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폰데인의 에세이
벤자민 폰데인 Benjamin Fondane의 에세이를 번역하여 올린다.
셰스토프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면서 알게 된 저자이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에세이스트를 사랑한다.
그를 한 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1898년 루마니아 몰도바령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거주했던 유대인, 아방가르드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다다이스트, 보헤미안적 라이프 스타일의 소유자, 연극 기획자, 영화 각본가, 실존주의 철학자, 셰스토프의 제자, 키에르케고르주의자, 시, 연극, 영화, 문학 비평, 철학 등 장르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히틀러가 가장 싫어했던 유대인의 전형, 즉 불순종적인 반항아였다.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중, 1944년 3월 프랑스 경찰에 붙잡혀 10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을 수밖에 없겠지만,
세상 그 어떤 것도
이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폰데인, Rimbaud le voyou)
이 에세이는 1944년 2월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기에 작성된 글이다. 그는 생계를 유지할 충분한 식량도 부족했던 상황에서 체포와 감금이 되풀이 되는 "역사적 일요일"을 보내면서 해방의 "실존적 월요일"을 꿈꾼다. 그는 철학적 "수다"가 "검을 든 후사르" 앞에서 멈춘다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면서, 키에르케고르, 니체, 셰스토프, 카뮈,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와 대화를 시도한다.
이 에세이는 『Existential Monday: Philosophical Essays』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초벌 번역을 끝마쳤으나, 국내에 출간된 참고 문헌 확인과 각주 작업 등은 추후로 미룬다.
인명, 지명 등은 국내 출간 도서를 원칙으로 한다.
올린 부분은 에세이의 후반부 부분으로, 헤겔, 하이데거,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에 대한 논의는 전반부에 포함되어 있다.
긴 명절 연휴를 끝내고, 다시 맞이하는 월요일
실존적 고투가 기다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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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당신은 멋진 월요일을 맞이할 운명입니다!
잘됐네요!
하지만 일요일은 결코 끝나지 않을 거예요.
-카프카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마가 2:27
.................(전반부 중략)
투르게네프의 소설에서 여주인공 마리 일리니차Marie Ilinicha가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시골 의사는 겁에 질린 채 "의사! 빨리 의사!"라고 외친다. 철학자 역시 존재자의 문제를 다룰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아 "빨리, 철학자! 진짜 철학자!"라고 외쳐야 할 정도이다. 그러나 시골 의사가 자신보다 더 큰 지역의 의사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정말로 믿을 수 있다면, 헤겔은 역사의 진지성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은 단지 "수다chatter"에 불과하다. 게다가 치유해야 할 사람은 병든 사람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요소의 "자연"을 치유하는 문제, 즉 예외의 끊임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철학자, 학자이다. 병든 사람은 "가능성The possible!!"을 외치지만 "이성The intelligible!"을 외치는 철학자의 목소리에 물거품이 된다. 전자에게는 충분한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자에게는 똑같이 충분한 "이성"이 없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계속 벗어나는 것 ; 아주 작은 "불쾌함", 아주 작은 "불연속", 그리고 오직 자기-충족성(아리스토텔레스의 autarkeotatos)에게만 복종하고자 하는 정신은 그 깊이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
"모든 것이 가능한everything is possible" 신은 그리스에서 우리에게 내려온 것과 같은 철학의 종말이다. 비극적인 영웅이 철학자에게서 멀어지고 가능한 사람에게, 최소한 가능한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막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가 마음을 만족시키는 지식 외에 절망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발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식에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게다가 '진실'을 요구한 적이 없고 오직 '선함', '완벽함'과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만 요구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독자들을 셰스토프의 책 『Potestas Clavium』 80)에서 특히 「진실이란 무엇인가?」을 소개한다. 여기서 이 위대한 실존주의 사상가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철학자가 의도적으로 선의 개념을 완벽함으로 대체하고 존재론을 윤리로 대체하는 충격적인 개념을 보여준다
"이성 [이해하는 것]"은 결코 '이해'를 의미하지 않으며, 모든 철학자의 목표이자 열망이었던 [영혼의 평화] 또는 [최고의 선]을 획득할 수 있는 우주에 대한 태도를 자신 안에서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실존 철학은 지식의 포기나 지식의 희생(a sacrifizio del intelleto)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지식을 찾는 것이다. 이는 "불행"의 문제든, "불연속"의 문제든 등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이 오직 필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 즉 라이프니츠가 말한 것처럼, 그의 의지의 동의 없이 신의 이해에 도입되었을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진리들에 의해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우주를 제공할 때, 나는 왜 실존적 사고, 즉 존재론적 사고가 여기서 "자연"이 답을 찾지 못했거나, 자연이 잘못 대답했다고 생각하거나, 오히려 우리가 잘못 질문했다고 생각할 권리가 없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표현을 초래한 질문들을 포기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권리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방법이 진실을 단지 “완화 appeasements”로 연구하는 연구 방법보다 더 인간적일 위험은 거의 없으며,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완벽함이라는 개념에 부합한다. 만약 앎이 지성에 해당한다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무엇에 해당할까?
