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버지의 기능 : 자크 라캉의 오이디푸스 재해석

by 낭만소년




자크 라캉의 오이디푸스 관련 논문을 번역하여 올린다.


지난 번에 번역한 <오이디푸스와 아버지의 이마고 : 라캉>에서「오이디푸스와 모세, 그리고 부족의 아버지」를 함께 읽기를 권한다.


이번에 번역한 논문 「신화에서 구조로 From myth to structure」는 마찬가지로 자크 알랭 밀레 Jacques-Alain Miller가 편집하고, 러셀 그릭 Russell Grigg 이 번역한『자크라캉 세미나 17 : 정신 분석의 이면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17 : The Other Side of Psychoanalysis』(2007)에 실려있다.




이 논문을 읽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이 책『자크 라캉 세미나 17 : 정신 분석의 이면 』의 개괄적 해석을 제공하는 저서로 국내에서 번역된 『자끄 라깡과 정신분석의 이면』(김종주 외,라깡분석치료연구소 역, 인간사랑2017)을 참고하면 좋겠다.



아울러 좀 더 용이한 접근으로는 현재까지 꾸준하게 라캉 세미나의 원전을 통해서 자신만의 해석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백상현 선생의 영상을 추천한다.


최근에 올라온 영상들은 『자크 라캉 세미나 17 : 정신 분석의 이면 』의 주제 가운데 <아버지의 죽음과 그 기능>을 다루고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다.




https://youtu.be/3PzgXg9XlHs?si=O4fXc2EzHz3fqiT6



초역이므로 오역이 있을 것이다. 발견되면 즉시 수정하겠다. 본문에서 언급된 저서들의 국내본 확인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추후 보완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9월 들어 번역을 거의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게 이번에 좋은 기회가 생겨, 특수대학원 상담심리 석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일과 공부의 병행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기능,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오이디푸스, 상실 혹은 죽음과 애도, 불안과 우울> 등의 주제들은


제게는 답을 해야할 스핑크스의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화에서 구조로」


이 자리에 계신 한 분이 지난번 제 발언에 약간의 실망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저는 그 점에 감사드립니다. 그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가 열었다고 알려진 길을 먼저 걸어가 주신 덕분에 저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즐거움은, 아시다시피, 최소한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법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 지금 이 자리에서 웃고 계시니 이름을 밝혀도 무방하겠지요. 바로 마리-클레르 분Marie-Claire Boons입니다. 저 분께서 저에게 『무의식 L’Inconscient』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학술지의 별쇄본을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이 글을 사전에 접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이 학술지는 우수한 글들을 실어온 바 있지만, 다소 역설적으로 제 강의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던 편집위원회의 성격 때문에 정작 저에게는 배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호가 ‘부성 paternity’을 주제로 하고 있기에, 저는 먼저 마리-클레르 분의 글을 주의 깊게 읽었고, 이어서 우리 동료인 콘라드 스타인Conrad Stein의 글도 검토했습니다.


마리-클레르 분이 원한다면, 오늘 그녀의 글을 주석과 논평의 대상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글에서 다루어진 주제는 프로이트가 말한 ‘아버지 살해 father's murder’입니다. 이와 관련해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 글 속에는 제가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해 제시했던 논의를 예견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녀가 이 글을 발표한 시점은—제가 겸손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 주장을 이미 전개한 이후였습니다.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제가 지금까지 신중히 전개해온 과정 속에 이미 이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아마도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의 한 모임 자리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되돌아가며 더 분명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여러분을 한 편의 논문의 여러 지점에 매달리게 두는 것보다는 훨씬 더 분명할 것입니다. 그 논문은, 사실 여러 측면에서, 일종의 서론이자 문제 제기이며, 그리고 말하자면 준비 작업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하나를 기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발언권을 마리-클레르 분에게 넘기겠습니다.

저는 결국 두 번째 방식을 따르겠습니다.



1.


