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h Wellisch, 『이삭과 오이디푸스 : 아케다, 이삭의 희생 제의에 대한 성서심리학 연구 Isaac and Oedipus: A Study in Biblical Psychology of the Sacrifice of Isaac, The Akedah(“Psychology & Religion”, Volume V) 』 (Routledge & K. Paul, 1954)
아케다 Akedah 사건과 관련하여 『Literature Suspends Death: Sacrifice and Storytelling in Kierkegaard, Kafka and Blanchot』의 1장 '죽음을 지연시키는 문학'을 번역한 바 있다. Chris Danta의 『죽음을 지연시키는 문학 Literature Suspends Death』은 기존의 아케다 사건에 대한 현대적 경험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죽음, 죽음을 둘러싼 세대의 문제, 문학적 삶과 죽음의 지연, 희생과 서사 전략 등을 키에르케고르, 카프카, 블랑쇼를 통과하여 다루고 있다. 반면에 Erich Wellisch의 『이삭과 오이디푸스 : 아케다, 이삭의 희생 제의에 대한 성서심리학 연구』는 다른 맥락으로 심리-종교적 모델을 보여준다.
아케다(עֲקֵידָה, ǎqedāh)는 “결박 binding"을 의미하는 말로, 구약 창세기 22장(1-19절)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경험 혹은 사건을 다룬다. 신학에서 이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순종, 희생제의와 인간 제물의 거부, 언약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의 해석, 전통적 해석과 현대적 해석의 차이가 여전히 존재한다. 유대교의 전통, 랍비들의 구술 전통에서(Wellisch 글의 본문에서 논의됨) 아브라함은 사탄의 도전을 받았으며, 신이 이를 시험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 제물로서의 그리스도 상징으로 해석된다. 아버지에게 바쳐질 아들, 즉,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결된다. 이러한 전통적 해석과 달리 현대 신학에서 아케다는 신약 속죄론atonement theology에 직접적으로 대면된다는 주장은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아케다에서 순종과 믿음, 신의 주권과 인간 윤리, 희생과 언약의 주제가 여전히 작동한다.
Erich Wellisch는 『이삭과 오이디푸스 : 아케다, 이삭의 희생 제의에 대한 성서심리학 연구 』에서 다양한 기독교, 유대교적 해석 자료를 활용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특히 고전적 정신분석학에서 논의되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아케다 사건에 적용하고 있다. 그는 아케다 사건을 신화적 서사 혹은 신학 텍스트로서 읽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대한 탐색의 기본 자료로서 읽어내고 종국에는 임상적 고찰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아케다 사건의 심리 구조는 아버지(아브라함)-아들(이삭)-신(야훼) 간의 복잡한 역동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격적인 적용 사례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변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필요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 앞에서 보여주는 ‘희생’의 구조(이는 신학적 전통과 관련있다)아래,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충동성을 유아 살해의 역사적 측면에서 '라이우스' 콤플렉스(아버지 콤플렉스)로 읽어내고, 아들 이삭은 수동적/순종적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변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공격적인 아들 형상을 가진 프로이트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다른 양상이다), 마지막으로 이들 사이에서 위치한 어머니 사라의 '이오카스타' 콤플렉스 등에서 그러하다. 그리하여 "다양한 아케다 모티프"-즉, 전통적인 오이디푸스적 역동이 포함되고, 그것과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의 존재를 탐구한다.
특히 후반부에서 다양한 아케다 모티프를 실제 임상적 고찰을 통해, 아케다 모티프가 심리 치료 장면에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즉, 아케다 서사가 단지 신화적, 신학적 상징과 주제를 넘어서 현대인의 가족 관계안에서 독특한 심리 구조의 하나로서 유의미한 가능성이 있음을 통해서 심리-종교적 모델을 수립하고자 한다.
다만, 1954년의 출판 년도에서 알 수 있듯이, 심리·정신분석학·신학·문화비평 분야의 최신 성과와는 거리가 멀다. 본서의 본문에도 여러 번 인용되지만, 아케다 이야기의 유대교적 전승, 이슬람적 독해 맥락 등이 심리, 정신분석학적 해석 근거로 활용되기 때문에 학문적 영역에서, 특히 성서 텍스트의 전통적·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논리적 근거가 취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프로이트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언급하면서도 아버지-아들-어머니의 삼각 구조의 갈등과 성적 욕망의 토대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비록, 실제 임상 장면에서의 적용을 시도하고 있지만, 현대의 심리 관계에서 아케다 모티프의 치료적 개입으로서의 구체성과 효용성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 살해의 '충동성'에 사로잡힌 아버지, ‘권위에 대한 순응 성격 구조’, ‘아들로서 겪는 존재 상실감’ 등의 심리 패턴에 대한 탐색을 통한 신학적- 심리, 정신분석적 통합적 접근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다. 나는 지식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없는 지식은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Wellisch의 접근은 의미가 있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구독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최근 공부와 일을 병행하다보니 번역 작업의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천천히라도 발걸음을 옮기겠습니다.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 미뤄왔던 번역글들을 올릴 계획입니다.
III. 아케다에서 오이디푸스 갈등 THE OEDIPUS CONFLICT IN THE AKEDAH
앞선 장들에서는 아케다Akedah와 관련된 주석 및 전승들에 대한 사실적 자료의 제시에 주된 관심이 있었다. 이제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그 결과들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이 논의될 것이다. 이 연구의 첫 과제는 아브라함Abraham·이삭Isaac·사라 사이에 존재했다고 가정해야 하는 오이디푸스 갈등의 고찰이다. 이는 그러한 갈등이 성서 이야기 속에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이야기가 무의식적 오이디푸스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심리학적 실천이 밝혀낸 여러 특징과 세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케다 사건 당시 아브라함은 이미 매우 노령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이 절정에 이른 상태였지만, 남편이자 부족의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힘이 이제 쇠퇴하고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질투하거나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이슬람의 전승에서는 그러한 오이디푸스적 특질이 본능적으로 덧붙여졌다는 사실이다.
전승에 의하면, 그 신생아는 아버지와 외모가 놀라울 만큼 흡사하여 둘을 서로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부분적으로는 이삭이 실제로 백세의 노인 아브라함의 친아들임을 입증하려는 목적을 지녔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앞서 20쪽에서 언급한 프레이저Frazer의 고찰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원시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유사성은, 아버지가 죽어 아들로 다시 태어나거나 환생했다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이것은 곧 아버지의 역할이 위태로워졌음을 의미하며, 아브라함 또한 프레이저가 묘사한 힌두 사회의 아버지들처럼 유사한 불안을 느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라이오스Laius의 충동이나, 우프살라의 온 왕King On of Upsala이 유아 살해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 했던 욕망을 전혀 낯설게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이 마음속에 어떤 비밀을 품고 있었으며, 그 비밀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서 사라에게 숨기려 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다른 전승들도 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떠난 일을 사라에게 알렸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그가 몰래 떠났다고 추정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미드라시Midrash에서는 이별 장면이 묘사되는데, 그 속에서 아브라함은 의도적으로 진실을 숨긴다. 그는 사라에게 이삭을 셈 과 에벨의 종교 학교 religious School of Sem and Eber에 데려가겠다고 거짓말했다. 이러한 행동은 극심한 내적 갈등으로도 설명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브라함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적 갈등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라이오스 콤플렉스Laius Complex 는 이삭을 향해 특히 집요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hand upon the lad”(창세기 22:12)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즉시 그 명령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어도 이삭의 피 Isaac’s blood를 조금이라도 흘리고 싶어 했다. 이 충동 속에서 아브라함은 프레이저가 묘사한 바와 같이, 직접적인 유아 살해 행위를 완화하고 대신 아들에게 대리적 상처를 입힘으로써 희생의 형식을 변형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Neither do thou any thing unto him”(창세기 22:12) 이 말씀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으며, 그 안에 남아 있던 라이오스 콤플렉스의 마지막 흔적마저 소멸시켰다.
전승 가운데는 이삭이 아버지에게 반항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 전승에 따르면, 사탄이 이삭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불쌍히 여겨야 할 어머니의 아들이며, 늙고 정신이 흐릿해진 아버지가 곧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탄 Satan은 사라를 찬미하는 말로 묘사하는 한편,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폄하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세부 요소는, 사탄이 이삭 자신과 닮은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꿈의 이미지에서 흔히 그러하듯, 사탄이 이삭 자신의 인격의 또 다른 측면을 상징했음을 시사한다. 전승은 이삭이 사탄의 유혹과 비난에 승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러나 비어Beer, G가 전하는 또 다른 전승에서는, 이러한 사탄의 방문이 이삭에게 심리적 흔적을 남겼음이 드러난다.
