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와 함께 한 나의 여정 : 커크 슈나이더

by 낭만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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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 슈나이더 Kirk J. Schneider의 논문「키르케고르와 함께 한 나의 여정 : 『역설적 자아』에서 『양극화된 마음까지』My Journey With Kierkegaard: From the Paradoxical Self to the Polarized Mind」(2015) 을 번역하여 올린다.


이 논문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주요 저작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특히 키르케고르 Kierkegaard 철학이 자신의 저작들 전체에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탐색한다. 그는『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Unto Death』, 『공포와 전율 Fear and Trembling 』같은 작품에서 “역설 paradox” , "무한성과 유한성 finite-infinite" , “수축-팽창 constrictive–expansive 연속선”이라는 개념을 도출하여 자신의 임상 심리치료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그가 운영하고 있는 <https://kirkjschneider.com/>의 약력 및 저서 소개를 바탕으로 정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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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첫 저서『역설적 자아 : 인간의 모순적 본성 이해를 향하여 The Paradoxical Self: Toward an Understanding of Our Contradictory Nature 』(1990)는 키르케고르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The Paradoxical Self- Toward an Understanding of Our Contradictory Nature.jpg 『역설적 자아』


이 책에서 그는 "역설 paradox" 즉, 인간 경험의 모순적 본성 Contradictory Nature 이 임상적 이해 및 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위축'에서 '공격성', '우정'에서 '적대감'에 이르기까지 극단주의적 심리적 패턴을 발전시키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극단을 대리적으로 살아가는가? 활기차고 창의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러한 극단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가 제시한 의문에 대한 답은 인간 경험이 '수축'에서 '확장'에 이르는 연속체에 걸쳐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여 이를 "역설의 원리"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전자는 '양보'하고 '집중'하는 능력이 특징이라면, 후자는 '주장'하고 '통합'하는 능력이 특징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양극단의 능력 중 어느 하나를 두려워할 때 기능 장애가 되거나, 양극화되거나, 과도해진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역설 모델을 다양한 기능 장애 증후군에 적용한 후 심리적 건강과의 관련성 즉 창의성, 신체 건강, 종교 및 사회 조직, 자녀 양육에 적용한다.


그가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치료 existential-humanistic therapy 및 실존-통합 심리치료 existential-integrative psychotherapy 분야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 있는만큼, 국내에서 처음 소개된 저서는 오라 크러그 Orah Krug와 공저『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Existential-Humanistic Therapy』이다.



여느 심리학 분야의 전공 개론서와 다르지 않지만,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미국적인 실존 치료의 역사, 이론 및 실천을 살피되, '자기 탐구', '투쟁', '책임'이라는 유럽적 실존 철학적 기반에서 '자발성', '낙관주의', '실용성'이라는 미국적 전통과 결합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의 사상적 기반이 유럽 대륙철학을 향하지만, 사실, 직접적 학문적 멘토는 롤로 메이 Rollo May 이다. 『존재의 심리학 The Psychology of Existence: An Integrative, Clinical Perspective』은 롤로 메이와 공동 작업의 결과이다.


existence.jpg 『존재의 심리학』


2008년『실존-통합 심리치료 Existential-Integrative Psychotherapy: Guideposts to the Core of Practice』는 확장된 개정판이다.


Existential-Integrative Psychotherapy - Guideposts to the Core of Practice.jpg 『실존-통합 심리치료』


또한, 그의 학문적 동반자로는 어니스트 베커 Ernest Becker, 특히『죽음의 부정 Denial of Death』이 미친 영향이다. 그는 자신의 '인간 성격 personality' 개념, '실존적 고통' 및 '치료 이론'의 설계에 직간접으로 관계한다.


『공포와 성스러움 : 괴물이야기를 통해 지혜를 가르치기 Horror and the Holy: Wisdom-teachings of the Monster Tale』(1993)은 고전 공포 이야기에서부터 현대 영화를 통틀어 인간은 왜 이상하게 괴물과 섬뜩한 것에 매료되는가를 탐구한다.


