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맞선 삶 : 노먼 O. 브라운

by 낭만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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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브라운 Norman O. Brown의 『죽음에 맞선 삶Life Against Death: The Psychoanalytical Meaning of History』(Wesleyan Univ Press, 1985, 2nd)에서 <서문>과 1장 「인간이라 불리는 질병 the disease called man 」을 번역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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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먼 브라운을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관심과 이어진,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읽기에서 비롯되었다.


20세기 들어서 정신분석가들은 아동기의 경험에 집착했으나 아동기가 인간에게 왜 그토록 결정적인 시기인지에 대해 꽤 완벽하고 그럴듯한 상식적 그림을 짜맞출 수 있게 된 지는(신기하게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 그림의 공로는 많은 사람, 특히 간과된 인물인 랑크에게 돌려야겠지만 내 생각에 이 그림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명확하게 요약한 사람은 노먼 O. 브라운이다. 그가 프로이트에 대한 방향을 바꾸면서 주장했듯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초기 연구에서 밝힌 욕정과 경쟁심의 지엽적인 성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기획'이다.(한국어판, 90쪽)


아울러, 노먼 브라운의 저서가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아 안타깝다. 또한, 그가 서문에서 언급했던 게자 로하임 Géza Róheim의 저서들도 훌륭한 번역자를 만나기를 희망한다. 다행히도 최근 그동안 절판 상태였던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의 저서들이 재출간되어 반갑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신분석과 심리학이 상담실의 소위 "카우치"에서 오고가는 담화 속에서 "개인" 심리에 대한 정신 장애 치료의 도구와 수단을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행정 당국의 책상 위에 놓인, 잘 표집되어 그려진 '정신 건강' 통계 그래프가 나의 현재의 심리적 양상과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노먼 브라운의 "인류의 보편적 신경증universal neurosis of mankind" 이 지금, 여기의 우리 사회에서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내가 나 스스로를 대상으로 '자기 분석' 하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초역이기에 오역이 있을 수 있겠다. 발견되면 즉시 수정할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저서의 한국어판의 경우 확인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추후 보완하겠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먼 브라운에 대한 지적 약력과 입문적 소개는 엘리 자레츠키 Eli Zaretzky의 추도 기고문「Norman Brown 1913-2002」(『Radical Philosophy 118 (March/April, 2003)』)을 번역하여 올린다.


국내에서 참고할만한 글은 조한욱 선생의「노먼 브라운의 사상」(중앙사론 42, 2015)이다.




<약력>


노먼 O. 브라운은 1913년 뉴멕시코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의 베일리얼 칼리지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옥스퍼드 시절 그의 지도교수는 이사야 벌린이었다.

1930년대 브라운은 대통령 선거 운동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전략사무국(OSS)에서 근무했으며, 그의 상관은 칼 쇼르스케Carl Schorske였고 동료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와 프란츠 노이만 Franz Neumann이 있었다. 마르쿠제는 그에게 프로이트를 읽도록 권했고, 이는 1959년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죽음에 맞선 삶』으로 이어진다.

그는 웨슬리언 대학교Wesleyan University에서 고전학을 가르쳤으며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의식사 History of Consciousness > 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죽음에 맞선 삶』의 배경>


이 책이 그를 1960~70년대 신좌파 New Left 운동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재평가할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프로이트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삼았다. 그의 동기는 정치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적 작업은 인간의 조건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양심을 물려받은 나는,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자유주의 사상과 행동을 이끌었던 정치적 범주들의 시대적 퇴조 superannuation of the political categories를 경험했다”고 그는 회상한다. 이어 그는 “죄와 냉소, 절망의 정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우리는 고전적인 정치 개념과 인간 본성의 정치적 성격을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 책은 1960년대 사회 변혁기 속에서, "어떻게 프로이트가 ‘구시대적’ 마르크스주의 계승자로 떠오르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다룬다. 60년대 이전까지는, 인간 삶에 대한 압도적 사실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것처럼, 물질적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후 풍요affluence, 자동화(사이버네이션 cybernation), 우주 정복의 조짐 등은 이러한 생존 투쟁이 더 이상 삶을 지배하지 않아도 됨을 시사했다. 케인즈가 예언했듯, 경제 문제 해결의 전망은 사회 전체적 ‘신경쇠약nervous breakdown’ 혹은 창조적 병리 상태creative illness를 불러와 사회적 목적에 대한 재검토를 촉발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재검토의 수단을 갖지 못했으나, 정신분석은 달랐다.


