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 : 마시모 레칼카티

by 낭만소년


아버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아들이다.

-마시모 레칼카티




스크린샷_11-10-2025_82848_teatrofrancoparenti.it.jpeg



마시모 레칼카티 Massimo Recalcati의『The telemachus complex : parents and children after the decline of the father』(Polity Press, 2019)의 2장 '세대들 사이의 혼란 The Confusion Between Generations'를 번역하여 올린다. 「아들들 : 오이디푸스, 나르키소스, 텔레마코스」



텔레마코스 콤플렉스(영역), 2019


























그에 대한 약력을 소개한다. 그는 1959년생으로 1985년 밀라노 대학(Università degli Studi di Milano)에서 철학(사르트르와 프로이트의 비교 가설), 1989년에 심리학(완결가능한 분석과 비완결 분석: 전이에 대한 노트)을 전공하고, 이후 밀라노와 파리에서 심리/정신분석 훈련을 수행했다.


현재 그는 식이장애(anoressia-bulimia), 중독(addiction), 공황(panic), 우울(depression) 등 현대의 병리적 주제들에 관한 임상 심리, 정신분석 분야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래는 그가 운영중인 홈페이지이다. www.massimorecalcati.it


스크린샷_11-10-2025_8391_www.massimorecalcati.it.jpeg



그의 저작 활동은 라캉의 정신분석을 이론적 토대로 삼는다.


자크 라캉, 2024


lacan-dittico-1.jpg 라캉 : 욕망, 향유, 주체화, 2012


lacan-dittico-2.jpg 정신분석 임상: 구조와 주체, 2016



한편, 라캉 이론을 적용하여 현대 사회 문화를 분석한다.『The telemachus complex』가 대표적으로, 욕망, 향락 jouissance, 상징계 symbolic order 개념들을 활용하여 아버지 부재 시대에 아버지의 역할, 가족관계, 현대 가족 변화에 따른 상징계의 위기와 주체의 빈곤을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탐구 분야는 임상 및 정신분석을 넘어서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윤리적 탐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겟세마네의 밤(영역), 2020



욥의 외침, 2021


아울러 문화 및 예술 분야 등 그의 시야는 전방위적이다.


파졸리니 : 기원의 유령, 2022



최후의 만찬, 2024



우리나라의 경우 그의 저작은 『Il complesso di Telemaco』(2013)의 이탈리아 원본을 저본으로 하여『버려진 아들의 심리학』(책세상, 2016)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아쉽게도 절판 상태에 있다.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로_ 윤병언 역_책세상_2016.jpg





나는 요즘 심리의 문제가 상담실 안에서 개별적인 상담과 생화학적 약물 처방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마시모 레칼카티의 말처럼 아버지 부재의 시대에 과거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길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출발한다.


절판본의 복간뿐만 아니라, 그의 다양한 저작이 소개되어 우리 독자를 만나기를 기대해본다.




「세대들 사이의 혼란 The Confusion Between Generations」



<부모의 과제>


프로이트는 부모의 과제가 불가능한 것impossible one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덧붙여, 그것이 통치governing나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부모의 역할이 어떤 이상적 모델에 근거해 수행될 수 없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부모는 오직 자신의 결핍inadequacy을 출발점으로 삼아 자녀를 교육해야 하며, 오류와 실패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부모란, 자녀에게 모범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과제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존재로서 자신을 내보이는 사람들이다. 이는 부모라는 위치에 놓인 이들의 불안을 덜어주는 희망적인 소식이다.


정신분석적 치료는 이러한 진리를 가차 없이 확인시켜준다. 최악의 부모―즉, 자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부모―는 단지 교육적 책임을 회피하거나 방기하는 이들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 곧 자녀에게 ‘말의 법’Law of the word에 복종하라고 요구하면서도 자신은 그 법에 복종하기보다 그 법 자체를 구현한다고 오만하게 믿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지식과 권력을 동일시하는 교육받은 부모들로, 자신의 지식을 권력처럼 사용하고, 반대로 권력을 지식처럼 행사한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해석해준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녀의 삶을 자신의 소유물 proprietors 로 여긴다. 또한 그들은 ‘말의 법’을 환영하고 그 수호자 custodians가 되기보다는, 모든 것에 대해 최종적인 말을 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늘 자처하는 이들이다.


이것이 ‘교육자로서의 부모parent-as-educator’ 형상을 괴롭히는 가장 심각한 일탈aberration이다. 특히 아버지의 경우에서 그렇다. 여기서 아버지는 더 이상 (그가 그래야 하듯이) ‘말을 건네고, 말을 전달할 줄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자신만의 배타적 권리로 강요할 수 있다고 믿는 자, 마치 언어가 절대적 권력이라도 되는 듯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자로서의 부모’의 형상만이 부모의 과제가 지닌 불가능성을 무효화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오늘날 지배적인 것은 오히려 그것의 거울 이미지 mirror image, 즉 ‘아이로서의 부모parent-as-child의 형상이다.


이러한 부모들은 자신의 역할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자녀를 방치하거나, 혹은 자신을 모범적 교육자로 내세우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와 지나치게 가깝고, 지나치게 유사similar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최악의 부모는 더 이상 구원적 사명redemptive mission으로 교육의 임무를 수행한다고 믿는 전문 교육자로서 부모가 아니라, 자녀의 젊음 youth of their children을 대칭적으로 동화(同化)하는symmetrically assimilate 부모다.


‘나르키소스Narcissus로서의 아이’는 아이로서의 부모 안에 반영되어 나타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세대 간의 상징적 차이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근본적인 혼동confusion이 차지한다. 파졸리니Pasolini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최근의 ‘인류학적 돌연변이 anthropological mutation’로, 자신의 교육적 책임 앞에서 증발vanished해버린 성인의 소멸을 의미한다.


오늘날 부모의 불가능한 과제는 새로운 불안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부모 권위의 기능에 내재한 상징적 위기의 시대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나 부모가 위기에 처했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말의 법이 더 이상 그 상징적 토대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의 시대가 ‘아버지의 부재(증발 evaporation)’의 시대라면,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증하던 ‘말의 법의 부재(증발)'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부재(증발)의 징후들은 누구에게나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것들은 단지 정신분석가의 진료실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불안에 시달리는 부모, 방향을 잃은 아이들, 혼란에 빠진 가족들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몸체entire social body를 관통한다. 제도를 존중하도록 만드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 공적 도덕의 붕괴, 교육적 담론의 퇴색, 공동체적 삶의 감각의 상실, 창조적 사회적 유대 형성의 불가능, 욕망과 분리된 치명적인 향락deadly enjoyment 의 승리 등이 그 징후들이다.


이 모든 현상의 중심에는 법전과 법서에 기록된 법률의 문화적 약화가 아니라, 바로 ‘말의 법’ 자체의 의미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정신분석이 가르치듯, 그리고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말의 법’의 근본적 특징은 인간의 삶을 결핍과 한계의 감각, 그리고 자족 불가능성 impossibility of self-sufficiency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지탱하는 데 있다.