아버지의 죽음 father's death. 사실, 누구나 알다시피 이는 모든 논의의 핵심이자 결정적 지점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신화라는 이름 the name of myth 으로만이 아니라, 정신분석은 무엇을 다루는가 하는 문제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마리-클레르 분의 논문 말미에 의하면, 많은 것들이 이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까지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정신분석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법the law(상징계의 질서)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천만에 Fat chance. 저는 이 지점이, 자유주의적 담론 libertarian hook 이 정신분석에 억지로 연결되려 한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층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제가 ‘정신분석의 이면 the other side of psychoanalysis’이라고 불렀던 것의 의미 전체를 구성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니체적 무게 Nietzschean gravity와 함께 “신은 죽었다God is dead”라는 이 선언―복음과 같은―을 반향하는 한에서, 결코 우리를 해방시키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프로이트 자신의 발언에 있습니다. 마리-클레르 분스는 자신의 글 서두에서, 제가 이미 두 해 전 세미나에서 말한 바를 적절하게 지적합니다. 즉,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선언은, 프로이트가 분석적 해석analytic interpretation의 이름으로 제시한 종교의 동기motivation for religion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 자체는 프로이트가 놀랍게도 근원적이라고 제시한 어떤 것, 즉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로서의 아버지를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미 하나의 역설 paradox이 드러나며, 이 때문에 앞서 언급한 마리-클레르 분스는 일정한 곤란에 직면합니다. 요컨대 정신분석은 종교의 장(場)field of religion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정점은 분명히 무신론atheism에 있습니다. 단, 이 용어가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의 의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때에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문제시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인데, 모든 징후 indications가 말해주듯, 그것은 의문에 부쳐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지적했듯,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신이 죽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If God is dead, then everything is permitted ”라는 문장은, 우리의 경험 텍스트에서 피할 수 없이 이렇게 결론지어집니다. 곧 “신이 죽었다”에 대한 응답은 “이제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Nothing is permitted anymore”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의 지평horizon 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프로이트가 그것을 주이상스 jouissance, 즉 지고의 대상supreme object과 동일시된 어머니, 곧 근친상간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주이상스의 열쇠라고 선언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살해가 프로이트 이론에 도입된 것은, “어머니와 동침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sleeping with the mother means ”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아버지의 죽음을 토대로 하여, 이 주이상스에 대한 금지prohibition가 최초로 성립하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되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살해 father's murder입니다. 제가 언급하고 있는 저자가 논문 제목에서 매우 적절히 표현했듯이 말입니다. 바로 여기, 곧 우리에게 제시된 오이디푸스 신화Oedipus myth 안에서 주이상스의 열쇠가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 신화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발화 내용 혹은 진술[énoncé]) 속에서 그렇게 제시된다 하더라도, 저는 이미 그것을 있는 그대로 the latter for what it is ―즉, 명시적 manifest 내용으로―취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정확히 서술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프로이트가 그것을 비극적 차원에서 수용한 방식에 따르면, 아버지의 살해가 주이상스의 조건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라이오스Laius가 제거되지 않는다면―그리고 이 과정은 투쟁의 한 국면 속에서 일어나며, 이 한 걸음을 통해 오이디푸스가 실제로 어머니의 주이상스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은데―아무런 주이상스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살해의 대가로 그것을 얻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 속에서 제정된 신화에서 취해진 참조reference 이기에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오이디푸스가 주이상스를 얻는 것은, 그가 인민을 구제했기 때문입니다. 곧, 이들을 몰락시키고 있던 물음―하나의 수수께끼로 제시된 것, 즉 스핑크스라는 모호한 존재가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 표상된 것―에 답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는, 말하자면 반쪽 발화처럼, 두 반쪽 몸으로 구성된 이중적 성향 double disposition 을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그 수수께끼에 답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민 가운데 진리의 문제question of truth로 인해 발생했던 긴장을 해소하는 모호성ambiguity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그 수수께끼에 답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자신의 비극을 예견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한 그 답변이 선택의 행위를 통해 어떻게 진리의 함정 trap of truth 에 빠지는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Who knows what man is ” 인간이란 네 발로 걷다가, 뒤이어 두 발로 서고, 마지막에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 존재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까요? 특히 오이디푸스의 경우처럼 얼마나 모호한ambiguous 과정입니까. 오이디푸스와 그의 혈통 전체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정확히 지적했듯, 똑바로 걷지 못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오이디푸스가 의지하게 된 것은, 맹인의 지팡이cane of the blind man는 아니었으나, 그만큼이나 특별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 세 번째 요소를 이름으로 부르자면, 바로 그의 딸 안티고네였습니다.