제단이 희생 제물로 준비되었을 때, 이삭은 자신의 손과 발을 단단히 묶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젊고 강한 청년이지만, 아브라함은 노인이므로, 칼날이 드러난 광경을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저항할까 두렵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이삭이 묶어 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무심결에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몸짓을 하거나, 심지어 그를 저주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네 부모를 공경하라 Honour thy father — 십계명 제5계명(출애굽기 20:12)”는 계명을 어길까 두려워했다.
그 후 이삭은 자신이 희생된 뒤, 아브라함이 자신의 시신을 재로 태워 그 재를 사라의 방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면 어머니가 방에 들어올 때마다 눈물을 터뜨리며 이렇게 외칠 것이라는 것이다. “아, 이 아이는 자기 아버지에게 희생된 내 아들이구나.” 이 전승은 아버지를 향한 이삭의 적대적 충동과 어머니를 향한 애정 어린 감정이 동시에 작용하는 양가적 정서ambivalence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떠날 여정에 대해 알렸을 때, 사라는 끔찍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삭을 자신의 장막으로 데려와 밤새 품에 안고, 입맞추고 껴안으며 지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디 이 아이를 소홀히 하지 말아 주세요.Oh neglect him not” 사라의 말 속에 드러난 끔찍한 의심은, 곧이어 사탄이 그녀에게 나타나면서 더욱 극도로 고조되었다. 사탄은 노쇠하고 초라한 노인의 형상, 즉 아브라함을 암시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삭이 제단 위에서 겪은 고통 Isaac's agony 과, 그가 아버지에게 자비를 구했으나 거절당한 장면을 사라에게 이야기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사라는 공포에 굳어졌고, 슬픔으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Pirkei de-Rabbi Eliezer 31장)
이 이야기들은 유대 민속이 사라와 아브라함의 관계를, 아들 이삭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발생한 내적 적대 관계antagonism로 그려냈음을 보여준다.
아케다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갈등Oedipus conflict의 해결을 묘사한다. 그 해결의 정도는 다른 어떤 유사한 이야기나 전승에서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에 이른다. 유사 전승들parallel stories에서는 이 갈등을 극복하려는 소망과 노력이 묘사될 뿐이지만, 아케다의 이야기에서는 그 완전한 해결이 드러난다. 아케다에서의 오이디푸스 갈등의 해소는 그 완결성에서 독보적이다. 이는 아케다 경험을 다른 모든 유사한 경험과 구별짓는 특유의 종교적·심리적 현상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아케다 모티프Akedah Motif”라 부를 것이다.
I. 아케다 첫 번째 모티프 THE AKEDAH MOTIF
아케다 모티프는 부모–자녀 간 갈등의 완전한 해소를 지향하는 종교-심리적 체험들의 무의식적 구성체unconscious constellation이다. 이는 곧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성서적 체험 형태라고 부를 수 있다. 그 특징은 특정한 형태의 초자아 형성에 이르는 일련의 정신 현상의 전개 과정에 있다. 아케다 모티프의 초자아는 내사introjection, 도덕적 마조히즘moral masochism, 그리고 본능의 변형instinct transformation을 통해 형성된다. 이 변형은 외부에 도덕적 힘external moral force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아케다 모티프의 현상들을 정신의학psychiatry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아케다 모티프의 기원은 오이디푸스 갈등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원시적 영아 살해의 시대 primitive infanticidal era에 그것은 부모가 자녀 살해를 완화하거나 변형하려는 경향 속에서 표현되었다. 그리스와 고전 고대의 계몽된 시대에 이르러, 아케다 모티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절충적 해결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이 두 단계를 각각 원시적 아케다 경향과 발전된 아케다 경향primitive and advanced
Akedah tendencies이라 부를 수 있다.
아케다 모티프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체험을 통해 성서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아브라함에게서 그것은 그의 생애 초기의 비범한 사건들을 거쳐 마지막에 도달한, 최종적이자 절정의 체험으로 발전하였다. 그 초기의 사건들은 아브라함이 외부의 힘으로부터 자신에게 전달된다고 느낀 ‘소통(계시)’에 대한 자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체험들은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의 부름the call of Abraham’이라 알려져 있다. 그는 생애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이 위대한 외적 힘external power의 부름을 들었다.
첫 번째 부름은 그가 예순 살 때 우르에서 일어났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되, ‘네 고향과 친족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사도행전 7:2–3)
두 번째 부름은 하란에서, 그의 아버지 데라Terah가 죽은 뒤, 그가 일흔다섯 살이었을 때 일어났다. 이번에는 약속이 함께 주어졌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를 복되게 하리니 … 너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기 12:1–3)
세 번째 부름은 그가 아흔아홉 살 때 가나안에서 임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셨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그의 후손과 함께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창세기 17:15–19)
이 마지막 약속으로부터 약 열네 해가 지난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이 새로운 신적 소통을 수용한 행위가 바로 아케다 체험의 첫 단계였다. 그 뒤에는 전율과 공포의 사유(思惟)terrifying thoughts가 이어졌고, 이는 행위의 고뇌 agony of the deed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정신적 태도의 변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와 상응하는 체험이 이삭과 사라에게도 각각 일어났다. 심리학적 해석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러한 종교적 체험들은 내사introjection, 도덕적 마조히즘moral masochism, 그리고 본능의 변형instinct transformation의 체험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아케다 모티프에서의 내사 현상Phenomenon of Introjection.>
아브라함의 초자아 형성 과정에서, 그의 부모와 조상들의 심상과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內射, introjection) 하는 과정이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을 가장 결정적으로 규정한 도덕적 이미지는 그에게 외부로부터 들려온 신적 부름divine call의 형태로 나타났다.
물론,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의 부름을 그의 마음속 투사projection의 결과로 설명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즉,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을 외부로부터 온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러한 가정을 받아들인다 해도, 아케다 이야기가 성서 역사 속 특정한 시기와 장소, 특정한 가문particular family에서 발생한 특유의 체험의 출현을 표현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그 체험은 인류 전체에 독자적인 도덕적 결과unique moral consequences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 현상의 의미는 성서적 태도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조차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성서적 태도Biblical attitude란, 내면의 도덕적·종교적 현상과 외부의 도덕적·종교적 힘을 분리하기를 거부하는 철학적 관점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아브라함은 부모와 조상들의 심상을 내사(內射)했을 뿐 아니라, 외적 신적 힘external divine power의 소통 내용 그 자체도 내사했다. 따라서 그의 초자아super-ego는 그가 본격적인 아케다 체험에 들어서기 이전에 들은 하나님의 부름call of God에 의해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
아브라함의 아케다 체험은 또 하나의 신적 발화audition of God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밤에 꿈을 꾸는 동안 그에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창세기에 따르면, 그 시작은 하나님의 다음 말씀과 함께였다. “이제 네 아들을 데리고 …”(창세기 22:2) 이 신적 소통의 문구를 세심히 검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 안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담겨 있는데, 표현은 다의적으로 되어 있으나 시련(nisayon, trial)의 해결을 향한 실마리를 이미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 …”(창세기 22:2) 여러 주석가들이 주목했듯이, 하나님은 “그를 번제물로서(as) 바치라”가 아니라 “번제물로 위하여(le‘olah, for)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이삭을 실제로 죽이라고 명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그를 제단 위로 데려가 바치는 행위를 명하셨음을 암시한다. 그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결정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
하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일러 줄 산들 중 하나 위에서 …”(al ’aḥad he-harim ’asher ’omar ’elekha, 창세기 22:2)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이 어떤 산에서 일어날 것인지 아직 밝히지 않으셨다. 스키너Skinner는 본문 어디에서도 그 산의 정확한 위치가 나중에 아브라함에게 알려졌다는 언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하나님은 장소의 위치를 의도적으로 숨김으로써,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의심과 긴장doubt and suspense’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 직선적straightforward이지 않고, 처음부터 모호했음 ambiguous 을 보여준다. 그 명령은 어떤 행위를 직접 수행하라는 명확한 지시가 아니라, 모호하게 암시된 요청vaguely implied an order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른 아침 일어나 곧 길을 떠났다”(창세기 22:3)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가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에 맹목적이거나 단순하게 simply and blindly 복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심한 내적 갈등 inner struggle as agonizing 속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그 갈등은, 예수가 겟세마네Gethsemane로 향하며 경험한 고뇌에 필적할 만큼 극심하고 결정적인 내적 투쟁이었다.
