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고통을 통해 본다 : 제임스 힐먼

by 낭만소년



영혼은 고통을 통해 본다(The soul sees by means of affliction).

-제임스 힐먼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의 글을 번역하여 올린다.


그의 선집 『A Blue Fire: Selected Writings』 (Thomas Moore ed. Routledge, 1990) 중 7장

「병리화 : 상처와 눈 Pathologizing : The Woundand the Eye」이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The Soul's Code』는 이미 국내 독자를 만난 적이 있다.(애석하게도 이 책은 절판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주민아 역, 토네이도, 2013


그의 또 다른 주저는『Re‑Visioning Psychology』이다. 직역하자면 "심리학 다시 보기"정도 인데, 그가 추구하는 인간 마음에 대한 탐구는 분과 학문과 과학 너머를 향한다. 그러한 점에서 "영성학", "영혼의 정신학" 정도로 의역해야 할 것같다.




선집의 번역된 글 후반부에 언급되고 있는 세넥스와 뿌에르의 원형적 심상은 이미 노인의 원형과 소년 원형』(김성민 역, 달을 긷는 우물, 2020)으로 번역되어 있다. 선집의 발췌 글을 읽어보면 단순한 노년과 소년성의 의미가 아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근원을 둔 이 개념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두 극성 즉, 사막의 고독한 현자(세넥스)와 배제되고 버려져 울어 제치는 근원적 아이(뿌에르)의 형상이다. 제임스 힐먼은 고통, 상처와 심리 치료의 관점에서 융의 원형 이미지를 재해석한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선집의 번역글을 토대로, 이 책으로 나아가기를 추천드린다.


노인의 원형과 소년 원형.jpg 『노인의 원형과 소년 원형』(김성민 역, 달을 긷는 우물, 2020)





9월 이후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있다 보니, 그동안 눈여겨 보지 않았던 관련 전공 분야의 책과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번에 번역을 시도한 제임스 힐먼의 경우가 그러한 케이스에 속한다.


그의 사후 "Uniform Edition of the Writings of James Hillman" 시리즈가 <Spring Publications Inc>에서 발간되고 있는데, 이 시리즈의 11권이『멜랑콜리와 우울에 관하여 On Melancholy and Depression』(2024) 이다.


On Melancholy & Depression


내친 김에 그의 글을 찾아 읽어보자는 생각이 선집 읽기에 이르게 했다.


실증적 분과 학문으로서, 사회 과학으로서의 심리학, 통계처리 된 정신 병리보다는 영성과 심리, 영성을 통한 마음의 치유를 고민하는 입장에서 그의 사유가 반가운 것은 숨길 수 없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구독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최근 공부와 일을 병행하다보니 번역 작업의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천천히라도 발걸음을 옮기겠습니다.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 미뤄왔던 번역글들을 올릴 계획입니다.






그의 글을 읽기 전에 제임스 힐먼의 전기적 약력을 소개한다. 출처는 <OPUS Archives and Research Center> 에서 가지고 왔다.


https://www.opusarchives.org/james-hillman-collection/


제임스 힐먼(1926-2011)은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융 및 후기 융 사상의 선도적인 학자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화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고 독창적인 비평가 중 한 명으로 간주한다. 그가 창설한 심리학 분야인 원형 심리학은 정신의 경험과 삶 자체에서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1926년 애틀랜틱시티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중 2년 동안 미 해군 병원 군단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파리의 소르본 대학과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녔다. 그 후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9년에 융 분석가로서의 훈련을 마치고, 같은 해 연구소의 연구 책임자가 되어 10년 동안 그 직책을 수행했다.


1970년에 심리학, 철학, 신화, 예술, 인문학 및 문화 문제에 전념하는 간행물인 Spring Journal의 편집자가 된다.


『Spring Journal』


댈러스 대학교 대학원장이 된 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1978년 댈러스 인문문화연구소를 공동 설립했다. 그는 또한 예일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교직을 역임했다.


그는 2011년 사망할 때 까지 19권 이상의 책과 여러 권의 에세이를 출판했으며 다작의 작가이자 강사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은 심리학, 철학, 신화, 예술, 문화 연구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학술 연구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획기적인 저서인 『Re-visioning Psychology』는 1975년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고, 그의 저서 『The Soul's Code: In Search of Character and Calling』은 거의 1년 동안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그의 작품의 주제는 분석의 신화, 치유의 소설, 꿈과 지하 세계, 성격의 힘, 자살과 영혼,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 등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의 지적 작업의 핵심을 형성하는 영향은 심층 심리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고전 그리스 전통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심리학자, 철학자, 시인, 연금술사의 공헌을 포괄하는 르네상스 사상과 낭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헤라클레이토스 Heraclitus, 플라톤 Plato, 플로티누스 Plotinus, 비코 Vico, 피치노 Ficino, 셸링 Schelling, 콜러리지 Coleridge, 딜타이 Dilthey, 프로이트, 융의 계보의 일부로 설명했다. 또한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작가는 키츠 Keats, 바쉴라르 Bachelard, 코르뱅 Corbin, 니체, 파라셀수스Paracelsus 및 셸리 Shelley이다.


그는 지적 작업의 전반에 걸쳐 심리적, 문화적 영역을 지배하는, 문자 그대로, 물질주의적, 환원적 관점을 비판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상상력, 은유, 예술, 신화를 통해 심리학과 문화에서 정신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글을 올려둔다. 저자는 서강대 종교학과 김재영 교수이다.


김재영 교수는 이미 어니스트 베커와 윌리엄 제임스의 주저를 번역한 바 있다.


힐먼이 비록 융학파의 개념과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그는 융의 제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선집은 제임스 힐먼이 그동안 발간했던 저서, 발표했던 글에서 주제별로 발췌했기 때문에 문단 혹은 단락의 통일적인 연결이 어색할 수 있겠다. 편집자의 의도를 반영하여 내용 구분선을 표시한다.





7장「병리화 : 상처와 눈 Pathologizing : The Woundand the Eye」


[편집자 Thomas Moore의 개관]


심리치료는 의학과의 친연성 때문에, 고통affliction을 적으로 간주하며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은 ‘영혼의 현상들phenomena of the soul’에 대한 관심 속에서 심리적 고통psychological suffering에 대해 경외심과 독특한 존중을 보인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본래 스스로를 ‘병리화’한다. 영혼은 그 자신을 비정상, 뒤틀림twistedness, 고통, 과장, 혼란mess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드러낸다. 힐먼은 이러한 비정상을 미화(낭만화 romanticize)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그것을 영혼에 고유하고 본질적인 것으로서 ‘인증(승인 authenticate)’한다.


건강과 정상성을 추구하는 수많은 시도들 속에서, 힐먼은 ‘영웅적 자아’의 작동을 본다. 그것은 빈곤, 질병, 약물, 그리고 모든 형태의 고난에 맞서 싸우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존재이다. 이러한 영웅적 환상에 대한 대안으로, 힐먼은 덜 적극적이고 덜 고무적인 태도, 즉 열등감의 자세를 제안한다. 초월하려는 과도한 노력 속에서, 영웅은 오히려 자신의 열등감의 감정을 억압하며, 이는 결국 거대한 실패의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
힐먼은 이러한 ‘영혼의 발현manifestations of the soul’이 처음 나타났을 때 이를 제거하거나 치유하려 하기보다, 그것들을 가까이 두고held close, 그 의도를 탐구하라고 권한다.


이러한 병리학적 시각은 영혼의 작동 방식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은 그렇게 정신(심혼, 心魂)의 자연주의자 a naturalist of the psyche’가 된다. 영혼과 그 기벽quirks에 대한 이 애정 어린 관심은 힐먼 사유의 박동하는 심장beating heart을 이룬다. 그것은 영웅주의의 재 속에서 피어나며, 영혼의 생태ecology of soul 속에 관여하는 심리학자의 초상을 제시한다.


