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카프카를 다룬 논문을 번역해 올린다.
필자는 로렌초 키에사 Lorenzo Chiesa 이며, 글은「 트로이의 성(城) : 라캉과 카프카의 지식, 향락 그리고 대타자에 대하여 The Trojan Castle: Lacan and Kafka on Knowledge, Enjoyment, and the Big Other 」이다. 이 글은 <CRISIS & CRITIQUE> Volume 6, Issue 1(2019년)에 수록되었다.
이 논문의 독일어 확장본이 2025년에 출판된 바 있다.
로렌초 키에사는 1976년생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2005년에 영국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에서 철학 및 문학 박사(PhD)를 취득하였다.
국내에서는 2012년 『주체성과 타자성』이 번역된 바 있다.
이 책의 원서는 2007년에 출간된『Subjectivity and Otherness- A Philosophical Reading of Lacan』 이다. 아마도,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의 확장본 아닐까 싶다.
그의 학문적 출발은 라캉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지만,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파올로 비르노(Paolo Virno) 등 현대 이탈리아 철학자들의 저서를 영어로 번역, 소개하면서 정치철학과 생명정치학(biopolitics)으로 관심분야를 확장하고 있다.
현재는 영국 뉴캐슬대학교(University of Newcastle)에서 철학 전임 강사로 재직 중이다.
그와 지젝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와의 관계는 그의 첫 저서가 출판된 MIT 출판부의 <Short Circuits Series>의 책임 편집을 맡은 이가 지젝 Slavoj Zizek이라는 점, 믈라덴 돌라르와 대담과 저널 <Umbr(a) : A Journal of The Unconscious>(2013)에 논문이 실려있다는 점에서, 그들과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논문을 읽기 위해서는 카프카의 『성(城)』 과 「굴」을 준비하면 되겠다.
카프카 작품을 분석하는 라캉의 이론적 토대는 카프카 세미나 시리즈 중『From an Other to the other, Book XVI 』이다. 이 세미나는 자크 알랭 밀레 Jacques-Alain Miller 의 편집과 브루스 핑크 Bruce Fink 의 번역으로 Polity 출판사에서 2023년에 출간되었다.(영역판)
국내에서는 『자크 라캉 세미나 1 』(새물결, 2016), 『자크 라캉 세미나 11 』(새물결, 2008) 이외에,『에크리』(새물결, 2019)의 한국어판이 출간된지 오래되었으니, 앞으로 라캉 주요 세미나들의 번역을 기대해본다.
아울러 이 논문에 등장하는 라캉 혹은 정신분석학 개념어는 다음과 같다.
소타자/대타자 other/Other
아갈마 ἄγαλμα
부분 대상 part-object
오브제 아 objet (petit) a
폐제 foreclosure
향락/향유 jouissance
잉여향락 surplus enjoyment (surplus jouissance)
유사물 semblance
무, 공백. 결핍 lack, void, gap
대학 담론/주인 담론 university discourse/master discourse
부인 disavowal
매혹 lure
거울 이미지 specular image
안다고 가정된 주체 subject suppposed to know(sujet supposé savoir)
이들 개념어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들 개념어는 이미 출간된 『라깡 정신분석 사전 』, 『정신분석 사전 』등을 참조하여 옮겼다.
카프카의 『성(城)』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그가 이 작품을 창작할 시기의 전기적 배경들에 대해 알아본다. 아래 내용은 라이너 슈타크 Reiner Stach의『Kafka, the Years of Insight :1916~1924』에서 발췌 번역했다. 소제목은 내가 자의적으로 삽입했다.
<창작 시기>
1922년 1월 27일, 카프카는 휴양을 위해 엘베 강Elbe 에서 해발 750미터 높이에 위치한, 폴란드 국경의 리젠게비르게 Riesengebirge의 눈 덮인 마을 스핀델뮐레Spindelmiihle 에 도착한다. 그는 의사 오토 헤르만 박사Otto Hermann와 만날 예정이었는데, 이 곳에서 박사는 아내와 딸과 함께 2주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두 마리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함께 올라왔다. 카프카는 이미 크로네 Krone 호텔과 서신으로 예약을 해 놓은 상태이다. 처음에는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행 중에 여행가방이 손상되었고, 로비 명부에는 그를 “요제프 카프카 박사”로 기재되어 있으며, 방 안의 책상은 삐걱거렸고, 조명은 어두웠으며, 호텔은 시끄러웠다.
도착 몇 시간 만에 그는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고, 잉크와 만년필을 바로 구할 수 없어서 연필로 대신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한 낯선 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카프카의 세 번째 소설 『성(城)』은 강렬한 집중의 순간, 현실과 상상의 강력한 상호작용에 의해 추진되었다. 평범한 사건—외딴 마을에 한 남자가 도착한 것—이 문학으로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변형되었다.
휴양을 위한 몇 주의 기간 동안 그는 오직 창작의 작업만이 다가올, 어쩌면 결정적일 수도 있는 심리적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느꼈다. 그는 1922년의 겨울을, 자신이 “광기의 시기”를 통과하며 “채찍질”을 당했다고 절친 클롭슈톡에게 썼다. 카프카가 이렇게 의식적으로 자기 치료/치유를 위해 창작을 시작한 것은 처음이었으며, 불안감으로 신경이 갉아먹히는 자기 관찰을 막아줄 건전한 창조적 효과를 기대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기대는 실현되는 듯했다. 그는 소설의 첫 몇 문장을 쓰자마자 그는 새로운 힘을 느꼈고, 발밑에 새로운 기반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원래 편지에서 “글쓰기의 구원적 목적”이라고 쓰려 했으나 곧 “구원적 위안”으로 수정했다. 글쓰기는 내적 관찰이며, 이 관찰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다른 차원으로 이어졌다. 반면, 글쓰기의 외적 목적은 거의 부수적으로 달성될 뿐이다. 즉, 회복을 위한 수면을 네 다섯 번 취하는 것-불면으로 인해 오랜만에 누린 가장 중요한 선물이—이었다.
『성(城)』의 원고의 첫 페이지의 시작은 오히려 단편 이야기에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카프카는 이 첫 번째 ‘표현주의적’ 시도를 바로 다음 날이나 그다음 날 중단하고 방향을 다시 틀었다. 그는 단문체의 대화를 버리고, 대신 몇 가지 신중하게 고른 도입 문장을 구성했다. 이 문장들은 독자를 처음부터 당황하게 하지 않으면서, 소설의 목표를 상징적 이미지 속에 담아 훨씬 오래 지속되는 인상을 남기도록 했다.
『성(城)』은 카프카가 앞으로 수개월 동안, 수백 페이지에 걸쳐 계속 발전시키고 변주하며 해석할 기본적 화음을 건드리는 것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카프카는 오랫만에 자신의 문학적 언어로 돌아가 수년간의 금욕에 각까운 창작의 중단 이후 즉시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했는지를 놀랍도록 잘 보여준다. 장기간의 휴지기가 오히려 그를 금욕주의적 서사의 이상에 한층 가까이 다가서게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언어와 플롯 구조 양면에서, 그는 이제 단순한 과시로 여겨질 수 있는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다. 이에는『변신』과 같은 인물에게 닥친 과장된 재난도, 『심판』에서처럼 범죄 스릴러의 긴장도, 『유형지에서』에서의 감옥 장치 같은 육체적 공포도 없다.
<주인공- 측량기사 K>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인간뿐이다. 마을에서 삶의 발판을 확보하려는 이유가 무엇때문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집요함을 가진 사람, 그 기회를 높이기 위해 마치 측량사로 가장하며 거짓을 일삼는 사람, 여성을 이용하여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 가능한 정보를 수집하고 암시와 넌지시 드러나는 힌트를 기다리는 사람, 집과 선술집에서 쫓겨날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 심지어 목표인 ‘성’에 단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하면서 허드렛일을 수행하는 사람.
이 ‘성’은 극도로 복잡하고 접근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권위로, ‘측량사’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허락하지만 그의 정체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단 한 가지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합하는 것은 오직 성의 거대한 그림자뿐이다.
측량사 K의 이름에서 암시하듯 주인공은 카프카의 대리인 역할을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일종의 카프카적 인형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은, 운명이 그에게 가한 충격을 피하기 위해 창작자 카프카가 사용한 장치이기도 하다.
첫 스케치에서 카카프카가 묘사한 신중하고도 낯선 성격을 가진 인물은 분명 그의 자화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텍스트를 두 번째로 다듬으면서, 카프카는 자신과 가장 닮지 않은 특징들을 줄였다. 측량사가 마을에 도착한 직후, 그는 주민들에 대항하여 막대기로 자신을 방어하도록 설정했으나, 카프카는 곧 이 문장을 삭제했다. 이미 카프카는 보다 부드럽고 공격성이 덜한 주인공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개별적 동기를 더욱 이해 가능하고 매력적으로 만들어 자신의 투쟁이 지닌 깊은 심연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나 측량사가 마을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창작자 카프카와 닮아간다. 새로운 경험이 쌓일수록 그의 목적의식과 낙관은 줄어드는 반면, 자신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은 강화된다. 마치 카프카가 미래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겪는 과정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점점 그에게 가까워지고, 측량사 K가 경험하는 실망은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들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을과 성에 그를 묶어둔 힘이 아무리 이해 불가하더라도 그러하다. 이러한 근거들은 『성(城)』이 처음부터 카프카의 자전적 프로젝트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수 년 전, 카프카는 이렇게 적었다.
“따라서 자전적 탐구의 계획이 필요하다. 전기biography가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작은 구성 요소들의 탐사와 발견. 그런 다음 나는 그것들로 나 자신을 구성하고자 한다. 마치 집이 안전하지 않은 사람이 가능하다면 기존 집의 재료를 이용해 안전한 집을 새로 짓고자 하는 것처럼.”
1921년 10월 중순에, 카프카는 자신이 썼던 모든 일기장을 밀레나에게 건넨다. 그리고 난 직후, 그는 수십 페이지에 걸쳐 자기 분석적 관찰을 기록했지만, 이전의 탄식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신중히 피했다. 그는 더 이상 즉각적 안도감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전적 수정의 행위로서 장점과 단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물론 이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었지만, 소설과 현실 간의 겉보기에는 직접적인 대응 관계가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간접적이고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세부적 대응의 수가 겉보기에는 무한대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대응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공간 배경>
『성(城)』의 세계는 겨울 리센게비르게에서의 경험 없이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카프카는 이를 즉시 문학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측량사가 도착하게 되는 마을과 카프카가 휴양차 도착한 곳 즉, 수십 년간 관광지로 개발되어 온 지역의 슈핀델뮐레 Spindelmiuhle과 같은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성 언덕 기슭의 이름 없는 마을은 완전히 달랐다. 이곳에서는 여관은 두 곳뿐이다. 하나는 단 한 개의 쓸모 있는 객실도 제공하지 못하는 브리지 인Bridge Inn이고, 다른 하나는 겉보기에는 더 우아한 젠트리 인Gentry Inn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똑같이 비위생적이며 성 관리인에게만 제한되어 있다. 다른 공공 장소는 없는 것으로 보이며,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이 마을에는 외부인이 거의 오지 않고, 여행객과 거래를 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측량사 K가 오두막에서 쫓겨난 후, 사람들은 손님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손님이 필요 없다.” 마을 사람들에게 외부 세계는 대비의 기준으로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편지와 전화는 오직 성과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독자에게 점점 더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자기 완결적 우주의 숨 막히고 악몽 같은 감각은 외부 세계에 대한 드문 언급조차 작가가 잊어버린 삐걱거리는 요소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렇다면 성(城) 자체는 어떨까? 성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며, 슈핀델뮐레에는 없다. 따라서 카프카는 이를 자신의 형성적 경험 중 하나로 도입했다. 그것은 바로 프라하의 성이다. 그 성은 거의 40년 동안 그의 시야에 존재했으며, 그는 그것을 올려다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성에 압도되었다. 때때로 길고 위협적인 창문 행렬이 햇빛에 반짝였다. 카프카는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그것에는 광기가 섞여 있었다.”
<등장 인물들>
카프카의 인물들은 경험, 기억, 그리고 창작이 복합적으로 얽힌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했다. 1920년대 후반 밀레나 폴락이 이 소설을 읽었을 때—그녀가 그것을 읽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음이 분명하다. 카프카가 성의 부속 마을 여관 이름을 ‘헤렌호프Herrenhof’이라 붙인 것은 장난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한 선택으로, 작품의 중심 무대를 통해 텍스트 안에서 자신을 위한 자전적 암시와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찾아내라는 초대였다.
‘헤렌호프’는 한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던 카페의 이름이었고, 그곳은 밀레나의 무대이자 더 나아가 그녀의 남편이 주로 활동하던 장소였다. 소설 속 시골의 ‘헤렌호프’에서는 바텐더 프리다가 처음에는 성의 유력한 관리 클람의 지배 아래 있다가 며칠 동안 측량사 K의 약혼녀가 된다. 프리다와 밀레나—이 두 이름의 음성적 유사성은 독자의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왜 프리다는 외모상으로 뚜렷한 특징이 없는,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인물로 묘사되는가? 또한 그녀의 주인 클람은 K가 열쇠구멍을 통해 몰래 엿볼 수 있는 한 장면에서, 맥주잔에 몸을 기댄 채 말없이 앉아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는 활동적이고 언변이 뛰어났던 에른스트 폴락과는 거의 닮은 점이 없다.
