 힘을 써 걸었더니 아픈 적 없던 무릎까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쉬고 싶어도 빗 속에 앉아 쉴 수 있는 곳이 없어 세 시간을 쉬지 않고 오르락내리락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닷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몸 어디 한 군데 안 젖은 곳이 없었고, 신발과 종아리는 걸을 때마다 튄 흙탕물에 엉망이었다. 이 정도로 고난도가 될 등산이라 생각 못 했기에, 일반 러닝화에 레깅스를 입고 등산 장비는 하나도 안 갖고 온 탓에 진짜 극기 체험이 따로 없었다. 설상가상 남편마저 허리 통증이 도져서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었다.
둘 다 거의 기다시피 산을 내려왔다. 그렇지만 텐트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움직이는 것마저 쉽지 않아 몸부터 녹여야 했다. 캠핑장 옆 주차장으로 돌아가, 있는 대로 히터를 최대치로 튼 후, 뒷좌석을 눕히고 차 안에 구겨져 옷을 갈아입었다. 그나마 대형 SUV 차량으로 렌트를 한 게 다행이었다. 사람 한 명 발 뻗고 있기 힘든 공간에서, 두 사람이 젖어서 뻑뻑해진 옷을 힘겹게 갈이 입으니 그것 만으로도 남은 에너지를 다 쓴 느낌이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 다섯 시였다. 산행으로 점심도 챙기지 않았기에 캠핑용 작은 프로판 가스를 틀어 물을 끓인 후 컵라면을 후후룩 먹고, 비가 그치길 기다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질 뿐이었다.
차 안은 잘 수 있는 여건이 충분치 않아 결국 비를 맞고 있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나는 겨울용 침낭을 갖고 와 그 안에서 만큼은 몸이 얼지 않았다. 문제는 한밤 중 화장실을 가기 위해 텐트 밖을 나설 때였는데,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수도도 전기도 들어와 있지 않은 화장실을 가는 게, 산행만큼이나 어려웠다. 말만 화장실이지, 사실 그 옛날 집 밖에 있던 시골 할머니 집 재래식 화장실과 똑같은 형태다. 다행인 건 암모니아 냄새를 죽이는 화학 물질이 뿌려져 있어 굳이 코를 틀어막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무섭지 귀신이 무섭냐고 외쳐대던 나도, 한 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깜깜한 산속을 걸으니 절로 소름이 돋아 발걸음이 자꾸 머뭇거렸다.
몇 시간 뒤 해가 뜨자 얼어붙어 있는 텐트를 보고 간밤의 비와 추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지퍼도 얼어 텐트에서 빠져나오는 게 힘들었고, 텐트를 다시 접기 위해 털어댈수록 얼음 조각이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텐트에서 잔 건지 얼음집에서 잔 건지 가늠이 안 되는 양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잘도 하룻밤을 버틴 게 신기했다. 그래도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른 근처 호숫가는 그 풍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물론 캠핑이 그런 것이 기는 하지만, 차 속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물과 전기가 없어 세수도 못 하고 얼어붙은 텐트에서 자면서, 내가 만일 인생이 잘못되어 노숙인이 되면 이런 생활이 일상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두려움이 드는 체험이었다. 미국에서는 도시로 갈수록 거리에서 노숙인들을 정말 많이 보게 되는데, 그들의 생활을 십 분의 1 정도 알게 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내게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오만가지 생각도 들었다.
보통은 등산과 캠핑을 하면 생각을 비우고 재충전을 하게 된다는데, 나는 오히려 노숙인 체험을 한 것만 같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긍정적인 효과인지 부정적인 효과인지 모르겠다. 캠핑을 캠핑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돌아갈 아늑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게 얼음 텐트에서 자고 난 후 가장 뼈저리게 느낀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