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 친구도 만들고 취미활동도 하기 위해 독서 모임에 나간다. 한 달에 한 번 열리고, 그동안 주최자가 정한 책을 각자 읽고 와서 책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수다도 떠는 모임이다. 말레이시아 현지인들도 있고, 여기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상당히 많이 참가한다. 독서 모임에 나가면서 친해진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쿠알라룸푸르에서 2년째 일하고 있는 영국인 친구다. 말하는 것부터 행동도 굉장히 발랄하고 귀여워서,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는 대단한 긍정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다. 영국인은 시니컬할 거라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부순 사람으로, 작고 귀여운 액세서리와 캐릭터 인형을 모은다. 그녀와 친해진 계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음식이다.
음식이 맛없기로 유명한 나라 출신에, 이것저것 가리는 게 많고 까다롭다는 백인이라, 이 친구도 맨날 똑같은 것만 먹는 그런 식상을 가진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는 모임 주최자가 말레이시아 대표 현지 음식인 '락사'맛집을 추천해 같이 가기로 하면서, 이 친구가 꽤나 음식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본인은 맛있는 걸 먹기 위해 살고,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보는 걸 좋아하며, 때문에 요리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했고, 가장 행복할 때는 머릿속이 팡팡 터질 만큼 맛 좋은 새로운 음식을 먹을 때라는 걸 신나서 얘기하는 데, 단번에 나와 같은 과라는 걸 느꼈다.
나 역시 음식 얘기만 나오면 몇 시간을 얘기할 정도로 음식에 진심이고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서로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먹을거리들을 끊임없이 얘기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 영국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김치'라는 것이다. 김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1년에 분기별로 집에서 직접 김치를 담그고, 종류 또한 배추김치는 기본으로 깍두기, 파김치, 심지어 생소한 청경채 김치까지 만든단다.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었는데, 직접 초대받아 가 본 그녀의 집에는, 직접 만든 온갖 김치로 꽉 채워진 냉장고가 있었다. 더욱 놀라온 건, 이 친구는 한국에 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김치의 본고장에 가 본 적이 없고, 본토 음식을 먹은 적이 없는데 집에서 이렇게 온갖 김치를 만든다고?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어디서 처음 김치를 먹었냐고 하니, 처음 김치 맛을 본 건 일본이었고, 그때 김치라는 음식에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후에 김치의 원조는 한국이라는 것을 알고 한국 김치를 사서 먹어봤는데 그 맛에 푹 빠졌고, 직접 레시피와 한국 요리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혼자 김장을 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까지 김장을 해 본 적이 없었고, 내 주변 친구들 또한 직장 생활에 치어, 김치는 다들 받아먹거나 사 먹는 음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인인 나조차 김장을 해 본 적이 없는데, 한국에 발 한 번 붙여본 적 없는 이 파란 눈의 영국인이 낯선 땅에서 김장을 하고 있는 건 근래 받은 가장 긍정적인 충격이었다. 나는 이 친구가 만드는 김치 맛이 궁금해졌고, 마침 먹고 있는 김치가 다 떨어져 만들 예정이라고 하길래 나도 껴달라고 했다. 그렇게 내 첫 김장 선생님은 영국인이 되었다.
내가 오기 전 미리 말레이시아 아침 시장에 가서 각종 배추와 파, 무를 사 온 그녀는, 집에 있는 큰 테이블에 고춧가루와 마늘, 온갖 양념 재료를 깔아놓았다. 야채 빼고는 전부 한인마트에서 공수해 온 재료들이었다. 마늘도 직접 통마늘을 까서 갈아서 썼고, 매실액을 비롯해 나도 잘 모르는 무슨 버섯 물까지 꺼내와서 김치 양념에 더했다. 품이 많이 들어가는 무를 썰어내는 칼질조차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그저 생각보다 훨씬 놀라운 그녀의 실력에 감탄하며 배추를 자르고, 양념을 섞고, 보조로서 하라는 걸 열심히 따라 했다. 본래 김장이라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적은 양의 배추로만 했는데도 오전에 시작한 김장은 해가 떨어지고 한참 지나서야 끝이 났다. 중간중간 당보충을 해주지 않았다면 김치 맛을 보기도 전에 체력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김치를 전문가처럼 만들어도, 역시 외국인이라는 게 티가 난 순간은 바로 김장을 마친 직후였다. 그녀는 김장 후 보쌈을 먹는다는 걸 전혀 몰랐다. 아니, 아예 보쌈이라는 요리 자체를 몰랐다.
미리 고기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갓 만든 신선한 겉절이에 돼지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던 나는, 급하게 근처 중국 식당에서 돼지고기 요리를 배달시켰다. 대충 분위기라도 내며, 김장 후 먹는 겉절이와 돼지고기의 궁합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의 양념으로 급히 만든 겉절이는 알싸한 마늘 향을 풍기며 입맛을 쫙쫙 당기는 게, 정말 보통 김치가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었다. 1년에 분기별로 김치를 만든다더니 거짓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웬만큼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자주 김치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김장을 도와준 대가로 김치를 좀 얻어와 숙성시켰다. 우리 집에는 이미 유명 한국 브랜드 마크가 박혀 있는 김치가 있었음에도, 직접 만든 그녀의 김치 맛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나중에 부모님이 방문하셨을 때, 약간 남은 친구 김치를 식탁에 꺼내놨는데, 60년 넘게 김치를 먹고 산 부모님조차 제대로 만든 김치라며 놀라워했다.
세상에는 음식에 대한 '애정'하나로 가보지도 않은 타국의 전통 음식을 마스터 수준으로 익힌 사람도 있다는 걸 그 친구를 보며 새삼 느낀다. 누가 알았을까. 내 인생 첫 김장을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영국 여자한테 배울 줄이야...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세계화 아닌가.
조만간 그녀를 데리고 한국에 간다. 아직도 본토 김치를 못 먹어본 친구가 안타까워, 내 한국 방문에 같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 드디어 한국에 간다며 1일 1 김치 플랜을 짜고 있는 친구를 보면 괜스레 내가 먼저, 친구의 김치 투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