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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서 집 찾기 2

계약금을 보냈는데 집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by 라봇

우리가 집을 계약하겠다고 연락하면 좋아하며 바로 답이 올 거라 생각했던 기대와 달리, 담당 중개인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집이 다른 사람에게 나갔다는 연락조차 없었다. 밤늦도록 답이 없자, 조바심과 불안감이 극도로 치솟은 나는 자정부터 미친 듯이 다시 집을 찾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애용한다는 부동산 어플만 이용해서 중개인과 연락을 하고 집을 보러 다녔지만, 집을 계약하겠다고 했는데도 답이 없는 사람을 비롯해, 애초에 연락 자체를 무시하는 중개인들을 경험하고 나니 정석적인 방법으로는 집 찾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 한국은 아니어도 다른 나라들은 페이스북 페이지를 많이 활용한다는 게 생각나, 혹시 몰라 뒤져봤더니 말레이시아 집 매물에 대한 정보도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많이 공유되고 있었다. 신원 정보가 확실하지 않은 SNS를 통해 집을 구한다는 게, 그것도 이제 막 도착한 동남아에서 그런다는 건 걱정과 불안을 동반하는 일이지만, 일전에 베트남에 살았을 때도 같은 방법으로 좋은 집을 구한 적이 있었고, 지금은 이 방법 저 방법 다 따지고 할 만한 여유 따윈 없었다.


남편 역시 옆에서 같은 방법으로 집을 뒤지느라, 늦은 시간까지 우리는 한 침대에서 각자 말없이 손에 핸드폰을 얹고 바삐 움직였다. 다행히 당장 내일 집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람과 연락이 닿았고, 잠이 들기 전에 남편과 나는 각자 1건씩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둘 다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에 나온 매물이었다. 원하는 동네에서 우리 예산으로 갈 수 있는 곳이 한 곳 밖에 없어 최대한 그 아파트에 나온 매물을 보고 있었고, 집 구조는 같으나 층수와 딸려 있는 가구, 인테리어, 그리고 약간의 가격 차이를 기준으로 결정할 생각이었다. 1시간 간격으로 약속을 잡고, 먼저 남편이 연락한 집을 보러 갔다.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아파트는 평수는 작아도 질리지 않는 공원뷰와 깔끔한 동네가 매력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보러 간 집은 공원 뒤편 고속도로로 창이 난 곳이었고, 딸려 있는 가구들 또한 노부부인 집주인의 취향을 탔는지, 갈색과 검은색인 섞인 암갈색에 높이 또한 맞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집주인 부부는 직접 운전하며 동네 구경까지 시켜주는 등 매우 친절했지만, 집주인이 친절하다고 덜컥 마음에 들지도 않는 집을 계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계약하겠다고 연락한 중개인으로부터 제발 답이 오길 기다렸지만 연락한 지 24시간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노부부의 집은 지난밤 남편이 잡은 약속이었고, 내가 잡은 약속도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부부와의 대화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남편이 각각 잡은 약속이 사실 둘 다 이 노부부의 집이었던 것이다.

"오늘 또 다른 집 보러 갈 예정이 있어?"

"네, 한 시간 뒤에 중개인이랑 만나기로 했어요. 다음 약속도 이 아파트에 나온 매물이에요."

"우리도 한 시간 뒤에 다른 세입자가 집 보러 오기로 했는데? 혹시 네가 만나기로 한 중개인이 '카산드라'라는 여자 아니야?"

".. 어? 맞아요.."

남편은 집주인들과 직접 연락해 약속을 잡은 것이었고, 나는 중개인과 약속을 잡은 것이었을 뿐, 사실 같은 집을 대상으로 나눠서 약속을 잡았다는 게 드러났다. 중개인은 전날 구체적인 집 층수와 호수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각자 같은 아파트지만 다른 집을 보러 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망한 끝에 결국 중개인에게 이미 당신이 보여주기로 한 집을 봤으니, 오늘 약속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고 연락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만나자고 했다. 아파트 단지에 거의 도착을 한 데다, 이미 봤다는 노부부의 집 대신 다른 집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벌써 아파트를 떠난 뒤였다. 남편은 그래봤자 집이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고 이미 걸어온 거리를 다시 돌아가는 것도 지쳤으니, 어제 계약하겠다고 말한 중개인의 연락을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입장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이미 도착했다는 중개인과 이렇게 얼굴도 안 보고 취소하고 가는 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의도적인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남편을 카페로 보내고 혼자 다시 아파트로 되돌아갔다.


로비에는 '카산드라'라는 왠지 카리스마 넘치는 이름을 쓰는 중년의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다시 되돌아와줘서 고맙다며, 이중 약속이 된 노부부 집건은 아쉽지만 대신 다른 중개인들은 잘 모르는 따끈따끈한 매물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프리미엄 중개인이라며 어쩌고 저쩌고 말을 했지만, 솔직히 많은 중개인들이 하는 그냥 자기 자랑 같았고, 피곤한 마음에 그녀가 말한 '따끈한 매물'이 그다지 기대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 아파트에서만 그간 총 3건의 매물을 봤지만 이 집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다 갖줘져 있었다. 깔끔하면서 필요한 만큼만 있는 가구, 거실과 각 방마다 딸려 있는 에어컨, 주방과 거실 사이에 있는 미닫이 문과 욕실에도 유리문으로 구분되어 있는 샤워부스까지 (다른 집들은 이런 게 안 되어 있었다). 게다가 층수도 원하는 높이였고, 낮이고 밤이고 질리지 않는 예쁜 공원뷰의 집이었다. 주방 시설도 리모델링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심지어 월세마저 마음에 드는 숫자! 나는 바로 두 눈이 하트로 변했고, 동시에 이게 사귀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같이 왔다. 동영상으로 집을 찍어 남편에게 보내자, 그 또한 지금까지 봤던 집 중에 제일 낫다며 환호를 보냈다. 나는 중개인에게 바로 계약하겠다고 말했다. 뒤늦게 전날 계약건으로 연락했다가 말이 없었던 중개인에게서 알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우리는 그의 늦은 답변 덕분에 훨씬 더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한 상태였다. 일은 이렇게도 풀리나 보다.


계약하고 싶다면 계약금 일부를 먼저 보내야 한다는 중개인에 말에, 그날 오후 atm으로 계약금을 보냈다. 솔직히 그때 역시 사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당장 그 중개인의 신원을 빠르게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정말 믿고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아니 거의 베팅에 가까운 마음으로 돈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계약서를 작성하러 그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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