하지만 1950년대의 지성계는 프로이트를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진보 환상을 반박하는 보수적 사상가로 읽었지, 그 계승자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브라운의 저서를 발굴해 알렸던, 당시 학생이던 노먼 포드호레츠Norman Podhoretz와 제이슨 엡스타인Jason Epstein에 따르면 브라운이야말로 카렌 호나이Karen Horney,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같은 초기 프로이트 비평가들의 ‘값싼 상대주의ʻcheap relativism’를 경멸하며 “프로이트 같은 거인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그를 통과하는 것뿐”임을 이해했다고 한다.


<『죽음에 맞선 삶』의 문제 의식>


『죽음에 맞선 삶』은 두 가지 핵심 논제를 제시한다.


첫째, “어떻게 스스로를 억압하는 동물이 존재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여기에 답을 제공한다. 브라운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 경험을 규정하는 요소는 분리에 대한 두려움 fear of separation이며, 이는 훗날 죽음의 공포 fear of death로 전환된다. 개별화individuation란 이러한 원초적 공포에 대한 방어적 반응으로서, 본질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적대적 경향’에 기반한다.


불안에 몰린 Driven by anxiety 자아 the ego는 '자기 창조 self-creation라는 자기 원인적 causa sui 프로젝트’에 사로잡히며, 이는 ‘비현실적인 독립성’으로 짐 지워진다. 자아의 성적 역사 자체 sexual history of the ego가 이러한 비현실성을 보여준다. 대상-리비도가 나르시시즘적 리비도로 전환되는 탈성애화 Desexualization 과정이 자아 구축의 주된 방식이다.


브라운은 유아의 정신적 취약성에 대한 강조에서는 프로이트와 일치했으나, 자아에 대한 일방적 폄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정신분석이 [개인] 발달의 목표로 제시했던 ‘개인적 자율성, 성기적 성숙 genital sexuality,, 승화’ 를 모두 억압의 형태로 간주했다. 특히 그는 정신분석이 영혼(혹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정신분석의 진정한 목적은 양자를 다시 통합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를 위한 방법은 초기 유아기의 ‘다형적 변태성 polymorphous perversity ’으로의 회귀였다. 이는 예술과 놀이에서 경험되는 자아 초월 transcendence of the self 상태이자,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와 야코프 뵈메 Jakob Boehme 같은 기독교 신비가들이 알았던 경지였다.


핵심은 자아의 자기보존 self-preservation 충동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브라운은 성기적 조직화genital organization를 “아직 죽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자아의 산물”이라며, 억압을 “인류의 보편적 신경증ʻuniversal neurosis”이라 불렀다.


브라운은 역사 또한 개인과 유사하게 외상 trauma, 억압, 억압된 것의 회귀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역사도 신경증의 구조를 지닌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의 탄생을 신경증의 핵심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개인 발달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중대한 시기였다. 프로이트의 원래 공식에서 유아가 항문기 anality 에서 성기기로 이행하듯, 중세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항문기의 억압·변형·재탄생 과정으로 나타났다.


브라운에 따르면 자본주의란 사회적으로 조직된 항문성 socially organized anality으로, 근대 사회의 유사-개별화된 성기기 pseudo-individuated genitality 아래 작동하는 진정한 동력은 ‘배설물에 대한 사랑love of shit’이었다. 루터Luther는 상업의 악마적 성격 Satanic character을 일찍이 간파했으며, 브라운은 이를 탐욕excremental overtones of possession, 인색함miserliness, 통제라는 배설적 함축으로 읽었다. 루터에 따르면 교황권의 궁극적 죄는 세속, 곧 상업 혹은 악마와의 타협이었다.


브라운에게 죽음은 다시금 삶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의 연계를 강조했지만,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간과했다고 브라운은 지적했다.


“프로테스탄트는 자기 소명을 받아들이되, 이는 곧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과 같다.”


즉, 이 세계와의 자유롭고 억압 없는 합일이 부활과 영혼/육체 분열의 초월transcendence of the soul/body divide 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죽음에 맞선 삶』은 4년 먼저 출간된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과 연관지어 논의된다. 두 책 모두 자동화가 열어젖힌 역사적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러나 마르쿠제가 ‘필연적 억압necessary repression’과 ‘잉여 억압surplus repression’을 구분하며 일정한 현실성을 유지한 데 비해, 브라운은 억압 없는 인류라는 불가능할 만큼 유토피아적인 비전을 예언자적 어조로 제시했다. 또한 1960년대의 포용적 분위기 속에서 브라운 사상의 기독교적 기반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는 그의 1965년 저서 『사랑의 몸 Love’s Body』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반면 마르쿠제의 책은 철저히 세속적이었다. 그럼에도 한 측면에서 브라운은 마르쿠제를 넘어섰다. 마르쿠제가 여전히 심리적 고통의 주된 원인을 외부 사회의 요구에서 찾은 반면, 브라운은 좀 더 프로이트로 다다가, 의존과 분리에 따른 고통이라는 [심리적] 사실 속에 뿌리내린 내적 굴레(‘ʻmind-forgʼd manaclesʼ 정신이 만든 족쇄’)를 더 분명히 파악했다.