신비주의자의 "비지식"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의 한 방식이며, 심지어 "바보가 되는 것"은 지능에 의해 수행되는 작업이다! 무엇을 하든지 철학 밖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 침묵을 지키고, 등을 돌리고, 그것을 제쳐두고: 이것은 여전히 철학적이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정의는 거부할 수 있다. 전문 철학자가 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강제성이 있는 한 “모순되지 않는 원칙” 을 적용하는 이 기술이나 저 기술, 규칙, 또는 봉사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계가 있다. 간단히 말해,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는 모든 생각은 현실이든 비현실이든, 우리를 위해 가지고 있는 선악이든: 그러한 생각은 어떤 입장이든 철학적인 생각이다. 우리의 전통에 너무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생각중의 하나는 철학자는 현상에서 시작하여 무언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인식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말한다.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이자 입법자이다 ;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명령하는 철학자에게 진리는 헤겔의 "자연"과 거의 닮지 않았다. ; 하나는 그럴 수 없겠지만, 아마도 다른 하나는 개념 수준에 도달하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철학이 한 번뿐인 진리a truth which is once를 알 필요는 없지만, 변화할 수 있는 진리, 만들어지지 않은 진리, 지루해질 수 있는 진리를 알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우리가 그 절차에 어느 정도 효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사랑하고, 울고, 기도하고, 실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스스로를 사임하는 행위는 어느 정도 그것을 형성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철학이 순종하려는 과도한 열정으로 인해 진리가 철학이 만든 것이 아닌지, 제한하는 진리가 우리의 봉사에 대한 갈증의 열매가 아닌 다른 것인지, 간단히 말해 도덕이 아니라 주인의 진리일 가능성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 주제에 대한 셰스토프의 생각을 내 말로 요약해야 한다면, 나는 이 대담한 공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진리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진리”
예언자들, 예수님, 성 바울, 루터의 오래된 실존 철학은 여기서 사변적인 대담함의 최대치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2천 년 동안 지속된 이 두 가지 주요 명제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시편 81:6)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신일까? 여전히 성서의 권위에 호소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확실치는 않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여러 번 그리고 거의 항상 잘못 호소했을지라도. 예를 들어 그는 소크라테스 사상과 "너는 해야만 한다Thou Shalt"의 윤리를 지지하기 위해서, 그러한 지지가 없었다면 매우 잘할 수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소크라테스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마다(그의 "기독교"를 지배하고 담론을 교화하는 등), 그가 의지하는 것은 성서의 철학이지 그것의 권위가 아니다. 성서의 역사성, 출처, 즉 진정한 것이든 추정된 것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오직 그 사상이 중요하다.
셰스토프에 대해 말할 수 있듯이, 키에르케고르는 성서에서 그들의 철학이 그대로 미리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그들의 질문에 응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선포되었더라면 (그리고 델포이 신 [아폴로]에 의해 선포되지 않았더라면),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철학은 그들의 질문에 답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고, 무방비 상태로 존재자들을 역사의 후사르들에게 칼을 뽑아 내던졌을 것이다.