진리가 어긋나있다 Truth has strayed?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오이디푸스에게 남겨진 귀환의 길 path of return을 열어두기 위한 것일까요? 진리는 그에게 다시 떠오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또다시 개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불행이 두 배로 커져, 더 이상 스핑크스의 질문에 자원한 이들만이 아니라, 그의 인민 전체가 모호한 형태ambiguous form, 곧 역병 the plague 에 의해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전승의 주제들 속에서 스핑크스가 그 원인으로 제시되는 바로 그 역병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에게 진리의 문제 question of truth가 다시 제기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으로 끝나는가? 우리가 첫 번째 근사치first approximation 에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 즉 적어도 거세라는 형태 form of castration로 지불된 대가와 관계하는 어떤 것으로 끝납니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요? 결국 오이디푸스에게 일어나는 일은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것scales fall from his eyes이 아니라, 그의 눈 자체가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는 것 eyes fall from him like scales 입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단순히 거세를 겪는 주체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말하고자 하듯, 바로 거세 그 자체being castration itself 가 되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곧, 대상의 특권적 지지 privileged supports 가운데 하나가―그의 응시라는 형태form of his eyes로―그에게서 사라질 때 남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오이디푸스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단순히 계승의 길을 따라 왕좌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문제를 지워버린 effaced the question or truth 자로서 주인the master으로 선택되는 방식에 있다는 물음이 제기된다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제가 제시한 명제에서 여러분이 아시듯, 주인의 위치master's position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거세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가려져 있지만 분명히 암시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곧, 제대로 말해진 계승이라는 것도 거세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환상 fantasy 이 언제나 기묘하게도 아버지 살해라는 원초적 신화fundamental myth에 의해 암시될 뿐, 결코 그것에 제대로 결부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만약 거세가 아들을 강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아들이 정당한 경로를 따라 아버지의 기능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모든 경험에서 드러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거세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승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기원origin에 자리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죽음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어쩌면 일종의 가면mask일 수 있다는 암시를 얻지 않습니까? 죽음이 분석가의 위치에서, 즉 주관적 과정 속 거세의 기능을 통해 드러나고 경험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 자체를 가리는 무언가—일종의 베일veils—에 의해 은폐되어, 다시 말해 그 보호aegis 아래 놓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분석가의 위치가 최종적이고 엄밀하게 진술할 수 있게 해주는 그 핵심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을 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 살해의 신화라는 핵심적 주제가 처음 프로이트에게 나타난 맥락이 바로 『꿈의 해석』 차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곳에서 죽음 소망wish for death이 드러납니다. 콘라드 슈타인Conrad Stein의 글은 이와 관련하여, 아버지의 죽음이 실제 사건으로 도래한 바로 그 순간에 다시금 표면화되는 죽음 소망을 포착하면서, 이에 대한 주목할 만한 비판을 제시합니다. 프로이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꿈의 해석』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도, 필자가 강조하듯, 아버지가 불멸father be immortal이기를 바라는 소망, 곧 아버지가 결코 죽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은폐된 형태로 각인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해석은 분석적 심리주의analytic psychologism의 입장에 따라 제시된 것으로, 아동의 위치의 본질은 죽음을 넘어서는 전능성omnipotence that would place it beyond death의 관념에 기초한다는 전제를 기본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저자의 손에 들어가면, 이 해석은, 말하자면, 예측 가능한 것이 됩니다. 반대로, 아동의 위치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규정을 비판한다면, 죽음 소망과 그것이 은폐하는 바—만약 정말로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다면—는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탐구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주체 구조subjective structure를 관찰할 때, 그것이 기표signifiant의 도입에 의존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구조의 출발점에 우리가 ‘죽음에의 인식 connaissance de la mort’이라 부를 만한 것을 두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전능성의 이름 name of omnipotence으로 죽음의 부정denial of death 을 해석하는 입장에서, 콘라드 슈타인은 프로이트의 주요 꿈들에 대한 분석을 교묘하게 활용합니다. 예컨대, 눈을 감아 달라는 유명한 요청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바 아래 놓인 응시 an eye under a bar’의 모호성은 하나의 선택지에서 파생된 산물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2


실제로, 같은 연속선상에 놓인 마지막 꿈을 중심에 두어 해석한다면—내가 과거에 그렇게 한 적이 있듯이—그것은 어쩌면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사실, 우리가 같은 시리즈의 마지막 꿈을 중심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른 의미에 취약할 것입니다. 제가 그 당시에 해왔던 일입니다.