힐먼은 또한 사회의 병리를 사유contemplation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들the gods은 개인의 문제 속에 존재하듯, 사회적 불안속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들은 언제나 구원자 영웅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웅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으며, 그의 존재 자체가 괴물을 죽이고, 외양간을 청소하며cleaning stables, 도시를 구하는 데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힐먼은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사회의 만성적 혼란chronic disorder과 병리화를 그 깊이 속으로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문화— 병리로부터 탄생한 예술과 사상— 에 이르게 된다. 둘째, 힐먼은 시민에게 자신의 분노, 욕망desires, 그리고 두려움을 ‘세계 영혼world soul’의 상태를 정확히 반향하는 신호로 신뢰하라고 권한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를 세계의 고통에 결속시키며, 정치적·사회적 무감각anesthesia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힐먼의 상상적 병리학 접근법은 언뜻 보기에 정숙주의적(靜淑主義, quietistic)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질병과의 전쟁에서 활동하는 현대의 사회운동가나 첨단기술의 전사와 달리, 미적 성찰aesthetic contemplation은 다소 온건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상상력은 그 나름의 근육과 인내를 요구한다.
물리적 노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문자주의적 해법literalistic solutions에 빠지는 일은 쉽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은 자신의 협소한 패러다임과 세계관을 벗어나, 일상의 가정들 속에 갇힌 환상에 대한 통찰insight을 얻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상상력이 결여되면, 모든 인간 활동은 무의식으로 가득 차고 완전히 자기화appropriation되지 않은 신화를 무의식적으로 재연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사로잡아온 신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용기를 요한다. 마찬가지로, 증상을 억누르려는 영웅적 노력은, 우리의 영혼을 괴롭히는 불투명한 증상들 속에서 통찰의 파편을 솜씨 있게 끌어내는 상상력만큼 대담하지 않다. 그러나 힐먼이 말하듯, 우리의 증상 속에 바로 우리의 영혼이 있다


<끝>






<증상>


병리심리학(病理心理學) psychology of pathology에 새롭게 접근하기 위해, 나는 ‘병리화pathologizing’라는 용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용어는 정신psyche 이 스스로의 자율적 능력에 의해, 자신의 행동의 어느 측면에서든 질병·병적 상태morbidity·장애·비정상·고통을 창조하고, 바로 이러한 뒤틀리고 상처 입은 시각을 통해 삶을 경험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Re-Visioning』, 57)




‘병리화’는 특별한 위기의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상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이 어디를 가든 지니고 다니는 죽음에 대한 감각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각자가 지닌 특유의 ‘차이화differentness’에 대한 내적 감정 속에서도 존재하며, 이 감정은 종종 자신이 약간은 ‘미쳤다’는 감각 위에 기초하기도 한다. 우리 각자는 나름의 정신적 질환에 대한 개인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다. ‘crazy’, ‘mad’, ‘insane’이라는 단어와 그 모든 속어·유의어들은 우리의 일상의 발화 속에서 규칙적인 요소를 이룬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이런 외침들로 나의 내면의 일탈을 바깥쪽으로 투사할 때, 동시에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일탈적이고 괴이한 제2(혹은 제3)의 인격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 인격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실제로 병리화는 우리가 일상적 삶을 구성하는 재료를 제공한다. 우리의 생활양식, 관심사, 사랑의 형태는 모두 그 속에 병리화된 요소들이 얽혀 있는 패턴을 반영한다. 우리가 자신과 우리의 콤플렉스 속에 얽힌 타인들을 더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역시 이상 심리학 교과서의 전형적 병리 유형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를 더 잘 깨닫게 된다. 그 사례들은 사실상 우리 자신의 전기biography이기도 하다. 사회학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미국] 사회의 거의 모든 개인은 — 이유가 무엇이든, 길든 짧든 — 일생의 어느 시점에 한 형태든 다른 형태든의 ‘영혼의 돌봄soul care’이라는 전문적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으며, 혹은 받게 될 것이다.


치료자가 아니라 증상이 이 세기를 영혼soul으로 이끌었다.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그들의 환자들 안에서 끊임없이 지속된 병리화 — 억압되거나 변형되거나 치유되거나 심지어 완전히 이해되기를 거부한 그 병리화 — 가 바로 이 세기의 주요한 정신psyche 탐구자들을 더 깊은 곳으로 인도했다. 그들이 병리를 통과해 영혼에 이르는 그 여정은, 우리 각자 안에서도 반복되는 경험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사실 더 큰 빚은 우리의 병리화에 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증상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부채를 지고 있다. 영혼은 치료자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고통afflictions 없이 존재할 수 없다.

(『Re-Visioning』,70-71)




병리화된 이미지는 실제로 죄책감을 동반한다. 그것은 단지 죄와 질병을 연결해온 긴 역사적 전통 때문만이 아니다. 그 죄책감은 단순한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진정한authentic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것이 불러오는 죄책감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달하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일탈의 체험, 즉 빗나감, 실패, ‘과오(hamartia)’의 감각에 속한다. 실제로 죄책감과 병리화가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우리가 병리화되고 상처받았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빗나감missing of the mark ’ 은, 바로 그 죄책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실패를 수정되어야 할 결함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죄책감은 ‘실패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아의 어깨 위로 옮겨진다. 이때 병리화는 자아의 양식을 강화하고, 죄책감은 '2차적 이득' 으로 작용한다. 즉, 자아의 중요성 감각을 부풀려 자아가 초자아로 변하며,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자아는 자만심 넘치는 자아만큼이나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죄책감의 양식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것을 원형적 상상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방어적 장치로 간파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형적 관점에서 볼 때, 문제의 핵심은 ‘죄책감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느끼는가’이다. 즉, 나의 고통은 정신의 어떤 인물에게, 어떤 신화 속 인물에게 속하며, 그것이 어떤 의무를 드러내고 있는가? 지금 나에게 요구를 제기하는 인물들은 어떤 콤플렉스속의 어떤 형상들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병리화가 불러오는 죄책감은 근본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것은 우리를 자아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병리화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어떤 원형적 인물들과 결속되어 있음을 —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원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기억을 빚지고 있음을 — 인식하게 한다.


물론 병들어 있는 이미지sickened image 는 우리에게 깊은 고통을 준다. 왜냐하면 병리화가 우리의 삶의 감각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손상vitiate 시키고 활성화vitalize 시키며 — 왜곡을 통한 생동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느끼는 이 생동하는 고통의 감각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이어진다. 환상 혹은 꿈 이미지가 너무도 생생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응하려 의학적 방식의 처치를 취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미지가 ‘꿈의 언어’ 의 일부이며, 고통의 감각 또한 그 은유의 감정적 측면만큼이나 그 언어의 필수 요소임을 잊는다. 고통은 하나의 파토스pathos — 즉, ‘움직임’이자 ‘감동받음being moved’ — 을 반영한다. 그 움직임은 지금 바로 정신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긍정/부정, 건강/질병의 범주는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정신의 존속, 즉 그 삶과 죽음 그 자체에 필수적인 어떤 것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동일한 섬세함과 생동감을 갖고 표현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 치료되지 않고, 치유되지 않은 채 — 보존하고자 한다. 병의 환상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정신의 깊이의 일부로 간주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병리화된 수수께끼 — 심리적 성찰의 주관적 재료를 제공하는 그것들 — 덕분에 우리는 심층 심리학자가 된다. 비록 병리화가 자연적 사건의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그 사건들을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Re-Visioning』,83--84)




원형 심리학은 심리적 질병이 병리화된 환상의 구현이라는 가정 위에서, 그 환상의 원형적 근원 ἀρχαί — 즉, 그것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 혹은 근원적 은유 — 를 탐색한다. 원형 심리학은 병리화를 의미로 이끌기 위해, 그것을 원형적 배경과의 유사성 속에서 이해하려 시도한다. 이는 플로티노스Plotinus가 제시한 원리, “모든 인식은 유사성(similitudo)에 의해 온다”를 따르며, 또한 그가 또한 제창한 회귀(ἐπιστροφή, reversion) 의 방법 — 즉, “모든 존재는 자신이 복사본으로부터 비롯된 원형적 본상(archetypal originals) 으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을 가진다” — 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병리화 역시 유사성의 관점에서 탐구되며, 그 자체가 원형적 배경으로 되돌아가려는 의도성 을 지닌 것으로 상상될 수 있다.


나는 모든 환상을 이 신화적 영역으로 되돌린다. 질병의 환상이 정당화되는 곳은 자연이 아니라 정신(psyche) 이며, 실제의 질병이 아니라 상상적 질병 imaginal sickness속에서, 과거 혹은 현재의 심리역동적 구성이 아니라 상상력의 영원한 은유들이자 환상의 보편자인 신화적 형상속에서이다. 이 신화적 형상들은, 나의 고통처럼, “비극적이고 괴물적이며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들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역시 나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요동치게 한다(perturb to excess).” 병리는 오직 신화 속에서만 적절한 거울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신화는 병리와 마찬가지로 왜곡되고 환상적인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병리화는 곧 신화화의 한 방식이다. 병리화는 인간을 맹목적인 즉각성으로부터 끌어내어, 자연적·현실적인 것에 대한 시선을 왜곡시킴으로써 그 안과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묻도록 강제한다. 이 왜곡은 동시에 확장이자 새로운 명료화이며, 영혼에게 자신의 신화적 존재를 상기시킨다. 병리화의 격동 속에서 정신(psyché) 은 신화적 의식 양식(style of consciousness) 으로의 회귀를 겪는다. 정신분석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았으나, 그것을 마술적·원시적 수준으로의 퇴행(regression) 으로 단죄했다. 그러나 정신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병리화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또 다른 현실을 찾기 위해서도 되돌아간다.