<아케다 모티프에서의 도덕적 마조히즘Moral Masochism.>
하나님의 부름을 통해 아브라함의 초자아에 형성된 도덕적 규범은, 그의 자아 속에 존재하던 공격적·근친적 충동aggressive and incestuous tendencies 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이 상태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전복되었다. 이 명령은 본래 공격적 충동을 강력히 억압하던 동일한 근원(신적 권위)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이제는 그 충동들과 겉보기에는 일치하는 듯한 모순된 형태로 나타났다. 즉,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원초적 유아살해 욕망primitive infanticidal wishes을 잔혹하게 재현할 기회를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욕망을 실현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따라서 극심한 도덕적 마조히즘 상태에 처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상태의 징후들은 창세기 본문 속에서 암시되었으며, 후대의 전승과 주석들에서 더욱 상세히 발전되었다. 아브라함은 사흘 동안 제물로 바칠 장소를 향해 말을 타고 갔다. 그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눈을 들어 올리지도 않았다.(창세기 22:4) 이 사흘간의 침묵의 여정은 키르케고르Kierkegaard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는 이를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 ‘사유의 공포terror of thoughts’가 이어진 기간으로 이해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St. Cyril of Alexandria는 이 사흘간의 고뇌를, 예수가 부활 이전에 지옥으로 내려갔던 사흘간의 고뇌에 비유했다.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이 사흘의 의미를 통찰 깊게 해석하며,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선택의 시간을 주기 위해’ 허락한 기간이라고 주석했다. 특히 셋째 날은 유대 전통에서 지대한 상징적 중요성을 지닌 날로 여겨졌다. 그날이 티슈리Tishri월 초하루, 즉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새해이자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여정의 셋째 날은 속죄일인 욤 키푸르Yom Kippur와 일치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고통스러운 내적 투쟁의 궁극적 결과는, 그가 일종의 황홀경trance-like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것으로 보이는 몇몇 발언들에 의해 예시되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그 장소를 보았다.”(창세기 22:4) 기억할 만한 사흘간의 명상은 끝났고, 그의 마음은 행동으로 향했다. 그는 이제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았으나, 아직 산꼭대기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종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머물러라. 나와 이 소년은 저쪽으로 가서 경배하리라 …”(창세기 22:5)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들은, 마치 더 높은 힘이 그 입을 통해 말하게 한 듯 보였다. 그 말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그는 경이로움과 두려움으로 뒤흔들렸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 그리고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이 놀라운 발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와 칼뱅Calvin에 의해 아브라함의 굴하지 않는 믿음의 징표로 간주되었다. 라시Rashi는 이를 무의식적 예언unconscious prophecy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이것은, 사흘간의 내적 투쟁을 거친 후 아브라함이 해답을 향해 상승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징후였다.
산을 오르던 중, 이삭이 끔찍한 질문을 던졌다. “번제에 쓸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창세기 22:7)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무의식적 예지 속에서 말했다. “하나님이 친히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Elohim yir’eh lo ha-seh, 창세기 22:8) 이것이 창세기 본장에서 기록된 마지막 대화였다. 그들은 정상 가까이에 있었고, 그 나머지 길은 침묵 속에서 올라갔다.
도덕적 마조히즘의 고통스러운 상태 agonizing state 속에서, 아브라함의 초자아super-ego는 마치 그가 이삭을 희생하기를 원하듯이 행동했다. 그의 현재의 의무는, 이전에 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과 부름의 메시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 딜레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훗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문자 그대로 복종하는 사람인 양("As if") 행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 시련을 통과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사흘간의 여정 동안, 아브라함은 이삭을 희생하려는 듯("as if") 행동해야 하는 자신의 시련이 실은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오해를 가리기 위한 허구fiction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그는 사유를 통해 그 오해의 간극을 가능한 한 좁히려 노력했지만, 그 간극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 광야의 평지에 머물러 있고 산에 오르지 않은 한,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답은 평지의 차원 level of the plain에서는 발견될 수 없고, 오직 산의 높이height of the mountain 에서만 발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사유thought’가 아니라 ‘행위deed’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실제로 희생을 행위로 옮기려 다가갈수록, 그의 ‘as-if 체험’이 주는 정신적 긴장은 점점 더 극심해졌다. 그러나 그의 내적 갈등의 해결은 오직 그 최대의 긴장 maximal strain을 견디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것은 비범한 정신적 조직력mental organization을 요구하는 체험이었다. 아브라함보다 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부서지기 쉬운 금속이 과도한 압력overstrain에 의해 산산이 깨지는 것과 같았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일어난 정신적 현상은, 금속학적 비유를 통해 가장 정확히 설명될 수 있다. 금속에는 과도한 긴장을 받으면 쉽게 부서지는 취성(脆性) 금속brittle metals이 있는가 하면, 그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는 연성(延性) 금속ductile metals도 있다. 이 연성 금속은 가공되어 유용한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다. 만약 이 금속에 가해진 응력이 매우 크면서도 파단점breaking stress 바로 직전의 수준에 있다가, 그 응력이 제거되면, 그 금속의 최종 강도ultimate strength, 경도hardness, 탄성elasticity이 놀라울 정도로 증가한다. 이것이 바로 ‘과응력 현상phenomenon of overstrain’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연성 금속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as-if 체험’의 시련을 극한까지 견뎌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 압력이 제거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힘strength, 통찰vision, 그리고 사랑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또 다른 비유에서, 라비 요세 벤 하니나R. Jose C. R. Hanina는 아브라함을 좋은 질의 아마포flax에 비유했다. 그 아마포는 삼을 다루는 장인flax worker에 의해 두들겨진다. “그가 그것을 세게 두들길수록 더 좋아지고, 더 빛이 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질이 낮은 아마포라면, 한 번만 쳐도 금세 찢어지고 만다.”
모든 도덕적 진보는 개인적 시련personal trial과 그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우수한 정신적 조직superior mental organization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주께서는 의인을 시험nisayon하시나, 악인과 폭력을 사랑하는 자를 그 영혼은 미워하신다.”(시편 11:5) 따라서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아케다를 묘사하는 한 전승에서 아브라함이 욥과 비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전승은 『욥기』의 서문Prologue in Heaven(1:6–12)과 유사한 구조로 시작된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 아브라함을 악하다고 고발하며, 하나님께 그를 시험해 달라고 요청한다.
II. 아케다 두 번째 모티프THE AKEDAH MOTIF
<수난의 절정에서 At the Height of the Passion>
아케다 체험은 고통의 연속적 단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점에서 예수의 수난Passion of Jesus과 비교될 수 있다. 실제로 아케다를 묘사한 수많은 회화적 재현pictorial representations들은 이 이야기를 ‘십자가의 길Stations of the cross’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장면들로 재현한다. 그 그림들은 아브라함의 출발, 여정, 종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장면, 산을 오르는 장면, 그리고 정점에서의 제단 장면을 보여준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수난의 마지막 단계, 즉 ‘행위the deed’는 특별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아브라함은 명상 meditation에서 행위 deed로 나아갔다. 사흘간의 명상은 영적 준비 spiritual preparation에 불과했으며, 진정한 해답은 물리적 행위physical action를 필요로 했다. 인도와 중국의 성자들은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그들의 겉보기의 해답apparent solution을 찾았다. 그들은 삶 자체를 경멸했기 때문에,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지 관조contemplation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영혼과 육체의 불가분의 결합inseparable union을 믿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일신교적 신앙monotheistic belief의 본질이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행위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들어 이삭의 목에 겨누었던 것이다. 바로 그 결정적 순간, 하나님의 천사angel of God가 개입했다intervened. 이 긴박한 장면은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극적으로 재현되어 왔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지닌 칼 끝을 움켜쥐는 천사, 칼날을 밀어내는 천사, 혹은 그의 팔을 붙잡아 멈추는 천사의 모습을 그렸다.