프로이트 자신은 자신의 꿈이 아니라 한 환자의 꿈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 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 꿈을 분석하기 위해, 그것을 발화와 진술 utterance and statement이라는 두 층위로 분해했습니다. 이 분석은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 중 하나가 참일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째,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무언가가 살아남는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은 자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둘째,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 경우 죽은 자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어떤 살아 있는 존재도—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no one knows, no living being in any case, what death is. 놀라운 점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자발적으로 산출되는 형식들이 바로 이 전제, 곧 죽음은 엄밀히 말해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위에 서술된다death is properly speaking unknowable는 것입니다.



저는 당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했습니다.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어떤 환원 불가능한 무언가가 모른다 something irreducible does not know는 사실입니다. 다만 여기서 “그것이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 Doesn't know that we are dead”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we’라는 이름으로 말할 때 우리는 한꺼번에 모두 죽지는 않으며, 그 점이 우리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어떤 죽은 자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 Something does not know that I am dead ”


바로 이러한 점이, “모든 인간의 필멸성—all men are mortal”이라는 논리를 성립시키는 조건이 됩니다. 그 기초는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비-지식 non-savoir 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간”이라는 말이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믿게 만듭니다. 즉, 아버지로부터 태어난born of a father 모든 인간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말해지기를, 인간이 죽은 자인 한, 그들에게 주어진 주이상스 jouissance를 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적 용어로 보자면, 죽은 아버지와 주이상스 사이에는 등가 관계가 설정됩니다. 말하자면, 그 주이상스를 예비해 두는 이는 바로 그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술되는 방식에서, 즉 미묘한 유연성을 지닌 비극의 차원이 아니라, 『토템과 터부』 신화의 진술 속에서, 프로이트적 신화는 죽은 아버지dead father 와 주이상스를 등가로 놓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조적 연산자structural operator"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화는 스스로를 넘어섭니다transcend. 프로이트가 강조하듯, 이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 곧 실재계의 이름 name of the real 으로 진술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아버지가 주이상스를 수호한다는 것 the dead father is what guards jouissance, 바로 그 지점에서 주이상스의 금지prohibition 가 시작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선언되는 것입니다.



죽은 아버지가 곧 주이상스라는 사실은, 우리 앞에 ‘불가능 impossible 그 자체’의 징후로 나타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가 실재계 the real의 범주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내가 말했듯, 실재계는 상징계와 상상계와 근본적으로 구분되며, 실재란 곧 ‘불가능’ the real is the impossible 입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부딪히는 장애물 obstacle의 의미가 아니라, 상징계 안에서 스스로를 ‘불가능한 것’으로 선언하는 논리적 장애물의 이름입니다. 실재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현합니다.


실제로, 오이디푸스 신화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연산자―구조적 연산자―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은 ‘실재적 아버지 the real father’라 불립니다. 여기에 붙는 성격은 이렇습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의 이름으로, 프로이트 체계의 심장부에서 실재적 아버지가 승격promotion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가능을 가리키는 항을 프로이트의 발화utterance [enonciation]의 중심에 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프로이트의 발화는 심리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원초적 아버지original father에 대한 어떤 심리학도 상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시되는 방식은 조롱을 불러일으킵니다. 지난 세미나에서 언급했듯, 모든 여성을 향유하는enjoys 아버지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는 단 한 사람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과한 일이 흔히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혀 다른 참조점different reference, 곧 거세castration로 되돌아갑니다. 이는 우리가 거세를 주인 기표the master signifier의 원리로 정의하는 순간부터 작동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가 끝날 무렵,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겠습니다.