Horror and the Holy.jpg 『공포와 성스러움』


그가 보기에 공포는 평범한 것이 예상치 못한 것이 될 때, 그리고 갇힌 것이 그 사슬에서 벗어나 무제한적으로 확장될 때 나타난다. 무한성이 무엇이든 그것은 인간에게 무서워지는 경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점에서 "황홀경은 무한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테러는 완전한 공개이다." 따라서 어쩌면 순수한 행복, 낙원 또는 열반은 그 한계가 무너지고 무한한 광활함이 열리게된 순간, 공포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삶에 대한 영성적 이해는 이를 통해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성격이 역설적이라는 점, 혐오감이 어쩌면 흥분과 자유의 이면이며, 이러한 양극성은 모두 개인, 사회적, 생태적 안녕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상기하고자 한다.


그의 인간 삶에 대한 영성적 이해에 대한 관심은『경이감으로서의 깨어남 Awakening to Awe: Personal Stories of Profound Transformation』(2009)에서 다루어진다.

Awakening to Awe- Personal Stories of Profound Transformation.jpg


그는 이 책에서 경이awe(놀라움, 신비감)가 현대 문화에서 억제되거나 잊혀진 요소라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경이감 awe의 회복은 현대인의 심리 치유의 중심이다. 공포 관리 이론의 이론가이자 어니스트 베커의 동료인 Sam Keen은 이 책에 대해 "새로운 종류의 치료의 열쇠..."라고 평한다.


그의 최근 저작은 다시 키르케고르적 주제인 "불안"으로 되돌아온다.『불안의 강화 : 제정신의 세계를 향한 열쇠 Life-Enhancing Anxiety: Key to a Sane World』


LIFE-ENH-FINAL-Image-9-15-22-at-1.01-PM-199x300.jpg 『불안의 강화 : 제정신의 세계를 향한 열쇠』


우리 시대의 심리사회문화적 특징 중 하나인 불안은 그 정도와 강도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21세기 들어 치솟고 있는 형국이다. 이 책은 정신 장애의 진단기준인 DSM-5 처럼 불안을 유형화하거나 종류별로 기술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현대인들 모두는 불안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듯이 국지적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다시 극단적인 권위주의가 되돌아오고 있으며, 여전히 기후 재앙은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전지구적 위기는 그 자체가 불안인 동시에 불안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는 특정 유형의 불안을 회피한 결과라는 전망을 제기한다. 그는 이를 삶을 향상시키는 [긍정적] 불안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삶을 향상시키는 불안이란 삶을 파괴하는 불안을 예방하기 위해 직면해야만 하는 불안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비참한 길을 가면서, 싸우고, 도전해야 함을 시사한다.


『양극화된 아음 The Polarized Mind: Why It's Killing Us and What We Can Do About It』(2013)에서 그는 서로 경쟁적인 관점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 한 관점에 집착하는 마음을 "양극화된 마음"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경향성이 우리 자신을 죽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존주의 심리학의 관점에서 양극화된 마음의 기초, 양극화된 마음이 역사 전반에 걸쳐 지도자와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황폐화시켰는지,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시급히 취해야 할 조치를 제시한다.

polarized-mind.jpg 『양극화된 아음』






그의 심리치료 기법은 확실히 임상심리 혹은 실증주의에 기반한 전통적 연구의 주류적 흐름에서 보자면, 그 방법론적 엄밀성이나 과학적 검증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통합적 접근" 방법은 인간 마음과 심리의 다양성, 진단의 다양성, 문화적 차이에 의한 다양성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현대 사회문화의 특징인 "양극적 분열polarization", "내면의 불안anxiety"에 대한 치료적 개입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또한 실존주의적 인간 경험의 모순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경이감을 심리치료 이론과 실천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에서 통계 과학이 자칫 놓치고 있는 중요한 지점을 탐사한다.


인간 마음의 문제는 개인의 심리적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실존 문제가 사회문화정치적 맥락에 깊숙이 맞닿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갈등과 분열의 양상들, 권력, 정체성 문제 등은 전례없는 사회문화적 위기 상황에서의 대응으로서 심리학이 확장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가 다루는 주제가 실존주의와 영성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심리적 갈등을 다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지점이야말로 오히려 적극적 치료적 개입이라는 반증이다.