카프카의 전기적 배경 가운데 한층 더 난해한 수수께끼는 『성(城)』에서 삶의 전개가 장대한 서사로 펼쳐지는 바르나바스의 가족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결코 언급되지 않지만, 세 남매—바르나바스, 올가, 아말리아—의 운명을 통해 그 가족의 이야기가 형성된다. 측량사 K는 세 사람 모두에게 차례로 자신의 희망을 건다. 바르나바스는 젊고, 건장하며, 걱정이 없다. 그는 성에서 오는 전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K는 그를 볼 때마다 들뜬 기분을 느낀다. 카프카가 염두에 둔 인물은 절친 클롭슈토크였을 가능성이 높다.
올가 역시 크고 강하지만 온화하고 측량기사에게 호감을 보이는 인물이다. 주목할 점은 그녀에게서 어떠한 성적 암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올가와 오틀라—이름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오틀라는 카프카의 막내 여동생으로, 근면하면서도 다정했고, 카프카가 취라우Zürau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그러나 소설 속 올가는 성의 하급 일꾼들을 상대로 자유롭게 몸을 내주는 창녀로 등장한다. 그녀의 굴욕에 대한 인내가 사회적, 도덕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카프카는 결국 여동생의 초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만들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아말리아가 있다. 그녀는 소설 전체에서 유일하게 성에 맞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인물로, 관리들의 노골적인 접근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녀는 그로 인해 자신과 가족이 마을 공동체에서 추방당할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굴하지 않는다. 카프카가 이 인물을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창조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주변 어디에서도 이토록 엄격하고, 과묵하며, 침투 불가능한 성격의 인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카프카에게는 드문 일이지만—그녀는 순전히 허구의 창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꿈속에서 그를 찾아왔을 수도 있다. 카프카에게조차 그녀는 불분명한 존재였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 제2장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발로 묘사되지만, 이후에는 흑발로 바뀐다.
<여성들>
세월이 흐르면서 카프카의 여성에 대한 판단은 점점 두려움에 의해 흐려졌고, 더욱 엄격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했다. 그의 삶에 여성이 나타날 때, 카프카는 무엇보다 여성을 대표자로 인식했다. 즉 여성은 혼란, 유혹, 생명의 사절, 혹은 구원의 천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화는 카프카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여성의 삶에 공감하고, 그 사회적·심리적 범위를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이를 고마워했다. 카프카는 과도한 칭찬이나 거드름 피우는 설교를 하지 않았으며, 비판에 민감했던 밀레나조차 카프카가 자신을 남편보다 더 잘 이해한다고 느꼈다.
21세기 독자들은, “고전적 근대성(classical modernity)”의 문학이 남녀 차이에 대한 전통적이고 극도로 단순한 관념에 여전히 강하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에 종종 혼란스러워하며, 때로는 웃음을 금치 못한다. 여성은 자연적 존재이고, 남성은 이성과 행동을 대표한다는 관념은, 1914년 이전에도 심리사회적 현실에 근거가 거의 없었으며, 1차 세계대전 동안 여성에게 남성적 책임과 따라서 남성적 자유가 부여되면서 이 관념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이 되었다. 반면 남성들은—특히 아버지라는 역할 속에서—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을 다루는 데 상당한 무력함을 드러냈다.
카프카는 문화적으로 압도적인 여성성의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여성”과 맞서 시험대에 서야 한다는 평생의 두려움은 그의 개인적 신경증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여성을 ‘생명의 대리자’로 보는 관념에도 스며 있었다. 여성은 유혹자이지만, 동시에 삶을 지배하는 힘과 직접적이며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민첩한 권위자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들에게 굴복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호소할 수도 있다. 『소송』에서 카프카는 이러한 이중적 본성을 문자 그대로 형상화하여 시각적이고 몽환적인 형태로 구현하는 중대한 문학적 발상을 얻었다. 여성들은 법정의 닫힌 문을 자유롭게 통과하며, 성적으로 추적당하는 동시에 법정을 성적이고 여성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카프카는 『성(城)』에서 이 모델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여기서도 여성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힘”들에 의해 복종을 요구받고 결국 복종하게 된다. 그러나 권력의 반영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존엄을 획득하며, 그것이 측량사 K를 매혹시키는 근원이 된다. 그 존엄은 말보다 몸짓과 시선 속에서 드러난다.
“그 시선이 K에게 향했을 때, 그는 그것이 이미 자신과 관련된 어떤 일들—자신조차 아직 알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결정을 내린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그 시선은 그 일들이 존재함을 확신시켜주었다.”
바로 그 ‘아는 시선’이 측량사 K를 특징 없는 여급 프리다에게 끌리게 하지만, 그녀가 성의 관리 클람과의 특권적 관계를 잃자마자 그 시선은 빛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여관’ 여주인의 존엄이다. 그녀 또한 클람의 옛 정부이며, 의도적인 무지를 보일 정도로 보수적이지만 측량사 K의 눈에는 일종의 권위를 지닌 인물로 비친다. 그는 그녀로부터, 자신이 시장을 추적하기보다는 차라리 시장의 눈에 띄지 않는 아내를 따라갔어야 했다는 사실—그녀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만 K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여자”—을 듣게 된다. 마지막으로 측량사 K는 “성에서 온 소녀”의 시선을 꿈꾼다.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피로에 찬 푸른 눈의 그 시선—그는 그 시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편지, 관리들 그리고 유령 이미지>
카프카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신화적이었다. 그의 상상은 구약성서와 유대 전승의 신화적 도식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그가 고대의 정전正典에 손을 대어 그것을 변주하고 자신의 상상 속으로 전유하는 것은—비록 그가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더라도—지극히 논리적인 일이다. 「세이렌의 침묵」, 「프로메테우스」, 「포세이돈」 등의 작품에서 그러한 시도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성(城)』은 이 신화적 풍경의 정점에 위치한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상징적 영웅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들로, 독자에게 동일시를 요구하며 그를 신화의 심층으로 끌어들인다.
더 나아가 이 텍스트들은 꿈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무의식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며, 그 결과 카프카의 언어는 독자를 불시에 사로잡는다. 우리는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그 언어에 굴복하고, 그 언어는 우리를 의미 탐색의 미궁으로 유혹한다. 카프카는 이 도발적 효과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문학적 기교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거의 눈치채기 어려운 언어적 속임수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가 어쩌다 커튼을 살짝 열어 내부를 엿보게 하더라도, 그는 곧바로 다시 빛을 희미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창조한 신화적 세계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과연 해석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성(城)』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고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관리들의 위계는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들은 권력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통치하지 않은 채, 단지 그 진행 과정을 반영할 뿐이다. 많아야 그것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역할에 그친다. 만약 그들이 공격당하거나, 그들의 요구가 무시되면, 그들은 물러선다. 그들은 낯선 이들이 자기들의 여성을 차지하도록 방임하고, 자신들의 명령을 실행할 능력도 없으며, 아말리아의 경우처럼 공격적으로 거부당해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기이한 권력은 대체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런 형태의 힘이 실제 세계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카프카 자신조차 그것을 명확한 정의나 일대일 대응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우리의 내면, 무의식의 힘, 혹은 생명의 원천적 에너지—감각적 현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성(城)』의 세계는 난해하고 철저히 봉인되어 있다. 모든 원고와 그 텍스트 변형이 공개되어 비로소 우리는 카프카가 소설의 줄거리 향후 전개에 대해 점점 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는 첫 문장부터 이 지하 세계를 지배하는 고대적 법칙을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더 숨겨진 문들도 존재한다.
카프카의 일기와 『성(城)』 집필 전후에 작성된 편지들은 종종 주석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카프카가 소설 밖에서도 신화의 구성 요소를 다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성 요소들은 문학적 시도 이전에도 이미지, 은유, 무대 장치 등으로 이미 존재했으며, 모두 명확한 상상적·논리적 연관성을 공유한다. 이 이미지들은 수많은 서로 얽힌 변형 속에서 반복되며, 카프카가 그것들을 문학적 형식으로 구현하기 이전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촘촘하고 확산적인 조직체로 성장하였다. 즉, 개인적 신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 연결망의 중심에는, 어떤 행복도 반드시 강제로 쟁취해야 하는 힘들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놓여 있다. 초기 카프카는 처음에는 전통적 이미지였던 '유령'의 개념을 도입했지만, 그 이미지는 점차 자율적 사유로 발전하며 그의 통제 밖으로 점점 더 벗어나게 되었다.
“[유령들은] 모든 문을 통해 들어왔고, 닫힌 문을 밀치며 들어왔으며, 크고 뼈만 남은 유령들이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유령들이었고, 그중 한 명과는 싸울 수 있었지만 주변의 모든 유령과는 싸울 수 없었다. 글을 쓰고 있을 때는 그들이 모두 호의적인 유령이었지만,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악마였다.”
1922년 2월 초, 스핀델뮐레에서 카프카는 이 아이디어를 완전히 내면화하여 이름조차 붙일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저 그것을 불러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몇 날 밤 놀라울 정도로 잘 잔 후 이렇게 썼다.
“그들로부터 벗어났다. 말하자면 무모하지만, 마치 길을 찾도록 돕기 위해 불빛을 켠 것처럼 숲 속에서 그들을 불러낸다.”
결국 그 해 봄, 유령들은 밀레나 폴락을 위해 준비된 짧은 신화적 강연의 주제가 되었다. 카프카는 이들을 삶을 무너뜨리고 인류 전체에 재앙을 가져오는 운명의 힘으로 제시했다.
순수 이론적 관점에서 편지를 쉽게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세상의 영혼들에게 파멸을 가져왔음이 틀림없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실제로 유령과 소통하는 것이며, 이는 단순히 수신인의 유령뿐만 아니라, 자신이 쓰고 있는 편지 안에서 은밀히 진화하는 자신의 유령과도 교류하는 행위다. 때로는 한 편지가 다른 편지를 증거로 인용할 수도 있는, 연속된 편지 전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서로 편지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멀리 있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것은 인간의 힘을 벗어난다.
그러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유령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유령들은 이를 탐욕스럽게 기다리고 있다.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유령들이 도중에 그것을 삼켜버린다. 이 풍부한 양분 덕분에 유령들은 엄청나게 번식할 수 있다. 인간은 이를 감지하고 이에 맞서 싸우려 하지만, 자연스러운 소통과 영혼의 평온을 얻고, 유령적 차원을 가능한 한 차단하기 위해 인간은 기차, 자동차, 비행기를 발명했지만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 이는 명백히 붕괴의 순간에 발명된 장치들이다. 상대편은 훨씬 더 차분하고 강력하다. 우편 제도 이후, 유령들은 전신, 전화, 무선을 발명했다. 유령들은 굶주리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
『성(城)』에서, 주로 밤에 활동하는 악령들은 더 이상 혼돈스러운 군중이 아니라 체계의 사절, 즉 자유롭지 않으며 불가해한 의지에 복종하는 관리들로 등장한다. 성 안 어딘가에는 최고의 권위가 존재하며, 그것은 '웨스트웨스트 백작'의 성으로, 그의 묵시적 승인 없이는 어떤 존재도 움직일 수 없다. 이 초자연적 이름을 가진 존재는 20페이지에서 언급되지만, 끝없는 수다의 연막 뒤로 사라진다. 그리고 아무도 인내심을 갖고 그 벽이 투과성을 갖게 되기를 기다린다고 해서—카프카의 「법 앞에서」 설화에서처럼—혹은 측량기사의 ‘투쟁’의 도전으로 그 벽을 뚫는다고 해서 이 벽을 관통할 수 없다. 최고의 권위는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먼 곳에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적대적인지 혹은 심지어 악한지에 대한 결정적 질문은 여전히 추측에 맡겨진다. 카프카 자신도 이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이미지를 편지에서도 자주 사용했으며, 유령의 공격을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강조하곤 했다. 카프카는 자신이 유령을 “진짜로” 믿는지 여부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것이 정신 속 힘의 투사라는 점을 인정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때때로 “내적 음모(inner conspiracy)”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령을 막아야 하는 순간에는, 그것들의 객관적 실재성을 측정하는 것보다 그것들을 어떤 개념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유령들은 심리적 사실이었으며 그의 삶에 실질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그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쓸수록 점점 두려워진다. 이해할 만하다. 유령의 손에 뒤틀린 모든 말—손의 뒤틀림이 그들의 특징적 몸짓—은 말하는 이를 향한 창이 된다. 특히 이런 발언은 더욱 그렇다. 그리고 무한히 반복된다.”
감방 속, 우리 안의 새장 속에서 살아가는 삶—그 자체로 질식할 듯 위협적인 삶. 개인적 신화는 자신의 역사와 본질에 대한 이론을 제공함으로써 개인을 지탱하고 문자 그대로 이해 가능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카프카의 신화는 큰 대가를 요구했다. 자발적 행동은 거의 불가능해졌고, 사소한 자극조차 “붕괴”의 위협을 내포했다. 카프카는 아무리 길조로 여겨지는 새로운 경험이라도 점점 더 견딜 수 없음을 느꼈다.
