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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집주인

by 라봇

계약서를 쓰기로 한 날인데 만나기로 한 집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행여나 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집을 본 당일날 바로 계약금을 넣었는데, 사실 이 집이 사기인지 아닌지, 부동산 중개인이 진짜 중개인은 맞는지 말레이시아 초짜 외국인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타나지 않는 집주인에 너무나 불안했다. 다행인 것은 부동산 중개인은 약속시간에 맞춰 왔다는 것이다.


중개인이 여분의 집 열쇠를 갖고 있었기에 계약하기로 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집주인 없이 집 계약을 할 수는 없었다. 중개인은 잠시 집주인과 전화를 하겠다며 나가더니 그녀 또한 사라져 버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중개인은 아까 보지 못했던 서류를 들고 돌아왔다.

"이걸로 집주인 없이 계약을 할 수 있겠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집주인이 자기 서명을 한 계약서를 집 우체통에 두고 갔고, 그걸 중개인이 방금 전에 찾아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집주인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화 통화도 중개인과만 했고, 계약 후에도 집주인의 인증이나 서명이 필요한 것은 관리사무소에 직접 연락을 하거나,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아파트에 방문해 필요한 걸 두고 가거나 했다. 어쨌든 집주인의 자필 사인이 들어간 서류가 있으니 중개인이 대신해 우리와의 계약을 마쳤다. 평수는 매우 작지만 나름 방 세 개에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으로, 우리는 차가 없기에 주차 자리 할인을 받아 월세 2300링깃에 계약했다. 이 동네에서 월세가 제일 저렴한 아파트다. 옆 아파트들이 비싼 곳은 월세 6000링깃까지도 받는다고 들었는데, 그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다. 대신 이용할 수 있는 부대시설도 적기는 하지만 말이다.


무사히 집 열쇠를 건네받았을 때는, 드디어 말레이시아에서 제일 중요한 첫 발을 사고 없이 내디뎠다는 생각에 안심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24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멋진 공원 경치는 마지막까지 포기 안 하고 열심히 발품판 나한테 주는 선물 같았다.


계약한 집은 기본적인 가구가 딸려 있는 집으로, 큼직한 가구가 필요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새로 장만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남편과 나의 책상부터, 정수기와 각종 욕실. 주방 용품, 침구류까지, 하다못해 집에 쓰레기통 하나, 헤어 드라이기 하나도 다 새로 채워야 했으니 그날부터 쇼핑센터를 며칠이고 돌았다. 그리고 집에 딸려 있는 가구는 정말 그저 기본 가구였기에 사실 굉장히 불편했다. 쉼의 공간이어야 할 소파와 침대는 쓰면 쓸수록 몸이 아파오는 싸구려였기에, 발 받침대나 침대 매트리스, 빨래 건조대 같은 건 따로 사서 구비할 수밖에 없었다.


집은 당장 짐을 들고 들어가도 될 정도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싱크대 연결 호수가 끊어졌다던가 실링팬이 돌다가 멈춘다던가 하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때문에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중개인을 통해 연락하다가 굳이 집수리 문제까지 중개인을 끼고 할 필요가 있나 싶어 중개인으로부터 집주인의 연락처를 받았다. 그때까지도 집주인은 나에게 연락 한 통 없어서 진짜 존재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다행히 문자를 보내면 재깍재깍 답이 오고 수리공도 제 때 보내주는 등 집주인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는 좋은 사람인데, 아직까지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목소리 한 번 들은 적 없다. 심지어 내가 월세를 늦게 보내도 절대 먼저 내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집주인이 나에게 먼저 문자를 보낼 때는 아파트 공지 사항을 대신 알려줄 때뿐이다. 단언컨대 집을 떠나는 날까지 나는 이 집주인을 만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사건건 참견하고 문제 있어도 해결 안 해주는 집주인보다야 백배 천배 나은 셈이니 이 또한 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얻을 수는 없다고 했던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좋은 집주인을 상쇄시킬만한 대단한 이웃을 만났다는 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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