오늘날 ‘말의 법’의 문화적 약화는 단순히 혼란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법적 텍스트에 대한 강박적 호소라는 증상을 만들어낸다. 즉, 법관과 법원, 그리고 법전에 의해 규정된 규범에 대한 반복적인 호소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오늘날의 또 다른 특징이다. 법의 상징적 의미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할 때마다, 법은 끊임없이 호출된다. 말의 상징적 법의 덧없음evanescence은 법에 대한 지속 불가능한 의존을 증가시킨다.


정신분석적 실천은 이러한 현상, 즉 ‘말의 법’에 대한 주체의 불충분한 기입inscription을 보충하기 위해 끊임없이 ‘법전의 법Law of the Code’의 개입을 요구하는 경향을 ‘퀘룰로마니(소송 강박적 querulomania)’라고 부른다. 이는 법을 실제적이면서도 박해적인 persecutory 방식으로 사용하는 증상을 가리킨다. 실제로 그것은 상징적 ‘말의 법’이 폐제foreclosure되어 남은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법은 처벌을 위협하지 않으며, 복수의 형태가 아니고, 원한을 품지도 않는다. 『오디세이아』에서 텔레마코스Telemachus조차 법을 호명하려 하며, ‘텔레마키아Telemachy’ 서두에서 우리가 보듯, 여신의 조언을 따라 그는 민회를 소집하여 프로키들Proci의 오만을 ‘말의 법’ 앞에 두도록 하지만, 그의 호명은 결코 퀘룰로마니적이지 않다.


퀘룰로마니아는 편집증의 ‘법률주의적' 변형으로, 정의의 법Law of Right에 대한 호소가 ‘말의 법’에 대한 호소와 대립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법을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행위일 뿐이다. 반면 텔레마코스는 세대 간의 상징적 차이를 존중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죽음과 같은 공격성을 제거하기 위해 '말의 법'을 기다린다.


오디세우스는 바로 이 '말의 법', 즉 환대의 법Law of hospitality을 존중하지 않는 자식들을 처단하기 위해 돌아온다. 다음 장들에서 나는 텔레마코스 콤플렉스Telemachus complex가 현대 청년 세대의 초현대적 불만hypermodern discontent을 이해 가능한 핵심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퀘룰로마니아적 주체가 법을 개인 맞춤형ad personam으로 만들고자 하는 반면,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품은 기대는 폴리스 안에서 정의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이다. 그는 삶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방하기 위해 법에 호소한다.


세대 간 혼란의 이 시기에, 말의 법에 대한 존중을 길러내기 어려워하는 부모들의 어려움을 보상하듯, 법적 법에 대한 호소가 퀘룰로마니아적 호소로 전개되는 현재의 양상이 나타난다. 법전의 법을 반복적으로 호출하는 강박적 행위는, 성인이 법의 상징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드러낸다. 상징적 타자 the symbolic Other 의 무활동성 inactivity은, 법정이라는 대타자the Other를 과잉 활성화된 방식으로 소환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현상이 현대 가정에서 나타난다. 성인에게 학대받는 아동의 사건을 다루는 법원, 부부 간 다툼을 돕는 법원이 존재하며, 가족 중재 제도는 갈등이 악화될 위험을 조정하기 위해 필수적인 장치가 되었다. 더욱 역설적인 상황은, 가정 안에서 종종 아이들이 법을 부과하고 동시에 법으로서 행위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드러난다.


아이들은 규칙에 복종하기보다, 오히려 규칙을 직접 지시하고 강요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거대한 인류학적 돌연변이anthropological mutation를 목격한다. 이제 더 이상 아이가 가족 생활을 규율하는 상징적 규범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아이의 변덕에 의해 설정된 법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판결의 개입을 요청하는 행위는 이러한 상징적 역할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다. 이는 초현대적 역설 hypermodern paradox이다. 자녀에게 말의 법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점점 어려움을 겪는 부모가, 자신들의 자녀에 대한 주권 ownership을 회복하기 위해 판결의 법Law of the judge 을 호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폭력과 학대, 병리적 장애disorder는 언제나 인간 관계를 특징지워왔으며, 이는 가족 내 관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갈등은 삶의 일부다. 말의 법은 인간 관계의 혹독한 본성을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그것들을 담론 안에 포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왜 가장 친밀한 정서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장애 를 신호체계적으로semaphorically 조정할 수 있는 제3자의 개입 intervention of a third party이 점점 더 필요하게 되었는가? 오늘날 가족 문제가 판결 앞에 놓이거나, 제3자를 통한 중재가 필요한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제3자the Third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 모든 것이 서로 동등하게 보이고, 부모와 자녀의 혼란스러운 동일화 confusing identification로 인해 세대 간 차이가 사라진 듯한 시대에는, 자신의 이익이나 자녀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제3자가 호출되기 마련이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부당한 평가를 받아 유급되지 않게 된다면, 교사들과의 세대간 협약을 깨는 데에도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제3자의 모든 개입은, 마치 권력 남용이라도 되는 양, 의심과 불신 속에서 받아들여진다.


“왜 둘 다 싸우기만 하면서 헤어지지 않을까?”


아주 어린 환아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가 이 질문을 부모에게 감히 던졌을 때, 부모는 한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네가 우리 없이 어떻게 살겠니?”


마치 자신들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에 아이는 되물었다.


“내가 죽어야만 두 분이 마침내 서로 헤어지겠어요?”


이 어린 소년의 철벽 같은 논리는, 교육적 책임educational responsibilities을 떠맡았다는 사실로 인해 정당하게 고통받고 있는 부모에게 어떤 탈출구도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부모라는 존재가 때로 폭풍우 같은 부부의 운명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자녀가 부부 간 상호 비난의 끔찍한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음을 안다. 바로 이럴 때, 제3자의 긴급한 개입이 요구된다. 그러나 판사는 아이들의 편에서 개입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른들의 편에서 개입해야 하는가?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가 판사에게 점점 더 흔히 호소하는 이 현상은, 모든 교육적 행위에 수반되는 결정 책임을 감당할 힘이 어른들에게 결여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른들의 전반적 미성숙화를 시사하지 않는가? 이때 그 책임은 판사의 판결에 위임되고 있다.


그런데 말의 법이 실정법의 법전the Codes과 동일하지않다면, 제3자가 반드시 판사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제3자는 오히려 말의 법의 상징적 의미를 인정하고, 부모가 개인적 이익을 넘어 자녀를 돌보도록 요구하는 존재로 나타나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법의 상징적 의미는 실추되었거나, 실정법의 법전의 물질적 존재와 완전히 혼동되고 있다. 따라서 만연한 퀘룰로마니아는 권리의 법Law of Right 에 대한 끊임없는 호소 속에서, 성인 세계를 포섭하는 말의 법의 주체화 과정(주체에 의한 내면화 subjectivization)에 결함이 있음을 드러낸다.