내가 롤로 메이, 어니스트 베커, 빅터 프랭클에 더 애착을 갖는 이유는 바로 심리 치유, 치료가 의사의 처방전과 상담실의 카우치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그들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모순성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한다.






「키르케고르와 함께 한 나의 여정 : 『역설적 자아』에서 『양극화된 마음까지』」


이 글은 2013년 10월 4일,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위치한 European Humanities University에서 열린 학술회의 <철학과 심리학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해석: Kierkegaard 탄생 200주년 기념>에서 초청 강연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나는 왜 나의 전문적 경력 전체와 가장 내밀한 글쓰기 속에서 줄곧 키르케고르를 따라왔는가? 왜 그가 나의 철학적 뮤즈philosophical muse로 자리하게 되었는가? 그 시작은 오하이오 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정적인 대학원생 존 카델라John Kadella가 근처 맥도날드에서(!) 무려 7시간 동안, 내게 키에르케고르의 삶과 사상을 소개해 준 이후, 나는 그의 사유에 깊이 매혹되었다.


이러한 공명(共鳴) resonance 은 단순히 이름의 유사성—‘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와 '나(Kirk)'—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어떤 이들은 텔레비전 시리즈 스타트렉Star Trek을 빗대어 나를 “캡틴 키에르케고르Captain Kierkegaard!”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그에게 매력을 느낀 근본 이유는 죽음과 그것이 자아를 산산조각 내는 경험에 대한 유사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자아 감각a sense of self의 붕괴는 내 삶 속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찾아왔다. 내가 세 살 무렵, 일곱 살에 불과했던 형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부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나 삶의 모순성contradictoriness과 균열ruptures에 깊이 매혹되어 왔다. 이 관심은 부분적으로는 나의 과학소설에 대한 점증하는 매혹에서 드러났다. 그 속에는 기묘한 심리 상태, 낯선 세계, 그리고 외계 존재를 포함한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특별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작품으로 1963년 CBS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시리즈 <아우터 리미츠The Outer Limits〉의 초반 에피소드였다. 그 이야기에서, 다른 은하계에서 온 전기화된 존재 electrified being가 지역 라디오 탑의 전자기장에 포획된다. 이후 외계 존재는 작은 마을의 중심지를 향해 서서히 걸어오기 시작한다. 과거 고전적인 B급 영화처럼, 마을 주민들과 주방위군은 광장에 모여 그 ‘괴물’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주민들은 총을 겨누었고, 주방위군은 대포까지 장전해 두었다. 그러나 ‘괴물’이 다가왔을 때는 전형적이지 않은 상황이 펼쳐졌다. 거대한 존재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뚝 서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총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 우주의 신비 the mysteries of the universe를 경외하라 contemplate !”


이 장면은 내게 여러 층위에서 교훈을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가장 두드러진 깨달음은 삶의 역설life’s paradoxes—즉 ‘급진적 타자성 radically other ’과 그에 내포된 죽음의 불안death anxiety—은 반드시 암울한 것으로만 경험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의 시각, 또 다른 방식의 존재another way of being 로 나아가는 관문이 될 수 있으며, 그 길은 매혹적이고 심지어 경이로운 가능성 fascinating possibilities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내 삶의 역설들에 대한 사유가 본격적으로 비상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이었다(그 해를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 그때 내 친구 돈 쿠퍼 Don Cooper가 나를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의 저작으로 이끌어 주었다. 베커의 『죽음의 부정 The Denial of Death』은 정신분석학을 실존주의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한 작품이었는데, 그의 저작에서 나는 철학으로부터 배운 바를 나의 주된 관심사인 심리 치료의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탁월한 경로를 발견했다.


베커의 영향으로 나는 키르케고르의 가장 심원한 저작으로 평가될 만한 작품『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의 렌즈를 통해 심리적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텍스트가 임상심리학자로서의 나의 작업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내 경험에도 너무나 풍부하고 적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나의 첫 저서인 『역설적 자아 The Paradoxical Self: Toward an Understanding of Our Contradictory Nature』의 초석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후 내가 저술한 거의 모든 작업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이 작업은 내가 롤로 메이Rollo May와 점점 더 깊은 친연성 kinship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너그럽게도 나의 첫 저작의 서문을 너그럽게도 직접 써주기도 했다.