<『죽음에 맞선 삶』의 현재적 의의>


비록 1950년대에 출간되었지만, 『죽음에 맞선 삶』의 주요 독자는 세계 곳곳에서 등장한 다중심적이고 혁명 지향적인 학생·청년 그룹, 곧 신좌파였다. 종교개혁기의 급진적 분파들(재세례파Anabaptists, 디거스Diggers, Holy Rollers홀리 롤러스)이 지상에서의 구원을 추구했던 것처럼, 신좌파 역시 억압이 불가피하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의 지평을 개척하는 돌격대와 같았다.


『죽음에 맞선 삶』은 이들의 주요 관심에 응답했다. 즉, 사회정치적 세계가 본질적으로 광기어린 체제라는 믿음, 핵가족의 거부, 모든 구별과 경계의 초월, 승화와 성취 윤리 achievement ethic의 거부, 그리고 진정성authenticity·표현적 자유·놀이의 옹호 등이었다. 『에로스와 문명』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자아와 "외부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연결 inseparable connection” 에 근거했다. 이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 자연과의 새로운 연결에 대한 열망, 성을 성기적·이성애적 한계를 넘어 해방하고 나아가 신체와 세계 전체를 에로틱하게 만들려는 시도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의 ‘탈유토피아적 post-utopian’ 시대와는 거의 무한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책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브라운이 근대 경제의 해방적 잠재력을 포착한 것은 옳았지만,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문화적·정치적 변혁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일어났다. 근대 경제의 막대한 힘이 삶을 위한 방식으로 동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간과했을지라도, 그 어두운 악마적 이면을 드러낸 그의 통찰은 여전히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


또한 사회적 격변기의 꿈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잠복한다는 점 역시 기억할 만하다. 1960년대의 꿈은 지하로 숨어들어 여성운동, 1989년의 격변, 오늘날의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 투쟁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브라운의 죽음을 기리는 것은 그가 무엇보다 믿었던 것, 곧 재탄생을 북돋는 길이다.








<서문>


1953년, 나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재평가할 필요를 느끼며 프로이트에 대한 심층적 연구로 눈을 돌렸다. 프로테스탄트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적 작업은 인간의 조건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양심을 물려받은 나는,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자유주의 사상과 행동을 이끌었던 정치적 범주들의 시대적 퇴조 superannuation of the political categories를 경험했다. 죄와 냉소, 절망의 정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우리는 고전적인 정치 개념과 인간 본성의 정치적 성격을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사상의 전통적 학파들이 상투적이고 비생산적sterile 으로 굳어졌다는 느낌은 나와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낡은 전제를 문제 삼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준비가 된 모든 이들을 향한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의 낡은 관념이나 우리가 상식common sense이라 부르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에게—그리고 이미 저자에게 요구되었듯이—기꺼이 상식을 유예할 것을a willing suspension 요구한다. 목표는 새로운 관점을 열어 보이는 데 있다. 신중한 평가의 과제, 즉 이론적 가능성을 현재 사건과 과거 역사라는 완강한 사실들과 대면시키는 일은 그 이후의 과제로 남는다.


하지만 왜 하필 프로이트인가? 도덕과 합리성이라는 서구 전통에 진지하게 헌신한 이라면 누구든, 프로이트가 말하는 바를 한결같이, 주저 없이 마주하는 것은 충격적인 체험이다. 수많은 위대한 이상들의 몹시 추잡한 면seamy side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굴욕적이다. 그 추잡한 면을 감추어온 문명적 금기를 깨뜨리는 것은 범죄적이다. 프로이트를 경험한다는 것은 금단의 열매the forbidden fruit를 두 번째로 맛보는 것이며, 따라서 이 책은 죄를 짓지 않고서는 그 경험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의 눈이 열리고, 무화과 잎fig leaf이 더는 벌거벗음을 가리지 못할 때, 우리의 현재 상황은 구체적 현실 전체로서 full concrete actuality 비극적 위기 tragic crisis로 체험된다. 이 책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말하자면, 인류는 그 끊임없는 분투와 진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no idea of what it really wants.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프로이트는 옳았다. 즉, 우리의 실제적 욕망real desires 은 무의식적unconscious이다. 또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인류가 자기의 실제적 욕망을 의식하지 못한unconscious 채 만족을 얻지 못하므로, 삶에 적대적이며 스스로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death instinct, Todestrieb을 상정한 것은 옳았다. 파괴적 무기의 발전은 우리의 현 상황의 딜레마를 명확히 드러낸다. 우리는 무의식적 본능과 충동 drives —삶과 죽음—과 타협하거나, 아니면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we surely die .