(『Re-Visioning』, 99-100)




원형심리학은 정신병리 개념을 일련의 겹겹이 포개진 표면nutshells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고통속에는 콤플렉스가 있고, 콤플렉스 속에는 원형이 있으며, 그 원형은 다시 신을 가리킨다. 고통은 신들을 가리키며, 신들은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융Jung은 말한다.


“신들은 병이 되었다. 제우스는 더 이상 올림포스를 다스리지 않으며, 이제는 태양신경총(solar plexus)을 지배하며, 의사의 진료실로 호기심스러운 표본들을 보낸다”(CW 13, §54)


이는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신들이 증상의 형태로 의식 속으로 스스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뜻을 함축한다. 따라서 우리의 병리화는 곧 그들의 일, 즉 인간 영혼 안에서 작동하는 신성화의 과정(divine process) 이다. 우리가 병리를 신에게로 되돌릴 때, 우리는 병리의 신성을 인식하고, 신에게 그의 몫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콤플렉스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제단proper altar 위에 놓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고통에도, 그리고 거기서 자신을 드러내는 신에게도 —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성적 무능sexual impotence을, 그로 인해 섬김을 받게 되는 대모신의 아들The Great Mother’s son 의 작용으로 보느냐, 무시당해 복수하는 프리아포스Priapus 의 발현으로 보느냐, 성적 기능이 결여된 예수(Jesus) 의 형상으로 보느냐, 혹은 육체의 능력을 빼앗고 음란한 환상을 부여하는 사투르누스Saturn로 보느냐에 따라, 그 고통의 의미와 방향은 전혀 달라진다. 고통의 배경을 찾는 일은, 한 개인의 의식 양식과 병리화된 환상,

그리고 그 양식과 환상이 회귀할 수 있는 신화적 구조에 대한 친숙함을 요구한다.


콤플렉스를 오로지 개인적 관점에서 연구하거나, 한 사례의 심리역동과 역사를 개인적으로만 분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병리의 절반은 신들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병리 는 동시에 사실이자 환상이며, 신체적이자 정신적psychic 이고, 개인적이자 사회적 impersonal 이다. 이러한 병리의 관점은 르네상스의 파라켈수스Paracelsus 가 제시한 치료 관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는 인간의 ‘다른 절반(other half)’—그 본성이 천문학적 철학(astronomical philosophy) 과 결합된 절반—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의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늘Heaven은 그 영역 안에 모든 신체와 질병의 절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지도cosmography 를 모르는 의사가 어찌 진정한 의사일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주지도학cosmography 이란 상상적 영역, 즉 행성들의 이름을 지닌 원형적 힘과 별자리에 의해 형상화된 신화적 서사를 가리킨다. 이러한 “절반(the half)”—곧 상상적 혹은 정신적 요소, 그리고 질병 속의 신—을 무시하는 것은 곧 인간을 배반하는 일이다. 어떤 인간적 사안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닌 것에 자신의 사고의 절반을 바쳐야 한다. “질병”은 또한 원형 안에 있으며, 그 일부로 존재한다.


만약 신들이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그렇다면 병리화는 그들을 내재화 immanent시키는 행위이며,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정신(psyché) 을 열어주는 일이다. 따라서 병리화는 초월신학transcendental theology 으로부터 내재 심리학으로 옮겨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내재성immanence은 단순한 교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내가 이러한 지배적 힘들에 의한 증상을 통해 충격받고, 내 혼란 속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실제의 힘들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 힘들이 나로부터 무언가를 요구하고, 나를 통해 어떤 목적을 의도하고 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모든 심리적 사건가운데, 때로는 병리화 만이 유일하게 진정 나의 것으로 느껴진다. 고통은 나에게 ‘다르다’는 확신에 찬 망상을 준다. 나의 희망과 두려움, 그리고 사랑조차 — 그것들은 세상의 방향성에 의해, 혹은 부모의 ‘살지 못한 삶unlived lives’의 잔여물과 선택지에 의해 내게 부여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증상들은 나의 영혼soul 을 가리키며, 영혼 또한 그 증상들을 통해 나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상과 기벽quirks 은 나이면서 동시에 나가 아니다. 그것들은 가장 친밀하면서도 부끄럽고, 내 깊은 곳을 드러내는 계시이며, 성격을 통해 운명을 조정하므로, 나는 그것들을 가볍게 떨쳐낼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의 의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방문visitations 이자 소외alienations로서,

영혼의 개인적/사회적적 역설을 뚜렷이 드러낸다.즉, “나인 것(what is ‘me’)”은 동시에 “나의 것이 아닌 것(not ‘mine’)”이다. 나와 영혼은 서로 이질적인데, 이는 영혼이 힘, 다이몬들(daimones), 신들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다.


병리적 체험은 영혼 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감각indelible sense을 부여한다. 그것은 사랑이나 아름다움, 자연, 공동체, 혹은 종교를 통해 얻는 감각들과는 다르다. 병리의 영혼 형성soul-making 은 고유한 풍미를 지닌다 — 짭조름하고, 쓰디쓰다. 그것은 “살갗을 벗기고skins alive”, “상처를 내고wounds”, “피를 흘리게 하며bleeds”, 우리로 하여금 정신psyché 의 움직임에 극도로 예민하게 만든다. 병리는 영혼에 대한 강렬히 집중된 의식을 산출한다. 이는 정신을 각성시키고sobering, 겸허하게 하며humbling, 때로는 눈을 멀게 하는blinding 증상적 고통을 겪는 경우에서처럼 그러하다. 병리는 영웅[아킬레스]에게 발꿈치의 작은 통증twinge of heel ―즉 자아로 하여금 죽음과 영혼을 상기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약점soft spot 을―부여한다. 샐린저Salinger의 『Franny』와 『Zooey』를 기억하는가? 여동생 Franny가 증상에 대해 묻자 Zooey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 궤양이 있어. 세상에. 이건 칼리유가야Kaliyuga, 철의 시대라고. 열여섯이 넘었는데 궤양 하나 없는 놈은 다 스파이지.”


나의 증상 속에 나의 영혼이 있다.(In my symptom is my soul)


(『Re-Visioning』, 104-106)






이제 병리화 또한 각 사건의 우주적 질서 속에, 그 사건의 아름다움(美), 덕virtue, 진리truth 와 마찬가지로 함께 짜여있다고 가정해보자. 병리화는 필연적 이며 내재적인, 플라톤이 [진·선·미의 3항에서] 빠뜨렸으나 소크라테스가 실존으로 살아낸 그 “그림자 같은 제4항a shadowy fourth” 이다. 그 기능은 목적telos이라기보다 맥락context 에 따라 다르다. 한 경우에는 질병(disease) 을 알리는 신호가 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위험을 경고한다. 혹은 의식의 확장을 가져오거나, 반대로 그것을 좁히며; 자유, 휴식, 망각의 환상을 자극하고; 절망을 응집시키며; 용기를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목적을 묻는 현자the sage 를 떠올리게 한다. 병리화가 우주의 내재적 요소라면, 그것은 어떤 사건도 이 그림자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병리화 자체가 우주적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질서 속에는 — 붓다가 말했듯이 — ‘소멸decay’이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뜻한다. 블레이크Blake 가 노래한 ‘모래 한 알grain of sand’ (「Auguries of Innocence」)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상처를 주고 받는다. 왜냐하면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모든 것은 동시에 병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Cosmos』, 300 )




<정상성의 신화>


영혼은 고통을 통해 본다(The soul sees by means of affliction). 상상력에 가장 의존하여 작업하는 사람들 — 시인, 화가, 몽상가 — 은 자신들의 병리화가 “무의식”으로 격하되고 임상적 문자주의clinical literalism[병리학적 사실로 환원하는 작업]에 종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반면, ‘무의식’ 개념과 병리화된 상상력의 치료적 복종은 간호사, 교육자, 임상심리학자, 사회복지사 등 상상력이 덜 요구되는 직업군에서 환영받았다.) “광기의 예술가crazy artist”, “정신 나간 시인daft poet”, “괴짜 교수mad professor”는 낭만적 상투어나 반(反)부르주아적 자세가 아니다. 그들은 병리화와 상상력의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는 은유적 형상이다. 병리화의 과정은 상상적 창작의 원천이 되며, 그 창작은 다시 병리화의 과정들을 담아내는container 그릇 이 된다. 이 두 과정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웹스터Webster와 셰익스피어, 고야와 피카소, 스위프트와 보들레르, 오닐O’Neill 과 스트린드베리, 토마스 만과 베케트 등의 작품 속에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이들은 단지 자명한 몇몇 예에 불과하다.)