책들 사이에서 홀로, 성서는 인류Man에게 열려 있는 채, 무한한 가능성의 압력 아래에서 매 순간 "진지함"과 단절할 준비가 된 부조리를 깨뜨린다. 또한 우리가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힘Power의 힘을 깨뜨린다 ; 그것은 홀로 우리에게 그 의미, 그 정도를 드러낸다. 또한 존재자를 소외된 개인으로 만들어 마법에 굴복하게 만드는 미스터리의 해결책을 드러낸다. 그 근원은 무(無Nothingness)이며, 그 원동력은 죄이고, 자립적인 지식autonomous Knowledge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 대한 믿음이 성서를 형성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철학, 그 형이상학은 그것들에 믿음의 의무를 지우지 않고. 그 자체로 고려되어 철학사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사상은 철학과 계시의 권위를 분리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고, 전자를 따르지 않고 후자를 따랐으며, 반면 계시의 권위가 부족한 그리스 사상에 집착해야 했다. 셰스토프와 키에르케고르의 경우는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 만약 신이 바가바드 기타에서 권위가 아닌 힘Power을 처분하는 존재로 제시되었다면, 그들은 브라만 철학에 그들의 믿음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수께끼 같은 철학! 용어, 방법, 기법 없는 ! 그것은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규범을 제공하지 않는다. "자신self"이 이성Reason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것의 정당화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위험은 공허한 담론과 시적 은유로 지나쳐가고 심지어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러나 세상에 실존적 사고가 존재하는 순간, 비록 미발달의 형태로만 존재하고, 자신이 세속적이라고 믿더라도, 그것은 자유, 가능성, 부조리의 철학을 중심으로 나방처럼 돌 수밖에 없다. 좋든 싫든, 실존 철학은 예언적 사고의 딸(또는 친척)이다.
『소송』의 결말 부분에서 카프카의 실존적 사고. 그의 주인공은 사형수들(검을 든 후사르들)에게 넘겨져 처형당하게 된다. 그는 알지 못하며 그들은 그에게 (역사의 "진지함") 숨기고 있다.
잊었던 항변이라도 있는 걸까? 물론 그런 것이 있다.
아무리 확고 부동한 논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살고자 하는 사람에겐 저항하지 못한다.
이 카프카적 사유의 세계는 마법에 의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억압되었다. 그 마법은 아테네Athens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탈출을 막지 않고 자유를 금지하며, 여전히 열려 있는 문을 통과하는 우리의 통로를 막으며, 우리가 보낸 메시지를 받을 수 없게 하며, 우리를 철창이 없는 감옥에 가두고, 입에 닿을 수 있는 샘물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마시지 못하게 한다.
좋든 싫든, 니체의 실존주의 사상은 카프카적 세계보다 더 아테네에 속하지 않지만 창세기 사상의 딸이다.
“사람들은 결국 한번은 숨겨진 조화나 미래의 행복과 정의를 위해 모든 위안을 주는 것, 신성한 것, 치료하는 것, 모든 희망과 모든 믿음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신 자체를 희생으로 바치고 자신에 대한 잔인함에서 돌과 어리석음, 중력, 운명, 허무를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허무를 위해 신을 희생으로 삼는다는 것-마지막 잔인함인 이러한 역설적인 신비는 이제 막 나타나고 있는 세대를 위해 남겨졌다. : 우리는 모두 이미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을 알고 있다.