그러나 프로이트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프로이트의 영향력이 있었을 때 in the hands of , 정신분석학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였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죽은 이후, 정통 정신분석학은 폐쇄적이고 거의 스콜라적 철학 체계scholastic system가 되었으며, 상투성과 비생산성으로 치닫는 일반 문화적 경향의 예외가 아니었다. 엄밀히 탐구해 보면, 정신분석학의 전체 메타 심리학적 토대는 재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정통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 후기 개념인 죽음 충동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 나아가, 초기의 보다 잘 확립된 것으로 간주된 개념들—성욕sexuality, 억압repression, Verdrängung, 승화—조차 재정식화를 필요로 한다.


이 책의 제2부에서 제4부에 걸쳐 “에로스 Eros,” “죽음 Death ,” 그리고 “승화 Sublimation”라는 제목 아래, 정신분석 이론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체계적 진술, 비판, 재해석이 제시된다. 이러한 시도의 난점은 소위 신(新)프로이트주의 neo-Freudianism의 파국적 결과에서 드러난다.


전통적인 도덕과 이성의 개념에 편승하여 프로이트를 상식에 조화되도록 잘라내는 것amputate은 쉽다—그러나 그렇게 하면 프로이트에게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역설 paradox 그 자체이거나, 아니면 무(無) nothing 이다. 어려운 것은 프로이트가 탐험했던 그 어두운 심연의 세계로 그를 따라 들어가 그곳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의 선구자적 지도 pioneering map가 새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의 손을 놓을 용기를 갖는 것이다.


프로이트주의 내부의 위기를 밑바탕에서 형성하는 것은 실존적 혹은 사회적 모호성이며, 프로이트 자신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적 비교(祕敎) esoteric 차원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전혀 무(無)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인간 사유의 혁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외적 교설 exoteric 차원에서 그는 정신분석 운동을, 전문적 숙련자들에 의해 통제되고, 선택받은 소수의 부유층에게만 제공되는 치료 방법으로 출범시켰다. 게다가 이들은 사회에 대한 효용이 이미 “비정상적” 수준의 좌절 frustration이나 정신 장애로 손상된 개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정신분석을 인간 본성, 문화, 그리고 역사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일반 이론으로 재구성하여, 인류 전체의 의식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역사적 과정의 새로운 단계로서 이를 수용하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천재성과 인간성으로, 정신분석적 의식의 장 field of psychoanalytical consciousness 속에 단지 신경증 환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까지도 머물게 하려고 애썼다. 이는 그의 저작들, 즉 『토템과 터부』(1913)에서 『모세와 일신교』(1937)까지의 문화론적 저술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내가 “인류의 일반적 신경증 the general neurosis of mankind”이라 부르는 문제—이 책의 제1부에서 규정한 문제—를 인류의 일반적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한 중심 문제로 삼는 데 있어, 실존적·이론적 결과들에 온전히 대면하지는 않았다. 이 책의 제6부 「출구 The Way Out」가 시도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인류학적 anthropological 관점으로 전환하기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때의 1차 자료는 정신분석적 “카우치 couch ” 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 속으로 나아감으로써 획득되기 때문이다. 역사란,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 의 말에 따르면, 인류의 악덕과 어리석음이 기록된 장부다. 필요한 것은 정신분석·인류학·역사의 종합이다. 그리고 이 방향에서의 게자 로하임 Géza Róheim 의 작업은 프로이트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선구적 업적이다.


다시 말해, 신(新)프로이트학파 심리학의 파국catastrophe은 우리에게 경고를 준다. 이러한 종합은 정신분석과 전통적 학문적 시야 vision 사이의 차이를 값싸게 절충하는 방식 compromising 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5부 「항문성 연구 Studies in Anality」는 프로이트의 가장 기괴한 역설들 중 하나가 인간 문화의 학문에 대해 지니는 혁명적 결과를 탐구한다.