그 겨울의 일기 기록은 이중적 시도를 보여준다. 한 손은 자신을 고정시키기 위해 개인적 신화라는 미로 같은 구조를 설계하고 있었고, 다른 손은 비상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 탈출로는 삶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삶은 “상대편”의 지배 아래 있었기에). 대신 문학으로 향해야 했으며, 그것조차도 근본적인 시각 전환을 요구했다. 외부에서,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라는 관점에서 카프카를 바라본다면, 그의 “글쓰기 시도”는 삶의 원의 여러 부러진 반지름 중 하나에 불과하며, 출판에서의 미미한 성과와 수많은 실패는 그의 막대한 심리적 희생을 정당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침범할 수 있는 경계, 그 너머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이미지—그곳에서는 “구원”이나 “고향” 같은 말도 결국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를 카프카는 몇 달에 걸쳐 개발하고 구체화했으며, 궁극적으로 권위의 세계에 대한 이 반대 이미지를 강화하기까지 했다. 이 발전 과정은 일기에서 명확히 추적할 수 있다. 처음에는 “저쪽 편”에서도 삶의 편에서처럼 불행이 똑같이 클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곧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추방된 자”이며 “이 다른 세계의 시민”이며, 일상을 “외국인”처럼 돌아보고 있으며, 미래에는 “다른 기후 속 다른 뿌리에서 주된 양분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카프카는 이를 감각적 차원으로 확장하기 위해 서둘러 이 땅을 상상했다. 차갑고 맑은 공기를 지닌 이 땅은 사막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흔적이 지워진 사막만이 근본적이고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물고 소중한 순간, 카프카의 글에서는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창조적 힘의 존엄, 스스로 길을 내는 자부심이 번쩍이고 나타난다.
나는 다른 곳에 있다. 단지 인간 세계의 매력이 너무 커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내 세계의 매력 역시 강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버림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그들은 내가 행복한 순간, 이곳에서는 전혀 갖지 못한 자유로운 움직임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이전에 결코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유령”을 자극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이제야 이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는 대작, 즉 그의 최대 역작 집필을 시작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글쓰기의 추진력과 형식, 내용이 완전히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막으로 이동하며, 도착한 사막을 흰색으로 묘사한다.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상의 경계’에 대한 맹공이며, 동시에 소설 자체를 향한 작업 역시 그러하다. 카프카는 이제 다시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현실과 소설 속의 다른 사람들은 그의 대담함을 넋 놓고 지켜보는 목격자이지만, 내심 그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존경심을 느낀다. 측량기사는 특히 여성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그들이 언제나 그를 기다려왔고, 오직 이 낯선 이만이 주문을 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를 창조한 작가는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른다.
본문에 삽입된 일러스트레이션 이미지는 데이비드 제인 메로위츠 David Zane Mairowitz의 『Introducing Kafka 』에서, 사진 이미지는 https://www.maramarietta.com/ 에서 미카엘 하네케 Michael Haneke 의 1997 TV 영화 『성 Das Schloß』을 활용한 글에서 가지고 왔다.
초역이라 오역이 있을 것이다. 발견되면 수정하겠다. 본문에서 언급된 저서의 한국어 번역본이 있는 경우 대조작업을 거쳤으나, 일일이 그렇지 못한 텍스트도 있다. 조만간 찾아 수정할 것이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구독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다보니 번역 작업의 속도와 양이 느리고 많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긴 명절,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식탁에선 오직 식사에만 열중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손톱을 자르시거나 연필을 깍으셨고 이쑤시개로 귀를 청소하셨지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아버지, 제 말을 오래하지 말아주세요.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들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들은 아버지가 제게 내리신 계율을 아버지 스스로가 지키시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저를 짓누르는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카프카, 『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국역, 39쪽)
“신경증자는, 타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능력이 없는 대신 적어도 알고는 있기를 원한다. (Le névrosé veut que, faute de pouvoir – puisqu’il s’avère que l’Autre ne peut rien – à tout le moins il sache)”
Lacan,「Séminaire IX- L’identification」
“[…] Those three words ‘as you know’”
[…] 세 단어는 아시다 시피(‘as you know’)
카프카, 『성(城)』
1.
“마지막으로 심리학을”: 카프카의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이 단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혹은 그것이 애초에 정당한 해석을 허용하는지—는 오래도록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20세기 독일어권 유대 지성인 두 사람의 견해만 보더라도 정반대의 평가가 드러난다. 그 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 Arendt로, 카프카의 작품의 프로이트적 해석이 “사탄적 신학적 satanic theological” 해석보다도 더 거칠게 오도한다고 단정한다. (요컨대, 그의 소설적 허구의 핵심을 ‘법 없는 법’이라는 초월적 도구로서의 법적 관료제 지배에 두는 해석) 다른 사람은 아도르노Adorno로, 신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비슷하게 회의적이면서도, “카프카는 프로이트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카프카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카프카는 정신분석을 그것 자신보다 더 철저히, 더 문자 그대로 이해함으로써—예컨대 자아가 해체되는 불가해하고 불투명한 세부, 맹점의 차원을 강조함으로써—그의 발언을 전도시키고, 정신분석을 “심리학의 손아귀에서 탈취한다.”
2.
시대적·공간적·문화적 근접성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카프카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정신분석의 아버지가 문학을 상당히 보수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그동안] 흔히, 그리고 정당하게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분명 라캉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라캉은 뒤라스Duras와, 무엇보다 조이스Joyce와 같은 혁신적 모더니스트 작가들에 대해 정교한 주석을 남겼다. 라캉은 말년의 한 해 세미나 전체를 조이스에게 할애했으며, 그의 작품을 정신분석 이론과 실천의 핵심 개념들—‘문자the letter’, ‘아버지의 이름Name-of-the-Father’, ‘증상(징후, 생톰 symptom)’, 그리고 임상적으로 중요한 개념인 ‘발현되지 않은 혹은 ‘보통의’ 정신증과 연결지어 폭넓게 논의했다.
하지만, 라캉은 아도르노의 권고를 무시하고, 결과적으로는 카프카 자신의 정신분석 거부를 간접적으로 지지하면서, 카프카에 대하여 무관심해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아는 한, 라캉의 방대한 저작 전체에서 카프카에 대한 언급 references 은 단 세 번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부차적 기원’—즉 ‘불투명한 세부’이자, 아도르노-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맹점’—으로 인해, 그 언급들은 오히려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적인 측면들을 증상적으로(징후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 특히 이 세 번의 언급을 함께 읽을 때 그러하다.
3.
첫 번째 언급은 『세미나 II(1954–1955)』에서 나타난다. 이는 사실 라캉이 직접 카프카를 언급한 것은 아라, 라캉과의 토론에서 이폴리트 Hyppolite가 언급한 말이다. 다소 카프카적인Kafkaesque 편집 선택 덕분에, 문제가 된 문구는 공식 판본에서 삭제되었으나, 이폴리트의 발언 나머지 부분은 보존되어 있다.
당시 라캉 세미나의 주요 참석자였던 이폴리트는—그는 의외로 “나는 헤겔주의자가 아니다. 아마도 나는 그에 반대일 것이다”라고 항의하곤 했다— 라캉이 헤겔의 절대지 absolute knowledge를 역사적 “현실화realization”이자 “그 종결”, 혹은 보다 정교한 ‘주인mastery’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 ‘주인의식’에 무엇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이폴리트는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헤겔은 해석되어야 한다. 라캉의 주장에 반대하여 헤겔의 절대지 absolute knowledge는 경험 그 자체일 수 있으며, 특정한 “경험의 순간”(이는 종국의 순간)이 아닐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절대지는 헤겔『정신현상학』의 모든 단계에 내재하지만, 의식은 그것을 놓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하여, 이폴리트는 카프카의 『소송 The Trial』의 「법 앞에서 Door of the Law」 우화의 특정 해석이 잘못된 개념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절대지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단계가 있고, 마지막 단계는 시골 사람 man from the country이 죽음 직전에야 도달하는 것”이라는 오해다.
라캉은 여기에서 카프카를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이 논의했던 헤겔에 대한 설명이 다소 순진하거나 잘못된 것임을 감지하고, 논지의 초점을 바꾼 것일 수 있다. 라캉에 따르면 헤겔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절대지가 “담론 안에 체현되어 있다 embodied in a discourse”는 것, 둘째, “담론은 자기 자신 위로 in on itself 닫히며, 설사 자기 자신과 완전히 불일치하더라도 닫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미나 I』에서 이미 예고된 바와 같이, 상징계Symbolic는 “출구 없는 [담론적] 질서 order”이며,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만(자기 폐쇄성), “물론 출구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 없는 질서가 될 테니까”.(『세미나 II』) 이런 ‘하나의 출구만 있는 폐쇄적 질서 a closure-with-an-exit’—즉 상징계 자체—는 이미 “최초의 네안데르탈 백치들Neanderthal idiots”이 말을 시작한 이래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에 대해 이폴리트는 라캉에 동의하게 된다.
4.
두 번째의 언급은—짧지만 더 길이가 있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세미나 IX(1961–1962)』의 열네 번째 강의에서이다. 라캉은 카프카의 후기 단편 「굴」(1923)과 그 주인공에 대하여 논의한다. 이 주인공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동물로, 아마도 오소리 badger나 두더지 mole일 것이다. 그는 외부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미로 같은 굴을 만든다. 그는 자신이 만든 장소(그곳은 의미심장하게도 ‘성채 Castle Keep’라 불린다)에 소박하지만 꾸준히 "저장품"을 비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위협을 느낀다. 때때로 이 동물은 굴을 나가고 싶어 하지만, 막상 나가도 결코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잠재적인 적의 냄새를 맡거나(“거의 들리지 않는 휘파람 소리”) 소리를 듣긴 했으나, 그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며칠 동안 굴의 입구를 주시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그는 안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은밀하게 굴 이전의 삶, 즉 “어딜가나 차이없이 위험으로 가득찬 생활”(국역, 651쪽)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돌라르 Dolar는 라캉의 「굴」 해석에서 핵심적인 두 논점을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가장 친밀한 은신처가 곧 철저한 노출의 장소이며, 내부는 본질적으로 외부와 결합되어 있다.” (「카프카의 목소리」) 이 위상학적 모델은 주체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위상학은 단순히 주체에 추가된 건축적 구조가 아니다. 라캉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 유기체의 가장 친밀한 것 속에존재하는 어떤 것”과 관련된다.(Lacan,「L’identification」) 다시 말해, ‘굴 이전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5
이러한 고찰에서 출발하여, 돌라르는 곧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에서 목소리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으로 전환한다. 이에 반하여 라캉의 논의는「굴」에 직접적으로, 혹은 그에 밀접한 관련성에서 제시한 중요한 주장들은 최소한 두 가지가 더 있다. 이것들은 『세미나 II』에서 카프카에 대해 짧게 언급한 내용과도 공명한다.
a) 『세미나 II』에서의 라캉의 상징계 논의―즉 폐쇄와 출구의 변증법 ―에 맞닿으면서도 돌라르의 논점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타자와의 어떤 ‘관여 engagement’ 혹은 ‘관계 맺음’도 “내부와 외부가 서로 열리고 서로를 규정한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위상학적 공간은 동시에 “통로의 이미지, 출구의 이미지, 그리고 등 뒤에서 출구가 닫히는 이미지”를 세워 올린다. 즉 문제는 단순히 주체의 내부와 외부의 타자성 사이 장벽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굴’을 구축하기 이전에는 주체성이나 타자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간적 유동성이 동시에 “출구 없음”이라는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출구가 닫히는 이 관계에서 […] 대타자와의 관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혹은 카프카의 두더쥐(굴의 주인공)는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한다:
“어느덧 내가 적이라도 되어 성공적으로 침입할 적절한 기회를 엿보기라도 하는 듯한 형국이다.”(국역, 652~653쪽)
b) 다시 『세미나 II』의 논의와 연결되며, 특히 여기서는 카프카적 이미지와 담론 속에 구현된 지식의 차원을 나란히 놓고 보면, 대타자와의 관계 및 그 욕망과의 관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요구를 수반한다. 이 요구는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가 what it wants”에 대한 것이지만, 결국은 “무엇이든 대답을 달라whatever answer”는 절망적인 요구로 귀결된다.
그러나 대타자는―주체와 마찬가지로―이에 답할 수 없으며, 더 정확히는 아예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절대지에 대한 요구―즉 출구 없는 폐쇄―와 알지 않으려는 욕망―즉 “출구 없음”이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출구가 있을 것이라는 욕망―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궁극적으로 “타자는 오직 기표에 의해 자신이 표지되는 만큼만,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떤 ‘메타언어’를 포기하도록 강제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을 형식화하고 기표화할 수 있다.”
타자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그의 지식의 한계”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무지한 타자 ignorant Other의 구조적 불가능성이야말로 “주체의 욕망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시에 주체는 “출구 없음”이라는 이미지를 세움으로써 타자의 무지를 배제 exclude(혹은 유예/억압 suspend/repress)하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두더쥐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적의 지식이 제한적이라고 가정한다―“아마도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만큼 적을 것이다.”―그러나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러 그는 타자의 무지,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했던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아마도 단순히 시간을 늦추려는 것뿐일 것이다”라는 진술을 욕망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동물이 나에 관하여 알고 있느냐 그리고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결정적인 게 될 것이다.”(국역, 680쪽)
6
『세미나 IX』에서 「굴」을 논의하던 같은 강의에서, 라캉은 주체가 타자의 무지를 배제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설명한다. 첫째 방식은 병리적으로 신경증적이며, 타자의 무지를 이렇게 보상하려 한다:
“당신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자동적으로 신경증자를 타자의 “희생자”로 만들어버린다고 라캉은 덧붙인다.