내 첫 저서에서 기본 논지는, 인간 경험은 유한성과 무한성의 연속선 continuum of finitude and infinitude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소위 정신의학적 장애psychiatric disorders라 불리는 많은 현상들―우울증에서 강박장애(“유한화finitizing” 한 극단)까지, 그리고 행동장애, 자기애, 조증(“무한화infinitizing” 다른 극단)까지―를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 일부 약물 남용의 경우, 예컨대 진정 작용을 하는 약물과 자극 작용을 하는 약물의 사용 역시 이러한 연속선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유한성/무한성의 양극성을 “수축-팽창 constrictive–expansive 연속선”으로 재구성했다. 왜냐하면 임상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용어가 보다 적절하고 실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자아가 수축(움츠러들고 한정하려는 경향)과 팽창(분출하고 확장하려는 경향) 사이에서 움직이는 양상을 임상 현장에서, 또 나 자신에게서 더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으며, 이는 다소 추상적인 “유한성과 무한성” 개념보다 임상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 훨씬 더 적합해 보였다. 물론, 키르케고르 역시 그의 개념들을 경험에 근접한 현상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려 했음은 분명하다.


나의 개인적·학문적 탐구 과정을 통해 나는 이 수축/팽창의 변증법dialectic of constriction/expansion이 세 차원으로 구성된 하나의 모델 속에서 작동함을 발견했고, 이를 나는 “역설의 원리Paradox Principle"라고 명명했다.


이 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인간의 심리는 수축–팽창 연속선 위에서 작동하며, 그 연속선의 정도만이 의식된다only degrees of which are conscious. 이 양극성을 부정하거나 회피avoidance 할 경우, 극단적이거나 양극화된 반작용(예컨대: “장애”나 폭력)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이 양극성과 마주하고encounter with, 통합하며, 공존할 경우coexistence with, 보다 활력 있고 역동적인 삶과 연결된다. 나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이후 “유동적 중심fluid center”이라 명명했다.


유동적 중심은 구조화된 포괄성 structured inclusiveness, 상황에 따른 유연성과 제약, 겸손과 대담함 humility and boldness의 공존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유동적 중심이 키르케고르의 “생 에너지vital energies”와 “통합된 자아(self as synthesis” 개념과 밀접히 닮아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내 글을 조금만 훑어보아도 알 수 있듯, 이 "역설의 원리"는 내가 출간한 거의 모든 주요 저작에 두루 스며 있다. 『역설적 자아』, 『공포와 성스러움』, 『실존-통합적 심리치료』, 『실존-인간중심 치료』, 그리고 『경외의 재발견』과 『경외로의 각성』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양극화된 마음』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작업은 “자신과 세계와의 다층적 관계 속에서 ‘유한화’와 ‘무한화’를 오가는 자아the finitizing and infinitizing self ”라는 기본적인 키르케고르적 문제 의식을 반영하고, 그것을 임상과 사유 속에서 적용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이 기념 행사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이 사람 키르케고르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다!



지금 막 출간한 저서 『양극화된 마음』에서 나는, 삶의 역설과 신비를 부정하는 태도가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사회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참혹한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사실 나는 이것을 인류가 "스스로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자초한 전염병” self induced plague of humanity으로 본다. 내 경험상, 어떤 세대도 이 교훈을 충분히 잘 배우는 것 같지 않다.



인류의 기록된 역사 초기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역설적 본성을 차단해왔고 그 결과 끔찍한 고통을 겪어왔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빌로니아『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신화이다. 이 신화에서 세계의 창조신인 티아마트Tiamat와 그녀의 남편 압수Apsu는 완전무결하다고 여기는 세계 질서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 질서는 곧 자녀들에 의해 전복되고 교란된다. 자녀들이 점점 더 반항적으로 변하자, 압수는 결국 그중 하나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오히려 자녀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본질적으로, 압수와 티아마트는 "역설의 원리Paradox Principle"―즉, 키르케고르가 말한 “유한성과 무한성의 통합적 자아self as a synthesis of finitude and infinitude””―를 따르는 데 실패했다. 그 대신 그들이 택한 것은 자신의 역설적 본성에서 돌아서고, 취약성을 잘라내려는 시도였으며, 그 결과는 예기치 못한 자기 붕괴self-collapse였다.