정신분석의 재해석에서 파생된—그러나 본질적인—부산물은 지적 역사 속 프로이트의 위치에 대한 재해석이다. 만약 그가 단순히 개인 치료 방법의 창시자로 간주된다면, 그를 의학사 속에서, 즉 샤르코 Charcot와 브로이어Breuer의 후계자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인간 자기 의식의 일반적 진화 the general evolution of human self-consciousness 속의 새로운 단계를 대표한다면,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의 일부는 프로이트와 현대 사상의 다른 조류들 사이의 다소 불분명한 연관성을 발굴하고 평가하는 데 있다.


프로이트와 니체 사이의 의도되지 않은 친연성 unpremeditated affinity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 자신도 무의식의 발견에서 시인들이 이미 자신을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탐구 과정에서 일반적으로는 인식되지 않은 다른 친연성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첫째, 프로이트의 방법론적 친연성은 '변증법적 사유'라 불릴 수 있는 논리학의 이단적 전통 heretical tradition in logic과 연결된다. 둘째, 그의 교의적 doctrinal 친연성은 특정한 신비적 이단 전통mystic heresy과 이어지는데, 그 전통의 가장 중요한 근대적 대표자는 야코프 뵈메 Jacob Boehme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마지막 장인 「몸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the Body」은 내가 정신분석을 근대 사상의 다양한 운동—시, 정치, 철학에서의 운동—사이에 놓인 잃어버린 고리로 보는 관점을 개괄한다. 이들 모든 운동은 현대 문명의 비인간적 성격을 깊이 비판하면서도 더 나은 것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정신분석을 새롭게 하고, 또 정신분석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사유를 새롭게 하려는 이 시도의 결과는 다소 기이한 eccentric 책이다. 이러한 기이함이 “옳다 right ”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옳음”을 겨냥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문제들을 대중 의식 속에 소개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책의 문체도 그러하다. 즉, 역설paradox은 신중한 수사의 장식 rhetoric of sober qualification으로 희석되지 않는다. 나는 새로운 사유들을 궁극적이고 “광기 어린” 귀결까지 밀어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프로이트 자신도 광인처럼 보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사유를 전개하던 시기(1953–1956)에는 지나치게 기이해 보였던 방향이 그리 엉뚱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몇 가지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그 반가운 징후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1955)이다. 이는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의 불운한 모험 ill-fated adventures 이후 억압의 폐지 abolition of repression 가능성을 다시 열어준 최초의 저작이다.









1장 「인간이라 불리는 질병」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프로이트 사상의 열쇠가 된다. 그 단어는 “억압 repression”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정신분석학의 전체 건축물은 억압 이론 theory of repression 위에 세워져 있다. 프로이트의 전 생애는 그가 ‘억압’이라 부른 현상 연구에 바쳐졌다. ‘프로이트적 혁명Freudian revolution’이란, 억압을 하나의 사실로 인정할 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인간 본성과 인간 사회에 관한 전통적 이론의 급진적 수정이다. 새로운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사회의 본질은 개인에 대한 억압이고, 개인의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억압 repression of himself이다.



억압 개념을 탐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프로이트를 그의 가설로 이끌었던 길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돌파구는, 적어도 과학적 담론에서는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던 일련의 현상들 속에서 의미성 meaningfulness을 발견한 데 있었다. ; 즉, 그것은 첫째, 정신이상자the mentally deranged의 ‘광기 mad’의 증상들, 둘째, 꿈, 셋째,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여러 현상들 — 즉 말실수, 착오/오류 errors , 무작위적 사고 random thoughts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어떤 의미에서 신경증적 증상neurotic symptoms, 꿈, 오류들 속에서 ‘의미성’을 발견했던가? 물론, 그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들은 결정되어 determined 있으며 인과적 설명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그는 정신 결정론 psychic determinism의 원리에 대한 명확한 충실성을 엄격히 고집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간다.


만약 이러한 현상들이 행동주의적 원리 behavioristic principles 에 따라, 단순한 표면적 연상 작용superficial associations of ideas 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원인은 있겠지만 의미는 없을 것이다. '의미성'이라는 것은 목적이나 의도의 표현을 뜻한다. 프로이트 발견의 핵심은, 신경증적 증상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꿈과 오류들 역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바로 그것들이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의미meaning’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개 이러한 목적적purposive 표현의 요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당사자 자신에게조차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인간 안에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목적들, 곧 ‘비자발적 목적들 involuntary purposes’이 존재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더 전문적인 프로이트의 언어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무의식적 관념들 unconscious ideas(unbewusste Vorstellungen)’이다.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정신적 현실world of psychic reality 의 세계가 열리는데, 우리는 그것의 내적 본성에 대해 외부 세계의 현실에 대해 무지한 것만큼이나 무지하다. 우리의 의식적 관찰이 그 세계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감각 기관이 외부 세계에 대해 보고해 주는 것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정신적 삶 속에서 무의식의 발견에 지나지 않는다 nothing more than the discovery of the unconscious in mental life ”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 혁명은 인간이 의식적 삶 외에 무의식적 정신생활을 갖고 있다는 가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중대한 가설은, 인간 안의 어떤 무의식적 관념들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의식화될 수 없다는 것 incapable of becoming conscious 이다. 그것들은 의식적 자아에 의해 강하게 부인disown되고 저항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전체 이론은 사실 우리가 환자를 그의 무의식을 의식화하도록 만들려 할 때 그가 가하는 저항resistance (Widerstand)을 인식하는 것 위에 세워져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과 의식적 삶 사이의 역동적 관계는 갈등의 관계이며, 정신분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적 갈등의 과학 science of mental conflict' 인 것이다.