둘째 방식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비신경증적이며,
“당신이 무엇을 알든, 알지 못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행동할 뿐이다
I wash my hands of what you know or what you do not know, and I act.”
라는 태도로 작동한다.
이러한 구도를 바탕으로 볼 때, 나는 두더쥐가 일종의 “보통” 혹은 적어도 “정상적으로” 신경증적인 주체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이 짧은 이야기가 불가해하면서도 불쾌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두더쥐는 언제나 분명히 활동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천 수만 번을 몇 날이고 몇 밤이고 돌진하여 이마를 땅에다 짓찧었다.”(국역, 641쪽)
지속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두더쥐의 행동은 효과적이며 끊임없다:
“나는 굴의 건설을 완성했고, 성공적인 것 같다.”
“진심 어린 마음의 기쁨으로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온갖 종류의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결코 “희생자”가 아니라 포식자다:
“모든 종류의 작은 놈들이 [굴 안 통로로] 달려들면, 나는 그들을 잡아먹는다.”
이러한 특성은 강박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의 행동을 제약하지는 않는다. 결국, 두더쥐는 타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한다. 그에게 핵심 질문은 결국
“짐승이 나를 알고 있다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전-오이디푸스 요구 pre-Oedipal demand와 그것의 응답 불가능한 차원과는 다르지만, 오이디푸스기 이후의 욕망 post-Oedipal desire은 여전히 ‘인정 욕망’으로 남는다. 또한 우리는 라캉이 『세미나 IX 』에서 동일한 교훈을 욕망의 발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맥락화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욕망은 근본적이며 급진적인 방식으로 오이디푸스라 불리는 이 매듭을 통해 구조화된다” )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 경우 whether”라는 조건이 타자의 무지가 배제되거나, 일시적으로 정지되거나, 더 나아가 억압되는 지점을 표시한다. (라캉은 『세미나 XI』에서 이를 “분리 separation”라고 부른다.) 이로써 선택의 공간, 즉 가능성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우연이 아니게도, 라캉은 『세미나 IX』에서 「굴」을 논한 바로 몇 단락 뒤에 “진짜” 주체의 가능성 Möglichkeit을 논한다.
이 모든 이유로, 나는 돌라르가 두더쥐를 편집증과 연관 짓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두더쥐가 편집증적이라면, 그는 적이 논리적으로 일관성 없는 행동을 보일수록, 그가 악의적으로 굴을 장악해가고 있다고 확신하며 마비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작은 놈들”은 결국 해롭지 않은 작은 동물들이며, 새로운 통로를 파는 것 외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처벌”할 가치가 없으며, 이들이 불가항력적 악의 사절 undefeatable emissaries이나 악마적 존재처럼 작용하지는 않는다.
7.
라캉이 카프카를 언급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순간은 『세미나 XVI-From an Other to the other』(1968-69)의 마지막 강의 중 하나에서 나타난다. 먼저 앞서 말할 내용은, 이 풍부하고 어려운 구절이 『세미나 II』와 『세미나 IX』에서처럼 내부/외부(입구/출구) 관계의 복잡성과 주체성과 타자성 사이의 경계 설정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또한 『세미나 II』에서와 같이 헤겔 철학(라캉이 후기에 “주인과 노예의 게임game of mastery”이라고 부른 주인과 노예 변증법)과 연결된다.
먼저 카프카에 대한 명시적 언급을 살펴보자: 라캉은 “카프카적인 권력의 성 Kafkaesque castle of power 앞에 줄지어 선 전체 인구 entire population”를 이야기한다. 그는 이 이미지를 또 다른 중요한 문학적 이미지와 연결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바로 트로이 목마이다 . 외부에 있는 어떤 물체가 내부를 담고 있으며, 마지못해 도시 안으로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환호를 받지만 곧 파괴를 일으키는 바로 그 이미지다.
라캉에 따르면, 트로이 목마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 일반적 독해와 달리 – 내부에서 나오는 아카이아 병사 Achaeans가 아니라, 목마 밖에서 파티를 벌이는 트로이인과 무엇보다 그 안에 ‘흡수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욕망이다. 이는 라캉이 보기에 카프카의 측량사 K와 접근할 수 없어 보이는 성 주변에 줄지어 선 마을 사람들과 유사하다. 라캉은 이 욕망이 “문명에 대한 불만”과 다르지 않다고 덧붙인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 두 문학적 이미지가 “오브제 a를 고려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고 단언한다. 『세미나 XVI』의 다른 부분에서 그는 이를 “외부적으로 친밀한” 대상으로 적절히 개념화한다.
8
라캉은 자신의 저작에서 트로이와 목마에 대해 여러 번 언급을 하는데, 그 중 일부는 상당히 시사적이다. 『세미나 I』에서 그는,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 서두에서 로마의 폐허를 무의식의 은유로 사용한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라캉에게 있어 핵심은 다른 도시 위에 세워지지 않은 트로이의 폐허이다. 이는 무의식의 언어적/상징적 성격을 함축하며, 즉 기표 “트로이”가 사물 (도시)과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음을, 오히려 영구적인 “존재-부재” 또는 차이화하는 구조differential structure, “도시/비-도시”를 생성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는 또한 지울 수 없는 객체적 잔여(폐허)와 불가분하게 연결된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트로이 도시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지만, 그 폐허는 사라진 것이 ‘본질적으로 거기 남아 있음’을 증언한다.”
9
미출간 『세미나 XIII』에서 – 이 세미나는 오브제 a의 위상에 초점을 맞춘다 – 라캉은 단테 Dante의 『신곡』에서 다뤄진 시논Sinon 이라는 인물에 주목한다. 시논은 그리스 군인으로, 동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거짓을 고하여, 트로이 사람들에게 목마가 아테나 여신에 바치는 제물이라고 말하며, 트로이 사람들을 설득해 목마를 도시 안으로 들이도록 만든 인물이다. 특히 그는 목마가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다는 점을 교묘하게 암시한다. 라캉은 Thérèse Parisot가 제시한 Dante의 시논 해설(이는 다시 Roger Dragonetti의 논문 「Dante et Narcisse ou les faux monnayeurs de l’image」에 근거)을 지지하면서, 시논의 거짓말과, 확대하면 트로이 목마의 유인 기능 luring function에 대해 간결하게 언급한다.
Dante에 의하면 시논은 두 번 죄를 지었다. 첫째, 자신이 아닌 척(탈영병인 척) 행세하는 가장자simulator이고, 둘째, 목마가 제물이라는 이야기를 꾸며 신을 모욕한 위증자perjurer이다. 특히 두 번째 의미에서, 그는 언어를 남용abuse language하며, 유다처럼 널리 악명을 떨치는 범죄에 연루된다. 라캉은 시논이 “지옥의 가장 깊은 곳 중 하나”에 거주하도록 당연히 정죄받았음을 고찰하면서, 말이 속임수로 전환되는 이 동심적이면서도 위상적 공간이 바로 우리에게 오브제 a의 필수 좌표 중 하나를 제공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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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XVI』에서의 트로이 목마 이미지는 (카프카의 '성(城)' 이미지와 유사하게) 라캉이 말하는 오브제 a와 밀접하게 연관되거나 심지어 동일한 것으로 다뤄지며, 이는 『세미나 VIII』의 잘 알려진 대목에서 더욱 심화된다. 여기에서 라캉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트로이 목마에 대한 오리지널한 묘사를 자세히 다룬다. 호메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디세우스가 교활한 물건으로 요새 안으로 끌고 들어간 말… 트로이 사람들 스스로도 그것을 요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곳에 세워졌고, 사람들은 그것을 둘러싸고 끝없이 논의했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세 가지 제안이 나왔다. 속이 빈 나무를 무자비한 청동으로 베어 버리거나, 절벽 끝까지 끌어내리거나, 또는 신들에게 바치는 웅장한 제물(아갈마, ἄγαλμα)로 그냥 두는 것 – 결국 후자가 선택되었다.”
a) 수수께끼적 기호 '아갈마 ἄγαλμα'의 풍부함과 복합성. 『오디세이』 의 여기저기에서 '아갈마는 단순히 웅장한 “제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신들을 유인하는 덫trap ”이자, “시선을 사로잡는catches the eye 장치”이기도 하다. 요컨대, 라캉은 아갈마를 “매혹 charm”이라고 결론짓는다. 바로 이것이 트로이인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목마를 부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b) 목마/ 아갈마와 불가분의 유혹과 기만 lure and deceit의 차원. 목마에 담긴 기만과 매혹은 그리스 전략의 의식적 차원과, 트로이인들에게 미치는 무의식적 매혹 모두에서 나타난다. 이 매혹은 그들을 망설이게 만들고, 결국 파멸로 이끈다.
c) 목마/ 아갈마의 “비범하고 당혹스러운” 객체성. 트로이인과 그리스인 모두에게 아갈마는 평범하지 않고 심지어 당혹스러운 객체다. 라캉은 이를 강조한다.
11.
텍스트적 증거에 근거하여 – 즉, 아도르노를 따라 카프카를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 우리는 동명 소설 『성(城)』에서 성을, 라캉이 이해한 트로이 목마와 비슷한 '아갈마적 대상'으로 읽을 수 있을까? 몇 가지 요소가 이 가설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소설은 성(城)의 외관을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측량사 K는 확실히 성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위에 있는”, “맑은 공기 속에 뚜렷이”, 윤곽이 더욱 선명했는데, 그는 “오직 성쪽을 바라보며 어떤 일에도 신경쓰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국역, 16쪽) 그가 학교 교사를 만날 때, 교사가 제일 먼저 묻는 말도 “성(城)을 보고 계세요?”이다. 이 매혹적인 건물은 동시에 실망, 심지어 당혹감을 주는 원인으로도 묘사된다.
"그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소읍이었으며 […] 그나마 칠은 벗겨진 지 오래고 돌마저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 오직 구경 삼아 온 거라면 오랜 발품이 아까웠을 것"이다.(국역, 16~1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량사 K는 놀랍게도 전체적으로 “거기엔 뭔가 광적인 게 있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는 첫날 밤 도착 당시 안개와 어둠 때문에 그가 성(城)을 ‘명료한 공허 apparent void’[scheinbare Leere]로 인식했던 착각적 인상을 낮에도 그대로 확인시켜 주는 환각적 특성이다. 이러한 오싹한 매혹uncanny captivation과 가리는 것/드러내는 것veiling/unveiling의 두 차원은 곧 성(城)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었거나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의 외형과 기만적 심리로 전환된다.
예를 들어, 측량사 K의 연인이자 곧 그를 버리는 프리다 Frieda는 “수수하고 키가 작으며 슬픈 표정과 여윈 뺨을 지닌 금발의 처녀이지만 눈빛에는 뜻밖에도 특별히 예사롭지 않은 우월함을 띠고 있었다”.(국역, 48쪽) 그녀가 측량사 K.와 처음 상호작용하는 장면은 그가 ‘작은 엿보는 구멍little peephole’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주인 Master 클람 Klamm을 보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국역, 49쪽) 우연이 아니게도, 소설 후반부에서 페피Pepi는 측량사 K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유별난 요구들을 지닌 채 바로 첫날 저녁에 털썩하고 험한 함정에 빠진다.[…] 대체 프리다의 어떤 점에 그토록 매료된 것일까?”(국역,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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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사 K는 프리다와 성에서 무엇을 보는가? 『세미나 VIII』에서 라캉이 아갈마와 오브제 아의 개념에 대해 주목하는 중심 사례는 플라톤 『향연 Symposium』에서 알키비아데스Alcibiades가 소크라테스를 묘사한 장면이다. 소크라테스는 못생기고 털이 많아 실레누스 Silenus처럼 보이지만, 잘생기고 자존심 강한 알키비아데스를 매혹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여전히 절실하게 소크라테스를 사랑한다. 라캉은 이 실레누스 형상 이미지를 “포장wrapping”과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플라톤의 말대로 “작은 조각 실레누스small sculptured Silenus”처럼, 그리스인들은 이를 보석함 jewellery box으로 사용했다.
“중요한 것은 안에 있는 것”이라고 라캉은 강조한다:, 즉 아갈마는 귀중한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본질적인 위상학적 지표”이다. 또한 라캉은, 한편으로, 자료들은 빈 상자 안에 실제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반대로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고 지적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명하는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한다. 즉, 주체는 실제로는 타자 o/Other 자체보다, 타자(소크라테스, 프리다, 성, 트로이 목마) 안에 속해 있다고 착각되는 것에 매혹된다. 라캉이 결론 내리듯,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브제 아 object a가 주체의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이며, 이는 곧 주체의 욕망의 대상이 타자에게 던지는 질문: “과연 당신의 의지에 맞는 욕망이 존재하는가? Is there a desire that really conforms to your will?”라는 의미와 동일하다.
13.
