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별로 없는 말레이시아는 한국보다도 아파트를 더 높게 짓는다. 한국도 고층 아파트가 많지만, 아무리 높게 지어도 30~40층 짜리가 평균인 것 같은데, 쿠알라룸프르에서는 50층 짜리 아파트도 흔하다. 내가 집을 얻는 아파트도 총 51층까지 있으니 말이다. 높은 층수만큼 사람도 많이 산다. 한 층에 평균 8 가구 이상 있는데, 그게 51층까지 있으니 한 건물에 사람이 너무 과밀하게 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의외로 거주인이 많아서 생기는 문제는 없었다. 아파트 관리가 잘 되고 있어, 매일 층마다 있는 두 개의 큰 쓰레기 통이 잘 비워졌고, 복도 청소도 거의 매일 같이 하고 있어 아파트와 그 주변에 쓰레기가 쌓여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방음은 아주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복도에 나와 떠드는 게 아닌 이상 딱히 소음 공해도 없다. 반려동물을 키울 수 있는 아파트고, 바로 옆 집에는 어린애들이 사는데도 이웃들의 소리로 방해받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외로 방음도 괜찮다고 만족하던 중, 예상치 못한 아랫집의 공격을 받았다.
나는 잘 때 빛과 소리에 예민한 편인데, 어느 날 밤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쿵쿵거리는 소리도 아니고 명확하게 시끄러운 소리도 아닌데, 낮은 음역대가 집 전체를 울리는 소음이었다. 내가 환청을 듣나 싶어 가만히 있다가 확인하게 위해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러자 그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던 소리가 더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소리가 나는 건가 싶어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니, 웅웅 거리던 소리는 아주 명확한 언어의 소리로 바뀌었다. 바로 아랫집에서 나는 TV소리였다.
애초에 이웃이 TV 보는 소리로 잠이 깰 정도라면 아파트가 아니라 고시원 수준일 테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이 아파트는 방음이 나쁘지 않은 곳이다. 그런 아파트에서 아랫집 사람의 TV소리로 방해받는 건 예상 못 한 일이었고, 그가 TV로 이웃을 괴롭히는 방법도 예상 못한 방법이었다. 아랫집 사람은 본인 집에 있는 베란다를 비롯한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거실에 있는 TV를 최대 볼륨으로 틀어두고 있었다. 터미널이나 기차역 대합실에서나 틀어둘 수준의 최대 음량이었고, 그 음량을 막아줄 문은 전부 열어놨으니 TV소리가 마치 공사장 드릴 소리처럼 주변 이웃집들을 울려댔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처음에는 아랫집에서 파티를 하나 착각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그가 틀어둔 TV채널은 미국 뉴스인 CNN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뉴스가 나오길래 새벽 2시에 틀어놓고 이웃들한테 전하고 있나 궁금해 잠시 귀를 기울여 들어봤지만 별다를 거 없는 그저 일상 뉴스였다. 아랫집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는 상태여서, 고국이 그리워 남의 나라에서 지네 나라 뉴스를 크게 틀어놓는 미친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미친 인간과 새벽에 혼자 대적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잠을 못 자 짜증이 난 나는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창문은 죄다 열어놓고서는 현관문은 아주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나는 CNN 소리는 문과 벽이 없는 것처럼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초인종을 눌렀다. 집 안에서 내가 누른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웬걸,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누구냐고 물어보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무 반응 없는 그 집 앞을 서성거리다 1층에 당직을 서고 있는 경비원들에게 내려가 알렸다. 그들은 인터폰을 통해 아랫집으로 전화를 해보고, 집 앞으로도 찾아갔지만 경비원이 와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물론 TV소리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경찰까지 부를 요량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소음으로 신고가 가능한 지, 외국인이 신고해도 되는 지를 검색해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꿈쩍 앉던 아랫집 사람이 TV를 끄더니 베란다를 닫았다.
남편이 베란다로 나간 후, 혹시 가능할까 궁금해 아랫집 TV와 블루투스 연결을 시도해보려고 하자, 경비원이 올라와도 꿈쩍도 안 하던 이웃이 그제야 TV를 끈 것이다. 처음에는 혹시나 아랫집 사람이 TV소리가 이렇게 큰걸 모르나? 아니면 혹시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인가?라고 추측하며 최대한 그가 고의적으로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이걸로 명확해졌다. 이 집 사람은 이유는 몰라도 일부러 이러고 있는 것이다. 이웃이 찾아와도, 경비원들이 문을 두들겨도 집 안에서 꼼짝 앉고 있다가, 누군가 자기네 집 TV랑 연결을 하려고 하니 놀라서 그제야 TV를 끈 게 어이없었다.
그런데 이게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뒤로 며칠 걸러 한 번씩 같은 행각을 벌였다. 시간도 꼭 새벽 2시였고, 언제나 CNN방송이었다. 오후 2시여도 TV를 그렇게 쩌렁쩌렁 울리게 틀어 두면 욕을 안 하고는 못 배길 행동인데, 그걸 새벽 2시에 그러고 있으니 바로 윗 집인 우리를 비롯해 다른 이웃들도 미칠 지경이었다. 경비원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 또한 집에 찾아가고 인터폰으로 전화를 하며 할 수 있는 걸 했지만 아랫집 이웃은 계속해서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날이 밝자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이 CNN빌런에게 조금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찾아가 하소연했다. 그러자 직원은 자기들도 죽겠다며, 그 사람 때문에 여러 곳에서 항의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마침 내가 사무소에 갔을 때 그 빌런의 개인 연락처를 찾아낸 직원이 그와의 통화에 성공했고, 나는 옆에서 그 통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맨날 CNN뉴스만 틀어놓기에 미친 미국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꽤 나이를 드신 말레이시아 현지 할아버지였다. 그는 관리소 직원 말에 모든 걸 부인했다. 자기는 절대 밤에 그렇게 TV를 틀어댄 적이 없다고 무슨 소리냐며 큰 소리를 빵빵 쳐대는 것이다. 직원 또한 목소리를 높여, 당신 집에서 TV소음이 나는 걸 우리 경비원이 다 촬영을 해 증거가 있으며,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길 경우, 관리소에서는 경비원을 보내지 않고 직통으로 경찰을 보낼 거라 소리 질렀다. 그와 통화를 하고 있는 직원 또한, 이 할아버지 때문에 온갖 항의를 받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듯 보였다. 이 할아버지는 가족 없이 혼자 살고 있어 대신 말을 전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세입자가 아닌 집주인이라 함부로 아파트에서 내보낼 수도 없는 형국이라 했으니, 직원 입장에서도 이제는 경찰을 내세워 협박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리 사무소와의 통화 후, 다행히 새벽 2시의 CNN빌런은 굉장히 얌전해졌다. 공권력을 내세운 협박이 통해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협박을 무서워할 정도의 제정신인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밤마다 이런 이상한 행동을 벌였는지 의문이다. 분명한 건 의도적으로 그 시간에 소음을 만들어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건데, 괴롭히고 싶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왜 CNN을 틀어둔 건지 등 의아한 부분은 아직도 많다. 밤마다 당한 걸 생각하면 그 사정을 안다고 해서 딱히 그를 이해할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