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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 -임박한 파국 그리고 성급한 결정

by 낭만소년


Zweig Stefan Sus libros en la Biblioteca Pública de Marchena.jpg


내가 사랑하는 작가 중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에 대한 글을 올린다.


요즘 나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마지막 나날에 관심이 많아졌다.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은 로랑 세크직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_로랑 세크직, 이세진 역_현대문학_2011.jpg 로랑 세크직,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2차 세계 대전의 집단적 광기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평화주의자이자 인문주의자가


어떻게 마지막 나날들을 맞이했는지,


1934~1942년 사이의 츠바이크의 관련 저작들의 소개와 함께 회고록을 참조하여,


이 시기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해본다.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은 2016년 Maria Schrader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Zweig : Farewell to Europe




[1934년 무렵]



어제의 세계_곽복록 역_지식공작소  2001.jpg 어제의 세계, 곽복록 역, 지식공작소, 2001


츠바이크의 회고에 의하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1924~1933년 10년간은 평온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그의 작가적 성공도 연이어진 듯했다.


하지만 '뜻밖에 찾아온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34년 츠바이크의 나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향토방위군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밀수입된 무기를 찾기 위해 가택 수색이 잘츠부르크에서도 행해졌는데, 특히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츠바이크의 집도 수색당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앞으로 있을 광범위한 간섭의 소극적인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암시였다. 그 날을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그날 밤 나는 가장 소중한 서류를 챙기기 시작하면서 영원한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결심은 집이나 토지로부터의 이별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나의 가족은 이 집에 대해 단순히 거주하는 곳 이상의 고향과 같은 애착을 품었고 이 토지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개인적 자유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런던에 도착한 이후 내가 최초로 한 일은 잘츠부르크 당국에게 그 곳에 있는 집을 결정적으로 포기했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것은 고향으로부터 나를 떨어져 나가게 하는 첫 조치였다.


마침내 츠바이크는 아돌프 히틀러의 악마적 힘이 자신의 집안에 미치는 것을 목도한 이후, 아내 프리데리케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 행선지는 낯선 땅 런던이었다.


조국에 다시 돌아올 기약도 하지 않고 그는 과감하게 고향과의 단절을 시도해버린다.


조국이 그를 버렸으므로. 그는 고향을 버리게 된다. 하지만 이는 생래적인 고향과의 단절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의 진정한 정신적, 사상적 고향은 어느 한 지역과 국가에 머무르지 않는 유럽 전체였다.


이를 보여준 단적인 예는 바로 이 해에 유럽 통합의 정신과 평화 애호, 세계 시민의 정신을 담아 출간한 '에라스무스'이다.



Erasmus, Holbein



저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 속 평온함을 소유한 은둔의 이성 '에라스무스'는 당시에 츠바이크가 발견한 모델이자 자기 자신이었던 셈이다.


에라스무스 평전.png 에라스무스-폭력과 증오에 맞선 보편 휴머니즘의 옹호자



한편, 이 시기에 츠바이크의 후반부 인생을 함께 할 타이피스트이자 여비서 알트만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게 된다.


두번째 부인이 될 여비스 알트만.png 두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을 함께 한 알트만



[1935년 무렵]


이 무렵 츠바이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합작 하여 쓴 오페라 대본을 완성시켰다.


슈트라우스는 그동안 작업을 해왔던 호프만슈탈이 죽은 후, 그와 유사한 조건 즉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계 작가인 츠바이크에게 자신의 작업에 함께 해 줄 것을 요청했다.


호프만슈탈.png 호프만슈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png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츠바이크가 보기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우리 시대에 창작을 하고 있는 작곡가 중에서 최고"의 음악가 였다. 헨델, 바하, 베토벤, 브람스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순수한 독일 음악가의 마지막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2주일 후에 1막의 내용을 집필하여 보냈다. 그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츠바이크의 오페라 대본 전체를 단 한 줄도 바꾸지 않고 작업을 진행하여 마침내 초연 상연을 앞두게 되었다.


하지만 1933년 1월 유대인이 관여한 작품의 독일 극장에서의 상연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초연도 올리지 못할 상황이었다.


당시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히틀러와 괴링, 괴벨스와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나치 제국 음악원의 원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1934년 마침내 제국 음악원 원장 슈트라우스와 유대계 작가 츠바이크가 합작한 공연이 히틀러 앞에서 상연된다.


https://youtu.be/tpUPUYDQkIE?si=bOAR-LHjLMXtTHfS

Die Schweigsame Frau (Strauss)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2회 상연은 모두 취소되고, 슈트라우는 원장직 사표를 제출하게 된다.




[1935년 망명 후 영국]


정치철학자 아감벤의 개념인 '예외상태'는 입법 사법 행정의 권력 분립이 통용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다. 계엄과 같은 정치적 상황이거나 혁명과 같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을 법적 효력이 미치는 범위라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는 범위라고 확대해서 쓰자면, 이 표현은 츠바이크가 영국에 머무를 당시 대변해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오스트리아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고, 개입하지 못했던 츠바이크는 당시에 영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사실 츠바이크에게 영국은 프랑스만큼 가깝지가 않았다.