법의 상징적 성격을 회복하려면, 부모는 자녀의 나르시스적 기대narcissistic expectations 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교육적 행위 에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 수반되는 분리의 운명destiny of separation 이 내포되어 있다. 자신의 자녀를 놓아줄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이는 부모가 말의 법을 대표하는 책임을 맡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 이삭의 희생 사건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무엇보다 자녀에 대한 소유권을 근본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녀를 ‘광야에 내어주는 법 how to give [them] up to the wilderness’을 아는 것이다.(매릴린 로빈슨 Marilynne Robinson, 『길리아드 Gilead』)


<법과 법전The Law and the laws>


공동체적 삶은 말의 법이 부과하는 상징적 매개를 통해 가능해진다. 인간의 삶은, 그 위에 끊임없고 고된 '번역'의 수행exercise in translation을 요구하는 언어를 통해 완성된다. 나는 오직 대타자를 거치는 매개를 통해서만 내가 될 수 있다. 이 대타자는 가족, 제도, 사회, 문화, 노동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오늘날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삶에 필수적인 이러한 제도적 매개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제도는 제3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권력 남용으로 인식된다.


제도의 상징적 기능과 반대 방향으로 강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람은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급의 위기에 처한 학생을 두고, 부모는 교사보다 자녀 편을 드는 경향이 있으며, 학교를 옮기거나 행정법원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교육적 입장을 취하는 것 자체가 권력이 자의적 방식으로 행사되는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인터넷은 자신이 저자라고 믿는 이들이 편집 심사를 거치지 않고 온라인으로 책을 출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친구 관계는 더 이상 필수적인 만남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사회 관계망에서 익명으로 형성된다. 필연적으로 답답할 수 있는 정치적 갈등 차원에서는, 폭력과 모욕, 계산된 명예훼손이 선호되는 선택지가 된다. 사람들의 삶을 괴롭히는 증상 또한 변화했다. 10년 전만 해도 고통의 중심은 사랑의 시련과 사회적 유대의 양도 불가능한 중요성에 있는 듯 보였다. 반면에 오늘날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유대의 단절이 아니라,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유대이다. 이로 인해 거식증, 우울증, 공황장애, 약물중독 등 각자 자신의 페티시적 기호fetishistic sign를 중심으로 모인 단일 증상monon-symptomatic 집단이 형성된다.


가장 충격적인 예는 청년층에서 나타난다. 수백만 명의 청년들이 이른바 문명화된 세계에서 자발적 수감자로 살아가며, 방 안에 갇힌 채 모든 세계적 관계를 끊고, 삶에서 물러나 학교와 일을 포기한다. 이 익명적 다수는 말의 법이 요구하는 번역의 어려움을 감내하기 보다, 나르시스적 자폐적 철회 autistic withdrawal를 선호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시대적 징후다.


제3자는 점점 침입자 intruder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대타자의 상징적 매개 없이는 구성될 수 없다. 밤중에 울고 있는 불안에 휩싸인 아이의 울음은 우리에게 응답할 것, 존재할 것을 요구하며, 우리는 그 삶을 포용해야 할 무한한 책임을 부여받는다. 스스로 만들어진 존재, 스스로 정의를 수행하는 존재라는 신화는, 최소한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파시스트적 신화fascist myth다. 누구도 자신의 기원을 스스로 장악할 수 없으며, 세상의 구원자가 될 수도 없다. 인간 공동체는 제도와 상징적 매개, 그리고 번역이라는 인내의 작업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상징적 매개의 쇠퇴는 단순히 현대성의 위대한 이상이라는 계몽의 빛을 잃고, 세계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가톨릭,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와 그 규율적 제도(교회, 국가, 군대 등)가 제시한 명확한 경로 밖에서 나침반 없이 헤매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쇠퇴는 파솔리니가 말하듯, 삶의 진정한 인류학적 돌연변이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은 개인이 가장 냉소적이고 나르시스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시대이며, 상징적 매개의 제도적 차원을 근본적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공동체적 삶을 보장해야 할 모든 제도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좋게 보아도 짐덩이, 오래된 짐으로서 개인의 자기 확립 의지를 억제하며, 나쁘게 보면 낭비와 외설적 부패의 장이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라캉이 선언했듯, 제도의 과제는 개인의 향락enjoyment에 브레이크를 걸어, 사회적 계약과 공동체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경제 위기의 폭력은 공적 삶 을 표방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정당한 불신을 낳았으며, 시민이 직접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제도는 경고, 예방, 통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정치가 그 완벽한 예를 보여준다. 개인적 차이를 폴리스의 선이라는 상징 아래 공적으로 통합할 수 있어야 할 위치, 즉 상징적 번역 symbolic translation 의 가장 중요한 장소가, 개인적 이익의 어리석은 주장들로 인해 타락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념의 무게에서 해방된 정치적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훔치는 악당으로 축소되었다.



1968년, 학생들이 제도에 대한 반란levelled 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라캉을 비판했을 때, 라캉의 답변은 언어가 부과하는 매개의 밖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말하는 존재talking-beings의 운명은 번역이며, 대타자의 언어 에 던져지고 노출되는 것이다. 1968년에 라캉은 학생들의 혁명적 열정을 실망시키며, 제도적 언어 장을 단절함으로써 추진되었던 저항revolt은, 스스로 벗어나고자 한 폭력과 동일한 폭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혁명은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며, 새로운 지배자를 데려온다.


역사는, 그리고 보다 겸손하게는 정신분석의 실천은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왔다. 아버지들에 대한 분노, 전수된 모든 것에 대한 전면적 거부, 우리의 상속자로서 지위 부정은 언제나 불모의 항의 futile protest 를 발생시킬 위험이 있으며, 이는 금과 진흙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고,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버리게 하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벗어나고자 했던 아버지에게 영원히 묶이게 만들고, 그의 괴물 같고 권위적인 얼굴을 다시 드러낸다.



<변질 Adulterations>



부모들마저도 마치 자녀들이 매일 매일 자신을 잃는 동일한 바다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보인다. 오늘날 최전선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세대 간 차이가 아니라, 세대 간 혼란confusion between generations이다. 불가능의 현실적 경험 을 거부하고 영원한 젊음을 꿈꾸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주체적 책임이 제로로 축소되는 현상은 우리 시대의 상징적 암호라 할 수 있다.


