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라는 고유명
사람은 시인이 될 수도 있고, 혁명가도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자 혁명가가 동시에 될 수도 있는 것인가
-김윤식, 『임화연구』-
나의 고향은 서울 낙산(駱山) 밑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향수란 것을 느낄 만치 그곳에 정들지는 않았습니다. 조금도 서울이 나의 고향이거니 하여 그리워한 일이 없습니다. 10년 가까운 변동 많은 생활에서 나의 마음은 대부분 향수라는 정조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지에 돌아다닐 때 반도 그것에 대한 깊은 애정은 오늘날까지 뇌수에 뿌리 깊이 백혔습니다.
나는 역시 향수를 관념적으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일인(一人)입니다. 그러나 처자나 소위 명리(名利)를 떠나 방랑하고 싶다는 취미는 안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욕망은 이것과는 전연 별건인가 합니다.
나는 은자(隱者)가 아니라 현실인으로 세계를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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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전후의 소년시대, 10살에 동대문 안에 있던 사립학교가 해산되는 바람에 보통학교 1년 급(級)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어머니 슬하에 나는 행복된 소년이었습니다. 20세 전후의 청년시대, 중학교를 5년 급에 집어던지고 난 지 2년 후 어머니도 돌아가고 가산도 파(破)하고 나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서울거리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매었습니다. 괴로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한 행복에 불탔습니다.
30세 전후의 장년시대, 금년이 30. 이곳에 처자 데리고 병을 다스리며 하는 일 없이 세월 보냅니다. 마음으로는 여러 가지 자기 반생의 사업(?)을 공상하고 있습니다. 심이하면 바다에 나가 고기를 낚는 게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임화, 작가 단편 자서전
가출이후 청년 임화는 '현해탄'을 건너 도일한 이후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동경에서 청년시절에 흔히 겪게되는 사상적 감화를 맛본 이후,
귀국하여 카프를 조직적으로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사상적 동지이자 첫부인인 이귀례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임화를 좌파 사상으로 안내했던 이북만의 여동생이었다.
임화의 여성관이나 여성편력 혹은 연애담에 대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 보이는 누이/ 딸/ 여성적 어조 등을 볼때,
확실히 그가 지향하던 좌파이념과는 거리가 먼 감수성을 지닌 시인의 자질이 돋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적/동지적 밀월 관계도
카프 해산 이후 도피와, 병치례를 자주 앓으면서 끝나버리고,
임화는 신여성이자 작가였던 지하련과 재혼을 하게된다.
이념에 의한 결합이 실패였다고 가정한다면,
재혼을 하면서 그는 진정 사랑을 찾았던 것일까?
지하련의 작품 속의 인물들은 임화와 자기자신의 형상화일까?
해방이후 남로당의 전위조직에서 활동하던 그가 1947년 지하련과 함께 월북했다가
약 6년 후 북로당(북한) 정권에 의해 남로당의 미제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된다.
<대동강변을 미쳐서 돌아다닌 임화의 부인 지하련>
- 이승하
내 남편의 시체를 돌려주시오
장례라도 치를 수 있게 해주시오
당신의 남편은 미제의 간첩이었소
시체는 돌려줄 수 없소
그대 머리 산발한 채 울부짖고 있구나 여보- 여보- 목이 터져라 부르짖어도 싸늘한 강바람 아무도 그대 거들떠보지 않는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나가는 평양시민들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 시신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마지막 남긴 말씀이 있었을까
인간의 울부짖음이 산천초목을 떨게 한다
인간의 슬픔이 천둥 번개가 치게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무지함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비 마침내 태풍을 몰고 오네
강변의 느티나무 뽑히고 지붕이 날아간다
지긋지긋해라 이젠 몸서리가 쳐져요
대동강을 넘실넘실 범람케 하는 지겨운 장마여
강바람이 차다 하늘이 슬피 운다
빗물에 흠씬 젖은 저 여인 지하련
며칠 대동강변을 울며 울부짖으며 돌아다니다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60년 세월이 지나갔다
그녀의 최후를 아는 사람이 없다
-『현대문학』(2015. 1) -
1953년 8월 6일 임화가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지만, 그 시신과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지하련은 치마끈도 제대로 매지 못한 실성한 모습으로 평양 시내를 헤매이다, 붙들려
평북 회천 부근의 산속에 있는 교화소에 수용되었고, 1960년 초 병사했다고 전한다.
위의 시는 임화를 지하련의 목소리와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아픔을 형상화하고 있다.
임화의 삶은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떠돌았던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의 <랭보>......
그에게 정착에의 열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유소년기가 베일에 가려진 것처럼,
그는 뿌리가 없다.
아니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는다.
가출/학업의 중도 포기/도일/카프 서기장 생활/영화에 투신/시창작/비평활동/문학사 연구 등
어느 한 분야나 영역에 머무르거나
뿌리 내린적이 없다.
'이귀례'에서 '지하련'에 이르는 과정도 또한 그렇다.
어쩌면 그는 안정과 안녕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능적으로 믿었을 지 모르겠다.
그의 <랭보>적인 방랑과 방황은
그의 시제목을 차용한 <바람이여 전하라>는 소설로 활자화되기에 이른다.
전기적 사실이 소거된 공간에서는
어쩌면 허구적 상상력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화라는 고유명>이 근대 문학의 한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자칫 상상력이 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역사를 배제한 채 상상력만의 유희로 만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허구적 상상력의 세계는 어려운 작업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력에 의한 작업이 불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꾸 그의 삶은 재해석되고, 재구성되고, 재발견되어야 한다.
그를 잊을만하면(우리들의 기억력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남으로부터 북으로부터 배척받았던 불행한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우리 스스로 그러한 불편한 메시지를 자꾸 감내하게 하면서...
복잡다단한 현실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을 탓하며
눈 찔끔 감아버리는 속물적 근성을 반성하게 하면서....
<임화라는 고유명>은 소설로, TV로, 영화로, 노래로, 전집으로 자꾸 재생되어야 한다.
무엇 찾니
죽은 듯한 밤은 땅과 하늘에
가만히 덮였고
음울한 대기는 갈수록 컴컴한
저 하늘 끝에서 땅위를 헤매는 데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내리는 가는 비는
고요히 졸고 있는 나무 앞에
구슬 같은 눈물을 지워
어둔 밤에 헤매면서 우는
두견의 슬픈 눈물같이 굴러 떨어진다
남 모르게 홀로 뛰는 혼령아
이 어둔 비 오는 밤에도 쉬지 않고 날뛰며
무엇을 너는 찾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