『세미나 VIII』에서 라캉은 오브제 a 를 아갈마로서 비교적 직접적인 방식으로 장황하게 논의한다.
a) 아갈마는 단순한 아이콘이나 이미지가 아니다. 단순한 이미지가 그저 “재현 reproduction”이나 복제일 뿐이라면, 그것은 훨씬 더 "특별한 힘"을 가진다. 이 힘은 전통적 문화를 활용하는 페티시fetish의 기능이나, 일상 표현 “너는 나의 우상이야!”와 비교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아갈마 여전히 이미지와 관계를 맺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우 특별한 종류의 이미지”라는 점이다.
b) 아갈마는 라틴어 용어가 가슴 모양의 봉헌물 ex-votos shaped like breasts 에 쓰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신분석이 말하는 “부분 대상partial object”을 예시한다. 흔히 오해되는 것과 달리, 부분 대상이 전체로서 우리의 욕망에 합당한 대응부분counterpart 을 구성한다고 보는 것은 틀렸다. 타자는 the other 전체 대상이 아니라 “부분 대상의 집합”으로서만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c) 아갈마가 항상 부분 대상으로만 남는 한, 그것은 주체 자신의 구조적 분열을 증언한다. 즉, 주체는 언어에 대한 복종과 기표의 차이화하는 논리에 의해 강제로 결정된다. 따라서 아갈마는 동등성의 대상, 교환의 대상, 또는 “재화의 전이 transitivity of goods”로 대변될 수 없다. 다른 모든 대상과 비교할 때 불균형한 unbalanced 상태로 남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불균형 위에서, 주체 내적 관계와 주체 간 관계가 성립한다.
d) 교환될 수 없는 아갈마는 구조적으로 무(無) void와 결합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 아갈마agalma도 소유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무(無) nothing”, 즉 공백 ouden임을 안다. 그는 “내 안에 사랑받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알고, 알키비아데스에게 경고한다:
“너는 착각하고 있다 undeceive yourself”,
“더 주의 깊게 살펴라 consider things more carefully( ἄμεινον σκόπει)”,
“네가 무언가를 보는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공백(무(無))을 아는 것은 역설적인 함의를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無)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공백과의 친숙함이 “비-지식 nonknowledge이 공백으로, 지식의 중심에서 공백의 부름으로 구성되는 것”을 낳는다. 소크라테스는 두더쥐와 달리, 비지식을 일시 중단하거나 유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e) 아갈마의 유혹적 역할을 수락하지 않음으로써(즉, 자신이 무(無)임을 알기에 알키비아데스에게 사랑받기를 거부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역으로 자기 자신을 유혹한다. 그는 "아갈마에 의해 구성된 목표대상의 본질적 기능을 오인misrecognises 한다." 다시 말해, 주체는 오브제 a를 폐기할 수 없다. 주체, 타자, 대타자의 삼중 위상은 그것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결국 두더쥐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하다. 『세미나 IX』에서 『굴』이 논의될 때 제시된 교훈이 명확히 보여주듯, "욕망은 그 자체 안에 이 공백, 즉 내적 구멍 internal hole을 포함해야 하지만(이는 법과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대타자와의 매듭’은 필연적으로 ‘유혹의 관계’를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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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세미나 XVI』 전반, 특히 그가 “권력의 카프카적 성 the Kafkaesque castle of power”을 언급하는 강의 전후에서, 오브제 a의 가장 진전된 개념화를 제시한다. 1950년대의 저작들이 주로 소타자 the small other―즉 주체의 소외적 동일시의 기원인 상상적 상대―대타자―즉 기표성 signifierness, 상호주관성, 그리고 요컨대 ‘문명’―으로의 이행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1960년대 초부터 『세미나 XVI』에 이르기까지 라캉의 관심은 동일한 이행, 즉 동시에 연결link이기도 한 이 과정을 오브제 a의 실재적 타자성에 대한 고찰로 전환한다.
이 세미나의 제목은 “대타자로부터 소타자에게 From an Other to the other” 와 같이 암시적으로 씌였다. 여기서 오브제 a의 타자성, 곧 ‘유혹하는 공백 a luring void’으로서의 성격은 주로 잉여향락 surplus enjoyment 개념을 통해 논의된다. 이는 요컨대 문명의 “불만 discontent ”이자, 그 불만에 스스로 만족하는 문명의 역설을 뜻한다.
나는 여기에 다음을 덧붙이고자 한다. 곧 라캉은 ‘잉여향락으로서의 오브제 a’를 통해, 『굴』의 위상학과 그 출구/출구없음 exit/“no-exit”, 비지식/지식의 복합적 변증법을 탐구한다. 그는 이를 두더쥐의 제한된 ‘저장물 supplies’과 ‘소박한 삶의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며, “그를 유혹하는 것은 바로 단 하나의 거대하게 축적된 음식 덩어리”라고 말한다. “성채 ”, 즉 측량사 K의 성이 지하로 전도되고 세속화된 형태는 완전성의 이미지를 충족시킨다고 오인된다. 그러나 두더쥐는 정신분석적 통찰의 순간에 올바르게 다음 사실을 인식한다.
“ 모두 한데 모아놓은 양식을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소유한 바를 한눈에 알 수 있지 못하면 그 점 때문에 자부심이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국역, 643쪽)
결국 완전한 향락에 대한 어리석은 이미지는 구조적으로 지속된다.
15.
라캉의 잉여향락 surplus-dejouir의 개념은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매우 간략하게 말하자면, 잉여가치는 상품 가치가 노동가치를 초과할 때 발생하는 추가 가치를 의미한다. 즉,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 완전히 보상받지 못하고, 자본가는 초과가치를 통해 이윤을 얻는다. 잉여향락은 이에 비유할 수 있는데, 주체가 자신의 "향락의 일부를 포기 renunciation"하고 대타자에게 부여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 포기는 본질적으로 신화적 차원의 완전한 향락 포기로 이해될 수 있으며(라캉은 여기서 다시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을 떠올린다). 동시에, 이는 구조적·"담론 효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주체는 대타자의 장 안에서 "상응물correlative", 즉 누군가에 의해 포착된 잉여향락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엄밀히 말하면, 오브제 a는 잉여향락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잉여향락에서 ‘상실 a loss’로서 "생산된 것"이며, 주체의 욕망의 원인이자 동시에 타자가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잉여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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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성(城)』은 의심할 여지 없이 노동과 향락의 포기를 다룬 소설이다. 열악한 생활 조건, 착취, 불안정한 고용, 심지어 일부 초기 형태의 초단시간 계약이나 장기 수습 계약 조차도 마을 사람들에게 거의 보편적으로 적용되며, 그들은 이를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여관에서 프리다를 대신해 임시로 근무하게 된 페피는 자신의 새 직업이 “매우 피곤하다”면서 “거의 견디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이전의 하녀직, 즉 “그다지 전망이 없는 하찮은 일”로 되돌려보내졌을 때에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녀는 크게 나아갈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으며, 이미 얻은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바르나바스Barnabas는 끊임없이 성 입구로 가서 일을 구하려 하지만, “직원이 지나치게 많아 매일 모두에게 일을 줄 수는 없다”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르나바스는 맡을 일을 받는다.”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비공식, 계약직 직원”으로 분류되며, 이는 그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워야 한다.
한편 측량사 K의 경우, 클람이 보낸 편지에서 "계속 열심히 하십시오! 좋은 작업 성과가 나오도록 하십시오"라는 촉구를 받지만, 측량사로서의 임명은 단지 행정적 실수의 결과일 뿐이다. “당신은 측량사로 고용되었다고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게 측량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당신을 위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K.는 처음에는 이 직위를 명예롭고 보수가 좋은 자리로 인식한다(“나는 측량사이고, 백작이 나를 불렀다”; “측량사의 도착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백작이] 좋은 일에 대해 잘 보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곧 이를 크게 저항하지 않고 포기한다. 대신 그는 수습 기간의 무보수 “임시직”으로 학교 관리인 자리를 받아들인다. 역설적으로, 학교 교사가 그를 해고하려 할 때에만 K.는 강하게 저항하며 무보수 직위를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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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성(城)』에서는 주인들 the masters 의 특수한 직무와 잉여 향락 사이에 명확한 연관이 존재한다. 주민들, 특히 성의 은총에서 떨어진 자들은 불안정한 노동과 공식적으로 일하지 않는 상태 속에서 ‘중간적’ 상황에 매달려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이 항상 극도로 바쁘다고 추정한다. 이에 대해 논평을 다는 학자들은 종종 이를 주인들의 게으름을 은폐하는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외관 façade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되는 것은 훨씬 더 복잡하다. 주인들은 공식적으로 노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을 수행한다. 상징적으로, 클람은 측량사 K가 구멍을 통해 관찰한 바와 같이, 일하는 동안 잠을 잔다:
"클람 씨가 앉아 있었다. […] 검은 콧수염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비스듬히 걸친 번득번득한 코안경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 "자거든요." "뭐라고?" K가 소리쳤다. "자고 있다고? 내가 방을 들여다봤을 때 그는 깨서 탁자 옆에 앉아 있던데." "그는 늘 그렇게 앉아 있어요." 라고 프리다가 말했다. "당신이 그를 봤을 때에도 그는 자고 있었어요."(국역, 49~53쪽)
나중에 우리는 주인들이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도 업무를 처리하고 민원인을 맞이하는 데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그들에게 “일반적인 시간과 노동 시간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 사이의 경계가 소멸하는 이러한 현상은, 주인들이 마을 여성에게 무제한적인 성적 접근권을 갖는다는 공유된 추정과 수용을 설명하는 데에도 기여한다(“아마도 공식적으로 거부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공직자 officials가 자신에게 향할 때, 여성들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프리다는 성의 여관에서 클람이 그녀의 근무지를 방문할 때 잠자리를 함께 한다. 소르티니Sortini는 소방 축제 동안 아말리아Amalia를 유혹하려 시도한다. 결혼 전날 아말리아를 잃기 전에, 측량사 K는 프리다가 클람의 전 연인으로서의 역할을 결코 완전히 잊을 수 없는 이유가 “이전 어디에서도 공식 업무와 삶이 이렇게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며, 때로는 삶과 공식 업무가 자리를 바꾼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라고 생각한다.
측량사 K는 이어 하나의 열린 질문을 던지는데, 이 질문은 주체가 잉여향락을 대타자에게 투사 projection하는 방식과, 그 대타자의 중심에 실제로 놓여 있는 ― 기능 장애, 무지, 무기력한impotent ― 공백 사이의 구조적 불일치를 라캉이 파악한 바 그대로 정교하게 응축하고 있다.
“클람이 K의 서비스에 대해 행사한 권력, 지금까지는 단지 형식적이었던 것이, K의 침실에서 실제로 행사한 권력과 비교해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이 긴장 관계는 소설의 다른 두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한편으로, “클람은 여성들에게 군 지휘관처럼 행동하며, 때로는 한 명, 때로는 다른 한 명에게 자신에게 오라고 명령한다”와 “공직자의 사랑은 결코 짝사랑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동시에, “공식적 결정은 어린 소녀들만큼이나 포착하기 어렵다”는 구절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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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세미나 XVI』에서 대타자를 구조적으로 비-일관적 structurally inconsistent 존재로 제시한다.
그는 “대타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 주체의 담론이 일관되게 될 수 있는 장소”라고 하면서도, “대타자의 장에서는 담론의 완전한 일관성이 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담론은 스스로 전체화 totalize되지 않으며, 대타자는 항상 “회피적”(주체의 포착을 회피하면서 완전히 동일화될 수 없는 것, 결여로서만 현전하는 것)으로 남는다. 대타자는 근본적으로 “언어의 구조적 현전existence of language”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기표와 그것이 구축하는 상징계의 연쇄 symbolic networks는 외부의 메타언어에 의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성립한다. 즉, 대타자의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There is no Other of the Other. 그렇다면 단 하나의 대타자만 존재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대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세미나 II』에서 이미 라캉이 보다 단순한 방식으로 예견했듯이, 대타자는 반드시 “출구”를 가져야 한다. 『세미나 XVI』에서 라캉은 이 “출구”가 그가 “환상”이라고 부르는 잉여향락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 본다. 여기서 주체는 기표성에 의해 분열된 채, 자신을 대타자의 잉여 향유의 오브제 a로 자리매김한다(즉, 주체가 소위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대상으로서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은폐 자체가 비-자율적non-autonomous 과정의 대가로 획득되며, 억압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체가 에고(Ego, 또는 자기 의식self-consciousness)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대타자의 일관성 또는 합법칙성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대타자는 주체에게서 ‘도둑맞은’ 것으로 간주되는 잉여 향유의 무의식적 저장소와, 그 향유가 “정화purged”된 의식적 영역을 동시에 점유한다. 주체가 대타자를 자신의 비-향락non-enjoyment, 비참misery, 무력함helplessness, 고독solitude과 공유하는 등가적 상응물로 축소할 때에만, “순진한 믿음”을 통해 에고에서 일관성이라는 유사물 semblance of consistency을 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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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에게 있어, 주체는 근본적으로 대타자의 비일관성 inconsistency 을 처리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진다: 도착증 perversion과 신경증neurosis 이러한 방식은 물론 “병리적”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세미나 XVI』에서 타인의 사적 향유를 관찰함으로써 향유를 경험하는 구조적 관음증 voyeurism과 시선의 향유 구조로서의 노출증 exhibitionism이 상세히 논의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이 단계에서 라캉이 제시하는 도착증과 신경증이 주체화 subjectivation의 구조적 모델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방식인 정신증 psychosis은 엄밀히 말해 주체화의 방식은 아니며, 단순히 문제를 폐제 foreclose하고 –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면서 – 대타자의 일관성에 맹목적으로 의존한다. 예를 들어 슈레버 Schreber의 사례에서, “세계 질서”의 붕괴조차도 신의 초월적 질서에 근거한다고 여겨진다. 『세미나 XVI』에서 라캉의 핵심 논지는, 대타자의 비일관성과 오브제 a는 공-범위적coextensive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타자는 “전체”가 아니며,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타자의 결핍(lack, bar, gap, hole)은 동시에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일종의 유혹”으로 기능한다. 주체는 결국 대타자의 영역을 단일 존재 One로 “측정measure”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은 바로 주체가 잉여 향유로서 대타자가 소유한다고 여기는 오브제 a의 상실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체는 이 오브제 a에 대해 자신의 분열된 욕망 존재를 환상적으로 배치한다.