미국 코미디 영화 《Young Adult》(2011)(제이슨 라이트먼 감독)는 제목만으로도, 성인 세계를 덮친 이 이상한 열병의 온도를 가늠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죽음은 재생regeneration의 신기루로 찬양된다. 성인의 변질은 고집스러운 미성숙stubborn immaturity으로의 퇴행, 지나간 시간을 (불가능하게) 되찾으려는 시도, 그리고 그들의 역할이 요구하는 무한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로 구성된다. 이 영화는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혼한 전 작가가 시간의 되돌릴 수 없음을 한 번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연인을 되찾기 위해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연인은 그동안 결혼했고, 아이를 두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만약 성인이 자신의 행동과 말이 초래하는 결과를 받아들이려는 존재라면(이는 사전적 정의를 넘어 내가 제안하고 싶은 성인의 정의다), 오늘날 사회에서 그들의 존재감이 현저히 감소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도적 역할을 부여받고도 집단적 이익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우리를 지배하며 집단적 상상력을 형성하고, 자유로운 향락을 모델로 제공하며, 거세로부터 해방되고 말의 법(상징 질서)의 부담 없이 살아가는 '영원한 소년puer aeternus'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또한 셰티노 선장(Captain Schettino,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사고 관련 인물. 안전보다 자신의 권력과 능력 과시에 집착하여 수천 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위험에 빠뜨린 사례)를 생각해 보라. 그는 자신의 무모한 남근적 힘phallic potency을 과시하기 위해, 마치 비디오 게임을 하는 듯 수천 명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혹은 서로의 교육적 역할을 지지하기보다는 즉시 이를 포기하는 부모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자녀가 교사에게 제시한 모순된 이유를 변호하거나, 삶이 보여주는 첫 번째 어려움의 조짐에서 곧바로 방어 태세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오늘날 성인들은 자녀들과 같은 바다에서 길을 잃은 듯하며, 세대 간 구별이 없다. 그들은 다양한 사회관계망에서 쉽게 친구를 사귀고, 자녀처럼 옷을 입고, 자녀의 게임을 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동일한 이상을 공유한다. 이러한 성인의 새로운 초상은 영원한 청춘의 신화, 피터 팬의 불멸 신화, 모든 책임에서 해방된 무책임한 행복을 제안하는 미성숙성의 숭배cult of immaturity의 수사를 찬양한다.


이는 우리 시대의 상징적 암호다. 한 이혼 가정의 딸은 나에게 절망적으로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내 친구들만 쫓아다니고, 그다음에는 나에게 그 일에 대해 얘기해도 되냐고 묻는다!”


요컨대, 오늘날 진정한 bamboccioni(성장하지 않은 젊은이)는 자녀가 아니라 성인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셰티노 선장Captain Schettino과 그레고리오 데 팔코Captain Gregorio De Falco의 대화는 하나의 실제적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는 단순히 긴장과 위험이 높은 상황에서 두 남자 간의 극적인 충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성인 세대 내의 분열split을 드러낸다. 즉, 자신의 행동이 초래하는 무한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려는 성인과, 마치 인생을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처럼 계속 즐기고 싶은 성인 사이의 분열이다. 물론 사례는 많지만, 모두 한 가지 사실로 수렴된다. 즉, 새로운 세대의 고립solitude—이는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리는 텔레마코스의 위치를 정의한다—은 성인들이 그들의 교육적 역할이 요구하는 무한한 책임을 떠맡는 데 보여주는 어려움에서 비롯된다.


<위반Transgression 인가, 법에의 호소인가?>


욕망과 법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도덕주의적·고전적 오이디푸스 모델이 존재한다. 이 모델은 법과 그 위반을 짝지으며, 한쪽에는 욕망과 그 다형적·전도적 충동 perverse and polymorphic urge, 다른 한쪽에는 법의 도덕적이며 엄격하게 억압적인 권위를 둔다. 이는 욕망과의 적대적 관계를 중심에 두는 법의 한 버전이다.


나는 여기에, 이 모델이 제공하는 법은 환상적phantasmatic이고 신경증적neurotic 버전에 불과하다고 덧붙이고자 한다. 이 모델에서, 법은 경계를 설정하고, 욕망이 위반하려는 한계를 정의함으로써, 위반의 가능성을 성립시킨다. 이런 경우, 법 자체가 죄를 짓는다고 말한 사도 바울의 유명한 공식과 라캉이 여러 차례 반복한 바 있는 말을 통해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법과 욕망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 오이디푸스 모델을 갱신해야 할 의무에 직면해 있다.


한 50대 환자는, 어린 시절 구입할 수 없는 책을 몰래 도서관에서 빼내던 순간 느꼈던 전율을 이야기했다. 반복적 충동으로 도둑질을 행하는 가운데, 중심에 있었던 것은 책이라는 대상object이 아니라, 주체subject가 법과 맺는 관계와 도둑질이라는 위반 행위가 동반하는 ‘이상한’ 흥분이었다. 이 흥분은 경계를 넘었다는 신호였으며, 법을 회피했다는 감각을 일으켰다. 이런 경우, 위반은 반드시 법의 존재와 그 견고한 실재를 전제한다. 법이 없었다면, 위반의 의미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흥분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젊은 폭식증 환자는 자신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려는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을 이야기했다. 이는 때때로 기억 상실amnesia을 동반하여 자신이 무엇을 훔쳤는지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진정한 도벽kleptomaniacal 충동으로, 그녀는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 도둑질은, 앞서 50대 환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훔친 대상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 그녀는 이를 무심하게 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경우, 도둑질은 위반이나 법 회피의 스릴을 반복하기 위해 행해지지 않는다. 즉, 이 도둑질은 법과 관련되지 않는다. 이 행동의 불법성은, 가장 욕망되는 대상이 가장 엄격히 금지되는 오이디푸스적 위반의 역학을 뒤집는 이유에 대응한다. 여기서 대상은 거세의 법 Law of castration의 상징적 금지symbolic prohibition에 종속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젊은 환자의 도벽에서 어떤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그녀는 법을 넘어서는 행위를 반복하며, 단지 보이기 위해, 인식되기 위해, 법의 대타자를 존재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한다. 이 행위는 법을 속이거나 그 시선 gaze을 회피해 도착적 쾌감을 얻기 위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법에 몸a body(구체적 실존)을 부여하기 위해 반복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가? 나를 잃지 않도록 도와줄 법이 있는가? 나를 제지하고, 치명적 향락(deadly enjoyment, jouissance mortifère)에 제한을 부여할 수 있는 또 다른 타인 another Other이 존재하는가?”


이 소녀의 절망적 도벽은, 진정으로 강탈당한 주체는 자기 자신임을 보여준다. 그녀의 삶 내내, 부모는 자신의 감정적 관계를 돌보느라 그녀에게 ‘아니No!’라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이 ‘No!’는 바로 말의 법으로서의 상징적 금지, 인간적인 삶을 부여하는 선물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조차 진정으로 그녀와 관련된 말을 줄 수 없었고, 그녀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슬프게 반복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녀의 도둑질로의 행동 전환에는 위반의 즐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의 소환, 언어의 대타자 the Other of the word의 소환이 존재한다.