상처wound 와 눈eye 은 동일하다. 정신psyché의 관점에서 보면, 병리와 통찰insight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마치 우리가 통찰이 없기 때문에 아프고, 통찰을 얻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지 않다. 병리화 그 자체가 하나의 바라봄의 방식way of seeing 이다. 콤플렉스의 눈은 심리적 통찰이라 불리는 특이한 비틀림peculiar twist을 제공한다. 우리가 심리학자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심리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 즉, 우리의 콤플렉스와 그 병리화 과정 덕분이다. “The wound and the eye are one and the same.” — 상처를 입는 경험이 곧 영혼의 ‘시각’을 열어준다. 통찰은 상처를 통해만 가능하다.


정상성의 심리학은 이러한 ‘비틀린 통찰twisted insight’을 병리적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정상성의 심리학은 병리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단, 그것이 ‘환자복’을 입고 나타나지 않는 한. 정상 심리학은 “비정상”이라 불리는 별도의 집을 마련해 두고 있다.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은, 자아ego의 규범적 시선은 영혼을 좁고 왜곡된 형태로 본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예술, 전기biography, 신화를 통해, 또는 전쟁과 정치, 왕조의 역사, 사회적 행위와 종교적 논쟁을 통해 영혼을 연구한다면, 그때는 ‘정상’과 ‘비정상’이 집을 맞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아카데미 심리학academic psychology 은 이러한 영역들을 피하고 대개 아직 자기 광기의 스펙트럼을 경험해보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를 작성한다.


(『Re-Visioning』, 107)




신화의 형상들 — 다투고quarreling, 속이며, 성적으로 집착하고, 복수하며, 상처받고vulnerable, 살해하고 찢겨나가는torn apart — 이 모든 모습은 신들이 단지 완전성만을 대표하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즉, 모든 비정상을 오직 인간에게만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신들이 등장하는 신화소(神話素, mythemes) 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범죄적 병리, 도덕적 괴이함moral monstrosity, 혹은 인격 장애personality disorders로 분류될 만한 행동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병리화를 신화적으로 사고할 때, 일부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신들의 세계는 인간처럼 형상화된anthropomorphic이며, 우리의 세계를, 그리고 우리의 병리까지도 모방적으로 투사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원형 혹은 신적 형상들의 "상상적 실재계mundus imaginalis"[앙리 코르뱅Henry Corbin의 개념]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의 “세속적 세계” 또한 동시에 신화적이며, 그들의 세계를 — 그리고 그들의 병리를 — 모방적으로 투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들이 신화의 상상적 영역 속에서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환상으로 반영된다. 우리의 환상은 그들의 환상을 반영하고, 우리의 행동은 단지 그들의 것을 모방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들의 원형적 상상에 의해 이미 형식적으로 주어진 것 이외의 아무것도 상상할 수도, 행할 수도 없다. 만약 ‘필연성the necessary’이란 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 즉 신화가 필연적 패턴을 서술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병리화는 필연적이며, 우리의 병리화 또한 그것을 모방하는 필연적 과정이다. 신들의 결함infirmitas 이 그들의 완벽한 구성configuration 에 본질적이라면, 그에 따라 우리의 개인화의 완성individual completion 역시 우리의 병리화 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afflicted 도 초월적 황홀의 상태beatific states of transcendence 에 있을 때만큼이나 원형적 영역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웃을 때 만큼이나, 우스꽝스럽거나ludicrous, 분노하거나, 고통받을 때도 여전히 신들과 여신들의 형상 속에 있다. 신들 자신이 허약함infirmitas 을 드러내는 이상, 신의 모방(imitatio dei) 의 한 길은 바로 결함 혹은 허약함을 통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로 이러한 원형의 결함 혹은 허약함이 우리의 자기분열self-division 과 오류error, 상처wounds 와 극단을 돌보는 양육자nurse 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에 형식을 부여하고, 그 고통을 위한 정당화와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당신에게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원형 안의 병sickness in the archetype” 이라는 개념이다 — 이는 “병의 원형” 과는 동일하지 않다. 후자의 접근은, 모든 비정상을 하나의 희생양 원형, 즉 죽음의 원리(Thanatos), 병의 다이몬(sickness daimon), 악마 혹은 그림자와 같은 단일한 병적 원리morbid principle 로 환원한다. 그리하여 악을 한 존재에게 떠넘기고, 나머지 원형들은 지극히 이상적인 상태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은 각 원형에 본래 내재한 병리화의 핵심— 그 존재 방식에 필연적으로 필요한 그 내적 어둠 — 을 적출enucleate 해버린다. 이에 반해 우리의 입장은, 병리화를 모든 원형적 복합체에 내재한 구성 요소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각 원형은 자신만의 맹목성blindness, 파괴성, 병적 가능성morbid possibility 을 지니고 있다. 죽음은 모든 존재 양식의 근저에 있으며, 비록 신들이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ἀθνητος(athnetos, 불사) 이며, 따라서 그들이 드러내는 허약함 또한 영원한 것이다. 각 원형은 나름의 방식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의 질병은 근본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bottomless depth 를 지닌다.


이 원형의 허약함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원죄는 “원형들 안의 죄the sin in the originals” 에 의해 설명된다고. 인간은 신들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우리의 비정상은 신들의 본래적 비정상을 모방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병리 이전에 존재하며, 우리의 병리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단지 시간 속에서, 신들이 영원 속에서 행하는 바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함 혹은 허약함은 반드시 태초의 원형적 허약함에 그 근거를 두어야 하며, 신들의 허약함 은 우리의 정신병리 속에서 재현된다. 만약 종교의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 건강성을 다시 회복하고restore it to health, 그들의 신을 다시 소생시키고자 한다면, 그 부활의 첫걸음은 악마의 머리 위에 쌓아 올려온 모든 병리를 되돌려 주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신이 죽었다면, 그것은 그가 지나치게 건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원형의 내재적 허약함intrinsic infirmitas of the archetype 과의 접촉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Abnormal Psychology』, 3-5)



위대한 정념passions, 진리, 그리고 형상images 은 정상적 중간치normal middles 도, 평균averages 도 아니다. 말이 어눌하면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머리에 뿔을 지녔으며, 사막에서 흑인 아내를 둔 모세의 형상 ; 기적을 행하고 십자가 위에서 찢겨나간 그리스도; 황홀경에 빠진 무함마드; 헤라클레스와 그 영웅들, 심지어 오디세우스; 그리고 경외스러운 여신들 — 이 모든 존재들은 극단 속의 영혼soul in extremis 을 드러내는 예측 불가능한 극단적 이미지unpredictable extremes) 들이다.


이러한 신화적 형상들은 모두 결함 혹은 허약함을 지닌다 — 소유, 오류, 상처, 병리화. 비코Vico 의 용어로 말하자면, 은유적 진리metaphorical truth 는 삶 그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며, 삶과는 다른 것이다 — 비록 그것이 삶의 이상적 기준을 제시한다고 해도. 즉, 이상성은 부분적으로 병리화된 거대함을 통해 표현된다.

나는 바로크적 낭만주의나 고딕적 공포, 또는 기괴함의 컬트적 숭배cult of the freakish 를 통해 부르주아를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태도는 단지 정상성의 반대면일 뿐이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혼(魂 ψυχή)의 혼돈적 본성]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 이성reason 만이 세상을 다스리거나 그 법칙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중간 지대the middle ground 에서 극단이 빠진 규범을 찾는 일은 망상delusions 이며, 허구의 신념false beliefs 이다. 그런 규범들은 사물의 전체적 본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병리화를 결여한 이미지의 규범은 우리의 심리적 관점psychological vision을 억압적 이상화 epressive idealization 의 방식으로 정상화하여, 우리 각자의 개별화된 비정상성 individual abnormalities 과의 접촉을 잃게 만든다. 결국 정상성의 환상 그 자체가 세계가 실제로 그러한 방식을 왜곡하는 하나의 왜곡distortion 이 된다.


