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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스 Mar 01. 2022

나에게 건축 선생은..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소환 일지 _03


나에게 기억되는 건축 선생 한 분만 얘기하라 하면..


건축가들도, 비평가들도, 가르침을 받은 학부/대학원 교수님들도,

앞선 세대의 거장들이나, 동시대의 거장들이나.. 모두 아니다.

미안하지만 한 사람만 얘기하라면 어쩔 수 없다. 그 모두를 제쳐두고 한 분만 얘기하라면..

이어령 선생님이다.


대학원 때 그의 텍스트를 접하고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건축이 아닌 일을 하시는 분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글을 갖고 있지 않고 기억이 또렷하지도 않지만, 건축을 한다는 것은 손에 잡히는 물성 너머에 우리를 충만하게 채우고 보듬는 무엇이 있겠구나 하는 걸 느꼈다.


물론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이만큼의 자극은 이전에도 있었고, 그런 것들을 전제하고 건축을 연구하는 것이 그때의 나의 할 일이었지만, 그 시점에 이어령 선생님께 충격에 가까운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생각해보면, 관점의 차이가 주는 또는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방향이 다르고, 방식이 다른 것에서 던지는 물음을 갖게 하는 거라 해야 할까.. 선생님의 글은 그랬다. 대지 위에 장소와 공간을 만드는 일과 미학적인 접근을 해야 하는 일들이 글이라는 매개가 그 가운데 자리하고 작동할 때, 작업하는 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는 건축학을, 특히 이론 비평으로 접근하는 전공자나, 필드에서 뛰는 건축가나, 문학을 전공하고 글쓰기로 무장한 작가들이나 어느 한쪽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 스스로도 그의 글을 보고 무언가를 느꼈다고는 하지만, 이어령 선생님이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에 그만의 글쓰기가 더해져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라고 얘기하는 것 외에는 뭐라 표현할 수는 없다.    


당시의 글을 지금 돌아보면, 통섭(consilience)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통용되고 이해되기 전에 이미 선생님의 글들은 사물들과 일과 사람들 사이에서 경계를 흩트리고 각각에 걸맞게 스며들었던 것 같다. 나는 건축을 말하지만, 또 다른 분야를 얘기하고 다루는 이들 사이에서도 각자 나름대로 자극을 받고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난 대체 뭐하는지도 모르겠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건축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의 잣대와 기대치, 가치들에 흔들림 없이 오늘도 내 갈길을 갈 수 있는 것도 학생일 때 학교 밖에서의 가르침.. 이어령 선생님의 글이 절반의 자리를 차지한다.


얼마 전 선생님을 매체에서 뵈었을 때 그 사이 무척  쇠약해지신 것 같아 보였다. 선생님 살아계실 때 좀 더 그의 글을 읽고 온라인에 올라오는 강연도 듣고 싶었다. 작년인가 언젠가 구입해놓고 읽지 못한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도 다시 꺼내놓고.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_이어령. 2015


딸 이민아 변호사/목사가 살아있을 때 내가 전에 속해 있던 교회에 며칠 방문하기도 했고, 이후 실명 위기를 겪고 있다는 얘기, 그리고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는 얘기들을 들어오면서.. 이어령 선생님에게 딸은 어떤 존재인가 궁금했다. 그러면서 구입한 책이다.


토요일 늦게까지 짐 정리하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기사를 보았다.


선생님.. 오늘 아니 어제. 그렇게 그리던 딸에게로 가셨다.


딸은 아들을 먼저 보내고 아버지는 딸을 먼저 보냈다.

딸은 아들을 잃고 세상의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고,

아버지는 딸을 잃고 같은 슬픔을 겪는 세상 많은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써 내려간 두터운 편지.. 이제 직접 건네시려고, 평소 많이 그리웠던 딸에게로 한걸음에 불쑥 가셨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_이어령. 2015


 많은 얘기를 해주시고 가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따님 이민아 목사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풀어놓으실 것들이 기대도 되는데..


무슨 좋은 얘기들을 따로 나누시려고 따님 먼저 가시고 아버지도 따라가셨는지요.  


아쉽지만..  감사했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존경의 마음, 감사의 마음들을 보내고 있네요.


선생님 천국에서 평안하세요.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어령 (1934-2022)  






(2022.02.27. 새벽 작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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