“왜 나를 버렸는가? 왜 나를 볼 수 없는가? 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이 젊은 여성은 단순히 법을 속이거나, 자신의 위반에서 오는 스릴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녀는 정반대의 행위를 하고 있다. 즉, 법에게 보이기 위해, 법에 의해 인식되기 위해, 법을 존재하게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어디에 법이 있는가, 아니면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답해줄 성인이라도 있는가?”


이 소녀의 요구는 많은 청년들이 내는 요구와 동일하다. 그리고 그 요구는 집요하게 우리의 등을 벽에 밀착시키는 방식으로 제기된다:


“당신들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성인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자신의 말과 행동의 무게를 책임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가?”


이 소녀의 도벽 속에서 우리는 현대 청년들의 불만의 암호를 찾을 수 있다. 그 중심에는 더 이상 세대 간 오이디푸스적 갈등이나, 법과 그 위반 사이의 갈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가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고립된 상황, 성인 세계와의 접촉을 찾으려 하지만 찾지 못하는 상태, 자신들만의 세계에 대한 프로젝트를 비교할 어른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상황이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위기와 우리의 집단적 물질적·정신적 빈곤의 실제적 위험은 이러한 상황을 확대하며, 문제를 더욱 결정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새로운 세대가 상속받을 세계를 어떤 상태로 남기고 있는가? 버려진 텔레마코스에 희망을 돌려주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젊은 됴벽 환자에게 존재를 보고 인정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법이 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가? 이것이 그녀를 고립과 방임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텔레마코스가 품는 희망의 근저에 놓인 것이 아닌가? 슈퍼마켓에서 훔치는 폭식증 소녀, 그녀의 이름은 텔레마코스와 다르지 않다. 누구도 그녀의 위반 행위에서 인정을 요구하는 상징적 요구의 집요함을 읽을 수 없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 실질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성인의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고, 버려지고, 거부당한다면, 새로운 세대가 인정받는 느낌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아이임을 느끼기도 어렵다. 누구의 아이인가? 어느 부모, 어느 성인에게 속하는가? 삶의 어떤 증언에 속하는가?


명확히 하기 위해 말하자면, 성인은 어떤 완벽성의 모델이나 규범적 이상을 구현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듯이, 가장 나쁜 사례 중에는 자신을 젊은 세대에게 이상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만약 부모가 자신의 불가능과 거세와의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녀에게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만약 성인이 자신의 행위에서 말의 법의 상징적 의미를 오인misrecognize한다면, 어떻게 자녀에게 그 의미를 신뢰성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심각한 거식증 소녀의 아버지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그는 종종 오후 한 나절, 벌거벗은 상태로 포르노를 시청하는 모습을 딸이 보게 내버려 두었다. 이 장면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아버지가 자신의 향락을 보여주는 데 어떤 장막screen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중요한 점은, 딸에게 해로운 것은 아버지의 향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향락이 어떠한 장치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딸은 거식증을 통해 거세의 법을 도입해야 하며, 아버지가 딸의 몸에 다른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이도록 강요받는다. 치료 측면에서 초기 개입은 아버지에게 말의 법을 존중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성인의 성적 향락이 자녀의 향락에 근친적incestuous으로 개입하지 않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분석가는 이를 통해 이 아버지가 보여주지 못한 법에 대한 존중을 재도입하려 했다. 분명히 처방적prescriptive으로 보이는 분석가의 개입(“딸 앞에서 벗거벗은 채로 포르노를 보지 마라!”)의 목적은 아버지 향유를 초월적 법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을 상징적 필터 없이 즐기는 몸 a body that enjoys 으로 제시한다면, 어떻게 딸이 학교에 전념하고 자신의 몸과 긍정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이 사례에서 거식증은 딸이 무의식적으로 포르노 영화 속 여성의 위치를 점유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시선에 마비된 채 무대 무용 공연 후에 발현되었다.


성인은 결코 소위 도덕적 삶의 이상이나 완벽한 삶의 이상을 대표하도록 요구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신의 말에 무게를 부여할 것,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먼저 감당하려 노력할 것이 요구된다.



<청년층의 새로운 불만 A New Discontent of Youth>



정신분석가들은 한때 청소년기의 위기를, 사춘기가 아이의 몸을 젊은 남녀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신체적 폭풍의 심리적 발현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일종의 봄의 각성spring awakening이었다. 즉, 더 이상 아이의 몸이 아닌 새로운 몸에 어떻게 거주하고 살아가며, 새롭게 나타난 욕구와 필요를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


오늘날, 진화적 흐름은 사춘기와 청소년기 사이의 거리를 점점 더 벌리고 있다. 사춘기의 시작은 점점 더 빨라져, 10~11세의 아이들이 실제 청소년처럼 행동하는 반면, 청소년기는 사춘기를 훨씬 넘어 지속되며, 끝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진화적 지연evolutionary lag은 청년층의 상태를 여러 면에서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더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청소년들은 정보, 지식, 감각, 만남의 기회가 넘쳐나는 세계에 내던져지며, 이는 그들의 정신 연령을 훨씬 초과한다. 반면, 다른 한편으로, 성인들은 그들의 교육적 여정에서 청소년을 방치한다.


어느 시대도 오늘날 우리 청년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개인적·집단적 자유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 얻은 자유는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과도 대응하지 않는다. 구세대는 교육적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우리 아이들을 치명적으로 훼손된 자유에 내맡겼다. 새로운 감각에 대한 지속적인 제공은 거의 삶의 전망이 결핍된 극적인 상황을 보완하는 듯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년층 새로운 불만의 중요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청소년들은 지속적인 자극 폭격constant bombardment of stimuli에 노출되어 그들의 자유가 무한대로 보인다. 반면, 성인들은 세대 차이에 의해 상징적으로 부과된 교육적 의무를 회피한다. 오늘날 이 의무의 기능은, 과거 전통의 대타자에 의해 보장되었던 교육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예전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주 반복하던, 우울하게도 잘 알려진 식물의 교육적 은유botanical metaphor를 기억한다.


“너희는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자기 자신 위로 말린 포도나무와 같다. 포도나무를 곧게 자라게 하려면, 말뚝과 철사를 묶어야 한다. 나는 너희에게 그 말뚝이자 철사가 될 것이다!”


