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미국 비자나 영주권을 간절히 바란다는 걸 알기에, ‘탈출’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조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내게는 ‘떠난다’보다 ‘탈출한다’는 말이 더 솔직한 표현이다. 나의 미국 생활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은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난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에 관심도 없었다가, 남편의 나라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온 것이었고, 생활 방식이 너무 안 맞아 우울증까지 겪었고, 곧 나아지겠지 하며 버텼지만, 매일 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만큼 간절히 미국을 떠나고 싶어진 지는 꽤 오래됐다. 미국 생활을 선택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미국에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았더라면 미국 이민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 정도로 나는 미국 생활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이민 온 지 정확히 1년 뒤부터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조금 더 내가 좋아할 만한 미국 도시가 어디가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결론적으로 나라는 사람한테는 이 나라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 계속해서 타국으로의 이사를 꿈꿔 왔다.
일단 운전을 싫어하는 나에게, 집 앞을 나서는 순간부터 차를 몰아야 하는 운전 사회인 미국은 간단한 외출조차 번거롭게 만드는 곳이며, 미국 남부 시골에 살고 있어 커뮤니티도, 할 것도, 다양한 음식도 부족해 도무지 내가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좀 더 할 게 많은 도시로의 이동도 고려해 봤지만, 미국에서 도시라고 말하는 곳들에서도 운전은 필수인 데다 높은 물가로 생활비가 배로 올라가며 더 높은 범죄율을 신경 써야 한다. 나는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동네를 걸으며 다양한 음식을 구경할 수 있고, 납득 가능한 물가에, 해가 진 저녁 때도 맘 편히 친구와 동네 공원에서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다. 물론 미국 내에 그런 동네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남편과 내가 둘 다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곳은 아직 찾지를 못 했다.
한국보다 자유로운 미국의 직장 문화는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무지 갈 곳 없고 자극 없는 미국 시골에서의 나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채워지지 않은 빈 껍데기로 허무와 우울만이 가득 찬 채 바스러지고 있었다. 넓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결국에 끝에 가서는 내가 나일 수 없게 가로막는 창살이 박혀 있는, 넓은 감옥에 살고 있다는 답답함에 나는 표정을 잃어갔고, 매년 새 해 이루고 싶은 걸 써볼 때 나도 모르게 ‘미국 탈출’이라는 단어를 꾹꾹 눌러쓰고 있었다. 어디서 사는 지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고립된 환경에서 마음으로만 자유롭게 산다는 건,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나 미국 살이를 힘들어하던 내가 쉽게 미국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역시나 남편 직장,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집의 중대한 수입을 지급하는 그 미국 회사가 외국에서 일하는 걸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 둘 다 집에서 일하는 재택근무자지만, 어디서 일하든 상관없는 나와 달리 남편의 회사는 ‘어디서 일하든 꼭 미국령 안에 있을 것’이라는 조건이 붙은 곳이다. 남편에게 회사를 관두고 미국을 떠나자라고 말하기에는 내 수입이 우리 두 사람을 배불리 먹여 살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기에 쉽사리 관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나의 괴로움은 더 깊어졌다. 남편을 데리고 원하는 곳으로 가서 살 능력도 없으면서, 현재 살고 있는 곳을 떠나고만 싶어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마음이 늘 혼돈의 상태로 날 지배했다. 나 역시 수입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남편의 미국 급여 수준을 따라잡기까지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하루 24시간 붙어 있는 남편이 그런 내 심리 상태를 모를 리 없었는데, 남편 또한 현재의 미국에 지쳐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 대화 끝에 남편 또한 미국을 떠나는 것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꽤 만족도가 높은 현재의 회사를 관두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고 했다. 결국 몇 개월간 친한 상사와 구체적인 회사 정책에 대해 알아본 후, 외국에 있어도 미국 시간에 맞춰 일하겠다는 조건으로 외국에서 일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미국 생활 4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