주인 담론 masters discourse은 주이상스가 대타자the Other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드러내며, 바로 그가 그것의 수단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어적 차원에서 주이상스가 성립하는 방식은, 집요하게 요구함으로써 결핍 the loss을 산출하고, 그 결핍을 통해 잉여향유 surplus jouissance가 형체를 얻는 것입니다.


우선 언어, 주인의 언어language of the master를 포함하여, 그것은 본질적으로 요구demand일 수밖에 없으며, 그 요구는 실패합니다. 언어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반복 repetition이며, 바로 이 반복에서 다른 차원의 어떤 것이 생성됩니다. 나는 이를 상실/결핍 a loss이라고 규정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잉여향유 surplus jouissance가 형체body를 얻습니다.



이 반복적 창조repetitive creation, 곧 분석적 경험analytic experience 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차원을 개시하는 것은, 원초적인 무능력 original impotence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는 아동의 무능력이지 결코 전능omnipotence이 아닙니다. 만약 정신분석이 ‘아이가 어른의 아버지이다 child is the father of the man’라는 명제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어디엔가 이 둘을 매개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매개적 국면에서, 비로소 주인 기표 the master signifier가 산출됩니다. 사실 그것은 어떤 기표든 될 수 있습니다.


제가 한때 프로이트적 구조와 관련하여 대상 관계 object relation가 문제되는 국면을 정식화할 때, 저는 실재적 아버지the real father를 거세의 행위자 agent of castration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거세·좌절frustration·박탈 privation의 본질적 차이를 명확히 드러낸 뒤에야 가능했습니다. 거세는 본질적으로 상징적 기능symbolic function이며, 오직 기표의 분절articulation of signifiers이라는 맥락에서만 사유될 수 있습니다. 좌절은 상상계의 차원에 속하며, 박탈은 자명하듯 실재계의 차원에 속합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정의할 수 있을까요? 우선 거세는 남근phallus이 우리 앞에 제기하는 수수께끼를 다루는 작용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남근은 명백히 상상적 차원의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거세라는 상징적 작용 속에서 문제화됩니다. 좌절은 언제나 매우 실재적인 어떤 것을 겨냥하지만, 그것을 향한 요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단지 ‘자신이 그것을 빚지고 있다 one is owed this real’는 상상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명한 사실self-evident이 아닙니다. 한편, 박탈은 오직 상징적 차원 속에서만 위치지을 수 있습니다. 실재적 차원에서는 결여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재는 그 자체로 충만하며, 따라서 결여lacking의 도입은 필수적이면서도 외부적입니다. 이러한 결여의 도입 없이는 우리 자신이 실재 속에 위치할 수 없으며, 바로 이 점에서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something in it is lacking’는 것이 주체를 처음으로 특징짓는 조건이 됩니다.