무의식의 영역은, 개인이 자기 안에 있는 어떤 목적이나 욕망을 의식적 삶에 받아들이기를 거부 refuse할 때 확립된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의식적] 관념에 맞서는 심리적 힘 psychic force을 자기 내부에 세운다. 개인이 자기에게 속한 목적이나 관념을 거부 rejection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 바로 이것이 억압 repression(Verdrängung)이다.


“억압의 본질은 단순히 어떤 것을 의식 밖으로 배제rejecting하거나 밀어내는 기능에 있다.”


더 일반적인 말로 하면, 억압의 본질은 인간이 자기의 인간적 본성으로서의 현실realities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데 있다. 그러나 억압된 목적들은 여전히 그의 것이며, 이는 꿈과 신경증적 증상에서 드러난다. 그것들은 무의식이 의식으로 돌출하는 현상을 나타내며, 그 결과 무의식의 순수한 형상이 아니라 두 갈등 체계 사이의 타협compromise을 산출한다. 바로 그 점에서 갈등의 실재reality가 드러난다.


따라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억압 이론 없이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는 무의식 이론을 억압 이론으로부터 얻는다.” 달리 표현하면, 무의식은 “역동적으로 무의식화된 억압된 것 the dynamically unconscious repressed ”이다.


억압은 [프로이트 이론] 전체 체계에서 핵심어이며, 그 말 자체가 정신적 갈등에 역동적으로 기반을 둔 구조structure를 함축하도록 선택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정신적 억압psychic repression의 성격을 전쟁, 내전, 경찰 행위police action와 같은 사회적 현상에서 끌어온 일련의 은유와 유추를 통해 보여준다.


신경증적 증상, 꿈, 착오errors 에서 인간 본성의 일반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긴 도약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이 긴 도약임을 인정하더라도, 프로이트는 좁은 분야에서 도출된 가설의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적용을 탐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더 나아가 공세적으로, 전통적 인간 본성 이론들이 이러한 주변적 현상들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고 단언할 수도 있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 가운데, 프로이트의 이론을 제외하고, 꿈이나 광기에 대해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이 과연 있었던가? 꿈과 광기 insanity가 정말로 인간 삶의 주변에서 무시할 만한 요인들인가?


그러나 사실은, 프로이트는 신경증적 증상·꿈·착오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으로 나아가는 데 전혀 추가적인 도약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억압된 무의식repressed unconscious이라는 가설이 근거하는 증거 자체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현상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정신병리적 현상들은 실용적 관점 practical point of view에서는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론적 관점에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무의식적 의도 unconscious intentions의 침투가 우리의 일상적이고, 또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행동 속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이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꿈이다. 왜냐하면 꿈 역시 “정상적” 현상으로서 무의식의 존재뿐 아니라 그것의 억압의 역학적 과정(꿈-검열 dream-censorship )까지 상세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일한 억압의 역학적 과정이 신경증적 증상을 설명해주며, 또 신경증 환자의 꿈은 그들의 증상의 의미를 밝히는 단서가 되는데, 이 꿈들이 구조나 내용에서 정상인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으므로, 결론은 꿈 자체가 하나의 신경증 증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신경증적이다.


적어도 꿈은 신경증과 건강한 상태의 차이가 낮 동안에만 유지됨을 보여준다. ; 그리고 일상생활의 정신병리도 동일한 억압의 역학적 과정을 드러내므로, “건강한” 사람의 깨어 있는 삶 역시 무수한 증상-형성들 symptom-formation 로 가득 차 있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아니라 오직 양적 차이만 있으며, 그것도 대체로 우리의 신경증이 일상의 수행을 불가능하게 만들 만큼 심각한지의 실제적 문제에 기초할 뿐이다.


