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만큼의 세상 01 _시작, 다른 경로
비교적 늦게 학교를 떠나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15년을 필드에서 일하며 일중독이다 하드코어다 라는 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하려고 했고 일과 일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흐르고 있는 것들을 잠시 멈춰 보려 해도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는 아이들과 무작정 떠나기로 결심했다.
일상에서 여러 부침들이 오랜 시간 반복되고 있으면 한번 즈음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여행이다. 그것이 일탈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길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시 여러 문제들과 맞서고 있었던 내가 아이들과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은 일탈도 아니었고, 다른 길을 찾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일탈은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지금까지 나의 길을 부정하고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될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 잠시 멈춰 보는 게 필요했다. 멈추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학원 갈래? 여행 갈래?"
당연히 아이들은 "여행 갈래!.."라고 답했다.
여기까지 주고받은 얘기로 결론을 내버리면 여행 가고 싶은 아빠의 유도질문이 되어버린다.
아이들이 학원 다니기가 싫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아이의 성향이 다르고, 각자 하고 싶어 하는 걸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다 형편이 되지 않으면 몇 개월 보내다가 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학원이 등 떠밀려 다니는 곳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가고 싶어도 때로는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다시 물었다.
"여행을 가면 다니고 싶은 학원들은 모두 중단해야 해.. 아빠가 둘 다 보내줄 수는 없어."
잠시 생각하더니, "여행..."
그렇게 여행을 갈 명분을 하나 만들었다.
우리에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일하던 사무실이 어려워지고 급여가 밀리고 있었다. 그나마 나오는 경우도 관리자(당시 Associate Partner였다.)라는 이유로 급여의 70%만 받아야 했다. 내 일상에 관계하는 모든 것들을 재편해야 했다. 가장 먼저 살고 있는 집을 옮겼다. 대출을 줄여서 매달 나가는 이자를 줄여야 했고, 아내가 계약직으로 일하던 곳 근처로 이사해서라도 한쪽의 교통비를 줄여야 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기업연수원들이 모여 있는 용인 구석진 동네였다.
사무실이 어려워진 것, 급여가 나오지 않는 것, 아주 외진 곳으로 이사를 한 것, 이런 것들은 표면적인 문제였다. 물론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매일 생활하는데 가장 어려움을 느껴야 했던 것은 엉뚱하게도 화장실 문제였다. 이사 나온 집도 이사 들어간 집도 화장실은 하나였다. 좁게 살아온 것에 익숙했고, 불편하지만 문제가 될 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도 자라고 있었고 4인 가족이 둘은 일하러 둘은 학교로, 평일은 평일대로 주말은 주말대로 전쟁과 같은 일상을 보내는데, 그 전장의 접점은 화장실이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단지 내에서 화장실 두 개인 집으로 옮겨가려면 대략 5천만 원 정도 필요했다(20평대와 30평대 차이가 이 정도라고 하면 정말 외진 동네다). 공동주택에서 화장실을 하나 더 갖는 것은 단지 화장실만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에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집 안의 모든 공간 가운데 시간대를 공유할 수 없는 곳이 유일하게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충족되면 금방 익숙해져 그다지 가치를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충족되지 못하면 큰 불편을 느껴야 하는 곳이 화장실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일상의 거주성을 높일까, 나그네의 일상을 누릴까 하는 선택이 필요했다. 감성적인 결정이 될 것 같아 숫자를 놓고 따져봤다. 아파트에서 화장실 하나의 크기는 내부 치수로 대략 2.2M x 1.5M = 3.3M2이다. 평으로 환산하면 3.3M2 / 3.3 = 1.. 딱 한 평이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5천만 원이었다. 4인 가족이 18박 19일 동안 아끼면서 여행을 다녀올 것을 계산해보니 대략 1,100만 원에서 1,200만 원 정도로 계산되었다. 네 번을 다녀오면 대략 5천만 원이었다.
우리는 화장실 하나를 세상과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여행 갈 두 번째 명분을 추가하고,
한 평만큼의 세상은 시작되었다.
가족과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정에 언제나 한 평의 공간만 주어지면 그곳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곳 글들은 그렇게 바라본 세상을 텍스트로 그린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