당시 저는 행위자the agents의 수준에 대해서는 다소 덜 명시적으로 다루었지만, 그 방향을 가리킨 바는 있습니다. 실재적 아버지는 다름 아닌 거세의 행위자이며, 바로 이 점을 은폐 mask하기 위해 ‘실재적 아버지’를 불가능한 것으로 선언하는 담론이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위자agent’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흔히 ‘거세자는 아버지’라는 공상 속으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프로이트가 의지했던 신화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이러한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가설적인 최초의 시점에서 아들들이 여전히 동물적 존재였을 때, 그들이 여성 집단에 접근하지 못했다고 해서 거세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세가 금지의 표명 the statement [enonce] of a prohibition으로서 정식화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번째 순간, 즉 ‘부족의 아버지 살해 the murder of the father of the horde’라는 신화의 국면에서입니다. 그리고 이 신화가 서술하듯, 거세는 다른 어떤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종의 공동의 동의common accord, 곧 특이한 기원singular initium의 계기로부터 발생합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바로 이 기원의 문제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동일하게, 여기서 ‘행위act’라는 용어도 다시 짚어야 합니다. 제가 과거에 정신분석적 행위를 논하면서 강조한 바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곧 행위란 언제나 이미 기표의 효과 signifier's effect가 충만히 작동하는 장, 다시 말해 기표가 세계 속에 진입한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다면, 최초의the beginning 시점에는 행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살해로 규정될 수 있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신화는 결국 제가 축소한 의미 이상을 가질 수 없으며, 곧 ‘불가능의 표명statement of the impossible’에 불과합니다. 행위는 언제나 이미 법the law이 자리잡은 기표적 장a field 안에서만 성립합니다. 다른 행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위란 오직 이러한 기표적 조직의 효과를 참조할 수밖에 없으며, 그 전체의 문제성entire problematic을 내포합니다. 한편으로는 주체로서 정식화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발생하는 것 자체가 필연적으로 수반하거나 곧 그것이기도 한 상실/결핍loss [chute],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전부터 존재해온 입법적 기능legislative function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재의 아버지의 기능은 거세와 관련된 행위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점을 유보하기 위해 제가 제안한 ‘행위자agent’라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gir(행위하다)'라는 동사는 프랑스어에서 여러 울림을 지닙니다. 우선 ‘배우’(acteur)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또 actionnaire(‘주주’)라는 단어도 있는데, 왜 안 되겠습니까? 이 단어 역시 action(행위·주식)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를 통해 ‘주식’(une action)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ctiviste(‘행동주의자’) 역시 그렇습니다. 행동주의자란,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를 어떤 것의 도구로 간주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이어서 Actéon을 떠올려 봅시다. — 프로이트적 맥락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일상적으로 쓰이는 mon agent(‘내 대리인’)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리인’이란 곧 “나는 그에게 그 일을 하라고 돈을 지급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가 나를 대신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지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재의 아버지’와 ‘거세의 행위자’는 같은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실재의 아버지는 주인 행위자 master agency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3.



오늘날 우리는 ‘행위자’의 기능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가짜 상품이나 광고용 기획물, 즉 판매를 목적으로 유통되는 일종의 대리물들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짜’나 ‘상품화된 것’이 단순한 표피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회적 장치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허구적이면서도 동시에 효과적인 것이다. 이는 주인의 담론 master’s discourse이 극한까지 팽창하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국면 속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양상이며, 바로 그 사회적 토대 위에서 ‘에이전트’라는 기능이 부상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저는 여기서 어떤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언급만 해두겠습니다. 아마 우리는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며, 저로서는 충분히 다룰 가치가 있고, 또 분명히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강조하고 특별한 표지를 부여해 온 ‘에이전트’의 기능과 관련해서, 언젠가는 ‘이중 에이전트a double agent’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한 여러 전개들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개념이 가장 논박 불가능indisputable하고 가장 확실한 매혹fascination의 대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행위자 The agent who starts again는 주인의 작은 장터the master's little market―즉 각자에게 주어진 몫―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접촉하는 것, 곧 참된 가치를 지닌 모든 것, 즉 주이상스e의 질서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음모의 그물망web of intrigues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은 역할 속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한 이야기, 많은 함축을 지닌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이중 행위자'는 아프죠 The true double agent ill. 그는 그물망을 벗어나는 것도 결국은 배치[agence]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배치 arrangement는 진리 true가 될 것이고, 동시에 처음의 배치―분명히 가짜였던 그것―도 진리가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한 인물을 이끌었던 것입다. 그는 이유도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이 주인 담론의 원형적 행위자의 자리 속에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것을 간직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허용했는데, 그 본질을 한 작가 앙리 마시스 Henri Massis가 “벽은 좋은 것이다.Walls are good”라는 예언적인 말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르그Sorgue라는 사람, 이름조차 아주 하이데거적이라고 할 만한 그 사람은 나치 부역자들Nazi agents과 함께하면서 스스로를 이중 행위자로 만들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인민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People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가 진리 the true 또한 배치arranged[agence]되도록 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로 그 인민의 아버지를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불러내는 인민의 아버지에 관한 참조는 거세의 행위자로서의 실재적 아버지와 많은 연결을 가집니다. 프로이트의 진술은 무의식을 말하는 한에서라도 주인 담론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이 유명한 실재적 아버지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불가능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actually 이 실재적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질서 different order에 속하는 어떤 것입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것은 그가 노동 works을 한다는 점이고, 그것은 자신의 작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그가 무언가의 행위자the agent of something라고 한다면, 분명 그에게 큰 역할 big role을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히 좋은 측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일하고 또한 그는 사랑받기를 매우 원합니다 like to be loved.