아케다의 도상학iconography에서, 구원의 천사the saving angel는 종종 아름다운 여성 형상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남성 천사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보누사미쿠스Bonusamicus는 특히 인상적인 천사의 표현을 남겼다. 그의 작품—볼테라Volterra 성당 설교단의 부조relief—에서, 날개 달린 여인이 아브라함의 뒤에 서 있으며, 이삭과 함께 하나의 가족군상(家族群像, family group)을 형성한다(아래 도판 참조).
심리학적 해석에 따르면, 그 여성 천사의 형상female figure of the angel은 사라Sarah의 상징적 이미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사라의 영향력이 그 칼날을 멈추게 하고, 숫양을 이끌어 왔으며, 가장 절박한 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 곁에 서 있었다’는 생각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이 사실은 하가다Haggadic 전승에서도 암시된다. 그 전승에 따르면,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더 예언적인 통찰prophetic vision*을 지녔다고 한다. 그녀는 그들의 일생 동안 아브라함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특히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여정에 오르기 전, 사라가 그에게 건넨 마지막 말은 그가 사흘간의 명상 동안,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고뇌 속에서 계속해서 그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음이 분명하다. “오… 부탁이오, 당신의 아들을 잘 돌보시고, 그에게 늘 눈길을 두소서.”
따라서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천사가 사라의 목소리로 말하였다고 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사라는 중재자mediator였을 뿐, 새로운 명령의 실질적 주체real power는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중재자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 자신이 직접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요구했다. 그래서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말씀이 이르시되 …” (창세기 22:15–16)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간청invocation에 응답하여, 직접 그에게 말씀하셨음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맹세oath of God는 족장들의 역사 속에서 기록된 유일한 맹세였다. 이는 “구약 전체에서 전례 없는 빛의 정점a point of unprecedented lustre이다. 여호와는 여기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직접 맹세하시며,
족장들과의 어떤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행동을 보이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 간극은 메워졌다. 해결은 발견되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인류의 경향tendencies이 이제 완성fulfillment에 이르렀다. 아브라함 안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정신의 전환’이었으며, 이 사건은 세계의 역사를 아케다 이전과 이후로 둘로 나누었다.
아브라함의 정신적 전환turning of mind은 예술 작품 속에서 그의 육체적 전환turning of body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프랑스 성서의 종교 아이콘Religious Icon에는, 아브라함의 머리가 거의 180도 돌아 하늘의 전령heavenly messenger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아래 도판 참조). 아브라함이 그 천사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그 음성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미 일생에 세 번 그 부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돌아섬turning’은 곧 ‘소명으로의 귀환returning to his calling’이었다.
아케다 모티프에서의 본능적 변형Instinct Modifications ‘전환turning’의 경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본능instincts은 결정적인 변형decisive modification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아케다 모티프에 특유한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이는 다른 초자아 형성super-ego formation의 경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현상들은 생명 본능life instinct의 고양promotion과 변형modification에 관계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의 관점 변화change of outlook가 가져온 근본적 효과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었다는 깨달음realization이었다. 아브라함은 명령으로 행해진 희생commanded sacrifice의 의미가 아들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하나님께 평생 봉헌dedicate하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죽음 본능death instinct에 의해 지배된 과거를 완전히 거부하고, 이삭에 대한 공격적 경향aggressive tendencies을 철저히 버렸다. 그의 생명 본능life instinct은 놀라울 정도로 고양되었으며, 그와 함께 이삭을 향한 새로운 사랑new love이 그의 내면에서 피어났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신앙을 완성crowning experience시킨 체험이었다. 이 ‘새로운 생명renewed life’의 사상은, 앞서 언급된 알렉산드리아-콥틱 양식의 프레스코화Alexandric-Coptic fresco 속한 놀라운 세부 장면detail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생명 본능 life instinct의 고양과 밀접히 연결된 것은, 아브라함 안에서 ‘행동하려는 근원적 욕구vital need to act’의 고양이었다. 그는 결단력 있는 행동resolute action을 통해 생명 본능이 죽음 본능을 이긴 실제적 승리를 획득했다. 행동하려는 욕망desire to act과 그 대응물counterpart인 명상하려는 욕구need to meditate는 모두 종교적 삶의 근본적 태도fundamental religious attitudes이다. 아케다 경험의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바로 이 '행동의 욕구'를 강화한 데 있었다. 그 경험은 명상meditation이나 믿음faith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행동action 또한 성서적 종교에서 필수적임을 가르쳤다. 이는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은 뜻이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로 보건대 사람은 오직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느니라.”(야고보서 2:21–24)
아브라함의 생명 본능life instinct이 강화된 결과로 나타난 가장 중요한 효과는 그의 대상애Object Love가 증가했다는 점이었다. 이 과정은 성서적 종교Biblical Religion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완전하고 만족스럽게 해석될 수 있다.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내사된 부모introjected parent 및 기타 인물의 표상은 자아 이상ego-ideal이 되며, 그것은 자기애Self-Love 혹은 2차 자기애 Secondary Narcissism의 목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원래 부모나 타인에게 향해 있던 대상애는 철회withdrawn된다. 그러나 성서적 관점Biblical view을 받아들인다면,
다른 측면이 드러난다. 즉, 아브라함의 초자아superego를 가장 깊이 형성한 이미지는 하나님의 부름the call of God이 내사된 형태로 자리한 것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소명이라는 자아 이상ego-ideal에 리비도 에너지libidinous energy를 향하게 했으며, 그 결과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발생했다.
아브라함은 그 ‘부름’을, 이제 자기 안에 존재하며, 자기 자신 일부가 된 무엇으로 사랑했다. 그는 자기애적 사랑Narcissistic or Self-Love으로 그 부름을 사랑했다. 따라서 부름이 요구하는 모든 것은 그의 자기애와 연관된 것으로 경험되었다. 이삭을 희생하라는 명령the command to sacrifice Isaac은 자신의 의로움self-righteousness의 위대함을 증명할 기회로 합리화될 수 있었고, 또한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의 이유로 정당화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명상meditating하는 과정에서, 그의 자기애는 점점 강화되었고, 마침내 그를 거의 자녀 살해infanticide에 이르게 할 뻔했다.
그러나 그의 소명이라는 자아 이상ego-ideal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 —그 사랑은 이타적 목적altruistic aim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또 다른,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자기애를 감소시킴으로써 그의 대상애를 증폭시킨 것이다. 이 경향은 앞서 언급한, 자기애적 강화로 인해 도덕적 마조히즘moral masochism을 초래했던 경향과 충돌했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아브라함의 대상애의 확대는 먼저 이삭을 향했으나, 그 범위는 곧 모든 인간human beings으로 확장되었고,
나아가 ‘부름’에 수반된 약속promise으로 인해 미래 세대future generations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그 사랑은 정화되고 구속된 세계a purified and redeemed world에서 모든 인류의 행복happiness of all mankind을 지향하는 사랑이었다. 이러한 정신적 태도가 바로 메시아적 사랑messianic love이다. 그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장 역동적인 도덕적 원동력moral power이 되었으며,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메시아적 사랑의 독특한 발생 방식emergence과 그 고유한 성질qualities 및 영향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도덕적 힘moral power outside man이 인간 안으로 내사introjection되었다는 가정을 정당화한다. 이 **외부의 도덕적 힘external moral power을 우리는 흔히 ‘하나님God’이라 부른다.
<신의 이름의 변화The Change of the Name of God>
아브라함의 영적 태도의 결정적 변화는 아케다 이야기 속에서 나타난 '신의 이름의 변화the change of the Divine name'로 상징된다. 이 이야기의 서두에서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으로 불리지만, 그 결말에서는 ‘여호와Jehovah’로 불린다. 창세기 22장에서 신의 이름이 바뀐 이 현상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야곱Jacob의 견해를 따른다. 야곱이 보기에 아브라함을 시험한 엘로힘Elohim은 진정한 하나님God Himself이 아니라
그의 하위 속성servant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아브라함은 그 하인에게 복종했지만, 내적으로는 유보mental reservation를 두었다. 그러나 시험의 마지막 순간, 그의 드러난 칼날open blade이 이 변화를 초래했다.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음성God’s real voice을 들었고, 더 이상 하위의 엘로힘inferior Elohim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God Himself께 복종했다. 즉, 그는 엘로힘을 버리고 하나님으로 바꿨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Jehovah-jireh라 불렀다.” “그가 산 위에서 그분을 보았기 때문이다.”(시편의 거룩한 산The Holy Hill of the psalm).