(『Abnormal Psychology』, 25-26)





<우울>


그리스도가 부활하기 때문에, 절망despair·암흑darkening·버려짐desertion의 순간들은 그 자체로서 정당할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신화적 모델은 “터널 끝의 빛light at the end of the tunnel” 을 고집한다. 즉, 목요일 저녁에서 일요일 아침까지, 더 나은 새 날의 도래로 나아가는 하나의 프로그램. 치료therapy는 이 패턴을 — 희망적 상담에서 전기충격 요법에 이르기까지 —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반복한다. 더 나아가, 개인의 의식 자체가 이미 기독교 신화에 의해 알레고리화allegorized 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우울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신화적 형식에 따라 그것을 경험한다. 우울은 반드시 필요한 것necessary 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십자가형crucifixion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고통suffering 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울 속에 머무르는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적 알레고리에서 금요일Friday 은 그 자체로 유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일요일Sunday — 신화의 불가분한 일부 — 이 이미 처음부터 금요일 속에 선재preexistent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십자가형의 환상crucifixion fantasy 은 그 대응물로서 부활의 환상resurrection fantasy 을 가진다. 그리하여 우리의 우울에 대한 태도는 선험적으로a priori 그 우울에 대한 조증적 방어manic defense 가 된다. 심지어 우리의 의식 개념조차 하나의 항우울제antidepressant 로 작동한다. 의식한다는 것은 곧 깨어 있음awake, 살아 있음, 주의attentive, 즉 활성화된 대뇌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극단으로 밀려난 의식과 우울은 서로를 배제하게 되었고, 심리적 우울psychological depression 은 이제 신학적 지옥theological hell 을 대체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학 에서, 우울의 무거운 나태함/무기력heavy sloth 과 멜랑콜리의 메마른 절망drying despair 은 교회 라틴어로 ‘아케디아acedia’ 라 불린 죄 였다. 오늘날 치료 실천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의 서사 구조를 본뜬 우리의 문화는 이 증후군에 맞서는 단 하나의 상승적 패러다임upward paradigm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 신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여겨지지만, 그 신화의 끈질긴 잔존물 tenacious residues은 우리의 우울에 대한 태도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우울은 여전히 ‘위대한 적Great Enemy’으로 남아 있다. 인간의 개인적 에너지는 사회의 다른 가상의 심리병리적 위협들―예컨대 정신병적 범죄, 분열증적 붕괴schizoid breakdown, 중독―에 대항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우울에 대한 조증적 방어manic defenses, 회피diversions, 부정denials 에 더 많이 소모된다. 우리가 절망에 맞선 희망의 순환 속에 갇혀 있는 한, 즉 절망과 희망이 서로를 산출하는 구조 안에 머무르는 한, 그리고 우리의 우울에 대한 태도가 언제나 부활적(復活的)이라면―즉 ‘내려앉은 상태로 머무는 것being down and staying down’을 일종의 죄로 간주한다면―우리는 여전히 심리학적 차원에서 기독교적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울을 통해 깊이에 들어가며, 그 깊이 속에서 영혼을 발견한다. 우울은 '삶의 비극적 감각tragic sense of life][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에 필수적이다. 그것은 메마른 영혼을 적시고, 지나치게 젖은 영혼을 말린다. 우울은 피난처와 한계, 집중과 중력, 무게와 겸허한 무력감humble powerlessness을 가져온다. 그것은 죽음을 상기시킨다. 진정한 혁명은 자신의 우울에 충실할 수 있는 개인에게서 시작된다. 그것은 우울을 억지로 떨쳐내거나, 희망과 절망의 순환 속에서 이를 견디거나, 혹은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울이 스스로 요구하는 의식과 깊이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바로 그렇게 영혼을 위한 혁명revolution in behalf of soul이 시작되는 것이다.


(『Re-Visioning』, 98-99)




흑과 백 사이의 푸른 이행(移行, 전이轉移) blue transit은, 절망에서 비롯되어 성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 슬픔과도 같다. 여기서 ‘성찰 Reflection’은 우리가 수행하는 집중된 행위라기보다, 오히려 차가운 고립된 억제isolating inhibition의 형태로 우리에게 스며드는 푸른 빛의 거리 blue distance로부터 오거나 그곳으로 우리를 이끄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수직적 철회vertical withdrawal는 또한 일종의 비움emptying out, 곧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의 형성 혹은 심오한 ‘경청’profound

listening의 상태와도 같다 — 이미 은빛의 예감 intimation of silver을 띠는 경계의 상태로서.


슬픔Sadness이 전부는 아니다. nigredo[연금술의 흑화(黑化) 단계]의 격렬한 해체는 ‘청색 영화 blue movies’, ‘음란한 언어 blue language’, ‘사랑의 타락l’amour bleu’, ‘푸른 수염bluebeard’, ‘잔혹한 살인blue murder’, 혹은 청색증으로 변한 육체cyanotic body의 형태로도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외설적·그로테스크하거나 폭력적인 아니무스/아니마의 환상들이 작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알베도albedo'[연금술의 백화(白化) 단계]로 향하는 푸른 이행/전이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폭력 속에서도 은빛의 단편들을 찾아야 한다. 공포와 외설을 매개로 새로운 자기인식의 패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부패(putrefactio)는 새로운 아니마 의식, 곧 아니마 자체의 죽음·왜곡된 친연성을 포함해야 하는 새로운 심적 토대를 산출하고 있다. 마돈나Madonna의 푸른 예복은 수많은 그림자를 품고 있으며, 바로 그 그림자들이 그녀에게 이해의 깊이를 부여한다. 달 빛으로 형성된 정신 또한 Lilith[밤의 여신]와 함께 살아왔기에 결코 순진할 수 없고, 언제나 그림자 쪽으로 깊이 파고들 수밖에 없다. 푸른 색은 백색을 순진무구함으로부터 보호한다.


흑에서 백으로, 푸르름을 경유해 이행하는 과정은, 푸른 색이 언제나 그 속에 흑의 흔적을 지니고 있음을 함의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민속에서 흑은 푸르름을 포함하지만,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푸른 빛이 오히려 백의 범주에 속한다.) 푸르름은 mortificatio[연금술의 ‘죽음 단계’]가 백화(白化)로 변형되는 흔적을 품고 있다. 이전에 제거할 수 없던 흑의 끈적임―역청이나 타르 같은―은 전통적으로 ‘푸른 덕목blue virtues’이라 불리는 ‘항상성’과 ‘충실함’으로 전환된다. 같은 어둠의 사건들이 전혀 다른 감각을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을 벗겨내고, 낡은 구조를 분쇄하고, 고집스러운 의지를 단두하며, 자기 내부의 쥐와 부패를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mortificatio의 국면은 결국 우울로 이행[전이]한다. 가장 짙은 푸름이 흑이 아니듯, 가장 깊은 우울도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는 mortificatio는 아니다. mortificatio는 더 강박적이고, 이미지들이 행위에 고착되어 있으며, 가시성은 제로이고, 심리는 물질적 관성 속에 포획되어 있다. 그것은 곧 ‘증상의 시간a time of symptoms’이다. 이러한 설명 불가능한, 철저히 물질화된 영혼의 고통은 색의 행렬에 따라 ‘우울로의 운동’을 통해 완화된다. 이 우울은 때로 “이전엔 몸이 아팠는데, 이제는 눈물만 흐른다It was better when

it hurt physically-now I only cry”는 애도적 후회mournful regret로 시작된다 — ‘비참한 비애blue misery’이다. 푸른 빛이 나타남과 함께 감정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그 중심적 감정은 애가(哀歌)이다. 랭보Rimbaud는 푸르름을 모음 ‘O’와 동일시했고, 칸딘스키는 이를 플루트, 첼로, 더블베이스, 오르간의 음색과 연관시켰다. 이러한 애도들은 영혼을 암시한다. 상상적 표현을 통한 반성과 거리두기의 능력이다. 이로써 우리는 왜 원형 심리학이 우울을 영혼 형성soul-making의 왕도via regia로 강조했는지를 보다 명확히 볼 수 있다. 우리가 ‘증상’이라 부르거나 그것의 ‘치료’라 부르는 금욕적 실천, 혹은 흑화 단계에서 발생하는 죄책과 절망의 분해는 낡은 자아-인격을 축소시키지만, 이러한 축소는 단지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영혼의 감각’을 낳기 위한 전주이며, 그 감각은 우울의 푸른른 상상 속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Blue』, 34-36)



푸르름은 ‘성찰’의 개념을 단순한 ‘거울적 반영mirroring’의 차원을 넘어, 숙고·사유·명상의 차원으로 심화시키는 색이다.


백색을 예고하는 색들은 ‘이리스(Iris)’와 무지개, 그리고 다채로운 꽃들, 무엇보다도 수많은 눈을 가진 공작의 꼬리의 찬란함으로 말해진다. 파라켈수스Paracelsus에 따르면, 이러한 색들은 건조함이 습윤함에 작용함으로써 생겨난다. 믿기 어렵겠지만, 연금술적 사막에는 홍수보다 더 많은 양의 색이 있으며, 강렬한 감정보다 절제된 감정 속에서 더 풍부한 색이 발생한다. 건조함은 영혼을 개인적 주관성에서 해방시키며, 감정의 습기가 물러날 때, 한때 ‘감정feeling’이 지녔던 생동감은 이제 ‘상상력 imagination’으로 옮겨간다. 이 지점에서 푸른 빛은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푸르름은 바로 ‘상상’ 그 자체의 색이기 때문이다. 이 명증적인 명제apodicticus는 지금까지 탐구해 온 모든 것에 근거한다. 즉, 몽상을 이끄는 ‘푸른 기분blue mood’, 신화적 상상력을 먼 곳으로 부르는 ‘푸른 하늘’, 서구에서 아니마의 전형이자 이미지 창조의 자극자인 ‘성모 마리아의 푸르름’, 그리고 ‘푸른 장미’—자연에 역행하며 불가능한 것을 그리워하는 pothos[그리움·열망을 의인화한 신]에 이르기까지. (이 꽃, pothos는 무덤 위에 놓였던 ‘푸른 델피늄(larkspur)’이었다.)