1968년 이전 시기, 교육의 역할은 삶을 독특하게 만드는 비틀림twists, 변칙anomalies, 결함defects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끔찍하게 억압적인 은유는 더 이상 교육 담론을 안내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곧은 말뚝과 철사를 사용하여 삶의 비틀림을 바로잡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이제, 젊은 세대를 향한 어른들의 돌봄 부재로 바뀌었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모든 교육 담론의 붕괴이며, 과도한 쾌락주의적hyper-hedonistic 이데올로기는 이를 억압적이고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는, 원한다면, 푸코Foucault의 관점의 반대편이라 볼 수 있다: 즉, 통제하는 대타자가 약화되어 사라지면서 신세대를 법 없는 세계로 던져버린다. 물론, 성인이 자녀의 미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자녀를 돌보는 것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모들은 실제로 예민하게 걱정하지만, 이 걱정은 종종 자녀 교육에 아무런 지지를 제공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세대 간 상징적 혈통 관계의 계보의 과정에서 심각한 변형으로 특징지어진다. 한편으로, 일종의 역 오이디푸스reverse Oedipus처럼, 아버지는 자녀를 죽이고, 자리를 내주지 않으며, 물러나거나 위임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미래를 돌보지 않는다. 반면, 아버지는 아이로 남기를 멈추고 싶어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말에 따른 상징적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의 삶은 가려지지 않은 날 것의 지식unveiled knowledge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단지, 벌거벗은 아버지와 관련해 거식증 소녀가 경험한 외상적 지식traumatic knowledge뿐만 아니라, 한때 모든 요구로부터 침투할 수 없었던 성인 세계와 관련된 지식까지 포함한다. 오늘날 성인 세계는 일종의 스위스 치즈와 같은 불행하게도 무수한 결함과 구멍 상태로 축소되었다. 아이들은 부모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오히려 알지 않는 것이 나을 경우조차도 안다. 세대 간 관계의 변형도 이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은 문화적 중재 없이 쉽게 접근 가능한 지식을 습득하며, 부모의 비밀을 공유하고 문제의 저장소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기대기보다는, 대부분 어리둥절한 상태로, 자신을 돌봐야 할 사람들이 살아가는 청소년적 삶을 따라가게 된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결정 책임decision-making에 대한 부담으로,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전통과 가족적 전달의 변함없는 궤도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는 바우만 Bauman이 말한 바와 같이, 신세대의 유동적 조건이다. 아이들은 점점 가족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고, 점점 더 (좋든 나쁘든) 자신만의 성장 경로를 스스로 발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아이들은 대중적 자유의 시대에 존재하며, 고립과 순응주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들의 책임은 조기에 커지지만, 성인 속에서 책임감을 신뢰할 만하게 구현한 사례를 찾기는 점점 더 드물다.



정치의 예를 들어보자. 정치가 청소년이 신뢰하며 의지할 수 있는 ‘고귀한 문화적 기준점’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정치 그 자체의 위치가(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폴리스의 공공선이라는 목적 아래 개인 차이를 조율하는 가장 고귀한 기술이었다) 광란의 청소년과 같은 정당adolescent party으로 변모한 것은 아닌가.


현대의 과도한 쾌락주의는 성인들을 교육적 과업에서 배제하고, 이를 도덕주의자들의 몫으로만 남겨두었다. 그 결과, 자유란 이제 구속이나 빚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빚은 점점 쌓여 우리의 삶을 잠식하고 있으며, 법의 의미의 부재는 욕망이 지닌 생성적 힘을 소멸시켰다. 자유는 더 이상 만족을 제공하지 않으며, 오히려 점점 우울과 관련된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서 이 현상을 훨씬 더 빈번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들은 이전 어느 세대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울한가? 그 해답은 그들의 자유가 실상 감옥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래, 노동, 성취 가능성 없는 향락의 서커스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상징적 규범적 지침이 부재한 유희의 혼돈 속에서 양육하지만, 역사는 그들에게 막대한 책임을 부여한다: 바로 다시 한 번 가능한 미래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중략>


<기술적 대상들Technological Object과 청소년 세대의 우울>


우울은 본래 삶이 흘러가고, 생명이 점점 줄어들며, 나이를 먹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삶을 동반하는 현상이어야 한다. 임상 정신분석 경험은 이것이 오늘날 현실과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현재 우울은 청소년 세계를 광범위한 관성inertia, 열정 결핍a lack of enthusiasm, 욕망의 경향적 쇠퇴로 점령하고 있다. 청소년에게 열정, 흥미, 계획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불만d의 표현 방식이 달라졌음은 사실이다. 오이디푸스적 시대에는 이러한 불만이 법에 대한 공개적 일탈, 반항적 저항, 반사회적 거부로 나타났다면, 오늘날에는 삶의 비활력적 차단non-vital switching off 의 형태로 나타난다.


청소년기가 자신만의 욕망을 가지려는 충동적인 시기, 어린 시절처럼 대타자의 욕망désir de l’Autre에 의해 조정·수용되지 않으려는 시기라면,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대상이라는 거대한 방해물로 특징지어진다. 이 대상은 욕망을 향한 개방을 가린다. 욕망이 대상의 초월transcendence, 즉 대타자에 대한 에로틱한 개방이라면, 현대 사회는 이러한 충동을 꺼버리고, 대상의 치명적 향락mortifère enjoyment을 장려한다.


오이디푸스적 청소년기는 무의식적 환상에 의해 특징지어졌으며, 이 환상은 시선 욕망의 중심성을 드러냈다(예를 들어, 성적 접근은 무의식적 환상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구강적 욕망의 탐욕이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타자의 몸은 욕망을 구조화하는 환상이라는 필터 없이 소비된다. 결과적으로, 성행위는 수행되지만 어떤 에로틱한 의미도 상실된 채 단순한 행위로 전락한다.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욕망의 힘과 그 각성desire awakening이 비인간적 대상에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새로운 힘(puberty)으로 발현되어야 할 충동의 몸은 꺼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울 경험은 사실상 순수한 무게로서의 존재 경험으로 나타나며, 결빙glaciation, 수동화passivization, 주체의 대상으로의 환원 reduction of the subject to an object으로 특징지어진다. 청소년기에 우울이 발생할 때, 삶의 순조로운 흐름을 방해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며, 삶의 열린 바다에서 무엇인가가 물러나 슬퍼진다.