이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신의 본성God’s nature에 대한 인식은 아케다 경험의 전환 단계turning phase 이후 결정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엘로힘Elohim의 명령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이 점에서 엘로힘은 비성서적 신앙non-Biblical belief, 즉 파괴destruction가 창조creation만큼 정당하다고 보는 세계관을 대표했다. 이러한 믿음은
세계가 탄생과 죽음의 영원한 순환eternal cycle of birth and death에 의해 지배된다는 견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이 순환 운동circular movement의 법칙에 자신을 '포기resign'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관에서 삶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intrinsic value는 부정된다. 인간의 목표는 개체적 존재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순환 운동속에 조화harmony of the eternal circular movement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별적 인간에 대한 사랑은 별다른 가치를 갖지 않는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영아 살해infanticide의 정당화를 제공한다. 실제로 이러한 신관(神觀)은 라이오스–오이디푸스 콤플렉스Laius–Oedipus Complex의 죽음 충동death wish에 대한 완벽한 합리화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엘로힘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 그의 명령속에는 모호한 표현이 있었으며, 그는 영아 살해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 내적 유보mental reservations를 두었다. 이 점이 바로 아브라함의 사고 전환change of mind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따라서 엘로힘은 올바로 이해된다면, 이미 여호와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호와는 생명의 성화sanctification of life를 명하였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서 here and now 행해지는 행위 ”가 다가올 세계the world to come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뜻이었다.
여호와는 신적 사랑Divine Love의 모방 가운데 가장 고귀한 형태로서 구체적 인물에 대한 개인적 사랑personal love to definite persons을 명하였다. 따라서 영아 살해infanticide뿐 아니라, 증오를 대리적 행위vicarious acts로 만족시키는 모든 타협적 해결도 폐기되어야 했다. 새로운 사랑new love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붙어야kindled 했다. 이것이 바로 모리아 산Mount Moriah에서 아브라함이 본 비전vision이었다.
<아케다 모티프의 여러 양상>
아케다 모티프는 가정 생활family life 안에서의 도덕 발달moral development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어머니, 딸이라는 4 가지 측면 또는 모티프로 구성된다. 이들 부모와 자식의 모티프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가족의 아케다 모티프를 형성한다.
아브라함 모티프의 탁월한 현상은 가족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아버지의 주도적 결단initiative of the father에 있다. 투쟁struggle과 고뇌agony, 그리고 실천적 본보기practical example를 통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라이오스 콤플렉스뿐 아니라, 이삭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사라의 이오카스테 콤플렉스Jocasta Complex까지 모두 해결로 이끄는 주도적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주도적 결단initiative은 그를 아케다 드라마의 중심 인물로 만들었다. 이 점은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종종 군주Lord이자 제사장priest의 모습으로, 흰 의복을 길게 두르고 때로는 후광을 지닌 채 묘사되었다. 그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 예술가들은 종종 그 손에 거대한 칼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칼을 사용할 권리와 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후손 말라기Malachi가 훗날 메시아적 시대the messianic age의 도래를 위한 첫째 조건으로 선포한 일을 이미 실천하였다—그는 자식에게 마음을 돌렸고, 그의 자식의 마음도 그에게로 돌이켰다. 아브라함은 흔히 “믿음의 아버지father of faith”라 불리지만, 그는 또한 “사랑의 아버지father of love”라 불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을 향한 사랑을 통해 아케다에 올랐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감동적인 측면은 렘브란트Rembrandt의 두 그림—「아브라함의 희생 The Sacrifice of Abraham」과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서 잘 드러난다.
이 두 작품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사랑한 방식이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든 아들은 오이디푸스적 공격성Oedipus aggression 속에서 탕자prodigal son와 같으며, 아케다 이전의 이삭 또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그림에서 아들들은 태어날 때처럼 나체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다시 태어남born again을 상징한다. 두 작품 모두에서 아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 얼굴들은 지워져 있는데, 첫 번째 그림에서는 아버지의 손에, 두 번째에서는 아버지의 옷에 가려져 있다. 반면 두 작품에서의 아버지의 얼굴은 초자연적 기쁨supernatural joy에 빛나는 듯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다. 비록 두 번째 그림이 첫 번째보다 28년 후에 제작되었지만, 두 아버지의 얼굴은 거의 동일한 얼굴로 보인다.
아브라함 모티프의 주요 발달 단계는 유혹temptation과 전환turning의 두 경험으로 이루어진다. 엘로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을 때, 그는 그 끔찍한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self-righteousness을 하나님께 증명하고, 이전에 받은 메시아적 소명을 포기하려 했다. 유혹의 단계는 곧 도덕적 마조히즘의 국면이다.
이 단계에서 자아와 이차적 자기애narcissism는 영아 살해를 지지하지만, 초자아와 메시아적 소명 의식awareness of the messianic call은 이에 반대한다. 전환의 단계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름을 내사하고,
아버지가 자신의 라이오스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하기로 하는 궁극적 선택을 내리는 순간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삭은 유아기as an infant에 경건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형상을 내사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가 경험한 하나님의 부름까지 함께 내사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의 소명을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증명하기 위한 정당화로 오해하여 영아 살해를 저지를 뻔했던 것처럼, 이삭 또한, 자신이 내면화한 아버지의 이상introjected ideal을 ‘폭군-아버지father tyrant’에 대한 부친 살해 충동patricidal ideas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려는 유혹temptation을 받았다.
그들의 삼일간의 여정 동안,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삭 역시 극심한 도덕적 마조히즘에 시달렸음이 틀림없다. 부자(父子)는 동일한 내적 전쟁the same battle을 치렀다. 한편으로 이삭은 마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듯이as if obediently following his father’s command 행동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내가 그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를 죽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극한의 고통의 순간the height of his agony, 이삭은 자신의 오이디푸스적 증오Oedipus hatred를 완전히 극복했다. 마지막 순간, 아브라함이 이삭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놀라움에 사로잡혔고, 마침내 그 시선에 의해 변화되었다. “이삭의 눈은 위의 천사들을 향했고, 이삭은 그들을 보았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했다.” 이삭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했기 때문에 하늘Heaven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라이오스 콤플렉스의 마지막 경련convulsions 속에서 싸우고 있었기에 보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라이오스–오이디푸스 갈등의 해결을 먼저 시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완전한 극복에 먼저 성공한 것은 이삭이었다. 이 점에서 이삭은 아브라함보다 위대했다.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순종surrender to the father’s command을 통해 아들은 아버지를 초월한다. 전승에 따르면, 이삭은 최종적 항복final surrender의 순간에 죽었다. 그러나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마지막 힘last strength을 얻어 자신 안에 남아 있던 라이오스 콤플렉스의 마지막 흔적last traces을 해결했다. 그 순간, 이삭의 영혼soul은 몸으로 돌아왔다returned into his body. 부자(父子)는 서로를 구원했다.
아케다 본문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비록 사라Sarah가 이야기 속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그 영향력은 이야기의 전개를 결정짓는 만큼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사라의 핵심적 체험은 아브라함의 신적 부름을
자신의 내면에서 함께 체험한 것이다. 이 체험은 그녀로 하여금 이오카스타 콤플렉스Jocasta Complex를 완전히 극복하도록 운명지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unconsciously 아브라함의 여정의 목적을 감지했고,
이삭이 아버지를 따르지 못하게 막고 싶은 유혹temptation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이삭을 떠나보냄으로써
자신의 이오카스타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에 대한 사라의 온전한 사랑undivided love은 그들의 마지막의 쓰라린 투쟁final, bitter struggle 속에서 그들과 동행하며accompanied both, 보호하고 구원했다. 사라의 사랑은 3 일간의 여정 내내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있었다. 그 사랑은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그리고 산을 오르며 이삭에게 말하던 순간마다 그의 마음에 영향을 미쳤다. 그 사랑은 마지막 순간에 그의 팔을 멈추게 했다. 사라가 곧 천사였다.
사라가 바로 아케다의 원동력the moving force of the Akedah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보다 더 위대했다. 그녀는 어머니였다.