(『Blue』, 39)



이 성취의 본질은 지금까지 우리가 불러낸 이들의 기록에서 추출할 수 있다. 그들은 연금술적 정신적 합일(unio mentalis)이란, ‘사유와 이미지’, ‘지각된 세계와 상상적 세계’의 상호침투를 의미한다고 시사한다. 그것은 더 이상 사물과 사유, 현상과 실재, 이론을 전개하는 정신과 환상을 구축하는 영혼 사이의 구분에 매달리지 않는 의식의 상태이다. 우리는 이 정신적 합일을 ‘푸르른 빛’으로 칠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탐구해 온 푸름은 ‘현상’을 ‘상상적 실재imaginal reality’로 변모시키며, 사유 자체를 새롭게 상상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푸름은 백색으로 향하기 위한 준비이자 그 속에 포섭되어 있다. 이는 백색이 ‘대지화(earth)’—즉, 고정되고 실재적인 것—가 되는 것은, ‘푸른 눈 the eye becomes blue’—즉, 사유를 상상적 형상으로, 이미지를 실재의 기반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통해서임을 암시한다.


(『Blue』, 43)




르네상스의 작가들―이를테면 페트라르카Petrarch, 피치노, 미켈란젤로의 편지들을 떠올려보라―그들의 편지에는 아니마가 가득하다. 우울, 허약, 질병, 불만불평, 다양한 형태의 사랑, 그리고 무력감 등. 그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고 토로한다. 물론 이들은 동시에 극도로 활동적인 인물들이었다. 피치노는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불평에도 불구하고 결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마흔 살에 이미 자신을 늙었다고 여겼으나, 결국 여든을 넘겨 생을 이어갔다.


영혼은 절망과 우울을 통과하면서 그 지구력과 인내를 형성한다. 라파엘 로페스Rafael Lopez가 말했듯이, 이러한 지구력은 희망이 아니라 ‘무력감hopelessness과 우울 속에서의 지속’에서 생겨난다. 나는 이탈리아인들이 아니마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정동 moods의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느낄 줄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 모든 기분·허약함·무력감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치료 속에서 배우게 되는 한 가지는, 우울이 ‘나의 것’이지만 동시에 ‘나 자신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울 속에서 삶을 산다. 우울과 함께 일한다.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증적 상태manic일 때만, 우리는 완전히 멈추게 된다.




무언가를 철저히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To feel something thoroughly does not mean to be it thoroughly. 감정을 전적으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현대의 심리 치료는 바로 이 ‘감정의 숭배worship of feelings’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만약 우리가 ‘사상’을 그처럼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을 ‘편집증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을 마치 ‘자기 존재의 진리’인 양 믿는다. 우울해질 때, 그 감정은 분명 너의 것이다. 너는 그것을 철저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약을 먹거나 조증적 방어에 들어가지 않는 한.) 그러나 그 기분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우울한 방식으로 하루를 살 수 있다. 사물의 속도가 느려지고, 슬픔이 가득하다. 지평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고, 알아차릴 수 있으며, 그대로 살아갈 수도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 일상적으로 혹은 주기적으로. 당신은 그 속에서 말하는 법을, 세상을 그를 통해 보는 법을, 그것을 감추지 않고 사람들과 연결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놀랍게도, 당신이 우울과 동일시하지 않을 때 타인들은 그에 응답한다. 한 사람의 한숨은 곧 다른 사람의 한숨을 이끌어낸다. 우울 속에서 그것이 되지 않고도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안도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배움을 청할만한 스승이다 — 때로 지혜로운 노인들이 그러하듯이. 우울은 당신으로 하여금 바닥에서 살아가게 한다. 그러나 바닥에서 산다는 것은 ‘그로부터 부활하라’는 기독교적 명령 — 곧 터널 끝의 빛이라는 환상 — 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빛의 환상이 사라질 때, 우울은 즉시 덜 어두워진다. 희망도 절망도 없다. 희망의 메시지는 오히려 절망을 더 짙게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제약 산업pharmaceutical industry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자극제다.


(『Inter Views』, 19-21)





깊이depth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실제로 우리가 ‘아래에 있는 below 모든 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이끈다. 이는 정신분석의 시작 이래 지속되어 온 경향이다. 억압, 잠재의식subconscious, 그림자shadow 등의 개념은 모두 이러한 하강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의 이름이다. 그 이미지들은 묻힌 자들 burials, 죽은 자들, 조상들ancestors, 쓰레기나 하수 속에서 일하는 자들, 배관공, 범죄자와 추방자, 하체와 그 의복과 기능, 우리가 ‘하찮다look down upon’고 여기는 생명형태들—유인원에서 벌레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아래쪽, 바다의 바닥, 지하층과 지하실, 그리고 실로 모든 ‘뒤집을 수 있는 것들hyponoia’—즉, 그 이면을 드러내면 더 깊은 의미가 밝혀지는 모든 것들—이다.

이러한 ‘바닥으로의 하강bottoming’ 이미지들과 함께하는 정동은 주저함, 혐오, 슬픔, 애도, 억제, 폐쇄, 무기력, 그리고 우리를 짓누르는 깊이의 감각—우울, 억압, 억제suppression—이다. 우리의 하강적 상상력downward imagination은 이미 대지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보텀의 꿈 Bottom’s Dream’[세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이다.


(『Dream and tbe Underworld』, 139-140)




내면 공간으로의 이행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공간이 반드시 어두우며 black, 반드시 비어 있어야 empty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해독제antidote는 극약poison 속에서 드러날 수 없다. 미래의 희망으로 도피하지 않고, 경직된 자기 중심의 집중을 지속하는 것 Rigid self-centered focusing―이것이 바로 멜랑콜리의 방법melancholy method이다. 그것은 원형적 자기 조정archetypal self-correction의 과정이다.


내면의 좁아진 고독과 상상적 독백에 동반되는 바로 그 불안과 순환적 사고circling thoughts는, 모든 중심화 과정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주변적 활동이다. 중심과 원주center and circumference의 상호 모순은 ‘모순적인 우울agitated depression’—손을 비비고, 서성이고, 잠들지 못하는 상태—이라는 역설 속에서 드러난다.


극도로 집중력을 높이는 사막의 현자desert saint조차 잡념의 소란에 시달리고, 홀로 책에 몰두하고자 하는 늙은 왕old king 또한 동시에 멀리 떨어진 국경을 방어하느라 분주하다.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다’는 환상에 빠져 있을 때만, 우리는 ‘만물(萬物)the ten thousand things.’을 걱정한다.) 구조는 강박적으로 자기 내부의 대립을 작동시킨다. 신체의 상징은 여전히 ‘머리’다.


심리 치료자가 우울한 사람에게 ‘그 우울 속으로 들어가도록’ 권하거나, 노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환상·꿈 속의 낯선 타자성과 함께 머물도록 하는 것은, 피치노Ficino—토성의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 child of Saturn—가 제시했던 하나의 설득력 있는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세넥스(노인 의식senex consciousness)는 마침내 원형적 형상들archai의 상상적 영역 속에서 안식을 얻는다. 그 형상들은 끝없는 복잡성과 모순의 신들dei ambigui이다. 멜랑콜리는 우리가 더 이상 사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지점까지, 곧 정신의 극한이자 내면의 공허로 우리를 이끈다. 이곳은 ‘경계선 borderlands’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이 "감정적 양가성ambivalence"[프로이트(1917) 「애도와 멜랑콜리」]이야말로 멜랑콜리의 근본 요인이다. 그러나 피치노의 접근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우울의 심연 psychotic bottom of depression에서도 내적 모순을 해소하려는 분노의 충동은 없다는 점이다. 대립적 충동들은opposite impulses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로 나타난다. 이 경계에서는 한쪽이 다른 쪽과 동일하다. 상상fantasy은 이 대립들을 더 이상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그저 자기 자신일 뿐, 어떤 판단이나 위치, 대립의 체계 속에 기소되지 않는다. 긍정할 것도, 부정할 것도 없다.


(『Negative Senex』, 98-99)






<상처>


‘근본 외침basic cry’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병리 속에 내재한 아이의 심상the child in the pathology을 불러낼 수 있다. 마치 사람들 안에, 배제된 채 버려진 내용abandoned content에 직접적인 목소리를 부여하는 하나의 근원적 외침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에게 그 외침은 “도와줘, 제발 도와줘”일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줘. 내 모든 특성을 가리지 말고, 판단도, 질문도 하지 말고, 그냥 전부 받아줘.” 혹은 “내가 무언가를 하거나,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그냥 받아줘.” 다른 외침은 “나를 안아줘,” 혹은 “가지 마, 절대 나를 혼자 두지 마”일 수 있다. 또는 “나를 사랑해 줘.” 혹은 “나에게 가르쳐 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 줘, 알려 줘.” 또는 “나를 들어 올려 줘, 나를 지켜 줘.” 혹은 심연bottom으로부터 들려오는 외침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나를 내버려 둬, 완전히 혼자 있게 해 줘. 그저 내가 존재하도록 놔둬.”


