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소환 일지 _02
된장찌개 냄비가 끓을 때면 뚜껑이 들썩들썩거린다.
온도가 올라가고 물이 기화되면서 갇힌 공간에서 한계치에 이르게 되니 뚜껑을 밀어 올리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덮고 있었던 뚜껑은 한순간에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밀려나야 한다. 마치 애벌레가 성충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보호막이었던 껍질을 벗어던지는 것처럼 자신을 감싸고 보호하던 것을 버려야 하는 일은 무기물이나 유기물이나 어느 순간에는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은 어떨까.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잠시 사람, 우리, 아니 내가 살아가는 곳을 돌아보자. 매일 살아가는 공간에서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는 장소가 있다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지붕이 떠오른다. 지붕이 없는 집은 없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고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 거주하는 곳의 지붕이다. 동시에 가장 멀리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루의 일과에서 또 한 주의 생활에서 그곳을 찾는 일은 드물다. 거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존해야 하는 것이지만 방치되어 있는 곳이다. 이렇게 보면 지붕은 된장찌개 냄비 뚜껑과도 같고 애벌레의 껍질과도 같은 것이다. 필히 있어야 하는 것이어서 그곳에 가져다 놓았음에도 어느 순간 멀리 밀려나 있다.
반면 건축가들은 더러 지붕을 다섯 번째 입면이라고 한다.
이 말은 지붕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기능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 건물의 앞뒤 좌우 네 개의 입면 못지않게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람들은 옥상조경에 관심을 보이면서 지붕에서 조경과 도시 경작을 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왔다. 법률에서도 옥상조경을 법적인 조경면적으로 일부 포함시키고 있으며 지역별 지구단위계획이나 조례 등에서도 옥상조경을 유도하고 있다. 이렇듯 몇몇 전문가 그룹에서 보이는 관심으로 지붕의 존재는 겨우 자존심을 유지하면서 버티고 있다.
지붕이 존중받는 곳도 있다.
지붕의 도시라고 하면 연상되는 도시들이 있기 때문이다. 리스본, 프라하, 두브로브니크.. 인상적인 지붕을 쉽게 볼 수 있는 도시들이다. 조금 높은 언덕을 오르던가 비슷한 높이의 건물 옥상에 오르면 적당한 경관이 손에 잡히는 도시들이다. 뉴욕에서 지붕을 얘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오른 지붕 위에 펼쳐지는 모습은 사실 낮고 고밀한 도시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좀 더 감동을 받는 도시는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대체로 지붕의 형태와 컬러가 주는 일관성을 가진 곳들이다.
우리는 왜 지붕을 잃었을까.
한때 우리의 도시 주택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던 경사지붕은 언제부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원인을 거슬러 찾아 가보면 다락방을 규제하기 위한 법이 강화되고, 인접대지로부터 처마를 이격 시켜야 하는 거리를 완화해주는 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두 개의 법이 강화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집에 다락방을 두는 일이 뜸해졌고 동시에 경사지붕은 차츰 사라져 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파란 물탱크’다. 평지붕 일색에 파란 물탱크를 올려놓은 모습이다.
파란 물탱크라고 하니 그제야 익숙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최근까지 보아온 모습니다. 지금은 상수도 직결급수체계를 갖추지 못한 지역에 일부 남아있는 걸로 알고 있다. 불법과 불편을 제거하려다 의도치 않게 도시와 마을의 스카이라인이 통째로 바뀌었다. 요즘 얘기로 빗대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바이러스의 변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형국이었다. 변이에 따라 외피의 돌기 개수가 늘어나는 것처럼 도시의 언덕마다 증식하는 물탱크들은 규칙과 반복의 힘을 한껏 내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란 물탱크가 올라선 지붕은 형태와 컬러가 주는 일관성을 갖춘 셈이 된다.
이뿐인가. 물탱크가 자리 잡은 평지붕은 대부분 녹색으로 마감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경사지붕에 비해 기후와 환경에 취약하니 방수 및 기타 관리를 위해 우레탄이라는 재료로 마감을 한 것이다. 2012년 한국을 찾은 영화배우 윌 스미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 SNS에 올렸다. 그러자 ‘한국인들은 옥상에 테니스 코트를 가지고 있다’는 감탄의 댓글이 관심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사실이라면 미국 타운하우스 뒤뜰에 수영장을 갖고 있는 것에 견줄 만한 것이다. 이 역시 형태와 컬러가 주는 일관성을 갖춘 셈이다.