최근의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연구가 보여주듯이, 자신의 취약성을 부정하는 것―심층심리학depth psychology 용어로 말하면, 창조 앞에서 느끼는 근거 없음groundlessness (무의미insignificance·무력감 helplessness)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과잉 보상적overcompensatory 갈망으로 이어진다. 자기 존재의 의미·무오류성·절대성을 주장하려는 강박적 시도로 이어지고, 결국 자기와 타자의 파괴를 낳게 된다. 이러한 부정은 본질적으로 트라우마 trauma(개인적이든 문화적이든)에 근거하며, 존재와의 생생한 그대로의 관계 raw relationship to existence가 드러났을 때 이를 감당할 지지 체계가 결여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 패턴은 인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바빌로니아 신화를 거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십자군 전쟁, 프랑스 공포정치, 나폴레옹, 영국 식민주의, 그리고 스탈린·히틀러·마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대와 인물들이 이 구조를 재현한다. 패턴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퍼펙트 스톰 perfect storm"의 형태를 띤다. 즉, 자기 평가 절하self-devaluing되고, 잔혹한 지도자와 자기 평가 절하, 잔인한 문화brutalized culture가 서로 수렴하면서, 그 보상적 장치로서 폭정tyranny(파시즘, 전제정despotism,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양극화 polarization 순환의 핵심은 이미 키르케고르에 의해 예견되어 있다. 사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정신병리psychopathology”라고 부르는 현상의 핵심 또한, 크게는 키르케고르적 역학―즉 근거 없음groundlessness(무한성infinitude), 그로 인한 공포, 그리고 이에 대한 방어 defense(혹은 특정 관점에 과도하게 동일시하여 경쟁적 관점competing points of view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근거 없음을 부정하려는 시도)―에 의해 주도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역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보자.


우울증depression: 위험을 감수하고 세상에 나아가는 대신, 억압적 자기 판단주의 oppressive judgmentalism로 자신을 제한한다.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 통제 상실의 위험을 막기 위해 세부와 규율에 집착한다.

불안장애anxiety disorder: 두드러지거나 더 크게 존재하려는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과도한 경계와 위축을 보인다. 반대로, 해체dissipation와 무가치함smallness에 대한 극단적 양극화도 있다.
사례 : 자기애narcissism, 품행장애conduct disorder, 특정 형태의 조증mania.


이 모든 경우에서, 인간은 결국 일방적 편향one-sidedness의 감옥에 갇히며, 다른 가능성은 극도로 회피된다. 그러나 이 “다른 면 the other side”은 언제나 심연abyss과 바닥 없음bottomlessness과 연결되어 있음을, 임상 현장의 환자들은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것을 이론적 형태로 정리하자면, 나는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근거 없음groundlessness, 즉 존재의 근본적 신비radical mystery of existence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 상실loss, 혼란disruption, 질병, 거부rejection, 버림받음abandonment과 같은 경험이 인간의 실존적 상황의 생생한 진실raw truth에 노출시키며, 이러한 상황에서 치료적 개입therapeutic intervention이 없다면 그 파괴력은 매우 크다.


반면, 나는 또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와 “가장 개인적이며 열정적 경험 속에서 붙잡히는 객관적 불확실성objective uncertainty의 진실을 따른다면"(Tillich, 1963), 인간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기쁨, 돌파breakthroughs, 그리고 해방liberations 역시 존재의 근거 없음에 매달려 있음suspension in groundlessness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현존presence과 경외감awe, 즉 삶에 대한 겸손과 경이 wonder, 모험심adventure의 감각이 인간의 활력에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나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바를 이렇게 이해한다. 또한 틸리히Tillich, 랭크Rank, 베커Becker, 랭Laing 등이 발전시킨 관점에 따르면, 인간 상황의 근거 없음groundlessness—즉 존재의 “진리truth” 또는 실존적 불안angst—에 직면하며, 이를 붙잡고grappling with, 공존하며, 그 다양한 차원 속에서 심지어 즐기는 법revel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역설적 자아paradoxical self가 될 수 있다.