아케다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딸의 인물 형상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케다 모티프의 개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딸의 경험을 내포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딸의 어머니에 대한 증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라 불린다. 이 용어는 아가멤논–클뤼타임네스트라 신화Agamemnon–Clytemnestra myth에서 유래했다. 아케다 모티프의 '딸의 국면daughter aspect’은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완전한 포기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체험의 대표적 성서적 예시는 『룻기Book of Ruth』에 나타난다.
모압 여인 룻Ruth, the Moabite은 시어머니 나오미Naomi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 체험(엘렉트라 콤플렉스의 해소)을 얻었고, 그 사랑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으로 개종했다. 룻의 공헌은 가정생활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윗 왕의 조상, 그리고 그의 혈통을 통해 이어진 나사렛 예수의 조상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다.
아케다 이야기 그 자체는 그 이후의 전개에 대한 명확한 암시clear indication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그것이 부자 관계 사이의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인류 가족관계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관계의 실현its realization은 이기적 목적selfish aims이 포기되고, 진정한 인간적 사랑과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헌신이 가능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진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새로운 관계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계약covenant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이 계약은 새로운 도덕적 질서의 시대를 열었다. 이 새 계약의 기초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햄프턴 코트 궁Hampton Court의 태피스트리tapestry에 남아 있다. (아래 도판 참조) 이 태피스트리에 묘사된 아케다의 수난the passion of the Akedah의 마지막이자 가장 고양된 단계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감사의 기도 prayer of thanksgiving이다. 그들은 산의 정상에서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은 감동 속에서 새로운 계약을 선포한다.
<아케다 모티프의 임상적 고찰 CLINICAL OBSERVATIONS OF THE AKEDAH MOTIF>
아케다 모티프는 단순히 이론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천적·임상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 이유는, 이 모티프가 모든 인간에게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케다 모티프의 임상적 고찰은
종종 특별한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종교적 경험이 성적 경험sexual experiences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표면surface of consciousness에 드러나지 않고, 정신의 무의식적 층위unconscious layers of the mind 속에 잠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의 인식을 위해서는 특수한 방법special methods이 요구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과 일반 대중은 그 성적 함의sexual implications를 처음에는 거부했다. 이러한 저항resistance은 분석학적 연구의 결과를 통해 이제 상당 부분 극복되었지만, 그 대신 심리학적 사실psychological facts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저항이 새롭게 나타났다.
즉, 종교적 문제religious matters에 대한 저항이다. 과거 성이 금기taboo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종교적 신앙이 정신의학계와 일반 사회의 넓은 범위 안에서 금기로 여겨진다. 게다가 종교적 경험의 진지한 수용에 대한 금기the taboo against the serious admission of religious experiences는 과거의 성적 금기보다도 훨씬 더 강하며, 그만큼 극복하기 어려운 저항으로 남아 있다.
타인의 종교적 체험religious experiences의 실재성을 인식하기 위한 본질적 전제 조건essential prerequisite은, 자신 안에서 동일한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체험에 이르는 주된 길은 기도이다. 기도는 종교적 체험의 인식에서 성적 경험의 해석에서 꿈dream이 담당하는 역할만큼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의식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무의식 속에서 기도와 유사한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와 유사한 체험prayerlike experiences’이란, 인간의 외부이자 상위에 있는 어떤 힘이
개인적이거나 도덕적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는 체험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많은 심리적 경험의 고찰은 비록 그것들이 의식적으로 종교적 성격으로 인식되지 않았더라도,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아케다 경험에서 유래한 문제를 겪는 환자들은 대체로 도덕적 마조히즘 단계에서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 관찰된다. 이 단계에서 임상적 징후와 증상들이 가장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투쟁inner struggle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투쟁이며, 이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투쟁과 같다. 이 갈등의 치료적 해결은 무아적 사랑selfless love의 원리로의 전환turning이다. 이는 종교적 회심religious conversion에 유사한 체험이다.
임상 실천clinical practice에서, 잘 알려진 부모–자녀 갈등의 현상들도 아케다 모티프의 관점에서 해석될 경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물론 라이오스–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심리적 기제들은 분명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때때로 그 안에서 일련의 세부 양상이 드러나는데,
이는 아케다 모티프에 특유한 경험들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이전까지 아들에 대해 사랑스러운 태도loving attitude를 보이던 아버지가 돌연 그것을 바꾸어 심각하게 아들을 적대하는 경우가 관찰된다. 이러한 변화는 비록 오랜 기간에 걸쳐 무의식적으로 준비되어 왔을지라도, 대개는 갑작스럽게 발생하며, 종종 도덕적 힘에 의해 ‘행동해야 한다’는 충동urge for action을 동반한다. 이 힘의 도덕적 성격은 특히 아들의 행동이 아버지에게 처벌 욕구demand for punishment를 불러일으킬 때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예컨대, 자신의 아들이 학업에서 부진한 것을 발견한 교사, 혹은 아들의 성적 일탈misbehaviour을 발견한 목사의 경우가 그렇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의 실제 잘못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과도한 엄격함severity으로 그에게 돌아설 수 있다. 그는 의로운 분노righteous indignation 속에서,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최고의 도덕법the highest moral law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확신conviction을 가지고 아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보다 면밀히 관찰하면,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하며, 실은 아들의 실패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더—자신의 태도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아들의 잘못이 단지 자신의 라이오스 콤플렉스를
폭발시키기 위한 구실pretext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는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자신 안에서 들리는 도덕적 부름moral call—즉, 아들에게 엄격히 대하라고 명령하는 듯한 내적 목소리—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는 결국 도덕적 마조히즘의 상태에 빠져 있다.
치료 과정during treatment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계속 엄하게 대할수록 그의 고통distress은 더욱 참기 어려워지고agonizing, 그러나 바로 그 과정 속에서 그는 자신의 문제 해결에 점점 가까워지는 경우가 관찰된다. 치료 도중에는 때때로 또 다른 전환이 아버지의 마음에서 일어나 그가 아들을 향해 사랑으로 돌아서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때 어머니의 영향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의 마음의 전환은 그가 스스로 갈등 해결의 주도권을 취하게 되는 결정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최종 결과는 아들의 반응에 달려 있다. 아버지의 이러한 변화는 종종 갑작스러운 통찰sudden new insight과
강렬한 행복감을 동반하며, 이는 종교적 회심religious conversion의 체험에서 묘사된 것과 유사하다.
치료의 역할은 라이오스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명하고, 그들의 완전한 해결은 오직 무아적 사랑selfless love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제시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practical ways을 제안해야 하며, 적절한 경우에는 기도의 사용을 권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들을 임상적으로 관찰할 때, 아케다 꿈에 대한 연구는 종종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우선,
아버지의 공격성을 주제로 한 소년들의 악몽을 언급해야 한다. 이러한 꿈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Castration Complex가 수행하는 역할은 물론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꿈속에서 공격적 부친상aggressive father figure은 팔을 뻗어 칼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며, 이 칼은 정신분석적으로 대개 위험한 남근 상징dangerous phallic symbol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위협적인 칼이
단순한 남근 상징만이 아니라, 자식 살해 충동infanticidal tendency을 지닌 부친의 제물용 칼sacrificial knife of the father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근거 없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생생하고 교훈적인 아케다의 꿈 Akedah dream 하나가 에드먼드 고세Edmond Gosse의 자전적 회고록 『아버지와 아들 Father and Son』에 기록되어 있다.
아홉 살의 에드먼드Edmund는, 존경하던 아버지에게 반항했던 사건 직후, 자신이 광적으로 무한의 공간 속을 질주하며 압도적인 힘에 의해 몰아쳐지는 꿈을 꾸었다. 그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utterly helpless로,
마제파Mazeppa(바이런의 서사시)처럼 손과 발이 묶인 채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생명의 어떤 중요한 목표로 몰아가고 있다고 느꼈지만, 그토록 간절히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면서도 결코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을 느꼈다. 그 목표는 멀리서 ‘카민 carmine’이라는 단어가 루비색 글자로 빛나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고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수채화 화가였으며, 그의 물감 중 가장 소중한 것은 강렬한 진홍색intense crimson이었다. 그것은 오직 에드먼드만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된 색이었다. 따라서 ‘카민carmine’은 그가 가장 열망하면서도 금지된 모든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 꿈은 부자 간의 고통스러운 갈등을 비극적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의 아버지는, 마제파를 벌한 복수심에 찬 남편처럼, 압도적인 힘으로서 그를 정서적 황야 속으로 몰아넣었다. 꿈의 내용 안에 이러한 부친상이 명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아버지를 광포하게 달리는 말a galloping, wild horse의 상징으로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달리는 말의 형상은 악몽 속에서 자주 공포스러운 부친 상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힘이 그를 손과 발이 묶인 채 억압하였다. 이 상징적 묘사 속에서 아케다의 상황—즉 희생과 복종, 금기와 사랑의 긴장—이 드물 만큼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부친의 힘과 아들, 이 두 존재는 광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며, 그들의 구원salvation은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데 달려 있었다. 그 목표는 ‘카민Carmine’, 즉 부친의 보물the treasure of his father이었으며, 이는 아버지의 숭고한 도덕적 소명을 상징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먼드의 마음속 절망은 그와 그의 아버지가 결코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이 꿈은 에드먼드와 그의 아버지의 실제 삶의 관계를 비극적으로 완벽히 재현했다.