그는 프랑스를 제 2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느낄 정도로 여행과 체류, 문인과의 교류와 만남을 빈번하게 가진 반면에, 영국은 그렇지를 못했다.


하지만 영국의 첫 방문 이후 30년이 지난 후 이번의 두 번째 영국의 방문에서는 전혀 낯섬을 느끼지 못했다. 이는 영국이 아니라 츠바이크가 변했기 때문이다.


긴장감으로 살아왔던 지난 날에 그는 지쳐있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거처를 옮긴 것도 바로 조용한 생활과 정치적인 사건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갈망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히틀러에 의해 짓밟히자 이제 영국을 더욱 더 편안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영국에서는 오스트리아 달리 대중들의 흥분이나 당파 가르기와 증오와 떠들썩함이 없는 정말로 "시민적이고 정중한 국외자"의 삶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새로운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마리 앙뜨와네뜨'가 간행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제 당분간 전기 작품은 쓰지 않고 미뤄 두었던 소설을 쓰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영국에 와서 3일째 되는 날, 나는 옛날부터 갖고 있던 필적에 대한 정열에 이끌려 대영 박물관에 전시된 필적류를 음미하다가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에 관한 육필 기록을 보게 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도대체 메리 스튜어트에 관한 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는 정말 두 번째 남편의 살해에 가담했던 것일까? 나는 그녀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찾아다니고 조회하면서 어느덧 그녀에 관해 책을 쓰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png 매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의 여왕



[1936년 계속되는 망명 상태]


1936년 이후 영국 체류 기간 동안에 그는 영국과 관련된 몇 개의 저작을 발표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한 망명객이었다.


마젤란.png 마젤란 평전


카스텔리오.png 카스텔리오 평전




추방당한 러시아인 한 사람이
수년 전에 나에게 한 말을 언제나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에는 인간은 몸과 영혼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밖에 여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국외 망명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조국을 떠나온 유럽에서 그는 전쟁을 일으킨 '독일-오스트리아 제국의 시민'이었다.


츠바이크를 비롯한 유대인의 비극은 조국으로부터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나고, 유럽으로부터 전쟁 주범국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히는 것이었다.


나는 빈 출신의 부유한 기업가이자 가장 지적인 예술품 수집가였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바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백발이 많아졌고, 늙고 지쳐 있었다. 힘없이 두 손으로 책상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는 대답했다.
"도대체 오늘날 누가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말입니까? 우리은 아직 우리에 허락된 곳으로 갈 뿐입니다. 누군가가 여기서는 하이티 섬 아니면, 산토 도밍고 섬으로 가는 비자를 맏을 수 있을 것이라 하더군요."
나의 심장은 일순에 멈추었다.
피곤에 지친 이 사람은 전에는 지도의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로 가려는 희망을 갖고 덜덜 떨고 있었지만, 거기에 가도 구걸해 가며 살아야 할 것이며 다시 한번 이방인으로서 아무 목적도 없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었다 !
그들은 유령과도 같은 사람들의 무리였다. 유럽에서 멀리 떠나고자 하는 무리들.




[1937~1939년 임박한 파국-이별들]


지젝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시기의 츠바이크는 '임박한 파국' 즉, 다가오는 종말에 직면해야 했다.

물론 지젝이 의미하는 자본주의의 종언 이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츠바이크는 세계 대전이 가져 온 유럽의 종말 이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1937년 그와 인생의 전반기를 함께 보낸 첫 부인 프리데리케와 공식적으로 별거한다.


첫 부인과 함께.png 첫 부인과 함께
두번째 부인과 함께.png 두 번째 부인과 함께


이는 다가올 파국에 대한 츠바이크의 대응과도 같은 것인다. 즉, 그는 하나하나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츠바이크는 1938년 3월 13일 히틀러가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으며, 마침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포성이 유럽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안전을 찾아 영국을 떠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반쯤은 운명은 어디를 가나 나의 뒤를 쫓아오고 았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달아나는 것에 대해 경멸감이 생겼기 때문이었고, 반쯤은 지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자유가 침해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엄습해오지만, 지쳐있는 아내와 가족들은 다시 어디를 가야한들 모두 동일한 상황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유럽 정신의 수호자이며 예민한 자유주의자인 츠바이크는 1938년 12월에 이혼을 하고 만다.


1939년 망명후 그의 정신적 동지이자 위안이 되었던 유럽의 정신, 독일을 탈출하여 영국으로 망명한 프로이트가 9월 23일 타계한다. 아울러 어머니마저 빈에서 돌아가시게 된다.