이러한 움직임 혹은 측정 행위는 특히 도착증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도착증에서는 “잉여 향유가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기서 환상은 실제로 행동으로 구현된다 acted out. 그러나 이러한 구현은 동시에 대타자 내 공백을 가리개 역할을 한다. 성도착자는 “대타자의 결여, 즉 비-일관성을 메우는 데 자신을 바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대타자를 위한 향락을 수행한다.
이에 반해, 신경증에서는 환상이 억압되는데, 이는 환상이 소위 향유의 도둑질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성도착자가 공개적으로 대타자를 단일 존재로 만들려는 목표를 갖고 “믿음의 수호자”가 되는 반면, 신경증적 주체는 “대타자의 영역에서 자신이 단일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신경증적 전략은 전적으로 나르시시즘 narcissism에 기반한다. 문제는 오브제 a가 상상계적 수준으로 전치 transpose될 수 없다는 점이며, 이는 언제나 주체를 회피하는 거울적/나르시시즘적 이미지specular/narcissistic image에 추가될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온전한 향락에 대한 사후적 환상 retroactive illusion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신경증적 주체는 비-일관적인 대타자를 위해 향유하기보다는 아예 향유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이러한 심화된 포기와, 그것과 함께 나타나는 미약한 일관성의 유사물은 궁극적으로 신경증적 주체 자신의 역설적 향락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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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城)』은 타당한 이유로, 가장 강력한 의미의 도착증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 있다. 이는 사드Sade의 『소돔 120일』에서의 실링 성(城) Silling castle이 보여주는 병적 성적 집중 focus 을 훨씬 뛰어넘는다. 주인들의 비일관성은 클람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잠자는 동안 일할 뿐만 아니라 –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체계의 일관성consistency of a system이라는 것은 그 안에서 명제를 발화할 때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심지어 “맥주를 마시기 전과 후에 다른 사람”이 되며, 어떤 사람들은 “모무스Momus가 클람이다”라고까지 맹세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비일관성은 여관 주인의 클람의 존재 및 용서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방어를 강화할 뿐이다. 그녀는 18년 전 세 번 밤을 함께하며 기꺼이 자신을 그에게 내주었고, 왜 더 이상 “호출되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그 “신사”에게 단단히 헌신하며 측량사 K가 “끔찍한 충성terrible fidelity”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 여관 주인에게 이 충성은 당연한 것으로, 그녀는 클람의 애인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결코 잃지 않기 때문이다.
대타자로서 비일관적인 클람을 잉여 향유의 대상으로 삼는 이러한 끊을 수 없는 특별한 관계는, 여관 주인에 의해 클람 방문의 “세 가지 기념품”으로 페티시화 fetishized된다. 즉, 사진 – 의미심장하게도 다른 사람의 사진 – 숄shawl, 그리고 나이트 캡이다. 실제로 “신사들은 잠을 많이 잔다.” 여관주인은 덧붙인다.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오래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프리다의 측량사 K가 구멍을 통해 클람을 들여다보도록 허용한 장면, 그리고 안경에 빛이 반사되어 “그의 눈을 가린” 모습은, 『세미나 XVI』에서 라캉이 말하는 관음증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라캉에게 관음증은 도착적 주체가 “대타자의 결여를 막는다”는 전형적 사례로 간주된다. 관음증자에게 중요한 것은, 대타자 내에서 볼 수 없는 것, 즉 “대타자로서 결핍된 것”을 탐문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의 시선을 보충함으로써 이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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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측량사 K는 적어도 초기에는 주체화 방식으로서의 도착증에 낯설다. 엿보기 구멍 사건 peep-hole incident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여관 주인이 올바르게 지적하듯, 그는 클람을 “제대로 볼 위치에 있지 않다”. 놀랍지 않게도, 측량사 K가 나중에 혼자 여관으로 돌아와 엿보기 구멍을 찾으려 할 때, “그것은 너무 잘 설치되어 있어서 찾을 수조차 없었다”. 라캉의 정의에 따라 일반적으로 신경증을 “대타자의 영역에서 단일 존재가 되려는 욕망”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측량사 K에게 잘 들어맞는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클람과 대화하고, 자신의 근무 상태에 관한 모든 오해를 해소하며, 정당하게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그는 명확히 대타자를 위한 향락보다 비-향락을 우선시한다.
예를 들어, 성에서 파견된 두 조수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즐기기보다는 – 설령 그들의 행동이 예측 불가능하고 극도로 부도덕하더라도 – 그는 조수들을 내보내고, 여전히 자율성을 유지하며 일정한 권력까지 확보할 수 있는 프리다와 함께하는 고된 노동의 삶을 꿈꾼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모든 미래 전망 – 비록 어둡다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한다 – 이 모든 것은 프리다에게 빚진 것이다. […] 비유적으로 말하면, 나는 위상을 얻었고,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작게 보일지라도, 나는 집, 지위, 그리고 실제 일[무급 관리인]을 갖고 있다 […] 나는 그녀와 결혼하여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일원”이란 곧, 성의 일관적인 영역에서 상징적 단일체 monadic – 그리고 겸손하게 불손한 – 요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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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반에서 측량사 K가 성에 대응하는 보다 구체적인 신경증적 양상은 강박obsession으로 나타난다. 라캉은 『세미나 XVI』, 특히 “카프카적 성 Kafkaesque Castle”을 언급한 강의에서 대타자의 비-일관성에 대한 강박적 태도에 대해 가장 상세하면서도 명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강박 신경증자의 기본적 특징은, 비일관적인 대타자와 끊임없이 그리고 필사적으로 협상하려 한다는 점이다. 라캉에 따르면, “모든 쾌락은 그에게 대타자와의 협상 treaty으로서만 사고될 수 있으며”, 이 협약은 항상 결정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상상되며, “근본적 전체”로서 대타자의 장 안에서 자신을 단일체로 확립하려는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대타자와 합의하려는 강박적 주체는, 불가능한 위치인 “금지된 타자의 기표 " 즉, 빗금친 대상 S(Ⱥ))를 점유하고자 한다.
문제는 대타자의 비일관성으로 인해, 겉으로 양 당사자가 합의한 것으로 보이는 모든 계약과 합의조차, 필연적으로 연속적 “지급”의 소용돌이를 초래하며, “자신과 결코 동일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강박적 신경증에서는, 비-향유에 대한 신경증자의 향락, ‘상징적인 부채의 의례 ceremonies of debt’의 향유로 구체화된다; 즉 주체에게 여전히 어느 한쪽 당사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향유이다.
측량사 K가 클람이 “백작의 근무에 채용되었다”고 명시하고, 또한 자신이 “언제나 그를 기꺼이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며 “만족스러운 직원들을 갖기를 원한다”고 개인적으로 안심시킨 편지에 막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면장 mayor이 측량사 K에게 해당 편지가 공식적 효력이 없으며, 따라서 무직임을 알리자, 그는 이것이 “모든 계산을 무너뜨린다”고 항의하며, “나와 아마도 법도 충격적으로 남용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분명히 “성으로부터의 호의의 표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권리”, 즉 “겸손한 토지측량사로서 작은 도면판 앞에서 평화롭게 일할 권리”를 요구할 뿐이다.
측량사 K는 자신의 사례를 면장과 길게 논의하며,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결국 클람이 서명한 권위를 강조한다. 면장은 서명의 유효성 자체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나, 편지가 사실상 “구속력이 없음”을 명시하고 있음을 알린다. 편지에는 “알다시피 as you know ”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어, “당신이 임명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입증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고 규정된다. 며칠 전 처음 편지를 읽었을 때, 그는 자신은 이미 자신의 곤경에 대해 이상하게 책임감을 느꼈다:
“편지는 결국 어떠한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것이 측량사 K의 부주의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리지 않았다 — 섬세하게 표현되었으며, 오직 불안한 양심(죄책감이 아닌)만이 ‘알다시피(as you know)’라는 세 단어에서 성의 임명을 언급하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측량사 K가 자신을 권력 남용의 피해자로 여기지 않았음에도, 이러한 선험적 a priori이고 소멸되지 않는 채무 상태 또는 최소한의 “불안한 양심uneasy conscience”은, 그가 면장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았을 때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정보라는 확신"을 느낀 배경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량사 K는 자신이 실수로 임명된 이야기를 놀랍게도 “즐거워”하기도 한다; 자신의 파일을 찾아내려는 면장의 실패한 시도는 무능한 관료주의를 상징하며, 면장 역시 침대에 누워 있고, 그의 아내는 처리되지 않은 서류 더미 속에서 관련 문서를 헛되이 찾는다. 면장은 이 이야기를 측량사 K를 즐겁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반박한다: “나는 [K.]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급여를 요구하며 화난 선생과의 측량사 K가 실패한 협상은, 측량사 K가 “웃고 손뼉을 치며” 마무리한다.
이 두 사람의 불일치 disagreement는 놀랍지 않게도 누가 누구에게 호의를 베푸는지, 반대로 누가 채무를 지고 있는지에 집중된다. 측량사 K의 “이상한(낯선 strange)” 전제는, “만약 누군가(교사)가 다른 사람(K)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받아들임을 허용한다면, 실제로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K 자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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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측량사 K가 클람과 면담을 허락받기 위한 실패한 시도를 따라 전개된다. 프리다의 관점에 따르면, 그의 “유일한 목표는 클람과 협상하는 것”이며, 심지어 그녀에 대한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점점 더 마을 주민들에게 빚을 지게 되며, 그 결과 조수들(이 조수들은 그가 프리다와 관계를 맺을 때 몰래 관찰하고 이후 그녀를 유혹하기까지 한다)이 성에 불만을 제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량사 K가 성의 정보에 정통한 서기관 뷔르겔Bürgel과 함께 점점 복잡해지는 곤경을 해결할 뜻밖의 기회를 얻었을 때, 그는 잠이 들어버린다. 측량사 K는 문자 그대로 대타자와 함께 침대에 있게 된다:
“[K.]는 초대받자마자 갑작스럽고 격식 없이 침대에 앉아, 침대 기둥에 기대었다.”
측량사 K는 뷔르겔이 “여기 상황이 결코 어떤 전문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깨어 있을 수 없다. 더 중요한 점은, 불면증인 서기관을 대신하여 잠을 자면서(“지금 내가 자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대타자 안의 공백을 가리고 — 놀랍게도 — 뷔르겔을 더듬는 행위를 통해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쾌락을 얻는다는 것이다:
“K는 잠들어 있었다 […] 그의 귀찮은 의식은 사라졌다 […] 뷔르겔은 더 이상 그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K.] [가끔씩 여전히 뷔르겔을 향해 더듬었다 [nur er tastete noch manchmal nach Bürgel hin]] […] 이제 그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었다. 그는 마치 큰 승리를 거둔 듯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강박증에서 도착증으로의 전환이 아니다 — 라캉에 따르면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인 모드이다 — 오히려 신경증자에게도 존재하지만 억압된 형태로 나타나는 환상의 무의식적 도착적 핵심의 작동을 보여준다. 즉, 대타자의 향락 오브제 a로서 자신이 쾌락을 느끼는 것을 즐기는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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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겔은 졸린 측량사 K에게 성의 모순적이면서도 어떻게든 효과적인 “협상”이 얼마나 복잡하게 수행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Verhandlung, “협상”이라는 용어가 네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동안 여섯 차례 반복된다). 전문 서기관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세상은 저절로 제 궤도 안에서 스스로 바로잡히고 균형을 유지한다; 다른 면에서는 암울할지라도, 훌륭하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체계적 arrangement 구조다.”
이 시점에서야 측량사 K는 뷔르겔이 “아마추어”이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판단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인간 본성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지닌 것인지 결정할 수 없게 된다.
소설 대부분에서 측량사 K는 수많은 반증에도 불구하고 성이 자신의 케이스를 완전히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측량사 K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신뢰하거나, 더 정확히는 자신에게 정확한 위치와 지위를 부여해줄 것으로 예상되는 대타자의 지식을 믿는다.