그들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 탁월한 도덕성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자기의 의로움self-righteousness에 사로잡혀 끝내 아들에 대한 참된 무아적 사랑selfless love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에드먼드 또한, 그의 아버지 못지않은 고귀한 포부를 지녔음에도 끝까지 아버지의 이상에 반항적 rebellious이었다. 양쪽 모두 나름의 정당한 이유를 지닌 공격성과 영적 투쟁spiritual fight을 품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라이오스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결코 해결되지 않았으며, 결국 **진정한 무아적 사랑true selfless love은 그들을 결합시키지 못했다.
임상적으로 아케다 모티프를 관찰하는 또 다른 통찰적 접근은 환자들의 그림 연구the study of paintings of patients이다. 필자는 주로 아동상담소Child Guidance Clinic에 다니는 아이들의 그림을 분석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의 그림은 꿈을 묘사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아케다 모티프의 특징을 드러냈다. 예컨대, 한 열세 살 소년은 자신이 말horse에게 쫓기고 밟히는 공포스러운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꿈의 상징에서 말은 흔히 아버지를 나타낸다. 그가 그린 꿈의 스케치에는 일어서서 소년을 짓밟는 사나운 말이 있었다. 소년은 땅에 누워 전혀 움직이지 못한 채 극히 수동적passive인 자세로, 그 위험한 상황에 부적절할 만큼 무저항적이었다.
이 소년은 아버지의 도덕적 규범에 의해 위협threatened을 느꼈다. 그는 고통받았지만suffered, 결국 아버지의 요구demands에 복종submitted했다.
아케다 모티프의 임상적 관찰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례는 아이들이 아케다 장을 읽은 뒤 그린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말하자면, 아케다 모티프의 임상적 도상학Clinical Iconography을 형성한다. 한 열네 살 소년은 아케다 이야기를 매우 정성스럽게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의 그림에는 정교한 제단을 쌓는 아브라함만 있고 이삭은 부재함으로써 오히려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었다. 그에게 “이삭은 어디 있니?”라고 묻자 그는 분개하며indignantly 이렇게 말했다. “그는 거기 없어요. 곧 자신이 죽게 될 제단이 만들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는 남은 짧은 생애 동안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이 소년은 매우 미성숙했으며, 아버지와 교사에 대한 의무duties로부터 상징적으로 도피했을 뿐만 아니라symbolically ran away
실제로도 학교에서 도망쳤다. 그의 결석은 지나칠 정도여서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또 한 명의 열네 살 소년이 공황 발작attacks of panic 때문에 아동상담소에 의뢰되었다. 그 발작 동안 그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 ‘이삭의 제물’을 그려보라고 하자, 그는 매우 인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에는 이삭이 자신의 제물용 불을 피운 뒤 깊이 몸을 숙이고 있었으며,
아브라함은 그를 죽이려 손을 뻗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그린 소년Isaac과 숫양the ram의 복종적인 자세와 표정이 서로 유사한 곡선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년은 강렬한 오이디푸스 갈등으로 고통받았으며, 그것이 공황 발작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그의 그림에 드러난 부친에 대한 복종의 성향은 치료 과정에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아케다 모티프의 임상적 의의clinical significance는 곧이어 제시될 임상사례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그 사례는 아동상담소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문제 유형을 보여준다.
피터(Peter), 일곱 살 남자아이는 몽상과 몰두, 파괴적 행동의 증가로 인해 학교 의사에 의해 상담소에 의뢰되었다. 그의 파괴적 행동은 절정에 달했을 때 정원을 황폐화시키고, 연못의 물을 비워 물고기를 죽이는 행위로 나타났다. 가정에서는 식욕이 감퇴하고, 극도로 초조하며, 때로는 어머니를 때리기도 했다. 피터의 아버지는 잡화점을 운영한다. 부부관계는 전쟁 이전에는 원만했으나, 전쟁 후 귀환한 뒤로 아버지는 군대식 규율과 폭력적 통제를 가정 내에 도입했다. 그는 피터와 스물두 살 된 형 로버트를 꾸짖고, 아내를 경제적으로 통제했으며, 우울발작과 격분이 잦았다. 그는 아내가 아이를 훈육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직접 매질caning을 했다.
의사나 상담가의 권유에도 그는 조언을 거부하고, 아내가 외부기관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차단했으며, 아동상담소 참여도 거절했다. 학교 교장은 피터가 공손하고 또래와의 관계도 좋지만, 때때로 이성을 잃고 폭주한다고 평가했다. 교장은 어머니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아버지는 학교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가정불화의 긴장이 어머니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임상면담에서 피터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발달이 양호했다. 회색 눈이 밝게 빛났으나, 때때로 슬픔이 어린 빛을 띠었고, 얼굴은 소녀처럼 온화했다. 터먼–메릴 지능검사Terman-Merrill Scale에서 상위 평균에 속했으며, 검사 결과의 분산도 정상범위였다. 행동에서는 과잉운동성hyperkinesis과 산만함flightiness이 두드러졌다. 그는 놀이방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장난감을 바꾸어 쥐었고, 이는 내적 긴장을 과활동으로 상쇄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그는 또한 말이 매우 많았고, 자랑과 죄책이 섞인 발언을 반복했다. “난 복서가 되고 싶어... 애들이 내가 먼저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그건 아니야.” 그는 아버지를 자주 언급했으며, 아버지의 성격이 자신에게 강하게 내면화되어 있음이 명백했다. “우리 아빠는 비싼 큰 책을 가지고 있어... 나한테 매질을 하지... 머리도 빗겨줘... 엄마를 때려. 그걸 자주 봐...” “나도 엄마를 때려, 그건 나쁜 짓이야... 엄마랑 아빠는 자주 싸워.” 피터는 부부싸움의 장면에 깊이 상처받았고, 절망 속에서 부모의 파괴행동을 모방했다. 그가 연못을 비우고 물고기를 죽인 행위는 상징적으로 그의 무의식적 갈등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못은 흔히 무의식적 모성의 상징, 물고기(fish)는 부성 혹은 남성성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피터의 성격에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결여였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을 슬프게 이야기했지만, 그럼에도 복종적이고 애정 어린 태도를 유지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깊은 애착을 보였다. 어머니의 진술 과정에서 그녀는 감정적으로 무너졌다. 그녀는 소진되고 절망한 모습으로, 격한 울음과 외침을 통해 고통을 토로했다. “남편은 좋은 아버지예요... 병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는 술도, 악습도 없고... 집안일에 충실했어요. 우리, 예전엔 행복했어요. 전쟁에서 돌아온 뒤 모든 게 변했어요. 그는 나를 하사관처럼 대해요. 내가 복종하지 않아서 결혼법을 어겼다고 말해요... 아들들을 자기에게서 돌려세웠다고 하며, 아들들에게 미친 듯이 질투해요. 하지만 제발 믿어줘요, 난 항상 그들에게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어요.” “그는 나한테 지옥 같은 삶을 줬다고 해요... 나쁜 여자라고 해요... 아마, 내 안에 뭔가 악한 게 있을지도 모르죠... 난 기도하려고 노력해요.” “얼마 전 피터를 재우는데, 그 애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둘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나도 행복할 거야.’” “1년 전부터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큰아들 로버트를 집에서 내쫓았거든요. 그날 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로버트에게 방을 나가라며 소리쳤고, 아들이 반항하자 미친 듯이 폭력을 휘둘렀어요. 난 그들 사이에 몸을 던졌어요.” 어머니의 진술로부터 가족 내에 심각한 오이디푸스 갈등이 존재함을 추론할 수 있었다. 전쟁 중 남편이 부재하고 어머니가 자녀들과 단독으로 생활하는 동안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이 경우에도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과도하게 애착over-attachment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특히 큰아들 로버트에 대해 강렬한 이오카스타 콤플렉스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 관해 몇 가지 긍정적 언급을 하였으며, 이는 치료적 희망의 단서를 제공했다.