혹은 더 역설적인 서술paradoxical formulation 을 하자면, “신경증적” 인간과 “건강한” 인간의 차이는 단지 “건강한” 이들이 사회적으로 통상적인 형태의 신경증usual form of neurosis을 가지고 있다는 점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같은 명제를 보다 기술적이고 신중하게 서술하면,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꿈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신경증은 우리의 정신 구조의 정상적 일부로 이미 존재하는 메커니즘을 활용한다는 점이지, 어떤 병적 장애 morbid disturbance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메커니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첫 번째 역설인 억압된 무의식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이자 훨씬 더 중요한 역설, 즉 인류의 보편적 신경증universal neurosis of mankind을 함축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의 '핵심적 난제 pons asinorum '이다. 신경증은 일시적 일탈이 아니다. 즉,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으며,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정신분석가에게조차 그러하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는 모든 신경증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자기분석을 통해 발견했다. 『꿈의 해석』은 소크라테스의 격언 “너 자신을 알라”의 위대한 응용과 확장 가운데 하나다. 다시 말해, 인류 보편 신경증의 학설은 신학의 원죄 교리에 해당하는 정신분석학적 유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기본 가설에서 결정적인 요점은 정신적 갈등의 존재다. 즉, 이 가설은 갈등과 그 갈등을 이루는 힘들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규정specification 하지 않고서는 의미 있게 정식화될 수 없다. 프로이트는 근본적인 정신적 갈등을 여러 층위에서, 그리고 여러 관점에서 반복적으로 분석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이 다양한 설명들로부터 공통된 핵심을 추출해 보자.


우리가 프로이트의 억압 이론을 처음 설명할 때,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는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 “목적/의도purpos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과도하게 모호한 단어는 하나의 근본적인 프로이트적 공리를 감추고 있다. 즉, 꿈과 신경증을 산출하는 정신적 갈등은 지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소망·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가 자주 사용하는 “무의식적 관념 unconscious idea ”이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과 관념만을 다루는 한 우리는 표면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심적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오히려 정동 emotions(Affekt) 이다. 모든 정신적 힘은 정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관념이 억압되는 것은 그것이 발생해서는 안 되는 정동의 방출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정확히 말하면 억압은 정동을 다루는 것이지만, 정동은 관념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꿈이 본질적으로 소망 충족 wish-fulfillment, 즉 억압된 무의식적 소망의 표현임을, 그리고 신경증 증상 또한 마찬가지임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이제 이 일련의 용어들 가운데 가장 추상적으로 적합한 것으로 “욕망desire”을 택한다고 하자. 프로이트의 공리는 인간의 본질은 [의식적] 사고에 있다고 본 데카르트와는 달리 욕망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플라톤(그리고 일정한 점 mutatis mutandis 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은 인간의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um' 을 관조contemplation와 동일시했다. 목적telos이 정의의 근본 요소라면, 이는 인간의 본질이 관조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을 관조자로 보는 교의 옆에는 모호하게 플라톤의 에로스론 Platonic doctrine of Eros이 나란히 놓여 있다. 『향연 Symposium』과 『파이드로스 Phaedrus』에서 파생된 교의에 따르면, 인간의 근본적 탐구는 자신의 사랑에 만족스러운 대상satisfactory object for his love을 찾는 것이다. 인간을 '관조자'로 볼 것인가, '사랑을 찾는자'로 볼 것인가 하는 이중적 모호성은 스피노자와 헤겔에게서도 발견된다.



서구적 사유의 전통의 전환점은 헤겔에 대한 반발 react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이어바흐, 이어 마르크스는 관조적 전통을 버리고 그가 “실천적-감각적 활동 practical-sensuous activity”이라 부른 것에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 개념의 의미와 프로이트와의 관계는 여기서 벗어날 만한 큰 주제가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우위 primacy of will 를 내세우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모색하여 자신의 입장을 약화시키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목적이 가능한 한 관조적으로 되는 데 있다는 위대한, 그러나 다소 광기 어린 서구 전통에서 벗어난 하나의 이정표로 남는다. 프로이트적 심리학은 순수 관조pure contemplation라는 범주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제거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심리적 장치psychic apparatus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소망 wish 뿐이다.


인간의 본질로서 욕망 개념과 함께, 그것은 쾌락pleasure의 획득과 고통의 회피로 방향지워진 directed toward 에너지로 정의된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우리의 전 정신심리적 활동은 쾌락을 획득하고 고통을 피하는 데 기울어져 있으며, 쾌락 원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조절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삶의 목적의 프로그램을 이끄는 것draws up the programme of life’s purpose은 단순히 쾌락 원리일 뿐이다”라고도 말한다.