어느 날 아침 84세의 어머니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왕진 온 의사는 어머니가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어머니의 둘밖에 없는 자식인 나와 내 형도 그곳에 없었고, 어머니의 임종을 맞아 귀국하는 일까지도 독일 문화의 대표자들은 범죄라고 입국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의 사촌 한 사람이 어머니의 집에서 밤의 새우는 일을 맡으며 임종을 지켜보려고 했다. 그가 바로 옆방에서 자려고 침대를 준비할 때, 간호부가 나타나서 유감스럽게도 새로운 나치의 법에 따라 죽어가는 자의 곁에서 유대인과 함께 밤을 새울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간호부는 이 법이 자기로서도 유감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사촌은 어머니 곁을 떠나고 대신에 임종하는 어머니의 곁에 그녀를 붙잡아 둘 수 있었다고 한다.



정신의 탐험가들_안인희 역_2000_푸른숲.jpg 정신의 탐험가들-메스머, 메리 베이커 에디, 프로이트


그는 프로이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몰락에 대해 항거하는 우리 시대의 강한 의지, 가장 투철한 정신의 투쟁은 점점 무거운 것이 되어 갔다.
명석하다는 것을 사고의 최고 미덕으로 말했던 프로이트는 자기가 더 이상 계속 글을 쓸 수 없으며,
계속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명확학 인식했을 때에 비로소,
로마의 영웅처럼,
의사에게 고통에 결말을 짓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숭고한 결말이었으며 이 살육의 시대에 한없이 죽어가는 희생자들 가운데 기념할만한 죽음이었다.



[1940~1941년 다른 곳-아메리카]


1940년 3월 12일 그는 마침내 영국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 영국에서의 정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강연을 위한 행군으로 파리와뉴욕을 경유하여 남미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르과이를 여행하게 된다.


1941년 잠시 뉴욕에 머무르면서 뉴 헤이븐 근처에서 아메리카와 관련된 '아메리고'를 집필한다.


아메리고_김재혁 역_삼우반_2004.jpg 아메리고 베스풋치 평전


이 평전은 영국에서 출간된 평전들처럼 자신이 탐구했던 지역과의 타협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가 말했듯이 아메리카는 유럽의 폭력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희망을 이 지역에서 발견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브라질은 1차 세계 대전이 함께 가져온 야만성이 도덕 관습이나 국민의 정신 속에 침투되어 있지 않은 나라였다.
여기서는 '혈통'이라든지 종족 그리고 게르만족의 순수성과 같은 바보스러운 이론에 의해 사람들을 분리하는 일이 없었다.
여기서는 아직도 대지가 인간이 이용하고 인간의 존재로 그것을 충족시키도록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브라질을 미래의 나라로 예찬한 이유일 것이다.


미래의 나라, 브라질.jpg 미래의 나라, 브라질




[1941년 엄습하는 공포]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엄습하는 광기와 폭력을 점차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함께 자서전의 초고를 뉴욕의 Ossining의 별장을 빌려 대강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어렴풋이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뉴욕 Ossining의 별장에서2.png 뉴욕 Ossining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여태까지 지구상에 있었던 어떤 전쟁보다 무섭고 훨씬 광범위한 전쟁이었다.
다시 한번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다시 한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아 버린 방에 묵묵히 서서 서로의 눈을 바로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사라의 유희에 들뜨고 살랑거리는 미풍에 몸을 실은 새들이 자유롭게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았다. 근심을 모른 채.

나는 내 방으로 가서, 작은 트렁크에 물건을 차곡차곡 넣었다.



그해 8월 드디어 부인 로테와 함께 드디어 브라질 페트로폴리스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다.


브라질, 페트로 폴리스 거처



현재는 츠바이크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브라질의 페트로폴리스에서 머무는 동안 전쟁의 위협과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한 동안은 자서전과 소설 ‘로열 게임’, 평전 ‘몽테뉴’ 집필을 서두르는 등 왕성한 창작 의욕을 불태우기도 한다.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_안인희 역_유유_2012.jpg 몽테뉴 평전


겉으로 보면 평온한 삶이지만, 이러한 평안은 언제 바스라져 무너질 지 모르게 금이 간 유리위의 삶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자, 그의 압박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츠바이크와 로테는 자신들이 세웠던 모종의 기획을 검토하고 1942년 2월 22일 밤에 이를 실행해 옮기기로 결심한다.




다음날 뉴욕 타임즈의 3단 기사면에는 아주 조그맣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그들의 집에서 포옹한 채 발견된 부부의 죽음을 알렸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자유로운 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이 인생에 이별을 고하기 전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의무를 다해 두려고 한다.
-(중략)-

나 자신의 말을 하는 세계가 나에게서 소멸되어 버렸고,

나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이 자멸해 버린 뒤에,

내 인생을 다시 근본적으로 새롭게 일구기에는 이 나라만큼 호감이 가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60세가 지나서 다시 한번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특별한 힘이 요구되는 것이다. 나의 힘은 고향없이 떠돌아 다닌 오랜 세월 동안에 지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나는 제때에 그리고 확고한 자세로 이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 나의 생명에 있어서 정신적인 작업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으며,
개인의 자유는 지상 최고의 재산이었다.

-(중략)-

나, 이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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