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시간에 나는 너를 부르고 : 네루다의 사랑

by 낭만소년


요즘 짬이 나지 않아 번역 글 올리는 일이 수월치 않습니다.


대신 오래전 썼던 글을 올립니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jpg 네루다 자서전, 박병규, 이경민 역


애덤 펜스타인 (지은이), 최권행, 김현균 (옮긴이)  생각의나무 2005.jpg 네루다 평전, 애덤 파인스타인, 김현균, 최권행 역



말 그대로 이 거친 단상은 『네루다 자서전』『네루다 평전』을 토대로 했습니다.





내가 네루다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던 때는 대학 1학년 무렵 고 김남주 시인을 통해서였다. 당시에 김남주의 시는 하이네, 브레히트, 마야코프스키의 자장(磁場) 안에 있었는데, 그의 시가 곧 네루다에게 가는 이정표였던 것이다.


나는 문학개론 강의에서 흔히 다루는 질문 ‘시란 무엇인가’를 김남주로부터 배웠다. 시는 음악속의 삶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슬로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하이네, 마야코프스키, 네루다, 아라공은 그러한 모범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김남주가 말한 대로 “그들의 시는 내용으로는 아랫도리가 촉촉이 젖는 에로스를 감싸안고 넘어선” 에로스적 유물론이자 형식으로는 불온한 선전을 위한 전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나는 네루다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언제 호명되었을지 기억조차 희미했던 ‘네루다’를 다시 들었던 때는 2000년대 들어서이다. 정현종 시인의 의욕적인 번역으로 네루다의 시집이 서가를 장식하고, 그의 자서전과 평전이 우리 언어를 얻게되고,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르 메타포레’의 생명력을 힘주어 말하던 그가 네루다임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이제 나는 김수영, 김남주의 네루다에서 정현종의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많은 네루다를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발견한 네루다는 ‘자연과 사랑의 변호인’이었다.


테무코의 바다와 파도, 별들에게 바치는 송가(頌歌)를 만들었뿐만 아니라, 사랑 혹은 에로스의 흘러넘침에 도취되었던 시인으로서 말이다. 물론 그 곳에는 밤의 시간, 심연과 절망이 이미 자리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목가적이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고뇌에 찬 청년 시절의 나의 정열과 <칠레 남부의 거친 자연>이 혼합되어 있다. 번뜩이는 우수에도 불구하고 실존의 기쁨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시집을 무척 아낀다. 이 시집은 산티아고의 로맨스이다. 학생들이 다니는 거리, 대학, 인동덩쿨의 향기가 묻어있다.

-『네루다 자서전』



20 poesie.JPG 20 Poesie d'amore e una canzone disperata, 1924



사실 네루다의 이 기억은 반쪽의 사실만 강조되고 있다.


네루다가 대학 진학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밤열차를 타고 산티아고에 도착한 때는 1921년 3월이었다. 그의 나이 16~17살 무렵이다.



자서전에 언급된 '칠레 남부의 거친 자연'.

바로 그 곳은 도시 산티아고Santiago de Chile가 아니라 소년시절의 테무코temuco에서 교감을 나누었던 자연이었던 것이다.

일상의 감각은 자동적이고, 규칙적이며 습관적이어서 무딘 감각으로 남는다.

반면에 자연은 일상에서 무디어진 모든 감각을 일깨운다.



테무코 해변.jpg 테무코temuco의 산과 바다


실은 소년 네루다를 시인으로 만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닫힌 감각을 열게 만든 자연의 위대한 힘이었다.


한편, 네루다는 "목가적 자연이 주는 로맨스"를 살짝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토록 전투적이고 유물론적이고 관능적인 『스무 편의 사랑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이해하는 한 축이 된다.



1920 temuco.JPG



1920년 봄 네루다가 산티아고santiago de Chile를 떠나기 1년 전이었다.

여느 때 처럼 "테무코의 사베드라 Saavedra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여름을 즐기던 소년 네루다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소녀 테레사 바스케스Teresa Vazquez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Teresa Vazquez.gif 테레사 바스케스 Teresa Vazquez



그녀 -테레사 바스케스는 테무코 지역의 꽃 축제에서 지금 막 여왕의 영예를 안은 때였다.


지역 축제에서 여왕으로 뽑힌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지역사회에서 그 미모와 재능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습작을 일삼던 치기어린 시인 네루다가 축제의 여왕과 사랑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Saavedra.JPG Puerto Saavedra 사베드라



사베드라 해안가의 부서지는 하얀 포말,

밀려들고 벗어나는 바다의 내음새와 소리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총총하게 빛나는 별들,


테무코의 산과 바다, 별들이


소년과 소녀를 감싸 안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토착 원주민 마푸체족이나 점령국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인의 의상을 입은 결혼식 축제의 연인들처럼 달콤한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CHILE-COLU__c853964_131013_469.jpg 축제와 Mapuche 인디언 전통 의상



그로부터 1년 후

네루다는 교사가 되기 위해 산티아고 사범대학으로 진학을 결정한다.