즉, 유동적 중심fluidly centered을 갖춘 다차원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근거를 가진individually grounded 개인—즉, “근거 없음 속에서 근거ground within the groundless를 발견하는” 개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형의 죽음 이후 받은 심리치료에서 찾았다고 느낀다. 분석가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흔들림 없는 현존rock solid presence이 내가 중심을 잡게 도와주었다. 나는 그가 자신도 깊은 수준에서 이해했고, 비슷한 경험을 겪었으며, 그것을 극복하고 오히려 성장했다는 것 thrived in the wake of it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내 자신 안의 겉보기에는 모순된 양극단contradictory sides 을 받아들이고grounding, 연결하고bridging, 포용하는 것 embracing은 나로 하여금 마비시키는 공포paralyzing terrors를 넘어, 경험의 “더 큰 차원MORE”으로 열리게 했다. 그 결과, 나는 나의 공포에 대해 점점 호기심과 궁금증, 나아가 매혹의 감각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불안 앞에서 미지의 회랑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면서도, 성장하고 확장하며 심화되는 경로를 따라 전 생애적 직업 여정으로 이어졌다. 롤로 메이가 말했듯, 자유는 불안의 뒷면flipside에 있으며, 불안은 자유의 뒷면이다.



정리하자면, 키르케고르는 우리의 대부분의 심리적 문제들이 “근거 없음groundlessness”—즉 존재의 근본적 신비- 속에서 부유하는 상태에서 비롯됨을 보여주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이를 깊이 숙고해 보자. 큰 상실, 혼란disruption 이나 변화, 질병과 학대 abuse 등을 다시 떠올려 보라. 이 경험들이 얼마나 강하게 "근거 없음"과 연결되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것이 바로 우리 상담 클라이언트들이 경험을 “블랙홀,” “분열shatterings,” “밑바닥 없는 구덩이 bottomless pit ” 등으로 표현하는 이유이다. 이 "근거 없음"의 경험은 사실 우리의 모든 경험, 곧 인간 조건humanity’s condition의 일부 상태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우주 속을 회전하는 작은 지구 위에 매달려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러한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지만, 트라우마를 경험할 때 비로소 극도로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panic-driven.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불안disease이 존재와의 관계 중 일부일 뿐임을 인식했다. 존재와의 다른 관계에서는 "근거 없음"이 선택 choice, 가능성possibility, 초월transcendence로 열리는 통로가 된다. 즉, 고정되지 않고 진화하는 우주가 제공하는 기회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실존주의 사상가들, 예를 들어 빅터 프랭클의 위대한 통찰이기도 하다. 그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환경—나치 강제 수용소—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절망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잠재적으로 극복할 기준을 제시했다. 또한 어니스트 베커의 위대한 계시이기도 하다. 베커는 키르케고르의 현대적 해설자로서, 임종 직전에 죽음이 자신에게 의미하는 바를 묻는 질문을 받았을 때, 사실상 이렇게 대답했다.


“즉,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순간에도 나는 스스로를 우주의 엄청난 창조적 에너지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힘들에 의해 사용되지만, 설령 약간 오용된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이러한 경험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짜릿한 경험 중 하나입니다.”


만약 Kierkegaard의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를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면, 나는 알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키르케고르를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와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는 과거의 중요한 심리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미래의 중요한 심리철학자이기도 하다.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비전은 아직 충분히 활용되지 않았고, 인류 전반에 적용 가능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에 혁명적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연인으로서, 지도자로서, 직능인functionaries으로서,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는 공포에 몰린 로봇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이데올로그ideologues와 폭군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유연하고 규율 있는 인간, 즉 육체와 피를 가진 존재로서 살 것인가?—언젠가 사라질 것을dissipate 알면서도, 동시에 지금 살아있음을 알고, 살아 있음에 필요한 놀라운 자원 resources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자원을 돌보고 care, 발전시키는 것이 지속되는 가치라는 것을 아는 존재로 살 것인가.


키르케고르가 상기시키듯, 자아self는 유한성과 무한성의 통합체로서 스스로와 관계 맺고, 그 임무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become itself이다. 나의 관점에서, 이것보다 덜한 삶은 덜 충실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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