성에서 걸려오는 전화 목소리는 측량사 K를 “영원한 토지측량사"로 알고 있으며, 프리다의 첫 발화 중 하나는 “당신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은 토지측량사입니다”이다. 심지어 면장조차도 그를 미리 알고 있는 듯하며 “이 사람이 우리의 토지측량사입니다”라며 환영한다. 따라서 그는 “그들이 성에서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여관주인은 반대로, 측량사 K가 “성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에 동의하지만 덧붙인다:
“내가 성에 대해 아는 것은, 저 위에서 좋은 토지측량사를 어떻게 선택하는지 안다는 것뿐”
이것만으로도 그가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에 충분해야 한다. 『세미나 XVI』에서 라캉은 주체가 대타자의 장 안에서 자신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대타자 또한 “그것이 알려진 자리”로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 차원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며, “모두에게 기반을 제공”한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특히 강박 신경증에서 이 차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타자는 주로 “일어난 모든 사건과 알려진 모든 것이 존재하는 장소"로서 ‘전체’로 출현한다. 이는 구조적·보편적 전제인 “그것은 알려져 있다 that is known”가 자기반영적으로 reflexively도 성립하는지 여부라는 추가 문제로 이어진다. 즉, “그것이 알려져 있다”가 스스로를 아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대타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른다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위한 향락을 취하며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도착증의 경우에서도, 전제되지 않는 것은 “타자가 결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 특히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오브제 a의 포함으로 전달되는 만족이 타자에게 제공되는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적 친밀성 sexual intimacy 때문에, 프리다는 자신이 클람을 “매우 잘 알고 있다”고 믿지만, 클람은 여전히 “무관심”하며, 그녀를 “호출"한 적이 없다. 보다 일반적으로, 대타자의 지식 구조 측면에서 우리는 누구도 “클람에게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고 알려진다 — 클람이 “그것이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클람은 “[기록] 문서를 전혀 읽지 않는다”며, “즉시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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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자, 오브제 a, 잉여향락과 함께, 지식은『세미나 XVI』에서 다루어지는 중심 주제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여전히 대부분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으며, 연구자들은 보다 잘 알려진 『세미나 XVII』과 그 담론 이론에서의 지식 처리에 주로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세미나 XVI』에서 라캉의 기본 요점은, 대타자는 지식이 “하나의 전체로서 One 환상적으로” 표현되는 장소라는 것이다. 대타자를 비일관되게 만드는 결여 gap 또는 결함 flaw은 근본적으로 지식의 결핍에 해당하며, 이는 다시 언어의 차이화하는 구조 differential structure가 항상 기표를 결여하거나(혹은 “출구”를 가지는) 방식으로만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타자는 알지 못한다 the Other does not know”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타자는 지식의 구조와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 unconscious structured like a language 에 대응한다는 의미에서 “대타자는 알고 있다 the Other knows”고 말할 수 있다. 대신, 대타자는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that it knows ; 즉, 대타자는 다른 주체가 아니다.
신경증적 주체는, 바로 지식의 진리를 문제 삼는 동안, 대타자를 절대지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가정된 주체 supposed to know로 전환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중요한 점은 “지식은 곧 지식을 알고 있다고 추정되는 주체의 향락”이 된다; 즉,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주인 master 의 향락으로 기능한다. 보다 구체적으로,『세미나 XVI』에서 라캉의 개략적이지만 흥미로운 논증은 지식, 향락, 권력 사이의 삼각관계에 관한 네 가지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를 중심으로 집약된다
a) 고대에서의 지식과 권력의 결합, 그리고 후자의 향락과의 명시적 분리.
b)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한 평가: 지식, 권력, 쾌락의 관점에서 분석.
c) 자본주의에서의 분리적 단락 “지식-권력”과 동시에 대학 담론 university discourse에서 “지식-향락 [savoir-jouissance])” 시장market 창출의 병행.
d)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분석의 인식론적, 윤리적, 정치적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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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대타자의 비-일관성이 언제나 “동일하다”고 진술한다. 역사적으로 변하는 것은, 말을 하는 동물이 대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라캉은 놀랍게도, 말 하는 동물이 오랜 기간 동안 (애니미즘적·종교적지식 형태를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방법을 마련해 왔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에피스테메episteme의 전형적 사례에서 근본적으로 걸린 문제는, “백작 없는 모든 장소” — 즉, 대타자의 비-일관성이 나타나는 모든 양상 — 가 언젠가는 지혜 의해 우주적 조화의 “구성적 간격”으로 축소될 것이라는 내기에 있다. 이러한 대타자의 질서에 대한 관점은 곧 지식과 권력의 동일시라는 전제를 수반한다. “계산할 줄 아는count” 지혜자들, 특히 그들의 상업 emporia적 행위로 “처리”할 줄 아는 자들은 권력을 보유해야 하며, 그들이 분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의롭다. 상업emporia과 제국empires은 함께 간다.
한편, 지식과 권력의 동일시 전제는 고대 지혜자들로 하여금 향락과 특정한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라캉이 한때 정의하듯, 그들의 향락은 “순수하다". 그들은 어떻게든 향락에서 “물러나” 있는데 — 이는 오브제 a의 상실, 잉여향락, 절대적 향락의 투사적 projection 사전 구성으로 나타나는 삼합구조 triad와 관련된다 — 그들의 인식적 내기 epistemic wager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잡힌 쾌락 hedone를 찾는 것이다. 이 향락은 인간이 주인 master이 되기보다는 축하자 celebrants로서 존재하는 자연의 “조화” 속에 있다. 이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겉보기에는 부자연스러운 쾌락 pleasures도 결국 이러한 쾌락이 제공하는 “척도 measure” —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조화로운 우주 — 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하고, 동시에 금욕주의 또는 otium cum dignitate 형태를 촉진하게 한다. 그들의 모토는 “일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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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에게 있어 헤겔의 가장 큰 공적은, 이미 항상 존재해 왔던 지식과 권력 간의 분리disjunction와, 그리스인들은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던 권력과 향락 간의 불일치 incompatibility를 명확히 규정했다는 점이다. 헤겔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준다:
a) 데카르트적 코기토 Cartesian cogito: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한다I am where I think”라는 주체의 통제 또는 권력이 실제로는 보다 구조적인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I do not know where I am”를 은폐한다. 헤겔 변증법에서, 사유 자체는 궁극적으로 “나는 내가 존재하고자 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I cannot think that I am where I want to be”로 환원된다.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있다 I am where I think”는 착각illusion에 불과하며, 사유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주인의 자유 — 인정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획득한 권력 — 는 항상 이미 역사 안에서 지식의 전개에 종속되고 분리되어 있으며, 이는 노예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b) 지식은 노예로부터 비롯된다. 지식을 지닌 노예는 권력을 가진 주인을 섬긴다. 그러나 노예의 노동 덕분에, 주인은 사실상 향락의 “회수”만을 누리며, 이 향락은 “향락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향락의 상실과 관련된다”. 라캉은 헤겔이 이를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변증법은 근본적으로 권력이 “향락의 포기”를 수반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주인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향락을 노예에게 남기게 되며, 노예는 실제로 “자신의 육체적 안전”을 위해 지배당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우리는 — 라캉이 명시하듯, 고대에도 신화적이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 노예의 향락과, 주인이 노예로부터 얻는 잉여향유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후자는 주인이 지식을 추구하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헤겔적 주인-노예 변증법은 구조적으로 고대 세계에도 적용되며, 그 세계에서 향락의 활용을 통해 대타자의 비-일관성을를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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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세미나 XVI』은 1968-1969년 5월혁명 봉기 몇 달 후 진행되었으며, 라캉의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상세한 논의를 제공한다. 후속 저작에서 제대로 명시되지 않을 자본주의자의 담론은, 『세미나 XVII』
에서 체계화 될 대학 담론과 밀접히 연결하여 분석된다. 두 담론은 상당 부분 동의어로, 혹은 최소한 상호보완적으로 제시된다.
자본주의의 기본적 새로움은 구조 안에서 지식과 권력의 배치 arrangement가 달라졌다는 점과, 이것이 잉여향락의 보편화를 어떻게 야기하는가에 있다. 자본주의-대학 담론에서 권력과 지식 사이의 분리는 유지되는 동시에 단락화 disjunctive된다. 요컨대, 지식은 이전에 주인이 차지했던 담론의 행위자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주인은 지식으로 승격elevated되었으며, 이는 역사 이래 가장 절대적인 주인 the most absolute masters을 실현하게 하였다.”
한편, “노예의 해방”은 단지 그들을 잉여향락 — 즉, 비-향락의 향락 enjoyment of non-enjoyment — 에 묶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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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자본주의 담론의 등장, 공고화, 그리고 기능에 대한 잠정적 서술은, 정치경제학적 고찰(Marx 및 Althusser와의 대화를 통해서), 인식론적 언급(현대 및 현대 과학·기술의 승리와 관련하여), 임상적 관찰(현대 문명의 신경증-도착증적 불만과 관련하여), 그리고 대학이라는 장치 apparatus로 구현된 관료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 사이에서 진동한다.
정신분석이 “지식 없는 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단일체 One로 수렴되지 않는 지식” — 즉, 비-일관성의 진리가 “어떻게 지식을 생성하는가”를 아는 지식 — 로 자기 구성self-constitution을 목표로 한다는 주장에 따라, 그의 논증은 기꺼이 개방적 제안의 형태로 남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명확하고 야심찬 반복적 주제를 몇 가지 분리하여 식별할 수 있다.
a) 갈릴레이-뉴턴적 패러다임의 등장 이후, 노예의 지식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한 과학의 진화는 전통적 권력 형식에 점점 더 큰 “문제”를 제기해 왔다. 권력은 점점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되는데, “긍정적 권력”은 “다른 곳”에 존재하며, 즉 구조적으로 권력과 분리된 과학의 지식 속에 위치한다.
b) 자본주의는 이러한 난제에 대한 답을 제공하려 시도한다. 한편, 마르크스가 정확히 인지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실질적 경제적 새로움은 보편적 “노동 시장”의 창출에 있다; 잉여가치surplus value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오직 이 노동시장을 기반으로 할 때이다. 다른 한편, 동일한 시장은 또한 “지식 시장”으로 기능하며, 그렇지 않으면 통제 불가능한 과학이 지식의 가치를 통해 인식론적으로 “통합”하게 된다. 이는 주인-자본가 master-capitalist로 하여금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자유주의적” 권력은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무정부적”이거나 “자기 내부에서 분열”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권력이 지식-권력 savoir-pouvoir 속에서 과학의 기능과 불가분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c) 지식의 “균질화 homogenization” — 즉 지식의 가치를 통한 균질화 — 는 향락의 “질서”, 즉 지식-향락savoir-jouissance으로 이어진다. 노예의 노동 또는 기술이,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로 대체됨으로써 — 이는 그를 “대지의 저주받은 자damned of the earth”로 만든다 — 노예의 향락, 즉 코제브 Kojève의 해석에 따른, 자신의 노동 산물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에서 오는 향락이, 노동자의 잉여향락에 대한 비(非)-향락으로 축소된다. 이처럼 노동과 향락이 점점 더 분리됨에 따라, 노동자의 “나(주체, I)”는 점점 더 좌절로 특징지어진다. 지식은 더 이상 주로 노동에 묶여 있지 않으며, 오히려 지식의 가격에 연관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향락 포기의 가격”이다.
d) 잉여향락의 이 보편화 — 즉 자신이 갖지 못한 향락을 다른 누군가가 누리고 있다고 가정하는 형태 — 은 자본가 자신에게도 특히 영향을 미친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잉여향락의 논리가 처음부터 주인을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주체subject를 향락과 연관시키는 방식이기도 한데, 이 향락은 "순수성의 가장자리edge of its purity”에서 취해진 것으로 간주된다.
노동으로부터 향락의 제거는 사실 향락의 결여를 드러내거나 명시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가지지만, 동시에 향락을 “무한점”으로 투사 projects enjoyment as an “infinite point” 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명의 “불만”의 지점(구멍 point/hole)이며, 대타자/자본을 위한 잉여향락의 끝없는 축적, 도착증 perversion과, 대타자/자본에 대한 잉여향락의 무력하게 적대적인 “희생” — 강박적 신경증 — 사이에서 나타나는 마비 현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e) 지식에 가치를 부여하고 상품화하는 장소 — 이로써 향락의 “질서”가 가능해진다 — 는 바로 대학이다. 대학은 자본주의의 특정 기관인 “모교 Alma Mater”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담론의 관료적 배치를 유지하는 보다 일반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의미 모두에서 대학은 지식을 대타자의 잉여향락으로 관리한다.
지식이 전체성으로 구성되어 그 자체로 만족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치 자체에 내재”되어 있으며, 고대의 에피스테메 eisteme와 주인-노예 변증법에도 명확히 적용된다. 그러나 대학의 “문제적”이고 위험한 특수성은, 지식을 담론의 “지배적” 위치에 설치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전체-지식 all-knowledge [tout-savoir]”으로서의 권력, 즉 관료제는 분명히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대타자의 비-일관적인 진리를 “더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는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주인이 분열된 주체로서만 존재하던 상황과 대조된다.