예를 들어, 오늘날 청소년 세계를 뒤덮고 있는 기술적 대상technological objects에 대한 중독을 생각해보자. 인터넷과의 연결은 삶과의 연결을 강화하기보다 때로는 이를 대체할 수 있다. 물론 때때로 삶과의 연결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연결의 단절을 초래할 수도 있다. 무의식 그 자체는 사실상 타자의 욕망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지만, 결국 기술적 대상에 의해 대체된다. 이 연결의 가상성virtual nature of this bond은 타자의 몸과의 에로틱한 충격을 대신하며, 이것이 바로 기술적 대상이 제공하는 거짓된 약속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적 대상 Freudian object 의 본질은 무엇인가? 손자 에른스트 Ernst 의 실패를 가지고 놀았던 Fort -Da 놀이를 예로 들면, 대상은 결핍(부재)에서 비롯된다.(프로이트, 「쾌락원칙을 넘어서)」) 프로이트적 대상은 항상 공백 void 을 배경으로 나타나며, 바로 이 배경 위에서 욕망의 게임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기술적 대상은 항상 주체를 삼키는 phagic 표면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적 대상이 상징에 의해 구성되고, 공백을 조직하고 경계짓는 것이라면, 기술적 대상은 공백을 막고 채우려는 항-우울적 약물의 치료적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욕망의 게임을 하려면 큰 사물Thing과 분리되어야 하며, 공백이 생성되어야 한다. 욕망의 게임은 오직 상실의 승화를 배경으로만 가능하다. 인터넷은 과연 그러한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개방이자 가능성, 세계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세계의 대체물이 될 위험이 있다. 인터넷은 끊임없는 연결이 되어 타자와의 단절과 고립을 생성할 수 있으며, 초현대적hypermodern 무의식의 버전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가 이용할 수 있는 정교하고 무한한 지식이며, 신체의 경험을 대신하는 대안이 된다. 이러한 지식은 타자와의 에로틱한 만남으로부터 거리를 만들어 내며, 접촉이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가상적이다.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이 탐욕스럽게 축적하는 기술적 지식은 진실과 명확히 분리되어 있으며, 욕망의 법 경험으로부터 분리split되어 있다.



내가 치료 중 만난 한 소년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유아기 동안 정신병적psychotic이고 깊은 우울을 겪는 어머니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던 주체였다. 오직 아버지만이 소년과 함께할 수 있었고, 농사일을 통한 규율과 노력의 방식을 가르치며, 어머니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증명해주었다. 그러나 소년이 어머니와 단둘이 있게 될 때, 그는 자신의 몸이 융합적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있어 유일한 ‘구명보트lifesaver’라고 강하게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두 사람의 관계를 공생symbiotic적으로 강화하였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자며, 어머니가 자장가를 불러주고 몸을 밀착시키곤 했다. 그들은 코와 침을 교환하며 놀이를 하였고, 두 몸은 액체처럼 서로 뒤섞인 듯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항상 아버지가 배제되어 있던 부부 침대 위에 안겨 누워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존재 덕분에 정신병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아버지는 노동의 긍정성과 삶에 대한 리비도적 투자를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소년은 특정 증상을 발달시킨다. 그는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첫 여자친구들에게 자신을 데리러 오게 한다. 그는 스스로를, 그의 표현대로 “항상 다른 사람*(Other)에 의해 옮겨지도록” 만든다.



그의 첫 사랑은 어머니와의 공생 관계를 재현하며,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소녀에게 향했다. 어머니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 첫사랑은 2년간 지속되었고, 사랑이 끝나자 소년은 깊은 우울에 빠졌다.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길을 잃은 느낌을 받았다. 이후 그는 삶을 오직 기술적 대상(컴퓨터)에만 헌신하며, 그것이 유일한 파트너가 되었다. 소년은 컴퓨터 화면 앞에서 시간을 보내며, 이러한 지속적 연결은 실제 세계와의 단절 형태였다. 여기서 대상object은 상징에 의해 구성되지 않았으며, 프로이트적 대상처럼 상징화를 통한 상실의 애도mourning를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상은 상징화를 방해하며, 소년의 어머니의 지속적 존재와 단절이 혼재된 근친적 병리incestuous morbidity 상태를 재생시킨다.


분석가와의 만남은 그를 타자의 욕망과 재연결시키는 사건이다. 이를 통해, 세션 동안 모성의 목소리와 맺은 특정한 언어적 결속을 작업함으로써, 그는 시poetry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관심은 신체성과 정동성을 담은 언어를 형성하는 방언 시인을 향하게 된다. 이러한 언어는 유아의 말장난lallation과 유사하며, 시인의 라랑(lalangue)는 어머니의 라랑을 연상시킨다. 이제 대상은 부재의 배경으로 돌아가, 새로운 승화의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다. 어머니의 포식적 현존 phagic presence의 연장처럼 늘 존재하던 대상은, 단어의 리듬과 음악적 매력 속에서 소멸한다.


이 짧은 임상 사례는 삶을 침투하고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연결이 바로 타자의 욕망과의 만남임을 보여준다. 내 동료 알도 베체Aldo Becce가 보고한 또 다른 임상 사례에서 주인공은 몇 달째 자신의 방에 고립되어 살아온 소년이다. 그의 가족에서는 욕망의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년은 아버지를 ‘ectoplasm’으로, 어머니를 ‘부재하는 현존absent presence’으로 묘사한다. 이 소년에게 비디오게임에 대한 매혹은 상징적 계보에 남겨진 공백을 대신한다. 분석가의 첫 움직임은 소년에게도 컴퓨터 게임을 해볼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년은 자기 외에 승리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항상 혼자서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경험은 중요하다. 항상 이기는 것은 사실상 지는 방식이며, 욕망의 게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미 항상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떤 게임도 제대로 즐길 수 없다.


이는 나의 강박적 환자 중 한 명이 꾼 교훈적 꿈의 주제와 연결된다. 그는 두 여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청년기의 이상적 사랑과 아이를 기대하는 성인 여성. 환자는 친구들과 포커를 치는데, 매번 네 개의 에이스를 받는다. 더 이상 아무도 그와 게임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카지노로 가지만, 다시 이기게 되고 아무도 그와 게임을 하려 하지 않아 결국 게임을 할 수 없다. 이 꿈이 보여주는 것은 패배의 불가능성, 곧 상징적 거세의 나르시스적 거부가, 만약 항상 이기는 것을 멈추었더라면 겪었을 손실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손실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바로 삶의 게임, 욕망의 게임에 참여할 가능성 자체의 상실이다.


그러나 알도 베체Aldo Becce의 환자로 다시 돌아가 보자. 분석가의 개입은 소년이 기술적 대상과 맺는 자폐적 관계를 다루도록 이끌었다. 이 과정을 통해 타자 없는 대상을 통한 향락은 스스로 중단되도록 강제되며, 이러한 중단 덕분에 소년은 그 대상을 새롭게 활용하려 시도하게 된다. 예를 들어, 타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제3자의 등장 이후, 이전에는 소년을 구속했던 그 대상이 이제는 사회적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전환될 수 있게 된다. 분석가와 함께, 곧 타자로서 놀이를 하는 경험을 통해, 인터넷은 자폐적 게임에서 세상과 연결하는 다리로 기능할 수 있다. 이 사례는 새로운 전달transmission을 가능하게 하는 치료의 단면을 보여준다. 동일한 대상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여기서 공백을 메우는 대상을 다루는가, 아니면 공백을 매개로 타자와 연결을 형성하는 대상을 다루는가? 인터넷은 분명 타자로부터 고립시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타자와의 새로운 접촉과 연결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이 사례에서 분석가의 작업은 기술적 대상의 사회화로 귀결되며, 이는 대상의 나르시스적 폐쇄를 깨고 욕망의 상징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이 사례는 끊임없는 연결과 단절이 동일한 병리적 위치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연결과 단절connection and disconnection 의 교대가 없이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연결될 권리만큼이나 단절될 권리 또한 중요하다. 이 사례에서 상황을 바꾼 것은 제3자의 개입이었으며, 이는 ‘ectoplasmic’한 실제 아버지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전이transfer를 통해, 죽은 듯 보였던 주체의 활성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활성화는 대상의 새로운 버전이 등장함으로써 일어난다. 주체는 대상에서 일시적으로 분리되어, 타자의 욕망과의 연결 덕분에 대상을 새롭게 활용할 방법을 발명하게 된다. 사실상, 모든 다른 활용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타자의 욕망과의 연결이다.