그를 폭군으로 만드는 신비적 교도 mystagogy가 분명히 전혀 다른 어떤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구성물construction of language로서의 실재적 아버지의 수준에서이며, 이는 프로이트가 늘 지적했던 것입니다. 실재적 아버지는 언어의 효과일 뿐이며, 다른 어떤 실재도 갖지 않습니다. 제가 “다른 현실 other reality”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현실 reality은 전혀 다른 것이며, 그것은 제가 조금 전에 말했던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즉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재적 아버지”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unsustainable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실재적 아버지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정자spermatozoon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 아무도 자신이 이 정자 또는 저 정자의 아들이라고 말하려 한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혈액형이나 Rh 인자 검사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었고 지금까지 아버지의 기능 the function of the father이라고 여겨졌던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위험한 영역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어쨌든 여성이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란 무엇인가?what me father really is” 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아룬타 부족Aruntas tribes에서만이 아닙니다. 만약 정신분석이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왜 정신분석에서―때때로 그렇다는 의심이 드는데―그 행위를 실제로 한 사람, 즉 정자의 차원에서 행위한 사람과는 전혀 무관하더라도, 정신분석가가 “실재적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때때로, 여성 환자가 분석적 상황 속에서 맺는 관계에 대해―겸손하게 표현하자면―그녀가 마침내 어머니가 되었다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기능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데에는 아룬타 부족일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더 넓은 시각을 주기 때문에, 내가 가장 절박한 것으로 삼았던 분석에의 언급을 취하지 않더라도 동일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를 안겨줄 수 있지만,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의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도, 바로 그가 아버지가 되기를 바랐던 사람one would have liked to be the father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를 조금은 꿈의 영역into the dream으로 데려갑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들을 깨우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프로이트가 공들여 사유한 것 lucubrated(물론 신화의 차원에서도, 또는 환자들의 꿈에서 죽음 소망을 인식하는 차원에서도)은 프로이트의 꿈 dream of Freud's이라고 말한다면, 그 이유는 내 생각에 분석가가 꿈의 평면plane of dreams에서 약간 스스로를 떼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것의 충격적인 측면에 이끌려 분석가들이 마주친 것, 그리고 그 만남으로부터 배운 것은 아직 전혀 무르익지decanted 않았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는 면담에서 한 환자를 소개했습니다. 그가 아프다고 말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어떤 일들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그의 뇌파는, 기술자technician가 내게 말하길, 늘 수면과 각성 상태의 경계 border of sleep and a waking state에 있으며, 양쪽 사이를 오가면서 언제 그가 어느 쪽으로 넘어갈지 결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정은 거기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우리 분석가 동료들 모두, 어쩌면 결국 나 자신까지도 이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정신분석의 탄생 the birth of analysis 이 남긴 충격, 즉 외상성 traumatism 은 그들을 그런 상태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날개를 펼쳐 프로이트적 서술에서 좀 더 정확한 무언가를 끌어내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결코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것은,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프로이트가 서술한 실재적 아버지의 위치, 즉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위치가, 아버지를 필연적으로 박탈자depriver로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너도, 그도, 나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위치 자체the position itself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항상 상상적 아버지the imaginary father를 마주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구조적으로 우리를 벗어나는 어떤 것에 의존하는데, 바로 그것이 실재적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실재적 아버지가 어떤 확실한 방식으로 정의되는 것 be defined in any assured manner 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다만 거세의 행위자 the agent of castration로서라면 예외일 뿐입니다.