이 즈음되면 우리도 나름 집요하게 고집하는 도시의 모습이 정착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경사지붕을 회복하자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형태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살면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지붕이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존재의 부존재로 여겨지던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가장 안정된 모습으로 우리를 덮어주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의 무게는 크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려는 시도의 첫 단계가 머리 위를 가려야 했던 것이라는 걸 가정해보면, 본연의 물리적 가치는 참 오랜 바람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지붕이라는 것이 짜인 공간의 위계로 인해 접근성은 상대적으로 어렵게 여겨져 왔던 건데, 오히려 그런 물리적인 이유보다는 심리적인 거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 우리로서는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붕의 모양이 어떻든 그 거리가 좀 더 가까웠으면 하는데, 파란 물탱크를 놓는 순간 심리적 거리감은 더 커졌다. 관리를 위한 기능적인 녹색 공간이 된 것도 한몫을 했다. 공공지원을 통해 파란색 물통을 없애고 있지만, 마음으로 이미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그곳에 마음 거리만큼의 간극을 채울 것들을 다시 소환해오려니 어디서부터여야 하는지 막막해온다.
집이라는 마이크로와 도시라는 매크로의 접점인 지붕과 옥상 공간은 그간 국지전이 끝이지 않는 전장이었다. 각종 법의 규제와 정책의 권장이 반복되면서 그 결과들이 흔적으로 남았다. 이걸 또 정비한답시고 섣불리 또 다른 규제와 정책으로 매스 들이대듯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보다 사는 사람들의 액티비티에서 방향을 찾아보면 어떻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답이 아닌 방향.
그게 뭐냐 라고 물으면 얘기할 내용이 부족한 게 현실이지만, 내가 믿는 것은 하찮은 물건을 자유자재로 변신시켜 끊임없이 쓸모를 찾아내는 힘이 그곳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집과 도시가 만나는 접점, 도시에서 다양한 스케일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마이크로와 매크로가 상시 만나는 곳, 여기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한 거다.
예로 조금 예전 기사에서 본 것 같다. 부산 반송동 주택가의 파란 물탱크가 즐비한 동네에서 별 모양의 야광 전지를 옥상 물탱크에 붙이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지역은 새로 개통되는 지하철의 지상구간. 그 지역을 지나는 사람들이 보게 될 경관을 단순하지만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찮고 보기 싫어했던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으로 만들었던 경우다.
파란 물탱크는 부산 도심 산복도로에서도 경관의 하나로 제 몫을 했던 건데, 이 지역에서는 집집마다 빠짐없이 옥상에 자리를 차지하던 '고무 대야'가 변신하는 모습들을 다룬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는 이, 본인들이 필요에 의해서 쓸모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무엇이든 약속된 규정 안에서 말이다.
스카이프런트(skyfront)라는 말을 생각해봤다.
사전에 없는 말이다. 대신 우리는 워터프런트(waterfront)라는 말은 들어봤을 거다. 도시에서 물이 닿는 지역을 일컬을 때 사용한다. 주로 도시의 항만시설이 거주지역과 바다나 강 사이를 독점함으로써 시민들이 수공간을 접근하고 이용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에서 생겨난 용어이다. 그래서 난 하늘과 맞닿은 곳은 '스카이프런트'라고 말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이용하지 못하는 그곳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에 사용하면 되겠다 생각했고, 단순히 용어의 생산보다는 그것에 담길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지붕은 공공재이다.
건물의 외관은 도시에서 공공재로서 성격을 지니는데, 지붕은 더욱 그렇다. 건물의 외관이 가로변 경관을 만들어 가는데 기여한다면 지붕은 도시 전체의 경관을 만드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건축가들이 다섯 번째 입면이라고 얘기하는 그 입장은 작업하는 건물에 대한 애착인 경우가 많지만, 다섯 번째 입면들이 도시에서 부분과 전체로서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애착의 범주를 넘어선다. 도시를 표현하는 대명사 같은 것일 수 있고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다. 도시를 대면하는 첫인상일 수도 있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의 애착에 머물지 않고 모두의 애착이 되는 것이다. 도시 자체가 그랬기 때문이고 그 경계에 있는 '스카이프런트' 역시 그럴 수 있다.
공공재는 도시에서 오픈 소스로 작용한다.
모두에게 개방되게 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각자의 소유가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보다는 오픈 소스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는 사람들의 행위에서 발산되는 것이 담기고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지붕의 모습, 스카이라인의 모습, 스카이프런트의 모습은 도시 거주자와 나그네에게 개방된 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적으로는 스카이라인을 회복하는 일이며, 공간적으로는 스카이프런트를 구상해보는 일이다.
한국의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안도 다다오에게 지붕은 그의 건축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중학교 시절 좁고 긴 주거지에 머물 때였다. 공사를 위해 지붕이 뜯기면서 순간 그곳에 채워지는 햇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이 1976년 스미요시 주택이 되었고, 다다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살면서 평소 볼 수 없는 지붕은 뜯겨나가고 나서야 그 존재를 보여준다.
태곳적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려는 처음의 시도가 여기서부터였던 걸 상기하면, 지붕은 가장 오래된 구축의 유산이면서 여러 행위와 사건이 작동하는 기계적인 장치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병적으로 기생하는 수많은 문제를 떠안고 우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는 곳 가운데 가장 하늘 가까이 가 있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처럼 '오래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일평생 지붕 아래 삶은 그래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