일반적으로 근본의 외침은 아이의 수용적 목소리receptive voice of the infant로 발화된다. 여기서 주체는 객체가 된다. 즉, ‘타인의 손 안에 있는 나(me in the hands of others)’이다. 행동 능력은 없지만, 그 무력함 속에서도 자기의 주체성을 절실하게 표현한다. 영아의 주체성은 바로 "울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기 존재를 조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개인이 자기 환경을 향해 내는 근본의 외침에서도 같은 구조를 듣는다. 그는 주변 사람들entourage을 도우미, 연인, 혹은 항구적인 동반자—곧 티아소스thiasos[디오니소스의 추종 집단]—로 전환시킨다. 그들은 그를 돌보거나, 곁에서 끊임없이 봉사하거나, 가르치거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결코 그를 혼자 두지 않거나, 혹은 반대로 그로부터 계속 도망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 외침은 한 개인이 자기 욕구를 스스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도울 수도, 홀로 남겨둘 수도 없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그 외침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버려진 아이abandoned child’에게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그 외침은 언제나 거기에 있으며,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원형적 필연성archetypal necessity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 도울 수 없는 것들, 다시 되돌아가 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음을. 이 도달할 수 없는 장소들—우리가 언제나 노출되고 두려워하며, 배울 수도, 사랑할 수도, 변형하거나 억압하거나 수용함으로써 도울 수도 없는 그곳들—이 바로 거친 광야wilderness이며, 버려진 아이가 숨어 있는 굴cave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러한 장소들로 퇴행한다는 사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진술이다. 우리는 삶의 과정 속에서,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이 ‘치유 불가능한 병리incurable psychopathology’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언제나 동일한 아이, 변하지 않는 내면의 아이the unchanging child와의 접촉 전후를 경유하며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이 ‘되기/생성과 존재becoming and being’, ‘변화와 불변’, ‘차이와 동일성the different and the same’이라 부르는 것들 사이의 관계가, 심리학에서는 한편으로 ‘성장(growth)’과 다른 한편으로 ‘정신병리(psychopathy)’로 대응된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정신 병리’란, 정의상 되돌리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일생을 통해 성격의 일정한 공백lacuna으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버려진 아이의 "영원한 상처eternal vulnerability"이며, 동시에 바로 그 아이의 "지속하는 생성evolving futurity"이다.



이 난제 속에서 우리는 보통 한쪽 편만 붙잡는다. 스스로 달라지고, 변화하며, 진화하고 있다고 느끼다가도, 곧 근본 외침의 파열적 재현shattering recurrence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며 되돌려진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여전히 똑같다’는 절망적 정체감hopeless stuckness에 사로잡힌다.

심리 치료의 역사 또한 이 겉보기에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 속에서 끊임없이 왕복해 왔다. 어떤 시기에는 퇴화론degeneration theory[생물학적 결정론]—즉, 유전이나 체질 혹은 예정론적 관점—이 “성격이 곧 운명이다(character is fate)”라 선언하며, 인간이 이미 정해진 패턴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고 본다. 반대로 또 다른 시기, 이를테면 오늘날의 미국의 인본주의적 발달심리학(humanistic developmental psychology)에서는 모든 심리적 사건을 ‘성장을 통한 변형growth through transformation’의 범주로 포괄한다. 이처럼 인간과 심리치료는 변화와 불변, 생성과 정체 사이를 오가며 그 어느 한쪽에도 머물지 못한다.



그 어느 입장도 충분하지 않다. 플라톤의 『소피스트Sophist』에 나오는 은유적 아이the metaphorical child처럼, 선택을 요구받았을 때 “둘 다both”를 택하는 그 아이처럼, ‘버려진 아이’ 역시 두 가지 모두에 속한다. 즉, 한편으로는 결코 성장하지 않는 존재로서, 일생 동안 지속되는 정신 병리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동시에 바로 그 취약성vulnerability으로부터 솟아나는 미래성futurity이기도 하다. 콤플렉스와 틈lacunae은 그대로 존속한다. 달라지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 장소들과 맺는 관계, 그리고 그를 통과하며 이루는 성찰이다.

마치 변화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과의 접촉을 유지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또한 ‘변화’를 발달의 관점이 아니라, 그 자체의 운동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뜻한다. ‘진화’는 종종 “과거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T. S. 엘리엇]. 우리가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바로 그것이, 사실은 우리가 버리려 하는 부분이다.


(『Abandoning』, 19-20)




"심리적 수용을 위한 내면의 그릇psychic vessel of containment"[W. R. Bion]을 구축한다는 것은, 곧 영혼형성soul-making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언제나 ‘피 흘림bleeding’과 ‘누출leaking’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내적 경계가 막히지 않은 상태unstoppered condition에 대한 절망이 없다면, 누가 그 작업에 나설 수 있겠는가? 아니마의 혼돈anima-mess에서 아니마의 그릇anima-vessel으로의 전환은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약함과 고통에서 겸허함과 예민함으로, 쓴 감정과 불평에서 짠맛과 피의 맛으로, 상처의 정서적 고통(그 원인·범위·치유)에 집중하던 시선에서 그 상처의 심상적 깊이imaginal depth로 향하는 이동으로. 또한 자궁womb의 상징을 여성이나 ‘여성성femininity’에게 투사하던 상태에서, 그것의 근원을 자기 신체의 리듬 속에서 발견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말한 바 있다. 모든 증상은 상처의 원형적 조건을 불러온다each symptom brings the archetypal condition of woundedness.. 비록 상처가 증상을 통해 경험되더라도, 둘은 동일하지 않다. 증상은 진단의 영역에 속하며, 다른 무언가의 원인을 지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해온 바대로, 상처는 우리를 상처 입음의 원형적 조건 속으로 데려가며, 가장 사소한 증상조차 초월적 의미를 부여한다. 각 증상은 우리를 그것의 환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피부에 반점이 생기면 우리는 나병환자가 되고, 설사는 우리를 어린 아기로 돌려보내며, 염좌는 우리를 벤치 위의 노쇠한 부랑자로 만든다. 상처가 가져오는 확대(magnificatio)는 원형적 의식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 즉, 나의 이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더 많은 것이 작동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상태다. 그때 인간은 열린 상처open wound가 되어, 온몸이 아프다. 의식은 ‘상처 입은 상태wounded condition’로 변형된다. 우리는 일반적인 고통과 더불어, ‘고통당함’(afflictedness)을 하나의 ‘세계-내-존재 방식(being-in-the-world)’[하이데거]으로 체험한다. 상처는 불가능과 무능력의 선언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할 수 없다.” 그것은 한계의 사실성을, 즉 한계가 외부의 힘에 의해 부과된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내재한 해부학적 간극anatomical gap임을 잔혹하게 일깨운다. 이 간극은 내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내가 손을 뻗을 때마다 동반한다.



"뿌에르(영원한 소년, puer structure, puer aeternus)에게 한계는 견디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다”라는 진술은 상처의 고통 그 자체로 드러난다. 그는 여전히 빛나고 명랑하며, 언제나처럼 순진한 얼굴로 서 있지만, 그의 다리에 두른 두꺼운 깁스가 그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뿌에르-성인Puer-man은 심리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숨긴다. 왜냐하면 그 상처는 바로 이 의식 양식mode of consciousness의 약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무능을 느끼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야기의 끝에서 그 상처가 드러날 때, 그것은 그를 ‘하나의 뿌에르a puer로서 죽이는’ 사건이 된다. 상처는 곧 죽음의 필멸성mortality이다. 모든 콤플렉스는 각자의 증상, 아킬레스의 발뒤꿈치(Achilles’ heel), 그리고 인간성으로 통하는 열린 상처를 지닌다. 그것은 삼손의 머리털이든, 지그프리트Siegfried의 심장이든, 언제나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취약점painful spot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자신이 필멸적 존재mortality임을 배운다.