거세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정의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얼마 전 한 논문 심사에서, 정신분석을 모두가 아는 ‘심리학 백과’로 만들려는 입장을 단호히 취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거세는 단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세는 기표의 개입―그것이 무엇이든―을 통해 성 관계sexual relation[rapport du sexe]안에 도입되는 실재적 작동 a real operation입니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를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불가능한 실재 impossible real로서 규정한다는 점에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문제는, 환상이 아닌 이 거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작용을 통해서만 욕망의 유일한 원인이 산출되고, 그 결과 바로 그 환상이 욕망의 전체 현실reality of desire, 다시 말해 법the law을 지배하게 된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꿈에 관해서라면, 이제 모두가 그것이 하나의 요구라는 것, 곧 자유롭게 떠도는 기표들이며, 집요하게, 때로는 떠들며 발을 구르면서,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no idea what they want. 욕망의 기원origin of desire에 전능한 아버지omnipotent father 를 두려는 생각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환자의 욕망에서 주인 기표들 master signifiers을 추출했다는 사실에 의해 충분히 반박됩니다. 실제로, 프로이트가 바로 여기서 출발했으며, 그의 질문의 중심에 남아 있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실이 기록되었고, 더구나 그것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한 바보에 의해 반복되었기 때문에, 그 가치는 더욱 커졌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What does a woman want?’


한 여성. 단순히 아무 여성이 아닙니다. 그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프로이트는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성이라는 존재가 무엇이든 원한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모든 상황을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는 모든 상황에 불만을 갖습니다. Kinder, Küche, Kirche(아이, 부엌, 교회)뿐만 아니라, Culture, Kilowatt, Culbute (공중제비, 넘어짐), 누군가가 말했듯이 Cru et Cuit(날것과 익힌 것),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 똑같이 들어맞습니다. 그녀는 그것들을 흡수합니다. 그러나 일단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 질문은 욕망의 차원에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여성에게서 욕망의 차원에서 질문을 설정한다는 것은 곧 히스테리 환자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히스테리 환자가 원하는 것은―나는 이 직업적 소명을 가지지 않은 이들을 위해 말하는데, 그런 이들이 많을 것이다―주인a master입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명확합니다. 너무나 명확해서, 어쩌면 바로 여기에서 주인의 발명 invention of the master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추적하고 있는 것을 우아하게 마무리짓는 결론이 될 것입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주인입니다. 그것은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어, 오른쪽 위 작은 모서리에 자리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녀는 타자the other가 주인이 되기를 원하며,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너무 많이 알아서 그녀가 그의 모든 지식의 최고의 대가 supreme price라는 것을 믿지 않는 상황은 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주인을 원합니다. 그녀는 지배하고, 그는 다스리지 않습니다She reigns, and he does not govern.



바로 여기서 프로이트는 출발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녀’는 히스테리 환자를 가리키지만, 그것이 반드시 특정한 성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누구누구가 무엇을 원하는가What does So-and- so want?”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순간, 욕망의 기능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주인 기표(S1)가 산출됩니다.


프로이트는 여러 주인 기표들master signifiers을 산출했으며, 그것을 ‘프로이트’라는 이름으로 덮어 씌웠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어떤 것을 막아버리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 수준에서 살인murder과 같은 어떤 것이 ‘아버지의 이름name of the father’이라는 막음 plug과 결부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다는 것에 저는 놀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분석가들이 프로이트라는 이름에 대한 헌신 덕분에 지금과 같은 존재라고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단지 프로이트의 주인 기표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그들이 매달리는 것은 프로이트 그 자체라기보다, 무의식, 유혹 seduction, 외상, 환상, 자아the ego, 이드 등 여러 기표들입니다.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문제될 수조차 없습니다. 이 수준에서 살해할 아버지father to kill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기표들의 아버지가 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의 원인(because of)”의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이 수준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진정한 원동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이상스는 그것을 아버지에게 귀속시키려는 시도와 관련해 주인 기표를 지식, 즉 진리로서의 지식knowledge qua truth과 분리합니다. 분석가의 담론 도식schema of the analyst's discourse을 취한다면, 주이상스가 만들어내는 장애물은 내가 삼각형을 그려 넣은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합니다. 즉, 어떤 형태로든 산출될 수 있는 주인 기표와, 진리로 가장하면서 지식이 사용할 수 있는 영역 사이에 그것이 자리합니다.


바로 여기에 거세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진술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즉, 아이에게조차—누가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아버지는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 the father is he who knows nothing about truth라는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이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18. March 1970



<보충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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