전체-지식은 통치의 구조적 불가능성 — 내재된 교착 — 을 억압하거나 오히려 부인 disavows하며, 동시에 이러한 통치를 “불가능성 속에서 더욱 난공불락”으로 만든다. 따라서 권력은 무정부적으로 더욱 강력해진다. 특히, 관료제가 도착적으로 “계산”하고, “셈 counting”하며 궁극적으로 대타자를 위한 잉여향락을 축적할 때, 관료제는 성공적으로 “잉여향락의 유사물 a semblance of surplus enjoyment을 수행하며, [이로 인해] 상당한 군중을 끌어모은다”.
루카치 Lukács는 카프카의 모더니즘을 “부르주아적”이며 근본적으로 니힐리스트적 nihilistic이며, 또 그의 진정한 주제가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악마적 성격에 직면한 인간의 무력함”이라고 단정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주장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의 작품이 관료제적, 즉 문자 그대로 공적, 사무적 offices의 권력을 냉혹하게 보고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카프카의 소설들 — 특히 『성(城)』— 은 현대적 “인간 조건”을 전달하는 “정보국information bureau”으로 기능한다. 『성(城)』에서, 클람과 같은 실제적 주인 “Chief Executive”은 도달할 수 없으며, 방해되어서도 안 된다. 한편, 성의 주인 중 주인 master of masters은 단지 이름에 불과하며, 흥미롭게도 “웨스트웨스트 백작 Count Westwest ”으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학교 교사는 측량사 K가 “순진한 어린이들” 앞에서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는 백작에 대해 본질적으로 부패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취급된다. 동시에, 하숙집 주인은 그에 대해 “질문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마을 사람조차 백작의 초상화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게 누구죠?’ K.가 물었다. ‘백작인가요?’ 그는 초상화 앞에 서 있었다 […] ‘아니에요,’ 하숙집 주인이 말했다, ‘저건 성 관리인입니다.’”
『성(城)』에서 구체적 권력은 명백히 관리인wardens, 부관리인deputy-wardens, 서기clerks, 변호사, 비서secretaries, 특별비서special secretaries, 조수비서assistant secretaries에게 속한다. 측량사 K가 도전적으로 면장 village mayor에게 “성에 대해 아는 것이 사무실뿐이냐”고 묻자, 면장은 단호하고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이 답한다:
“예 […] 그것이 바로 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관료들 자체도 서로에게 “하인처럼 잘 지내길”이라고 인사한다. 어느 시점에서 올가Olga는 자연스럽게 결론짓는다:
“하인이 성에서 진정한 주인real masters입니다.”
게다가 『성(城)』에서, 한 하인이 다른 하인에게 행사하는 통제, 지배의 연쇄 chain of command 가 다시 제3의 하인에 의해 통제되고, 이러한 구조가 주인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전체-지식으로 추정되는 사슬로서 주목된다. 측량사 K의 사건을 고려할 때, 면장은 그의 아내 미치Mizzi의 “탁월한 기억"에 의존하고, 다시 관료 소르디니 Sordini — “성실성으로 잘 알려진” — 에게 보고한다.
다만 소르디니의 사무실은 “위에 쌓인 거대한 서류 묶음이 바닥으로 쏟아지는” 소리로 특징지어진다. 면장은 측량사 K에게 명확히 설명한다. 성 행정적 관리 administration에는 한 가지 기본적인 “작동 원리”가 존재한다:
“권한들은 실수가 발생할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올가가 덧붙이듯, “매우 의심스러운 관료들”의 경우에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들의 권력과 지식이 얼마나 대단한가”이다. 결국, 실수가 “장기적으로 정말 실수인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최종 권한이 없는 “감독 기관 [Kontrollbehörden])”만 존재하고 — 즉, 담론의 지배적 위치에서 궁극적 주인 기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 관여된 사무실의 일관성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고 가정해야 한다. 비록 그러한 일관성이 명백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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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가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과 달리, 주인 클람은 “즉시 잊고” “많이 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클람은 모무스Momus이며, 클람의 권위 있는 비서이다. 결국 소문은 어느 정도 정확하다. 백작의 이름은 발설되지 않아야 한다 — 이는 그의 부재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모무스는 “클람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외지인 측량사 K가 지식의 일관성의 진실을 허망하게 탐구하며 성의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때조차 그렇다. 이러한 통치, 지배의 불가능성의 부인 disavowal은, 그 자체로 통치를 강화하고, 권력-지식을 지원하며 — 백작은 “클람”을 통해서만 불릴 수 있고, 모무스는 클람의 이름으로만 발언할 수 있다 — 성 자체의 지형학에도 반영된다. 성은 한편으로 편재적 omnipresent이면서 동시에 공백의 중심 missing center으로 작동하며, 아갈마적/매혹적 공백 agalmic/luring void으로 기능한다.
한편, 올가Olga는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우리는 모두 성에 속하며, 거리 distance는 전혀 없고, 벌어져 있는 다리 bridge도 없다.”
이러한 거리의 부재 는 그녀의 오빠 바르나바스Barnabas에 의해 확인된다. 바르나바스는 성에서 “심부름꾼의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직무는 불안정하다. 그는 “사무실의 장벽 barriers을 지나가는데, 이전에 지나가지 않은 장벽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보고하며, 따라서 “마지막 장벽 너머에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무실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동시에, 올가는 피할 수 없이 질문한다:
“바르나바스가 하는 일이 성을 위한 봉사service인가? 그는 확실히 사무실에 가지만, 과연 사무실이 성인가?”
결론적으로, 성의 장벽은 “서로 다른 분리의 경계선으로 상상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바르나바스는 “거기서 클람으로 묘사된 관료가 실제로 클람인지 의심스럽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모순 없이 “그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람의 일반적 이미지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 설명할 수 없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해당 관료를 묘사하지만, “그 묘사는 우리가 아는 클람의 묘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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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XVI』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Seminar IX』의 <굴> 논의와도 울림을 갖는 중요한 표현을 사용하면, 착취된 노동자/마을 사람들은 결국 “안-밖 dedans-dehors”으로서 전체-지식으로 추정되는 성 안에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그 잉여 향유의 오브제 a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형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인 자신이 대타자에 의해 “흡수”되어야 한다. 라캉에 따르면, 이는 바로 트로이 목마 신화에서 문제가 되는 핵심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트로이의 멸망 — 불가피한 사건 — 에서 카프카적 성 Kafkaesque Castle의 건설로 이어지는 과정과 관련된다. 『Seminar XVII』에서 라캉은 호메로스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트로이 목마의 “내부” 혹은 “속guts”이 “전체 지식 savoir-totalité의 환상”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트로이 목마는 트로이의 주인 Trojan masters이 외부에서 두드려야만 트로이를 점령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이 언급은 『Seminar XVI』의 강의와 함께 읽어야 한다. 해당 강의에서 라캉은 트로이 목마를 카프카적 성과 연관시키는 그의 복잡하고 암시적인 논지는 두 가지 계열의 고려사항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째, 트로이 목마는 대타자, 즉 기표들의 연쇄체 the battery of signifiers (S2)가 처음에는 “하나의 타자one Other”로 구성되며, 이는 “공 집합 empty set”의 형태(혹은 더 정확히는 “단일 존재가 아닌 대타자 속의 하나의 타자"로 구현됨을 상징한다.
둘째, 이러한 논리적 구성은 현상학적으로 주인으로 존재하는 것의 순수한 위신으로서 S1(주인 기표) 이 항상 이미 주인의 지식 있는 노예라는 이상적 이미지 속에서 중첩redoubling됨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즉, “노예는 주인의 이상이다 it is the slave who is the ideal of the master”, “주인은 자신이 가능한 한 완전히 노예화된 self as perfectly enslaved as possible” 상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대타자의 이미지는 라캉 초기 작업에서와 달리, 단순히 주체가 인식받고자 하거나 모순적으로 타자를 제거하려고 의도하면서 자신을 그 자리에 두고 싶은 거울적specular 완전성의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이 이미지는 특히 노예의 알 수 없는 욕망을 아갈마적 공백, 즉 다시 말해 공 집합으로 제한하며, 이는 주인의 지식 욕망과 성 구축을 촉발한다.
“이 매혹 lure을 통해, 그리고 1의 과정[주인 기표 S1]이 스스로를 1에 동일시하는 이 과정[procédé]을 통해” — 즉, 자신을 오브제 a의 1로서 0에 동일시하는 것 — “지배의 게임에서 트로이 목마는 항상 더 많은 것을 그 내부에 흡수하며, 그것은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든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불만 discontent of civilization이다.”
다시 말해, 오브제 a가 환상 속 주체의 무의식적 동일시의 초석으로 등장하는 순간, “전체 메커니즘이 그곳에서 작동하며”, “과정” — 즉 카프카적 절차 Kafkaesque Prozess — 은 끝날 때까지 중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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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은 무질서하게 강력하며 모든 지식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성의 절차 process/Prozess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Seminar XVI』에서 라캉은 정신분석을 공개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한다.
첫째, 정신분석은 인식론으로서, 그 주된 과제는 전체-지식과 ‘알고 있다고 가정되는 주체’를 대비시키는 것이다. 보편 담론, 즉 메타언어나 절대적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담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신분석은, 담론의 결여과 아갈마적 공백으로 제한된 대타자의 비-일관성이 의미 작용을 촉발하고 유지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타자의 장은 “진리가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한에서의 진리의 장”과 동일시된다.
둘째, 지식의 생산적 난관에 주목함으로써, 정신분석은 또한 실재계의 윤리 ethics of the real로 기능한다. 실재적이고 반드시 가정되어야 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은 공식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주체의 욕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알고자 하지 않는 욕망으로 발생하며, 구조적으로 지식-향락savoir-jouissance로서의 잉여향락은 재투자나 축적이 아니라, 순환circulation, 소비 [dépense]) 및 공유sharing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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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XVI』은 그 정치적 함의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며, 이는 아마 『Seminar XVII』보다도 두드러진다. 한편으로, 68년 5월 혁명 시기의 사실들은 라캉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와 혁명을, 우리의 정치적 세계에서 전체-지식의 헤게모니의 두 상충하는 측면으로 연결하도록 한다. 혁명에 대한 강조는 잉여향락으로서의 향유의 ‘질서화’가 야기하는 좌절에서 비롯된다. 이는 분명히 문명의 현재적으로 일반화된 불만을 지시하는 증상적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과학을 억제하기 위해 혁명과 전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아직 충분히 인식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라캉은 어떤 목적론적 “진보”의 개념도 부정하면서, 정신분석이 과학의 ‘제한’을 옹호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될 경우 정신분석은 자동적으로 ‘반동적’이 된다고 명확히 한다. 이는 결코 주인 담론과 같은 오래된 권력 구조로 되돌아가는 문제가 아니며, 왜냐하면 해당 담론은 이미 지식을 위해 스스로를 항상적으로 잠식해 왔기 때문이다.
만약 혁명이 “자본주의 체제와의 엄격하고 순환적인 연대”를 보여준다면, 정신분석은 반드시 “이 순환이 열릴 수 있는 접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 접점은 필연적으로 지식과 관련된다:
“[자본주의적] 게임을 거부하는 것은, 문제가 지식과 주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때만 의미를 가진다.”
즉, ‘새로움’은 지식의 기능 자체를 전복 subversion할 때만 발생할 수 있으며, 여기서 지식은 지식을 관리하는 방식으로서, “‘지식’이라 불리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가 그 ‘보편적’·‘단일적 질서’에서 차감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당분간, **임시적 “해결책”**은 우리가 “지식의 행렬에 들어가 procession of knowledge”, 즉 관료제를 세심히 검토하되, 그 속에서 [우리의] 맥락을 잃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한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을, 현재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가 대학과 그 관료제에 종속되는 “교육하는-학습하는“educator-educated””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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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6월 25일, 라캉은『Seminar XVI』을 마무리하며, 에콜 노르말 École normale에서 더 이상 자신의 세미나를 개최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공문을 청중에게 낭독하며 종료한다. 이는 이전에 프랑스 파리-고등 연구원 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 제6과 요청으로 부여된 양보를 뒤집는 조치로, Dussane 강의실을 비워야 했다. 다른 강의실은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식적으로 “학교 재편reorganization of the École”, “대학 일반 개혁General Reform of Universities”, “교과 과정 개발development of teachings”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라캉은 이 공문을 341부 복사하고, 날짜만 기입하고 서명은 하지 않으며,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한 부씩 전달한다. 그는 이를 설명하며 말한다:
“이것은 졸업장 diploma이다 […] 상징이다 […] S1이다 […] 언젠가 이 문서를 가진 사람들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신분석의 기능에 관한 비밀 강연이 이루어지는 특정 강의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르몽드Le Monde 지면에서 장기간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1969년 6월 26일, 신문은 에콜 노르말 관리부서가 라캉의 강의를 종료했다고 보도하며, 그 이유를 “평범하게 구성된 인간 존재들에게는 세속적이고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다음 날, 학장은 해당 기사를 부인하면서도, 라캉 학생들의 “약탈depredations과 여러 차례 절도thefts”를 문제 삼는다. 라캉은 7월 5일 이에 대응한다. 그는 학장이 관리부서가 말한 내용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문서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내용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defamatory] 텍스트의) 공개에 해당한다고 명확히 한다. 또한, 르몽드가 두 번째 공문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이러한 논쟁은 1969년 11월까지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