그러나 게임의 가능성은 공백의 생산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대상의 지속적 존재로부터의 단절을 요구한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바로 이 점을 부정하는 듯하다: 침묵, 시간의 중단 suspension of time, 단절될 권리가 부정되는 것이다. 소년이 기술적 대상의 새로운 활용을 가능하게 하는 순간은, 타자(분석가)가 소년과 그 대상을 가로지르며 개입할 때 발생하며, 이를 통해 주체와 대상 사이에 분리가 생긴다. 소년은 타자 덕분에 대상에서 단절하고, 이를 통해 보다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다시 연결될 수 있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와 새로운 상징의 창조 Evaporation and Invention >


아버지의 증발(부재)의 시대에는 단지 치명적 향락에 대한 충동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의 가능성도 동시에 열려 있다. 아버지의 공백은 단순한 밑바닥 없는 심연 bottomless abyss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개방이기도 하다. 이 공백은 치명적 향락을 향한 강박적 충동의 위험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전통의 규범적 무게와 결부되지 않은 길의 가능성도 함께 품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버지를 주인master, 토템totem, 교황, 영웅으로 이상화하고, 선과 악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존재로 향수nostalgia를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러한 부재(증발)는 잠재적으로 창조(발명)를 위한 길을 열어준다. 아버지가 부재(증발)하면, 라캉이 말하듯, 창조(발명)를 위한 ‘강제적 선택’이 나타난다. 이 새로운 조건을 보여주는 사례로 프로이트가 언급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청년기를 들 수 있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가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어머니와 외조모 두 여성에 의해 양육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는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부여하는 구조적 가치를 넘어서는 상속의 새로운 시각과 맞닿는다. 레오나르도의 비범한 창조적 충동과 연구 욕구는, 아버지를 ‘포기하는 법renounce his father’을 배우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그는 ‘상속인 ’이라는 용어의 어원이 보여주듯 아버지에게서 고아가 되었고, 바로 이 때문에 상속인이 된다. 아버지의 부재는 삶을 가볍게 하는 듯 보이는데, 마치 아버지를 기다리는 행위가 과학적 연구로 대체되어, 자연과 그 법 Nature and its Law 안에서 말의 법의 상징적 차원을 재발견할 가능성으로 전환된 것과 같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있어 – 오늘날이라고 해서 원시시대와 다르지 않게 – 어떤 형태의 권위authority로부터의 지지support에 대한 필요는 너무 강력하여, 그 권위가 위협받으면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만이 그러한 지지 없이도 설 수 있었다. 그는 생애 초기 몇 년 동안 아버지 없이 지내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결코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



아버지의 부재(증발) 시기에 우리는 다소 레오나르도처럼 되어야 한다. 흥미로운 질문은, 텔레마코스적인 아이child-as-Telemachus와 레오나르도적인 아이child-as-Leonardo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이다. 다음 장에서 다루겠지만, 상속자의 조건은 어원적으로 고아, 결핍, 황무지 wilderness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왕국 없는 상속인으로, 레오나르도처럼 아버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속인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포기를 새로운 주체적 책임으로 이끌어낸다. 아버지의 부재(증발)은, 아버지에 대한 포기가 단순한 거부가 아닌 한, 창조(발명)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상속인은 자신의 책임이나 타자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어Schopenhauer와 환자들의 경험을 참고하여 죽음 충동death drive을 소개하면서 이 인물을 스케치한다. 인간은 삶의 죽음조차 즐기려는, 모든 한계를 넘어선 향유를 향하는 존재로 제시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와 달리 프로이트는 금욕적 수행asceticism이나 세계의 포기를 통해 해결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책임의 주체를 도입한다.


그렇다면, 이드 Id, 즉 에고Ego가 아닌 무의식의 주체로부터 책임의 문제를 설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오늘날 청년들의 불만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어떻게 자신을 파괴하거나 미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가? 삶을 소모시키지 않고 향락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욕망을 향락과 연결시키되, ‘프로키들의 밤night of the Proci’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캉은 프로이트의 길을 따라, 욕망의 시간은 항상 자신을 잃고, 길을 잃고, 평범한 삶의 규칙적·순응적 관리에서 이탈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모든 욕망 경험에는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요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자신을 잃고 스스로를 소비하는 것과, 자신의 욕망을 위해 행동하며 잉여향락surplus enjoyment을 획득하는 것 사이에는 취약한 경계frágile frontier가 존재한다.


실제로, 타자가 정하는 ‘적절한’ 한계는 없다. 우리는 단지 프로키의 향락과 자신의 욕망을 위해 행동함으로써 얻는 만족과 잉여향락 사이의 불확실한 경계, 즉 자기 욕망 실현의 무한하고 유일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경계를 떠올리고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무의식과의 관계에 대한 책임을 탐구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자신의 꿈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Freud,꿈 해석 전반에 대한 몇 가지 추가적 주석Some Additional Notes on Dream Interpretation as a Whole) 이 질문은 우리를 초월하는 것에 대해 책임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이미 창조적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창조적이 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레오나르도에게 일어난 것처럼,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는 프로이트가「아동의 심리학에 관한 몇 가지 성찰Some Reflections on Schoolboy Psychology」에서 다룬 것과 같다. 그는 청소년을 교육하는 문제를 ‘첫 번째 이상적 대상, 즉 아버지로부터의 분리detachment’를 실현하는 과제로 요약했다. 이 분리가 바로 상속에서 가장 크고 위험한 과제가 아닌가? 정당한 상속은 오직 우리가 타자로부터의 출처, 상징적 빚을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이 빚은 우리를 언어 공동체와 인간 공동체에 묶는다. 이러한 분리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아버지의 법Law of the father을 말의 법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즉, 분리, 불연속성, 오인mistakenness 모두가 기본적 소속감의 경험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의 분리’가 상속에서 가장 진정한 문제로 남는다. 오디세우스는 돌아오지만, 그것은 오직 놓아주기 위해, 분리를 허용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애도의 과정radical mourning을 촉발하기 위해서이다. 이제야 우리는 텔레마코스를 ‘정당한 상속인’으로 부를 준비가 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카프카의 『성(城)』 과「굴」에 대한 라캉적 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