그러나 산티아고로 떠나온 네루다의 곁에는 테레사가 없다.

그는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후 떨어져 지내면서 정말 열정적인 연애 편지를 그녀에게 보내곤 했다.

멀리있는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에게서 편지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랑하고 또 다시 행복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달콤하고 아름다운가.



1921년 네루다가 산티아고로 온 후 4년동안


그들은 휴일을 이용하여 짧은 만남을 통해서 관계를 지속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그들의 사랑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공간적 거리감은


심리적 거리감의 비유적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반영한다.


우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거지? 이렇게 차츰 멀어져 가고 있는 거야? 이게 나만의 느낌일까?


이렇게 소원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의 원인으로는 테레사 부모의 반대가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하층 네루다의 집안-네루다 아버지는 철도 용역 노동자-과 테레사 집안은 어울릴 수 없는 계층 구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young neruda.JPG



더욱이 테레사의 부모들은

네루다의 현대적 감각-헤어 스타일과 옷 입는 맵시 등-과 가치관을 못마땅해 했다.




그들 사이를 방해하는 완고하고 엄격한 가치관에 가로막혀


그들의 사랑도 끝을 향해 멈추고 있었다.



네루다는 언젠가 "사랑은 그토록 강렬하고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지만,

그 사랑이 끝난 후, 그것을 잊는다는 고통은 그토록 오래도록 남는다"고 했다.



여기에

한 청년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모든 다채로운 감정들이 있다.

망설임, 주저함, 떨림, 두근거림, 다급함, 기쁨, 슬픔, 아픔, 수렁에 빠짐, 자학 ……

사랑으로 인하여 열린 감각과 복합적인 감정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스무편의 사랑의 시 끝에


<한편의 절망의 노래>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_정현종 역-민음사-2007_완역판.jpg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너에 대한 기억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밤으로부터 나타난다.
강은 그 그치지 않는 슬픔을 바다와 섞는다.

새벽의 부두처럼 버려졌다.
이별의 시간이다, 오, 버려진 자!

차가운 꽃부리들이 내 머리 위에 비 오듯 쏟아진다.
오, 파편 구덩이, 난파한 것의 사나운 동굴.

네 속에 전쟁과 싸움은 축적되었다.
너로부터 노래하는 새의 날개는 솟아올랐다.

너는 모든 걸 삼켰다, 먼 거리처럼.
바다처럼, 시간처럼,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그건 공격과 키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등대처럼 반짝인 마법의 시간이었다.

조타수의 두려움, 눈먼 잠수부의 격렬함,
사랑의 광포한 취기,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안개의 어린 시절 내 영혼은 날개를 달았고 상처받았다.
길 잃은 발견자,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너는 슬픔을 띠 둘렀고, 욕망에 매달렸으며,
슬픔에 비틀거렸다,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나는 어두운 그림자의 벽을 열어젖혔고,
욕망과 행동을 넘어서, 계속 걸었다.

오, 살, 내 이 살, 내가 사랑했고 잃어버린 여자,
축축한 시간에 나는 너를 부르고, 너를 향한 내 노랫소리를
높인다.

항아리처럼 너는 무한한 다정함을 저장했고
또 무한한 망각이 너를 항아리처럼 깨뜨렸다.

섬들의 검은 고독이 있었고,
그리고, 사랑의 여자여, 네 말은 나를 끌어들였다.

갈증과 굶주림이 있었고, 나는 과일이었다.
슬픔과 폐허가 있었고, 너는 기적이었다?

아, 여자여, 나는 네가 이렇게 내 영혼의 흙 속에
네 팔의 십자가형 속에 나를 담았는지 모른다.

오, 물어뜯긴 입, 키스한 사지,
오, 굶주린 이빨, 오, 얽힌 몸.

우, 우리가 녹아 들고 절망한
희망과 힘의 미친 결합.

그리고 그 다정함, 물처럼 밀가루처럼 가벼운
그리고 말이 좀처럼 입술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게 내 운명이었고 그 속에서 내 갈망은 항해했으며,
그리고 그 속에 내 갈망은 떨어졌다,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오, 파편구덩이, 모든 게 네 속에 떨어졌다,
어떤 슬픔을 네가 표현하지 않았으며, 어떤 슬픔 속에 네가 빠지지
않았으랴!

놀에서 놀로 너는 여전히 불렀고 노래했다.
뱃머리에서 선원처럼 서서.

너는 여전히 노래 속에 꽃피고 현재에 틈입했다.
오, 파편구덩이, 열린 쓰라린 우물.

창백한 눈먼 잠수부, 불행한 투석꾼,
길 잃은 발견자,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밤이 모든 시간표를
묶어버리는 힘든 낙담의 시간.

철썩이는 바다 띠가 해변을 둘러싼다.

차거운 별들 떠오르고, 검은 새들 이동한다.

새벽 부두처럼 버려졌다.

떠는 그림자만이 내 손 속에서 몸부림친다.

오, 그 무엇보다도 먼, 오, 그 무엇보다도 먼.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오, 버려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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