치료therapy는 바로 그 자리를 건드려야 한다. ‘아름다운 상처의 상태beautiful wounded condition’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의 실제 고통actual present hurt 속으로 이동해야 한다. 원형은 ― 기억해두라 ― 일반화하는 것이다The archetype, remember, generalizes. 왜냐하면 원형이란 본래 보편적 형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료는 그 보편적 상처 개념을 넘어서, 실제의 절단·마비·출혈이 일어나는 구체적 기관—간, 어깨, 발, 심장—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각 기관은 의식의 불꽃spark of consciousness을 잠재적으로 지니며, 질병과 상처는 그 의식을 해방한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 기관의 원형적 배경을 자각하게 한다. 이전까지 그 기관은 단지 무의식적 자연의 일부로서 생리적으로 기능했을 뿐이지만, 이제 자연은 상처 입었고, 그 기관은 ‘열등inferior’해졌다. 기능의 박탈deprivation of natural functioning은 그 기능의 의식을 낳는다. 우리는 비로소 그 기관의 감각, 가치, 작용 영역을 인식한다. 상처를 통한 한계는 기관을 의식으로 끌어올린다. 마치 우리가 어떤 것을 오직 그것을 잃음으로써만 아는 것처럼, 그 한계와 부패 속에서만 아는 것처럼. 죽음이 주는 지식이란, 어떤 심리적 사물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를, 영혼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지식이다. 상처는 ‘죽어가는' 의식을 해방한다 A "dying" consciousness is released by the wound..



이 죽어가는 의식dying awareness, 혹은 죽음을 자각하는 의식awareness of dying은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상처가 더 이상 그렇게 필수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처는 puer 의식(puer consciousness)의 치유 과정 그 자체이다. 그리고 치유가 진행됨에 따라, 의식 안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융]의 원형이 서서히 성좌화constellation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는, 실제로 뿌에르적 개인puer persons과 치료의 소명vocation to therapy 사이에 존재하는 이 기묘한 연관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뿌에르 Puer는 자신의 상처와 죽음성으로 인해, 타인의 상처를 감지하고 그 고통을 돌보는 길로 끌려들어간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단순히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자명하며, 결코 치유에 충분하지 않다.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치유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의식을 완전히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그 경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상처 입은 치유자란 특정한 인간person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 형식으로 인격화된 형상personification of a kind of consciousness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의식은 신체 기관의 절단과 고통을 통해 발생하며, 그 과정에서 각각의 기관이 지닌 의식의 불꽃이 방출되어 기관-의식organ-consciousness 또는 신체-의식을 일으킨다. 치유는 ‘온전함wholeness’이나 ‘통합integration’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절단dismemberment을 통과하며 그 너머로 돌파해 나가는 의식의 발생breaking through dismemberment에서 비롯된다.


(『Ulysses' Scar』, II5-II7)






<문화의 장애 CULTURAL DISORDER>



문화는 닫힌, 심지어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연금술적 부패alchemical putrefactio 즉, 발효의 신체로서의 타락decadence—를 수반한다. 생성과 부패는 동시에 일어나며, 이 둘을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문명에 동반되는 것은 관개 체계, 기념비, 승리, 역사적 지속, 부와 권력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공동의 목적을 지닌 응집력의 체계로 작동한다. 문명은 작동한다works; 그러나 문화는 피어난다flowers. 문명은 미래를 향해 바라보며, 문화는 과거를 돌아본다. 문명은 역사적 기록이며, 문화는 신화적 기획이다.


문명과 문화는 서로 연관될 수 있지만, 동시에 서로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듯하다. 문화 없는 문명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그렇다면 문명 없는 문화는 가능한가? 나는 18세기에 서양인들이 발견한 Tierra del Fuego의 인디언들을 떠올린다. 그들에게는 불도, 옷도, 거처도, 도구도, 그릇도 거의 없었고, 항상 굶주리고 병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휘는 셰익스피어나 조이스보다도 더 방대했으며, 그들의 문화는 전적으로 온갖 종류의 신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해온 문화란, 뒤를 돌아보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invisibilities에 대한 향수nostalgia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 비가시적인 것들을 다시 현재에 불러내어, 인간의 삶을 그 위에 기초짓는 행위다. 문화적 과업은 개인의 감수성을 벗기고peel, 채찍질하며flail, 자극시킨다excite. 그렇게 해서 감수성이 다시—여기서 ‘다시’라는 말을 주목하라—이 비가시적인 것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나침반에 따라 삶의 방향을 정하도록 한다. 결국 문화의 핵심 음절은 접두사 "re-"에 있다.


언어 유희에 근거해 논증을 세우자면, “뒤로back wards는 문화가 되돌아가고자 하는 “뒤쪽”, 즉 근원으로의 회귀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이곳—정신 병동의 병리적 공간—에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와 사회 속에서 되풀이되는 반복적 형상recurring forms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모든 사회는 각기 나름의 병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보편성과 만성성chronicity 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하나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유전적 결함’으로, 다른 하나는 도덕적 관점에서 ‘죄’, ‘타락’, ‘영원한 저주’로 나타난다. 만약 신들이 질병이 되었다면, 이러한 만성적 병리의 형태들은 변장한 신들gods in disguise이다. 그 신들은 왜곡되고 비인간적인 형태 속에 은폐되어 있으며, 우리가 이 병리적 형태들—우리 자신과 도시 속의 모든 만성적 무질서—너머에서 그 신들을 통하여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문화의 근원적 행위가 된다. "감정 교육(education of sensitivity)"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 시간 속의 현상들을 통과하여, 그 안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패턴eternal patterns within time을 보려는 시도 속에서. 따라서 우리는 문명속의 불만[프로이트]을, 오히려 문화의 근본 요소로 간주할 수 있다.


질병을 신성과, 문화를 기형deformity과 연결하는 일은 다소 놀랍게 들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들이 티 없이 순수하고pristine, 대리석으로 빚어진 올림포스의 모델 형상이며, 눈처럼 깨끗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신들은 그들의 그림자, 고통, 결함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이 시간을 초월한 존재(athnetos, “불멸자”)이듯, 신화 속에서 그들이 드러내는 이러한 무질서의 그림자들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의 사건들, 즉 만성적 병리속에서 재현된다. 우리가 그들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면, 우리는 시간 속에서 그들이 영원 속에서 행하는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영원한 고통은 곧 우리의 인간적 약함이다Their eternal afflictions are our human infirmities.


내 요지는 이제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문화는 뒤처진 것the backward, 곧 병리적이고 결함 있는 차원과 마주할 때 비로소 성장한다. 이것이 정신병원에 들어가 제자로 훈련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학생들이 치료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돕기 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문명에서 문화로 이동하려는 시도다. 문명으로부터 버려진 만성적 존재들(chronic castaways)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시간을 초월한 영혼의 불치성과 마주하게 된다. 당신 자신의 ‘내면의 뒤처진 병동을 다시 떠올려보라. 그것을 간호하고nursing, 곁에 앉아sitting, 그 안에 머물며dwelling, 그 보이지 않는 신비를 추적하고tracing, 그 만성적 병리에 대해 연민을 품는 일—이 모든 것은 당신의 ‘진보progress’를 늦춘다. 그러나 바로 그 지연이, 인간을 미래지향적 사고에서 본질적 사고로 이끈다. 그것은 존재와 성격, 삶과 죽음의 의미, 사랑과 그 실패, 그리고 언어·행위·태도 속의 작은 것들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한다. 그때 우리는 다르게 듣고, 다르게 보고, 더 섬세하게 받아들인다. 내 안의 견딜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그 두려움이야말로 연민compassion의 첫 징후다. 타인에 대해서도 내 태도는 달라지고, 언어는 더 정제되고 조율된다. 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새처럼 감지하며, 개처럼 공기 속의 보이지 않는 것을 추적하게 된다. 나는 이해를 위해 예술에, 행위를 위해 의례ritual에,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견뎌냈는지를 배우기 위해 과거의 남녀의 삶에 눈을 돌린다. 나는 공동체나 문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느낀다. 그것들은 너무 인간적이고, 너무 가시적이다. 나는 신화와 이미지, 우상과 제단altars, 그리고 자연의 존재들로부터 상상적 도움imaginal help을 필요로 한다—개인적으로,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서다. 감정 교육은 바로 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병동the back ward에서 시작되며, 문화는 만성적 무질서(chronic disorder)에서 자라난다.


마지막으로 단락 하나만 더 허락한다면, 나는 이제 ‘만성chronic’ 그 자체를 이해하고 감사하게 된다appreciate. 그것은 단지 속도를 늦추는 일도, 관용의 계기이거나 생존의 교훈도 아니다. 나는 점차 깨닫게 된다. 만성적인 것이란 문명적 시간civilized time—즉 “나중에 나아질 것”이라는 미래의 시간도, 적응·위장·불만의 현재의 시간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시간을 초월한 존재의 구조timeless structures of being로서, 우리와 함께 머물며, 결코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형태로 우리와 동행한다. 겉으로는 문명과 그 ‘용감한 행진’에 어긋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부적합성out of step이 문화의 생명이다. 문명은 결국 쇠퇴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문화는 언제나 부패decay와 무질서 속에 존재함으로써, 문명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신들의 그림자 속에는 신들 자신이 있다. 그들의 신화는 여전히, 결코 사라질 수 없기에 계속 남아 있는 것—소멸하지 않음으로써 생존하는 것—의 한가운데 살아 있다.


(『Chronic Disorder』, 19-21)


<끝>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길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 : 마시모 레칼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