한편, 아버지 면담 없이 부부관계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백했다. 이에 상담소에서는 공감적인 어조로 작성된 초청장을 발송하여 그가 피터의 치료에 협력하도록 호소하였다. 아버지는 실제로 상담소를 방문했다. 그는 피터와 같은 회색 눈을 가졌으나 눈빛은 더 꿰뚫는 듯하고 공격적이었다. 얼굴 표정은 심한 걱정과 고통을 드러냈다. 그는 단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말이 느리고 사고와 표현에 어려움을 보였다. 그러나 깊은 감정과 높은 규범 의식을 지닌 인물로 보였다. 그는 말했다. “나는 모두를 사랑했네…… 내 삶을 가족에게 바쳤네…… 그런데 결과가 이게 뭐야!…… 이제 피터만 남았네.” 그는 옳고 그름에 관해 매우 엄격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윤리는 규율과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관념을 그는 하나님, 교회, 법과 질서에 대한 믿음과 연결시켰다. 아마도 군 복무 경험이 이 믿음을 강화시켰고, 그 믿음은 의무와 복종에 대한 강박적 관념으로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향했을 때 가족 상황을 바로 이 기준으로 판단했다. 그가 아내와 아들들이 자신에게 반발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강렬한 라이우스 콤플렉스를 발전시켰다. 자신의 행동 규범을 지키기 위한 높은 도덕적 의무로서 가족, 특히 장남 로버트를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로버트와의 갈등 이야기를 격앙되고 쓰라린 어조로 들려주었고, 이것이 그를 가장 괴롭히는 갈등임이 분명해졌다. “로버트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는 좋은 놈이야…… 내가 그를 죽일 수도 있었어, 지금도 죽일 수 있어.” 그의 목소리에는 그런 행위를 저지를 준비가 된 듯한 섬뜩한 저음이 깔려 있었으나, 동시에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는 듯한 기색도 있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말했다. “아내와 피터가 진료소에 가고 나서는 집안이 좀 나아졌네. 텔레비전은 처벌로 끊어놨는데 이제 다시 틀어주었네.”
치료 과정 전반에서 피터는 부모의 불화를 얼마나 깊이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자주 드러냈다. 그는 두 부모 모두와의 관계가 좋았으며,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어느 날 피터가 “엄마와 아빠가 또 싸웠어요…… 두 분이 서로 사랑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을 때, 분석자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작은 기도를 해볼래?”라고 물었다. 피터는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엄마와 아빠를 사랑해요. 두 분이 톰 삼촌과 베시 숙모처럼 서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어머니의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남편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쏟아냈고, 의사에게도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에게는 마음속 이야기를 충분히 쏟아내도록 허용되었으나, 이후 왜 그렇게 공격적인지를 물었다. 이 질문은 그녀에게 큰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저는 공격적인 게 아니에요. 남편을 아껴요.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저는 그 곁을 지킬 거예요. 그를 사랑해요.” 그녀에게 가족의 행복은 아들들에 대한 과잉애착을 버리고, 남편과 그의 신념에 대한 사랑과 충실함 속에서 회복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가족의 상황은 어느 정도 호전되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예전보다 서로 더 많이 대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로버트 사이의 비극적인 갈등이 가장 큰 문제로 남아 있었으며, 이 갈등이 개선되지 않고서는 어떤 만족스러운 해결도 불가능하다는 점이 점점 분명해졌다. 사실 피터의 문제는 로버트의 문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심각해 보였다.
로버트를 진료소에 초대하기로 결정되었다. 로버트는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그는 우울하고 불안해 보였으며,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아버지와의 끔찍한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버지 얼굴이 창백해졌어요…… 무서웠어요…… 정말 저를 죽일 것 같았어요…… 서로 몸싸움까지 했어요…… 어머니가 와서 말리셨어요…… 아버지는 아마 질투했을 거예요…… 물론, 저는 어머니를 사랑해요…… 그 뒤에 아버지께 다가가 보려 했지만, 아버지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셨어요.” 집에서 쫓겨난 이후 로버트는 결혼을 약속한 여성을 만났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어머니와의 관계가 논의되었고, 그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의존해온 위험성을 자각했다. 그에게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그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이어 아버지의 성격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감정과 세계관을 이해하려 노력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로버트는 이에 동의했다. 아버지에게 로버트가 화해의 뜻을 보였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그는 격분하며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안 돼! 안 돼! 다 끝났어!” 그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불확실한 떨림이 묻어 있었고, 결국 제안된 만남의 날짜와 장소가 그에게 통보되었다. 부자(父子)의 만남은 진료소가 아닌, 보다 가정적인 분위기의 개인 주택에서 이루어졌다. 정해진 시간에 아버지가 먼저 도착했다. 그는 가장 좋은 양복을 차려입었고, 얼굴에는 근엄함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로버트도 곧이어, 역시 단정한 차림으로 도착했다. 그는 두려움의 기색을 보이며 약간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마주쳤고 처음에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가 자리를 비우자, 그들은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화는 한 시간가량 이어졌고, 집과 정원, 로버트의 일, 그리고 결혼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걸으며 발소리가 멀어져 갔을 때, 창세기의 구절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들이 둘이 함께 걸어가니라(창세기 22:6).”
이 사례 기록은 완전하지 않지만, 심리적 현상을 ‘아케다 모티프’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예로서 기능한다. 아케다적 경험을 해석할 때, 그것이 성경 속 아케다 이야기의 세부적 전개와 정확히 일치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이야기는 시간, 장소, 감정의 강도가 응축된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반면 일상 속 아케다 경험은 대체로 느리고, 눈에 띄지 않으며, 불완전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그러한 일상적 경험들 속에도 아케다 모티프의 주요 구조적 요소—즉, 두 개의 선한 원리 사이의 갈등, 해결의 모색, 그리고 외적 도덕적 힘의 개입으로만 설명 가능한 현상들—이 드러난다.
아버지가 진료소에 왔을 때 그는 도덕적 마조히즘 상태에 있었다. 그는 두 개의 선한 원리 사이에서 갈라져 있었고 구원적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라이우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가족을 벌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이 충동은 ‘법과 질서’에 대한 신념에 의해 강하게 지탱되었다. 그 신념은 단순히 군대에서 배운 규율의 모방이 아니라,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다른 한편 그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부드러운 사랑을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었으며, 이것 또한 신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아들에게서 화해의 제안이 전달되었을 때, 그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났고, 결국 그는 아들보다 먼저 그 만남의 장소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치료 초기, 여전히 깊은 이오카스타 콤플렉스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이 콤플렉스는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엄격한 규율 아래에 숨어 있는 가치들을 인식하게 되었고, 아들들에게도 그것을 존중하도록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들들 모두를 사랑하는 그녀는 언제나 중재자였으나, 요카스타 콤플렉스를 내려놓고 남편의 가치들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에야, 그녀는 아버지와 아들들 사이의 투쟁 속에서 상징적으로 ‘천사적 존재’로 변화할 수 있었다. 로버트 또한 진료소를 찾았을 당시 도덕적 마조히즘 상태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아버지에게 복종시키는 환상을 품었는데, 이는 단지 권위에의 복종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가치들 자체에의 복종이었다. 그는 어머니, 약혼녀, 그리고 동생 피터의 도움을 받았다. 피터는 자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향한 사랑으로, 아버지가 가장 절망했던 시기에 그를 도왔고, 로버트와의 화해를 준비시켰다.
이들 각 인물의 전환turning, 즉 마음의 변화는 새로운 통찰을 획득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부드러운 사랑과 공격적 충동 사이의 긴 투쟁 속에서 일어났다. 현실적 상황에 대한 적응은 치료 과정 중의 설명을 통해 도움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전환은 종교적 체험이라 부를 수 있는 경험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 경험은 영적 가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여러 면에서 성경의 아케다 이야기에 서술된 체험과 놀라울 만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