신이 없는 세계, 우리가 신을 죽인 세계, 니체가 말한 것처럼 실존 철학이 탄생한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세계에 우리는 빠져 있다. 살해된 신으로 절정에 도달하는 키에르케고르와 셰스토프의 철학은 (적어도 서두르고 있는 사상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를 이것이 단순히 피로, 안전과 휴식의 필요 때문에 잃어버린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휴식, 안전, 확실성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이끌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질문과 함께 모든 평온함을 깨뜨리고 싶은 위험한 영혼(그것이 바로 그들의 정체이다)이 아니라 지친 영혼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철학적 위기가 아니라 종교적 위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발견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며,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둘 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 : 그들의 질문이 "시poetry"로 증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스스로 설정한 과제는 단순히 실존 철학과 그렇지 않은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 자체로 이 에세이에서 다루고 싶지도, 해결하고 싶지도 않은 무한한 수의 문제와 이의제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철학을 인식할 수 있는 특별한 표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와 같은 형이상학적 명제에 직면했을 때 생성되는 반응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모나드를 정의해야 할 때 그것은 닫혀 있으며 "감각적 종sensible species"이 침투할 수 있는 문과 창문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확언이 당신을 달래주는가? 도덕적으로 마음을 진정시켜주는가? 마음의 만족을 주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확실히 철학자이지만, 이 용어의 실존적 의미에서 당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닫힌 문과 창문을 꿈꾸기에 충분하다면 당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녀와의 내 역사는 시로 증발해서는 안 된다.
이는 그가 의미하는 헤겔 철학에의 반응이다. (그는 항상 자신 스스로의 조언을 따랐던 것은 아니며, 실존 철학의 주요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그의 소산시키는 사유였다.)
그러나 만약 당신에게 "고통과 박차(拍車) torture and a spur"라는 한계가 있다면, 만약 당신이 항상 혹은 단 한 번이라도 울부짖었던 사람들 중 하나라면, 논리는 살고 싶어하는 남자를 저항할 수 없다고 외친 사람 중 한 명이라면, 문도 창문도 없는 세상에서 숨이 막히고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 형이상학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의 열정은 실존적일 것이다.
분명히 이 열정은 개념의 수준까지 올라가지 않지만, 적어도 그 무력함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대담하지 않은가?
그것이 가치 판단이지만, 존재론적 판단에서 가치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모나드의 구조의 기원이 무엇이든, 그 친밀한 핵심에는 이러한 구조를 깨뜨릴 수 있는, 라이프니츠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비밀스런 의지가 있다. 저항하는 행위는 억압하는 행위만큼이나 존재론적 힘을 가지고 있다. 억압에 대한 새로운 의지가 생길 때마다, 다시 한 번 이 억압과 억압의 억압을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것이며,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것이며, 무한히도, 폐쇄의 형이상학에 영원히 영향을 미치며, 파열의 형이상학, 자유의 형이상학, 절대자가 조금만 느슨해져도 행동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고, 조금만 부주의해도 행동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채. 이 뻔뻔한 불안, 이 신성한 건강 염려증(diese impertinente Unruhe, diese heilige Hypochondrie) !
그 무례한 불안과 성스러운 건강 염려증이 평화, 정신적 만족, 지성과 같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연구의 도구, 방법의 입문prolegomena이 될 수는 없을까?
철학자의 역할이 존재의 불안을 유지하는 것일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 없는, 지식도 아닌, 우리를 빈손으로 만드는 철학에 너무 많은 것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역사가 그 실패만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 철학이 우리, 예외자가 아닌 다른 타자들과 갖는 관련 ! 그것이야말로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리고 반박할 수 없다. 하지만 실존 철학이 모든 가르침이 끝나는 순간, 지식이 더 이상 우리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순간, 검을 든 후사르가 돌이킬 수 없는 승리를 거둔 순간부터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검을 든 후사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분명한 것은 가르침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한, 지식이 우리의 질문에 답하는 한, 그리고 후사르와 교전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한 ; 우리가 여전히 측정 가능한 것들의 왕국, 치료법을 알고 있는 질병들의 왕국에 있는 한 ; 여전히 승리할 수 있는 전쟁들이 있다는 것 ;
분명한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직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한, 그때 우리는 긍정 철학의 가능성, 절대적인 영지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왕국에서는 예외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
아주 거대하지만 깨지기 쉬운 왕국, 작은 재앙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재앙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자!
현실의 정도를 자신의 힘만으로 측정하는 것이 여전히 긍정적인 철학의 특권으로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선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것일까?