이 분석 수준에서 쾌락 원리 the pleasure-principle 는 어떤 복잡한 쾌락주의 이론 hedonistic theory 이나 쾌락의 원천에 관한 특정한 이론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는 상식에서 끌어온 가정일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리의 목표를 행복이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에 대한 욕망은 전체 세계 whole world 와 충돌한다. 현실은 인간에게 쾌락을 포기해야 할 필요를 강요하며necessity of renunciation of pleasures, 현실은 욕망을 좌절시킨다. 쾌락 원리는 현실 원리 reality-principle와 갈등하며, 이 갈등이 억압의 원인이 된다. 억압의 조건 아래에서 우리의 존재의 본질은 무의식 속에 있으며, 오직 무의식에서만 쾌락 원리가 절대적으로 지배한다. 꿈과 신경증 증상은 현실의 좌절이 우리 존재의 본질인 욕망을 파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무의식은 인간 영혼 속에 길들여지지 않고 파괴될 수 없는 요소다. 온 세계가 그것에 맞선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행복의 긍정적 충족을 향한 깊이 뿌리박힌 열정적 추구passionate striving 를 고수한다.



반면에 욕망을 의식 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억압 과정을 수립하는 것은 의식적 자아conscious self 이며, 다시 말해 우리의 내면의 실재 존재 inner real being와 외부 현실 사이를 매개하는 우리 자신들의 외표면surface이다. 의식적 자아의 핵심은 마음, 혹은 마음 속 체계의 일부로서 외부 세계로부터의 지각을 받아들이는 영역이다. 이 핵심은 언어의 힘 power of speech을 통해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는데, 이는 그것을 교육과 문화화 acculturation의 과정에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 의식적 자아는 환경과 문화에의 적응 기관이다. 따라서 의식적 자아는 쾌락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적응의 원리principle of adjustment to reality, 즉 현실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앞서 의식과 무의식 체계 간의 갈등으로 설명했던 꿈과 신경증적 증상은 쾌락 원리와 현실 원리 사이의 갈등의 산물로도 분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 꿈, 신경증적 증상, 그리고 환상과 같은 무의식의 모든 다른 현상들은 견딜 수 없는 현실로부터의 도피 flight나 소외alienation를 어느 정도나마 나타낸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은 쾌락 원리로의 귀환을 의미하며, 현실에 의해 거부된 쾌락의 대체물substitutes for pleasures denied by reality 이다. 이 두 갈등하는 체계 사이의 타협 속에서, 욕망된 쾌락은 축소되거나 왜곡되거나 심지어 고통으로 전환된다. 억압의 조건 아래, 현실 원리의 지배하에서 쾌락 추구는 증상이라는 지위 status of a symptom 로 전락한다.


그러나 현실이나 현실 원리가 억압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문제를 정의하는 데 그친다. 프로이트는 때때로 현실 원리를 ‘존재를 위한 투쟁struggle for existence’과 동일시했는데, 이는 억압을 궁극적으로 노동의 객관적 경제적 필요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문화나 사회라는 매개를 통해 그 자신의 현실과 다양한 현실(그리고 다양한 노동 강제)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따라서 사회가 억압을 부과한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 하지만 이 공식조차도 프로이트의 초기 저작에서는 미흡한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곧 사회가 억압을 부과하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 경제적 필요의 요구를 합법화legislating the demands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순진하고 합리주의적인 사회학은 프로이트의 초기 정신분석 이론과 함께 서 있거나, 더 정확히는 무너진다.


후기 프로이트는 불안 이론doctrine of anxiety에서 보듯, 인간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동물이자 스스로를 억압하기 위해 문화나 사회를 창조하는 동물이라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사회가 억압을 부과한다’라는 공식조차 문제 해결보다는 문제 제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제기된 문제는 중대한 것이다. 만약 사회가 억압을 부과하고, 억압이 인류의 보편적 신경증을 초래한다면, 사회 조직과 신경증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결이 있다는 결론이 따른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곧 신경증적 동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한 점은 신경증을 겪을 수 있는 능력capacity for neurosis에 있으며, 이 신경증의 능력은 곧 문화적 발전 능력의 이면일 뿐이다.


따라서 신경증 연구라는 과학적 경로를 통해서 프로이트는 니체가 한 말( “인간이라 불리는 질병 the disease called man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신경증은 문명 civilization 혹은 문화의 본질적 결과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인간적 겸허함humility의 가혹한 교훈이 드러난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섬세한 비평가들이나 추종자들은 이를 회피 evade하거나 억압 suppress한다. 우리는 싫어하는 낯선 문화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화 또한 신경증으로 임상 분석 analyze clinically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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