이 시점부터 - 하지만 오직 여기서부터 -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이고 역사적이며 유효하지 않은 철학이 시작된다. 이 철학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긍정 철학에 의해 공식화된 지식 이론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고 한계를 부여한다. 그것은 철학자에게 철학의 중심에 있는 이러한 문제들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요구하는 것일까?(그가 승인할 필요는 없는)
그리고, 철학자에게 무인의 땅이 시작되는 철학의 경계에서 다른 유형의 탐험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 관점에서 다르게 채비를 갖추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가 등장하는 것을 인식하도록 요구하는 것일까? 철학자에게 이해할 수 없거나 "불행"에 부딪히는 순간, 그것들에 등을 돌리지 말고 "수다chatter"라고 부르지 말라고 요청하는 것이 많은 것일까?
철학자가 직면한 문제들을 가능한 한 빨리 “정신적 만족”을 얻기 위해 “해석”하지 말라고 특별히 요청하는 것이 많은 것일까? 이 “만족”을 찾기 위한 수천 년의 탐색은 철학자가 그와 함께 끌고 다니며 감히 생각하지 않는 불치의 고통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항상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 이 특별한 순간들에서, 아마도 우리가 눈을 뜨고 의지 전체를 긴장시켜 모나드가 닫히지 않고 유한하게 열려 있고 무한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항상 의존하는 것은 아닌 이 예외적 순간들만이, 우리가 무에 머물도록 강요하는 마법의 “힘”을 마주하는 것에 달려 있다. - 이 무는 우리의 내적 경험(느낌, 경험[Sentimus, experimus)의 증거와는 달리, 우리의 작은 모나드에는 문과 창문이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때 존재자는 자신의 자유가 거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내재된 내면에서 영원히 자신을 닫아버리고, 거짓 출구와 거짓 초월만을 제공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이다. 즉 자아를 초월한 자아의, 존재에 대한 지식의, 지식에 대한 보편적 이성의, 그리고 자신을 떠날 수 없는 그의 내면성과 평행한 신의 거부이다.
하지만 실존자Existent—아마도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존재Existence만큼이나 일반적인 범주이며, 이 개념 역시 희생되어야 한다. "예외exception"는 단순히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실존자든 주어진 순간에 "예외"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지 않은 철학은 모든 사람이 일상적인 삶의 조건, 즉 모든 질문에 대한 준비된 답이 있는 한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감염성, 지진은 가장 준비되지 않은 사람, 가장 진부한 삶에서 갑자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때까지 그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모든 사람은 "예외자"가 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레기네 올센과 결혼하고 "예외자"가 되지 않기를 더 선호했을 것이다.
니체는 프라우 바그너에게 전보를 보내기 전에 먼저 화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계시"에 맞서기보다는 마차에 치이는 것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것이고, 파스칼은 심연보다 의자를 더 선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방향을 잃고 이성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끔찍한 경험보다는 어떤 형태의 복종이든, 사실 "필연성의 전쟁necessary war"의 후사르를 선호할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욥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를 구하는 것보다 더 쉽다. 그러나 우리를 "예외자"로 만들고 실존적 문제에 굴복시킬 경험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그 고통을 겪어야 하고 그 약속을 들어야 할 것이다.
무슨 약속인가?
"당신은 멋진 월요일을 맞이할 운명입니다!
잘됐네요!
하지만 일요일은 결코 끝나지 않을 거예요!"
카프카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위대한 월요일"을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 : "당신은 운명입니다 ... . . !!"
만약 존재자existent가 문과 창문이 없다면, 이 목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리고 존재자 자체에서만 나온다면, 왜, 그때조차도 "결코!"라고 말하는 목소리보다 덜 정당할까?
왜 이 열정만이 쓸모가 없어야 할까?
왜 혼자서 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군분투해야 할까?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결코 끝나지 않을까?
하지만 역사의 일요일을 그렇게 침울하고, 너무 불안하고, 너무 오랫동안, 너무 조급하게 만드는 것은 "위대한 월요일"의 낯선 목소리로, 그것의 "진지함"을 선포하고, 오직 아무것도 아닌 것일 뿐이며, 오직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후사르를 보내는 것이다.
가장 깊은 구조 안에 자기 자신에 의한 부정negation 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무가 아닐 것이고,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부터 역사가 존재자를 잔인하게 지배하는 것은 단지 마법의 힘(Zauberkraft)일 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기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